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폭 찌던 더위도 이제는 그 기세를 완전히 잃고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다. 지난주까지는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 무난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는 선득선득한 기분이 들고 낮에도 그늘로 들어가면 약간 선득거린다. 이제는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다. 작년 추석에 삼척에 가족이 모여 설은 서울에서 모여보내고 추석은 아무래도 성묘를 가야하니 고창에 가까운 전주 동생집에서 모이기로 했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아이들이 기차표 예매를 하는날새벽부터 인터넷으로 접속하여 어렵게나마 기차표를 확보했다고 한다. 우리야 일없는 백수부부이니 하루정도 먼저 출발하여 피곤하면 중간에 하루밤을 자고 가도 무방하니 잘되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서울 아버지가 몸이 불편하셔서 장거리 여행이 가능하겠느냐고 연락이 와서 그러면 서울로 가야하나하고 서울애들에게 연락을 해서 예매한 차표를 취소시켰다. 오늘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예약을 해서 검사를 받으셨는데 자세한 것은 16일 입원을 해서 1박 2일로 정밀검사를 받으셔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결과가 어떠하든지 이번 추석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성묘를 가자고 해서 다시 전주로 행선지가 바뀌었다. 그래서 서울 아이들에게 연락을 하니 공연히 확보한 기차표만 취소해서 내려갈 일이 막맛해졌다고 볼멘소리다. 그래서 작은애는 미리 삼척에 내려와서 우리와 같이 가기로 하고 큰애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누나 차를 타고 내려오기로 했다. 아버지도 누나 차를 타고 내려와 전주 동생집에서 추석날 아침을 먹고 부안면으로 가서 상등 똥뫼밭에 모신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묘에 성묘를 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일본의 식민 통치가 악랄해져가는 1930년대 초에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상오마을에서 할아버지 이신 흥덕장씨 '홍'자 '수'자와 할머니이신 부안김씨 '은'자 '섬'자 사이에2남 5녀중 장남으로 태어 나셨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부터 오산교회에 나가셨고 부안초등학교를 다니셨고 같은 또래의 친구로는 내가 부안초등학교 재학시에 3학년 담임선생님이었고 고창북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던 조기일 선생님이 아버지와 나이는 같고 학교는 후배가 되신다. 부안초등학교 재학시절에 아주 공부를 잘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부안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실때 전주 사범학교로 진학을 하셨다. 당시 사범학교는 한국인이 입학하기는 하늘의 별을 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전주 사범학교에 입학할 때도 거의가 일본인이고 한국사람은 아버지를 포함해서2-3명 정도에 불과했으며 작은아버지가 할아버지 생전에 들은 얘기로는 아버지가 사범학교에 합격하자 커다란 호말(조그만한 조랑말이나 수레를 끌던 짐말이 아니라 커다란 승마용 말을 호말이라고 불렀다.)을 탄 지서장이 집에 찾아와 축하인사를 했다고 한다. 당시 울던 애도 "순사가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쳤다는 그 무시무시한 일본 순사도 아니고 일본인 지서장이 축하인사를 왔다는사실은 할아버지에게 큰 자부심을 갖게 했고 아버지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갖게 했다. 그후 아버지는 전주로 유학을 가서 사범학교에 다니셨다.일본인이 절대다수인 사범학교에서조센징인데다 경제적으로도 빈한한 시골 촌놈이고 거기다가 아주 체격이 아담하고 성격이 여리신 할머니를 그대로 닮은 아버지는 짐작컨대 현재도 일본 학교에서 문제가 되는'이지메'라는 집단괴롭힘과 따돌림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해방이후 학교에 불어온 좌우익의 대립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해방후 전주사범을 자퇴하고 고창고등학교로 편입을 하고 말았다. 만약 아버지가 전주 사범을자퇴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졸업을 하셨다면 정상적으로 사범학교를 졸업한 한국인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20대 후반부터 학교의 관리자가 되고 30대부터는교육청의 관리자등으로 나가시거나 아니면 대학재학시절의 교수님처럼 대학교단에 서실수도 있었을거라고 생각한다.사범학교 재학 당시 배웠던 올갠을 오산교회에서 반주를 하시기도 했는데 친구이며 후배이기도 한 조기일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올갠을 배우기 시작해서 음악에 취미를 갖게되어 음악을 전공하고 음악선생님이 되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원수를 나와 누나에게 갚는다고 누나도 부안초등학교 재학시절 밴드부로 하모니카를 연주했고 나도 부안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밴드부로 나름 폼나는 심벌즈 주자였고 고창북중 2학년 때에는 클라리넷연주자이기도 했다. 게다가 오산교회 주일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나름 미성에 음악성이 있다고 해서 주일학교 음악경연대회에서는 거의 참가했다 하면 빠짐없이 입상을 했고부안초등학교 교내음악경연대회에서도 거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고창북중학교 재학시절에는 거의 밤마다 조기일 선생님댁에 찾아가 발성연습과 노래연습을 해야 했다. 그 덕분인지 교내 음악경연대회에 그치지 않고 중학교 2학년 때에는 고창군내 중등학교 음악경연대회에도 참가하여 최우수상은 놓쳤지만 우수상을 받은적도 있었다.중 3때에는 조기일 선생님이 담임산생님이었다. 그당시 금호공고가 새로 생겼고 추천에의해 입학도 가능했지만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해서 금호공고로의 진학은 포기하고 말았다.고등학교는 정읍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봤고같은 학년이던 박정진, 박상호와 나까지 세명이 정읍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제와서 돌아보건대 사실 중학교 재학시절에도 학교 공부라는 것을 했다는 기억은 별로 없다.하지만 중학교 까지는 별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성적이 중학교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받기도 했으니 성적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공부는 중학교와는 달라서 벼락치기 공부라도 해야 어느정도 성적이 유지되었다. 당시는 대학본고사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예비고사라는 시험을 치루고예비고사에 합격해야만 본고사에 응시할 수 있지 예비고사에 합격하지 못하면 본고사 응시원서 자체를 접수할 수 없었다. 요즘 학력고사응시일과 비슷한 시기에 전주시내 각중고등학교에서 전라북도 내 모든 고 3학생들이 모여서 시험을 봤다. 전날 예비소지을하고 학교별로 전주시내 여관에 분산하여 단체로 숙식을하고 다음날 지정된 학교에서 아침부터오후 5시 전후 까지 시험을 치루고 끝나면 다시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정읍으로 돌아와 해산을 했다.시험 결과는 대체로 12월 27일 경에 발표를 하고예비고사 성적발표와 동시에 전기대학 접수가시작된다. 나도 고등학교에 근무하던 시기에 학생들을 인솔하고 강릉으로 대입학력고사에 응시하러 가기도 했고 여러차례 감독관으로 차출되어강릉 태백 등지로 시험감독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한번은 삼척여고로 시험감독을 나갔는데 당시 시험시간과 감독관 배정을 담당한 교사가 내 제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감독으로 배정된 교실이 응시 인원이 10명 미만인 교실만 배정되어 정말 편하게 감독을 했고 감독수당은 힘들게 감독한 교사와 같은 액수를 받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시 아버지 얘기로 돌아가서 고창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로 진학하셨다. 농촌에서 얼마 되지 않는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을 서울로 대학을 보내고 뒷바라지 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도 서울에서 편하게 하숙을 하면서 학비걱정없이 공부만하며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하시지는 못하신것 같다. 전후 사정을 미뤄 짐작하건대 신문 보급소 총무 일을 하시며 대학에 다니신것 같다. 당시 한국사회는 극심한 빈곤과 실업문제에 직면하고 있었고 아버지도 이를 피해가지는 못했다.흐릿한 기억이속에 아버지가 처음에 한전에 들어가셨을 때는 수금사원으로 들어가셨던 것 같다. 몇년이 지난 후에야 정식사원이 되셨고 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승진 시험을 통해 간부사원이 되셨다. 그리고1983년 은평구 녹번동에 있는 한전 성서지점으로 전근하셔서 서울을 떠난지 거의 20년 만에 다시 서울로 컴백하셨다. 그리고 1988년 가을에성서지점 요금봉사실장을 끝으로 정년퇴직을 하셨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참으로 부인복이 없었던 것 같다. 같은마을인 오산리 오산교회에 시무하시던 권장로님의 셋 째 딸인 '옥'자 '신'자인 어머니를 만나 24살에 결혼을하여 "영란", "무열","경열" 3남매를 두고도 자식 욕심이 많으셨는지 그 아래 아이를 또 갖게되었고 어머니는 임신중에도 외가집의 유전적인 병세인 혈압이 높으셨다. 애를 출산하기 위해 병원에 가서 분만실에 들어갔을 때 까지도 태아가 쌍생아라는 것을 병원측에서도 본인과 가족도 몰랐다. 쌍생아중 첫째 아이를 사산하고도 산통이 그치지 않았는데 둘째아이가 나오는 것을 발견한 분만실 종사자 중 한명이 무의식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소리에 놀라 혈압이 급격히 상승했고 결국 혈관이 터져 분만 중에 숨을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 여파로 마음이 여린 아버지도 그 후 심장병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주위사람들의 권유로 재혼을 했으나 나이가 아버지보다 몇살이나 연상이었고 두분이 아기자기한 정은 별로 없었던것 같다. 결국 두분은 몇년가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그후 만나게 되신분은 반대로 너무 나이가 어렸다. 당시 아버지는 30대에 접어들었는데 만나신 분은 갓20이 되신 분으로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로 아버지 마음에는 꼭 들었다고 한다.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판단에는 그 나이에3남매를 거두어 기른다는 것은 무리라고 반대를 했고 결국 또헤어지게 되었다.그리고 우리는오산리 할아버지 댁으로 갔고 아버지도 서울을 떠나 경북 김천으로 가시게 되었다. 김천으로 가셔서 주위사람들의 소개로 4번째 부인 지금 응암동에 계신 분을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여복이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반대로 처복이 참으로 박복하신분이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아기자기하게 놀러가거나 여행을 간 기억이 별로 없다. 기억에 의하면 5살 무렵 어린이 날 무료공개하는 창경원에 가서 벚꽃 구경인지 사람구경인지 갔던 기억과 서울 신길동에 있는 우신초등학교 1학년 정도로 기억이 나는데 여름에 뚝섬 유원지에 물놀이를 갔을때 모래를 채취했던 구덩이에 빠져서 거의 죽을 뻔 했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그래서 이번 추석에 가족이 모이면 같이 단기간에 멀지 않은 곳이라도 같이 여행을 가서 아기자기 오손도손 도란도란한 추억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2015년 9월10일 강원도 삼척에서 삼척동자 장무열ㄱ
첫댓글 위의 글로 미루어 보니 무열 친구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풍성한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삐뚤어지지 않고 성격이 참 여유만만 하고 온유한 것을 보니 본성이 착함에 틀림없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