출처: 이승하 블로그
세상에는 영화광들이 있습니다. 영화에 즐겨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심도 있게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르바’라는 닉네임을 가진 분도 그런 분일 겁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각색한 영화 <백치>에 대해 상세한 해설문을 썼는데, 이 글을 ‘네이버 영화’에서도 퍼갔네요. 1951년에 상영된 영화니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해 겨울 흥남철수가 한창일 때 제작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르바 님에게 고마워하며 제 블로그에 담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디브이디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20대 때 읽고 격렬하게 감동했었는데 작년 겨울에 다시 읽으면서 ‘역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세계 소설문학의 최고봉이구나’ 하는 감탄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올해는 눈이 많이 올 터이니 여러분은 눈 오는 날, 창밖에 가끔씩 눈길을 주며 소설 『백치』와 영화 <백치>의 세계에 빠져보는 것이 어떨지요? 자, 이제부터 영화에 대한 상세한 해설. 각색자의 재주에 놀랄 만한 영화.
구로사와 아키라는 서구 문학을 사랑했습니다. 셰익스피어와 고리키 원작을 영화화하기도 했지만, 구로사와 본인은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애초부터 『백치』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고 기회가 오자 메가폰을 잡습니다. 『백치』를 영화화한다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탐구했던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이었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필모그래피에서 <백치>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는 1950년 다이에이(大映) 영화사에서 <라쇼몽>을 찍었습니다. 스튜디오에서는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사장은 이것도 영화냐며 시사회 도중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쇼치쿠(松竹)로 영화사를 옮겨서 <백치>를 만들지만 감독 편집판이 무려 265분에 달했습니다. 영화사에는 구로사와의 반발을 무시하고 166분짜리 편집본을 내놓았습니다. 그렇지만 흥행과 평단 양쪽에서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구로사와는 완전히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게 되었고 다음 영화 계약까지 해지 통보를 받습니다. 감독으로 살아남느냐 못하느냐, 어쩌면 생존 자체가 달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기 힘든 반전이 일어납니다. <라쇼몽>이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겁니다. 그렇게 해서 기사회생한 구로사와는 대표작들인 <이키루>(1952년)와 <7인의 사무라이>(1954년)를 찍게 됩니다. 하지만 <백치>는 어떤 면에서 보면 구로사와의 대표작과 대표작 사이에서 과히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작품이랄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총살 직전에 재판을 받고 풀려난 가메다(모리 마사유키)는 그때부터 악몽에 시달립니다. 간질성 발작에 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북해도 행 기차에서 악몽을 꾸다 깨어난 그는 아버지가 죽자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삿포로로 돌아가던 아카마(미후네 도시로)와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두 여인이 있습니다. 젊을 때부터 돈 많은 노인네의 첩으로 살아가던 다에코(하라 세츠코)와 가메다의 먼 친척이자 부잣집 딸로 예쁘게 자란 아야코(쿠가 요시코).
다에코를 사랑하는 두 남자 아카마와 가메다.
가메다와 아카마는 역전 사진관에 걸려있는 다에코의 사진을 봅니다. 아카마는 그녀를 사랑해서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선물로 주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그녀를 꼭 품에 안겠다고 결심하는 아카마의 눈길을 불꽃으로 이글거립니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을 사진으로 처음 본 가메다는 그녀의 눈동자에 불행이 담겨있다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때부터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멍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모리 마사유키의 연기 패턴은 영화 내내 지속적으로 반복됩니다.) 삿포로에는 끊임없이 눈이 쏟아집니다.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길은 얼어붙은 눈덩이가 쌓여있습니다. 영상은 냉혹하고 차가운 환경, 인간성이 얼어붙어 있는 사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기차에서 내린 아카마와 가메다는 역전에 있는 사진관에 걸려있는 다에코의 사진을 바라봅니다. 두 남자의 비극적인 운명이 시작되는 순간.
가메다는 먼 친척인 오노의 집으로 갑니다. 거기서 오노의 작은딸 아야코와 마주칩니다. 다에코의 생일날 오노는 중매를 서서 비서인 카마야(치아키 미노루)와 결혼시키려 합니다. 과거가 있는 여자와 결혼해주는 조건은 두둑한 현금입니다. 그러나 파티장에 가메다가 나타나 그런 결혼은 불행하니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립니다. 대신 자신이 다에코를 받아주겠다고 말합니다. 다에코는 가메다의 순수한 마음에 흔들립니다. 그러나 돈을 들고 나타난 아카마와 함께 떠나버립니다. 가메다가 자신과 결혼하면 불행해질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가메다는 아야코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결혼하기로 결심한 아야코는 혼자 앉아 있는 가메다에게로 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면서 입을 막는 아야코.
다에코는 아카마와 지내면서도 여전히 가메다를 마음속으로 사랑합니다. 아야코 역시 가메다의 순수함에 이끌립니다. 아야코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메다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합니다. 다에코도 두 사람이 결혼하기를 바란다고 편지를 적어 보냅니다. 그러나 아야코는 가메다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그와 함께 다에코를 만나러 갑니다. 그러나 다에코는 아카마가 지켜보는 앞에서 다에코는 가메다에게 두 여자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이제 모든 관계가 다시 엉켜버립니다. 백치인 한 남자를 사랑한 두 여자는 결국 불행을 향해 갑니다.
내숭을 떨면서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아야코는 가메다를 공원으로 불러내서 마음을 떠봅니다.
아야코는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가메다와 함께 다에코를 찾아갑니다. ㅉㅉ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지 말았어야죠.
아카마는 가메다를 뒤좇아 가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죽이기 직전 가메다가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놀라서 도망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백치라는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를 통해서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간을 구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서 그걸 본다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166분짜리 버전으로 보는 데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건너뛰는 부분이 많고, 연기자들의 감정선도 종종 튀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원래 찍은 영화에서 100분 정도를 들어냈으니, 원래 구로사와가 의도했음직한 많은 부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라마 구조가 무척이나 느슨해져 버렸습니다. 거기에 배우들은 영화가 아니라 연극처럼 과장된 연기를 펼칩니다. 미후네 도시로 혼자 오버하는 다른 사무라이 영화들과는 다릅니다. 전반적으로 마치 연극 무대를 옮겨다 놓은 것 같습니다. <백치>는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구로사와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극장에서 본다는 장점 이외에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입니다.
처음 같이 외출한 아야코는 가메다의 순수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길게 늘어선 가로수들이 아름답습니다. <백치>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장면이 아닌가 싶네요.
tip.
1. 하라 세츠코는 구로사와보다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에 훨씬 어울립니다. 올해 <동경 이야기>와 <백치>에서 열연하는 모습을 그녀의 보았습니다. 연기 톤이 완전히 다릅니다. <동경 이야기>에서는 사랑스러운 며느리 역할을 맡았지만, <백치>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히가시야마 게이코도 두 영화에 같이 출연했습니다. <동경 이야기>에서는 순한 시어머니 역할이었는데, <백치>에서는 아야코의 어머니 역을 맡습니다. 할 말 다하고 성질 급한, 약간은 수다스러운 아줌마 역을 열연합니다.
다에코 역을 맡은 하라 세츠코의 카리스마 넘치는 강렬한 인상.
2. ‘구로사와의 배우들’로 불리는 배우들이 총출동합니다. 이 시기에 구로사와가 앞으로 지속적으로 같이 일할 배우들이 거의 다 정해졌다고 볼 수 있죠.
<라쇼몽>에서 무사 역을 맡았던 모리 마사유키는 가메다, 즉 백치 역을 맡았습니다. <라쇼몽>에서 도둑 역을 맡았으며, 구로사와 사무라이의 아이콘 역할을 하는 미후네 도시로는 다에코를 사랑하는 아카마 역으로 열연합니다. 여기서도 오버하는 연기는 여전합니다. 그래서 인상 또한 강렬하죠.
‘구로사와의 배우들’ 중 한 명인 모리 마사유키. 우측 상단은 <라쇼몽>, 좌측 하단은 <백치>.
언제 봐도 요란스러운 캐릭터를 보여주는 미후네 도시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배우입니다. 제가 처음 미후네 도시로의 모습을 본 것은 할리우드에서 찍은 전쟁영화 <미드웨이>였는데~ ^^;; <이키루>의 주인공이자, <7인의 사무라이>에서 무사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았던 시무라 다카시는 아야코의 아버지 오노 역으로 나옵니다.
‘구로사와의 배우들’ 중 한 명인 시무라 다카시. 우측 상단은 <7인의 사무라이>, 우측 하단은 <이키루>.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서 미래의 R2D2가 되는 웃기는 캐릭터를 연기했던 치아키 미노루는 다에코와 결혼할 뻔한 카마야 역을 맡습니다. <거미집의 성>에서 미후네 도시로에게 배신당하는 무장 역을 맡았던 것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구로사와의 배우들’ 중 한 명인 치아키 미노루. 우측 상단의 <거미집의 성>, 아래는 <숨은 요새의 세 악인>. 언제나 멍한 표정,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 히다리 보쿠젠은 여기서도 짧은 콧수염을 붙이고 나옵니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가련한 농부, <밑바닥>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현자 같은 노인 역도 맡았었죠. 연기들은 오버하는 경향이 있지만, <백치>에서는 ‘구로사와의 배우들’을 한데 모아놓고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구로사와의 배우들’ 중 한 명인 히다리 보쿠젠의 다양한 모습. 항상 빠질 수 없는 조역으로 등장합니다. 왼쪽 상단은 <이키루>, 왼쪽 하단은 <7인의 사무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