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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신앙 – 자선] 자선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안녕하세요?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번 달은 성 대 레오 교황을 만나러 이탈리아로 떠납시다.
레오 대교황(440-461년 재임)은 야만족의 침입을 두 번씩이나 물리쳤습니다. 452년 훈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자, 교황은 황제의 사절단과 함께 만투아로 가서 훈족의 왕, 아틸라를 만나 즉시 철수하라고 설득시켰습니다. 455년에는 반달족이 오스티아를 쳐들어오자, 혼자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를 만나 담판을 지었습니다. 비록 로마의 약탈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살인과 방화 행위는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레오 대교황은 야만족의 침략으로 멸망의 위험에 처한 로마를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 제국의 소중한 문화유산과 그리스도교를 게르만족과 켈트족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레오 대교황이 말하는 ‘자선’의 참된 의미를 살펴봅시다.
레오 대교황은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자선 행위입니다. 자선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도 선행에 낯선 사람이 되지 맙시다. 나는 가난해서 겨우 먹고 살 뿐 남 도울 겨를이 없다고 말하지 맙시다. 적은 가운데 바치는 예물이 크고, 하늘의 저울은 예물의 양이 아니라 영혼의 확고한 뜻을 잽니다. 복음서에서 과부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고, 그것은 부자의 예물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예물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자선이 값집니다. … 그분은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재산을 주시지만, 똑같은 사랑을 요구하십니다”(「설교집」, 20,3,1).
보잘것없는 동전 두 닢이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과부의 행동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자신이 가진 부의 일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적선하는 것이 자선의 전부는 아닙니다.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자신의 생명까지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자선입니다.
자선은 주님에 대한 사랑의 행위
자선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의무이자 권리이지, 선택이 아닙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자선을 실천하는 의무를 면제받을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냉수 한 잔은 대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오 대교황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목말라하는 가난한 이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흔한 물을 남에게 준 것도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하셨으니, 주님께서는 당신 나라를 얻기 위한 간편한 방법들을 당신 종들에게 얼마나 많이 마련해 주신 것입니까! … 이 일을 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사순 시기 강론집」, 10,5).
그리스도인이 실천하는 자선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신 당신 사랑의 손길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은 신자들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자선 행위는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만의 행위가 아닙니다. 자선 행위에는 제자들의 손을 통해 오천 명을 먹이신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사랑의 손길이 항상 관여하고 있습니다. 자선을 실천할 마음과 재산을 주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자선 행위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로운 사랑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자비의 모상’(Imago pietatis)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자비로운 보살핌이 있는 곳에서 당신 자비의 모상을 알아보시기 때문입니다”(「사순 시기 강론집」, 10,5).
자선은 영혼의 치료제
레오 대교황은, ‘예수님께서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나그네 된 이들, 헐벗은 이들, 병든 이들, 갇힌 이들에게 실천하는 사랑과 자선이 최후 심판의 재판관이신 주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 25,40 참조)라고 설명하면서, 우리가 실천하는 자선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주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고칠 치료제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잘못을 저지른다면, 자선이 그것을 말끔히 지워 버립니다. 자선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준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설교집」, 7,1).
“‘물이 불을 끄는 것처럼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여, 세례의 물(baptismi aquis)과 참회의 눈물(paenitentiae lacrymis)이 죄를 씻어 주지만 자선(eleemosyna)도 죄를 없애 줍니다”(「사순 시기 강론집」, 11,6).
자선은 하느님 나라에 쌓는 천상의 부
레오 대교황은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자선과 돈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 잃어버릴 수 없는 천상의 부가 되며 반드시 하느님의 보상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쓰다 남은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가장 작은 몫”(「사순 시기 강론집」, 10,5)을 남겨 두고 남을 위해서는 큰 몫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후하게 대접받으신 그리스도께서 후하게 보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남아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하여 나누어주면 결국 잃어버릴 수 없는 부를 얻는 것입니다. … 이렇게 재산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복된 일입니다”(「설교집」, 92,3).
자선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본받는 행위
레오 대교황은 자선을 실천할 때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자선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본받는 것이며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자선은 주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에, 겸손한 마음과 관대한 마음으로 자선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이의 관대함이 큰 부가되기 때문입니다.
“관대함 자체는 하나의 큰 부이며, 관대함의 기회는 없을 수 없으니, 거기에는 우리를 먹여 주시면서 동시에 친히 대접을 받으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사순 시기 강론집」, 10,5).
신자 여러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알아보게 하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자선입니다. 따라서 자선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모두 자선의 강물에 몸을 담가 주님의 자비를 입읍시다.
[교부들의 신앙 – 기도] 기도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
안녕하세요? 오늘은 기도에 대해 알아봅시다. 교부들은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초대 교회 때부터 신자들은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마쳤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간경’(시간 기도)을 바침으로써, 하루의 시간과 수고와 일을 기도로 성화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아침 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면서 바치는 기도이고, 저녁 기도는 하루의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드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기도에 대한 교부들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동이 트는 순간이 바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 이유는 새벽이 그날의 탄생을 알리기 때문이며, ‘빛은 어둠 속에서 먼저 비추기’(2코린 4,6 참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빛은 태양과 같이 진리를 앎에 있어서 앞길을 비춥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양탄자」, Ⅶ,43,6).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아침에 기도를 바칩니다. 영혼과 마음의 첫 움직임을 하느님께 바치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전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느님 생각할 제 기쁨으로 가득 차나이다.’(시편 76,4 참조)라는 말씀대로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즐거워지기 전에는 다른 아무 일도 시작하려 하지 말 것이며, 또 ‘주님이시여, 이른 아침 내 소리를 들으시오니, 이른 아침부터서 채비 차리고, 애틋이 기다리는 이 몸이오이다.’(시편 5,4-5 참조)라는 시편 말씀을 채우기 전에는 우리 몸이일하도록 움직이지 맙시다”(카이사리아의 대 바실리오, 「긴 규칙서」, 37,3).
“아침 기도로써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기 위하여 아침에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치프리아노, 「주님의 기도」, 35).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 기도
「사도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외에도 삼시(오전 아홉 시)와 육시(낮 열두 시), 그리고 구시(오후 세 시)에 기도를 바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삼시에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육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구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 시간에 기도하면서 주님의 수난을 되새기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려고 했습니다.
“삼시에 기도하십시오. 빌라도가 우리 주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한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 육시에도 기도하십시오.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 구시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 참혹한 모습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해가 어두워지고 땅이 무서워 떨던 바로 그 시각이기 때문입니다”(「사도 헌장」, 8,34).
기도의 힘과 참된 기도
신자 여러분,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교부들이 말하는 기도의 힘과 참된 기도에 대해 들어봅시다.
“기도는 만능 갑옷이고, 줄어들지 않는 보화이며, 무궁무진한 광맥이고, 구름에도 가로 막히지 않는 하늘이며, 폭풍에도 안전한 항구입니다. 기도는 헤아릴 수 없는 선의 뿌리요, 샘이며 무수한 축복의 어머니입니다.
기도의 힘은 국가 권력보다 더 셉니다. …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힘도 열정도 없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열린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 부서진 마음의 열매이며 뉘우치는 마음의 결실인 기도를 말합니다.
이것이 하늘로 올라가는 기도입니다. … 제가 말씀드리는 기도는 입술로만 읊어 대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본성」, 607).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내려 주실 마음이 드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가르쳐 드려야 할 분이 아니라 마음을 얻어야 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긴 기도가 아니라 참된 마음입니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강해」, 13).
믿으려고 기도하고 기도하려고 믿는다
고대 교회의 신자들은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믿으려고 기도하고, 기도하려고 믿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힘으로, 자신들의 신앙과 삶을 계속해서 일치시켜 나갔습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도 고대 교회의 신자들처럼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신앙과 삶을 일치시켜 나갑시다.
“믿음이 없다면 기도는 사라집니다. 믿지 않는 것을 청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 기도하기 위해서 믿읍시다. 또 우리가 기도하게 하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믿음은 기도를 샘솟게 하고, 샘솟는 기도는 믿음을 튼튼하게 해 줍니다”(아우구스티노, 「설교집」, 115,1).
“성도들은 맹수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불길에 휩싸여서도, 바다 속 깊은 곳과 짐승의 배 속에서도 기도합니다. 그래서 집 깊숙한 곳이 아니라 마음의 침실로 들어가라는 훈계를 듣습니다. 많은 말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바쳐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행동이 어떤 말보다 낫기 때문입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오, 「마태오 복음 주해」, 5,1).
“그대가 신학자라면, 그대는 정녕 기도할 것입니다. 그대가 정녕 기도하고 있다면, 그대는 신학자입니다”(폰투스의 에바그리오, 「기도론」, 61).
혀는 기도하는 이의 손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과 자세로 기도해야 할까요? 교부들의 주옥같은 가르침을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똥을 가득 쥔 손으로 당신의 발을 붙잡고 무엇을 청한다면, 당신은 그 청을 들어주기보다는 그를 발로 차 버립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손에 똥을 쥔 그러한 상태로 하느님께 다가가려고 합니까?
혀는 기도하는 이의 손이며, 그 손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발을 붙잡고 있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 51,5).
“왜 여러분은 얼마 전 나쁜 말을 한 여러분의 입으로 하느님께 청을 드립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역겨워하십니다”(아우구스티노, 「그리스도인의 삶」, 11).
[교부들의 신앙 – 단식] 단식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 (1)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일 년에 두 번, 곧 재의 수요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단식을 합니다. 하지만 고대 교회에서는 40일 동안 엄격하게 단식하면서 저녁 한 끼만 식사했습니다. 교회의 단식은 사순 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순 시기의 역사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사순 시기의 역사
처음부터 교회는 기도하고 단식하면서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했습니다. 3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주님 부활 대축일을 합당하게 준비하려고 한 주간 전부터 하루나 이틀 단식을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성금요일, 무덤에 계신 성토요일 그리고 부활하신 주일을 ‘성삼일’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주님의 최후 만찬을 기념하는 성목요일이 포함되면서,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 밤 전례까지가 파스카 성삼일로 바뀌었습니다. 곧이어 성주간이 생겨났습니다.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가 파스카 준비 기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님 부활 대축일의 기쁨을 50일 동안 경축하는 데 비해, 단지 한 주간만 파스카 준비 기간으로 지내는 것은 너무 짧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3주간 동안 단식하면서 주님 부활 대축일을 준비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주님 부활 대축일의 기쁨은 50일 동안 경축하는데(부활 시기), 사순 시기는 단지 3주간밖에 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습니다.그래서 4세기에 사순 시기를 제정하여 40일간 단식하면서 주님 부활 대축일을 준비했습니다.
단식, 사순 시기의 대표적인 수계
사순 시기에 신자들이 지켜야 할 가장 대표적인 수계가 단식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의 강론 주제는 주로 단식과 자선이었습니다. 많은 교부가 단식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단식의 절기에, 평소 항상 수행해야 하는 자비의 행위를 더욱더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대 레오 1세, 「사순 시기 강론집」, 41,3).
“단식의 시기보다 참회에 더 적절한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요한 크리소스토모, 「참회에 관한 설교」, 113).
“우리를 수많은 악에서 구해 주는 단식을 두려워하지 맙시다”(같은 책, 123).
“단식은 우리 구원에 맞서는 원수들을 이렇게 쫓아내고 우리 삶의 원수들에게 이렇게 끔찍한 것이니, 우리는 단식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고 품어 안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과음과 폭식이지 단식이 아닙니다. 과음과 폭식은 우리 손을 등 뒤로 묶고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정부(情婦)를 닮은 욕정의 폭군에게 종과 포로로 굴복시킵니다. 그러나 단식은 노예이자 죄수인 우리를 보고는 우리의 결박을 풀고 폭군에게서 구해 냅니다. 단식은 우리를 본래의 자유 상태로 회복시킵니다”(같은 책, 107).
“사순 시기는 악습의 무리와 욕망의 무질서에 저항하여 싸우는 특별한 시기입니다. 단식으로 목과 싸우고, 정결로 사치와 싸우며, 믿음으로 악행과 싸웁니다. 동정심으로 불경과 싸우고, 인내로 격노와 싸우며, 관용으로 탐욕과 싸웁니다. 자비로 인색함과 싸우고, 겸손으로 교만과 싸우며, 성덕으로 죄와 싸웁니다”(베드로 크리솔로고,「설교」, XIII,1-2, 226-231 참조).
단식의 가치
교부들은 단식의 가치에 대해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을 들어 봅시다.
“단식은 악습을 파괴하는 약입니다”(카이사리아의 대 바실리오, 「단식에 관한 강해」, I,1-2, 165A 참조).
“단식은 영혼의 원수를 물리치는 영성 생활을 위한 약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창세기 강해」, X, MPG LIII, 81-90 참조).
“단식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단식은 영혼을 더 활기차게 만들고 땅에서 높이 올라 천상 실재를 관망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아 줍니다”(같은 책, I, 21-25 참조).
“만취와 탐식은 인간의 마음을 속박하고, 욕망에 인간의 마음을 노예와 죄수로 넘겨준다. 하지만 단식은 그러한 사슬을 풀고 인간에게 원초적인 자유의 운명을 회복시켜 줍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참회에 관한 강해」, V, MPG XLIX, 305-314).
참된 단식
단식을 하면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을 겪겠지만 영혼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만한 사랑으로 영적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영적 즐거움을 누리려면 육적 단식에만 머물지 말고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성찰하여 자신 안에 조그마한 악습이라도 결코 자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영적 단식이 수반되지 않는 육적 단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식의 핵심은 육적 단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단식이 수반된 육적 단식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악한 본성과 격노와 증오, 논쟁과 언쟁, 해로운 악습을 끊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참된 단식이라고 강조합니다.
“육식을 삼가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된 단식은 악습을 멀리하는 일입니다. 온갖 악의 사슬을 끊어 버리고, 부당한 계약서를 찢어 버리십시오. 그대에게 고통을 주는 이웃을 용서하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카이사리아의 대 바실리오, 「단식에 관한 강해」, 1,10).
“단식의 핵심은 음식의 절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일 마음이 불의에서 되돌아서지 않고 혀가 악담을 끊어 버리지 않는다면, 육체에 음식을 줄이더라도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대 레오 1세, 앞의 책, 4,2).
“육신이 음식을 단식하듯이 영혼도 악행을 단식해야 합니다”(같은 책, 12,2).
단식의 경기장(jejuniorum stadio)에서 음식만 절제하면 만족스런 결과를 얻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육체에 음식을 줄이면 영혼은 강해집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약간 고통을 당하겠지만 내적으로는 영양을 섭취하게 됩니다. 육체에게는 육적 풍만이 줄어들지만 정신은 영적 즐거움으로 강인해질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서로 사방을 둘러보고 자기 마음의 내면을 엄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같은 책, 1,5).
[교부들의 신앙 – 단식] 단식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 (2)
그리스도교 단식의 전통은 예수님의 단식을 따르고 유다교의 단식 전통과 단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인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 교회는 단식을 구약의 관점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했습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단식의 차이
교회가 수요일과 금요일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처음부터 유다인과의 단절을 명백히 밝히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3세기 초부터 수난의 두 순간, 곧 유다의 배반이 있었던 수요일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금요일을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단식은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유다인의 단식에는 하느님의 단죄를 피하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의탁하려는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단식해서 생긴 금액을 가난한 이들에게 되돌려 주는 자선 행위를 유다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 자선에 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있지만 말입니다.
“자선은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너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토빗 4,7).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잠언 21,13).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며”(집회 35,4), “네 곳간에 자선을 쌓아 두어라. 그것이 너를 온갖 재앙에서 구해 주리라”(집회 29,12).
그리스도교로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단식이 기도와 사랑, 자선 실천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교 단식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죄 사함을 받고 하느님 나라를 합당하게 준비하려는 희망의 표현입니다. 둘째, 세상의 제약에서 해방된 구원을 받을 자가 갖추어야 할 합당한 삶입니다. 이 같은 단식은 반드시 자선의 실천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었습니다. 단식은 사탄에 맞선 싸움이며 고행입니다. 단식은 기도와 결합되어 주님에게로 돌아서는 회개의 표지이고, 간구를 강화하는 개별 참회 행위이며, 온갖 유혹을 멀리하고 악마를 쫓아내는 힘이 됩니다. 단식은 참회의 길이며, 단식과 고행은 영혼을 덕행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단식은 기도이며, 겸손과 인내의 덕행을 닦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실천한 이웃 사랑은 성찬 전례 거행 때 예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구원 경륜의 정신으로 단식했습니다.
영적 단식의 중요성
교회는 처음부터 죄를 멀리하는 영적 단식을 강조했습니다. 1-2세기에 쓰인 다음과 같은 책들에서도 그런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영적 단식을 하면 육적 단식도 쉽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단식은 형제애를 목적으로 합니다. 단식은 원수들을 위한 간구의 행위이고(「디다케」), 가난한 이들과 연대감의 표지이며(헤르마스, 「목자」), 기도와 자선을 받쳐 주는 행위입니다(「로마의 클레멘스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단식은 겸손하게 해 주고(「바르나바의 편지」), 하느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목자」).
단식은 그리스도인을 우상 숭배로부터 멀리하게 하고(「디다케」),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희생 제물을 영성화하며(「바르나바의 편지」), 죄의 함정에서 그리스도인을 보호합니다(「목자」).
“영적 단식을 먼저 시작하면, 음식의 단식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곧 영혼의 통회는 몸을 억제합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 단식하면서 영혼에 해로운 악습을 버리지 않는다면, 육체적 고통인 단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죄가 계속해서 성령의 성전인 몸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카시아노, 「공주 수도승 규정집」, V,21,MPL XLIX,239).
레오 대교황은 우리가 육적으로 단식한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순결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단식하면서 우리 생활이 완전한 절제에서 오는 순결함과는 동떨어져 있다면, 불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또 우리의 잘못은 우리 종교를 모독하는 불경건한 이들의 혀를 무장시켜 주는 꼴이 될 것입니다”(「사순 시기 강론집」).
단식하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
아우구스티노는 지나치게 초라한 옷을 입는 것이 오히려 교만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허영은 세상의 재산을 자랑삼는 화려함 안에만 있지 않고 칙칙한 삼베옷 안에도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 허영은 더 위험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며 속이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육신과 육신에 걸치는 옷을 지나치게 꾸미거나 … 화려함으로 남의 눈을 부시게 하는 사람은 … 그가 화려히 과시하고자 한다는 사실이 쉽게 눈에 보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묘하게 거룩한 척 꾸미면서 속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가 매우 지저분하고 추레한 모습으로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고백하는 방식에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면, 그리고 그가 그렇게 지낼 수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뜻에 따라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이 쓸데없이 꾸미는 일에 무관심해서인지 아니면 어떤 속셈이 있어 그렇게 하는 것인지를 그 사람의 다른 행실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주님의 산상 설교」, 2,12,41).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것은 위선자들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침통한 얼굴로 있다면, 우리는 위선자들을 본받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보다 더 심하게 구는 것입니다. … 제대로 단식하지 않으면서도 단식하는 이들의 옷을 걸치고 있는 사람을 저는 몇 명 압니다. … 왜 그대는 그대가 비난하는 위선자들보다 더 나쁜 위선을 곱절로 저지릅니까?”(「마태오 복음 강해」, 20,1).
탐식의 세 가지 특성
단식하면 평소보다 더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카시아노는 탐식의 특성에 대해 말합니다.
“탐식은 세 가지 특성을 지닙니다. 첫째, 규칙으로 정한 식사 시간 전에 음식을 먹고 싶게 만듭니다. 둘째, 어떤 음식이든 배부를 때까지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셋째, 더 맛있는 고급 음료(음식)를 좋아합니다. 따라서 수도승은 신중하게 정해진 식사 시간을 준수하고, 고행의 한계 내에서 만족하며, 어떤 음식으로든 만족해야 합니다”(「담화집」, XXI,18,MPL XLIX,1192-1193).
[교부들의 신앙 – 단식] 단식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 (3)
수도자들은 하루 한 끼 식사하며 빵과 물, 또는 올리브기름과 소금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많은 여름철에는 두 끼, 곧 점심과 저녁을 먹었습니다.
하루에 한 끼를 먹을 때는 주로 오후 3시에 식사했지만, 사순 시기에는 해가 질 때 저녁을 먹었습니다. 사순 시기에 수도자들은 자발적으로 ‘음식이나 음료, 잠, 말, 농담’까지 줄여 나갔습니다.
수도자들의 단식
“수도원에서 하는 절제는 빵과 물 심지어 자는 것까지도 만족할 만큼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폰투스의 에바그리오, 「단식」, 8).
“수도승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 시기를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하겠지만 이러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에, 사순 시기에 모든 이는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 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통회와 절제를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베네딕토, 「수도 규칙」, 49,1-7).
“단식이 인간을 얼마나 아름답게 꾸며 주는지 알고 싶습니까? 단식이 우리를 얼마나 위험에서 지켜 주고 보호해주는지 알고 싶습니까? 당부하건대, 복되고 훌륭한 수도승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소란을 피해 산꼭대기로 재빨리 달음질쳤습니다. 그들은 마치 안전한 항구에 정박하듯 적막한 사막에 오두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한평생 단식을 벗 삼으며 함께 성체를 받아 모시는 동지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단식은 인간인 그들을 천사들로 만들어 주었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참회에 관한 설교」, 108).
자선 실천의 중요성
단식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단식은 음식의 절제를 통해서 자신이 지은 죄를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표지입니다.
둘째, 단식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표지입니다. 단식을 통해 육체적인 고통을 겪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셋째, 단식은 그리스도인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유대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따라서 단식하여 절약한 금액을 가난한 이들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자선 실천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자발적인 단식과 청빈으로 생긴 돈은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을 절제하고 날마다 단식하여 심신을 맑게 하였습니다.
예로니모는 영성체를 준비할 때 지극한 정성으로 늘 단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아델레 스카르네라, 「4천 년의 기도, 단식」 참조). 교부들의 말을 들어 봅시다.
“자선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입니다. 단식이 기도보다 더 낫습니다. 그러나 자선은 단식과 기도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로마의 클레멘스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6,4).
“기도와 눈물과 단식은 착한 채무자의 재산이며, 모든 재산을 팔아서 만든 돈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재산입니다”(암브로시오, 「참회론」, II,IX,81, MPL XVI, 538).
“그리스도인은 단식하여 절약한 금액으로 배고픔을 느끼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시오”(아우구스티노, 「사순 시기 설교」, CCX,10.12, 1053).
“가난한 이를 위해 단식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속이는 자입니다. 비록 단식은 하지만 자신의 음식을 선물로 내놓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단식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 때문에 단식하는 자입니다”(베드로 크리솔로고, 「설교」, VIII,2, 208-211).
“단식은 죄의 상처를 낫게 하며, 자비는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없애 줍니다”(「설교」, XLI,3, 314-317).
“기도와 단식과 자비는 믿음을 뿌리내리게 해 주는 세 가지 조건입니다. 단식은 기도의 영혼이며, 자비는 단식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자비가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설교」, XLIII,2,4, 320-322).
막시모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지만, 자선을 베풀 때마다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세 가지 중요한 종교적인 행위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입니다. 영혼을 씻는 또 다른 방법은 자선입니다. 만일 세례를 받고 나서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에 죄를 지었다면, 자선 행위를 통해서 그 죄를 깨끗하게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죄를 더 자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바로 자선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고 세례를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용서도 단 한 번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풀 때마다 우리는 그 자선 행위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와 자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죄를 용서해 주는 자비의 두 원천입니다. 세례와 자선, 이 두 기둥을 꼭 붙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 나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세례를 받고 나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자선의 강물에 몸을 담그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비를 얻을 것입니다”(「설교」, 22A,4).
예로니모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단식하는 이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위에 부담이 될 정도로 음식을 많이 먹어서도 안 됩니다. … 최선을 다해 자주 성서를 읽고 모든 것을 배우시오. 그대의 손에 성서가 들린 채 잠드시오. 잠들 때에는 거룩한 말씀이 그대의 머릿속을 사로잡도록 하시오. 음식을 절제하고 날마다 단식을 하여 심신을 맑게 하시오”(「편지」, 22.17).
“적어도 일주일에 이틀은 전통에 따라 단식하도록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합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단식과 절제에 관한 설교」, IV, MPG LXIII, 595-602).
우리가 예로니모와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말과 같이 살아간다면, 그리고 자녀를 교육시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꼭 그렇게 합시다. 교부들의 주옥같은 가르침을 우리 것으로 만듭시다.
[교부들의 신앙 - 말씀 듣기]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첫 번째 말씀은 ‘들어라.’입니다”(암브로시오, 「성직자의 의무」).
사랑으로 충만해지려면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붉은색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붉게 물들고, 검은색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게 물든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첫 번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당신의 사랑에 흠뻑 젖어 들고, 말씀으로 충만해져야만 복음을 합당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놀라운 기적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2 참조).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길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순서를 지키셨습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첫 번째 장소로 광야를 선택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시기에 앞서 가장먼저 광야로 향하셨습니다. 광야, 그 고독과 침묵의 땅에서 성부의 품 안에 온전히 머무셨습니다. 외적인 활동에 앞서 내적인 충만을 이루신 것입니다.
말씀 읽기에 열중했던 암브로시오
가톨릭과 아리우스주의의 대립이 극심하던 4세기 후반 밀라노. 암브로시오 성인은 밀라노의 집정관으로 임명됩니다. 374년, 밀라노의 주교 아욱센시오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주교 선출을 두고 가톨릭파와 아리우스파가 대립각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밀라노의 집정관이었던 암브로시오는 밀라노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고, 양측의 동의를 얻어 주교 선거 과정의 중재자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암브로시오가 평화로운 해결책을 추구하자고 연설할 때 한 아이가 성인을 가리키며 “암브로시오를 주교로!”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에 가톨릭파와 아리우스파 모두가 찬성하였고, 암브로시오 성인을 주교로 선출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암브로시오는 세례받지 않아 주교가 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주교직을 거듭 사양하였지만 끝내는 이를 수락하게 됩니다. 주교가 되기에 앞서 먼저 세례를 받은 성인은 8일 뒤인 373년 12월 7일 주교품을 받습니다. 주교가 된 성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합니다.
훗날 밀라노의 성직자들을 위한 규정을 담은 책에서 당시의 처지를 성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갑작스레 성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배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여러분을 가르쳐야 했습니다”(「성직자의 의무」, 1,1,4).
그리하여 암브로시오 성인은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르치려면 먼저 배워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말씀을 듣는 일(읽는 일)에 몰두했는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증언을 통해 짐작해 봅니다.“‘그(암브로시오)는 대체 무슨 희망을 품고 살고 있을까? 유혹에 맞서 무슨 씨름을 벌이고 있을까?’ … 제가 원하는 바를 원하는 대로 그에게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꼭 필요한 요기로 몸을 돌보거나 독서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 그가 소리 없이 책을 묵독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럴 때면 저희도 하릴없이 소리 내지 않고 한참 동안 말없이 그냥 앉아 있다가 가만히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그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번거로움을 끼칠 엄두가 나겠습니까?”(「고백록」, 6.3.3.)
사제들에게 전하는 성인의 충고
이토록 말씀을 듣는 일에 열중하였던 암브로시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심을 다하여 사제들에게 충고하였습니다. 바로 사제들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사제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가르치려는 사람은 먼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침묵’입니다. 그래야만 다른 이들의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지혜로운 사람은 침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이렇게 가르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 내 귀를 일깨워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이사 50,4). 그러므로 말을 함에 있어서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말하여라.’가 아니라 ‘들어라.’입니다. 하느님의 첫 말씀이 바로 ‘들어라.’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여러분의 길을 평탄케 할 수 있고, 혹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가 무엇으로 제 길을 깨끗이 보존하겠습니까?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시편 119,9)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들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혀로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성직자의 의무」, 1,1,4-1,3,10).
유스티노 성인은 “말씀의 씨앗”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얻기까지 땀을 흘리는 것처럼,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으려면 영적인 땀을 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수고의 첫걸음이 바로 침묵 가운데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지기”(로마 10,17) 때문입니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면서, 농부들은 겨우내 딱딱하게 굳어 버린 땅을 날카로운 쟁기로 갈아엎습니다. 마찬가지로 단단하게 굳어 버린 우리의 마음 밭을 ‘말씀’(성경)이라는 ‘영적인 쟁기’로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씨앗이 숨을 쉬게 해야 합니다.
[교부들의 신앙 - 죄 고백] 죄의 고백과 하느님 찬미
“주님, 당신이 지으신 한 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아우구스티노, 「고백록」, 1,1,1.).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짓는 죄가 무엇일까요? 우스갯소리이지만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일 듯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상처들과 죄악들, 그것들을 직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기억들을 다시 꺼내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숨기고 묻어 두려 합니다. 때로는 그런 죄들을 하느님께 고백하기가 망설여 집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죄를 감추다 보면 더 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해하고 나와도 여전히 어두운 얼굴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잠언 1,7)입니다. 주님을 옳게 두려워한다는 것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는”(마태 10,28)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솔직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하고 약속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죄를 기억하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3대 저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고백록」은 말 그대로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는 책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죄의 고백은 하느님 찬미’라는 깊은 의미를 담은 책입니다. 그래서 「고백록」은첫 시작에서부터 “주님, 당신이 지으신 한 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라는 찬미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라는 가면 뒤로 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냅니다. “일자(一者)이신 당신을 등지고 다자(多者)를 향해 스러지면서 제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청소년 시절 저는 저 밑바닥 것들로 허기를 채우는데 몸을 불살랐으며, 다채롭고 그늘진 애정 행각에 우거지게 뒤얽혔으며, 그러는 사이에 제 용모는 시들고, 저 스스로 만족하게 즐기고 사람들의 눈에 들기를 꾀하다 보니 당신 눈앞엔 썩어 문드러지고 말았습니다”(2,1,1.).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지르고 넘어간 제 패악과 육체적 부패를 저의 영혼에서 기억해 내려고 합니다. 그것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서입니다. 당신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그 일을 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는 그 쓰라림 속에 제가 걸은 사사스러운 길들을 되새김으로써 당신께서 제게 감미로움을 주시게 하려는 뜻입니다. 속임수 없는 감미로움, 행복하고 안전한 감미로움, 분산되지 않게 저를 가다듬는 감미로움 말입니다”(2,1,1.).
성인의 이 고백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 기억들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의 사랑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 일은 쓰라린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감미로움으로 바꿔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믿음입니다.
주님께로 향한 올바른 두려움
루카 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작은아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죄를 지었고 아버지의 심판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아버지를 피해 더 멀리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임을 깨달았습니다. 두려웠지만 아버지께로 향했습니다. ‘올바른 두려움’이 그를 다시 살린 것입니다. 곧 죄의 고백이 하느님 찬미였던 것입니다.
한때 잘나가던 시절에는 떵떵거리며 허세를 부렸던 작은아들이 낯선 땅에서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돼지죽조차도 맘껏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된 자신을 한탄하면서 죽음을 결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작은아들을 다시 살게 했던 것은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과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정말 나를 기다리실까?’ 하는 의심과 불안 때문에 돌아가는 발걸음을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15,21)라고 고백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저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15,22-24)며 꼭 안아줄 따름이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선택하시고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떤 면을 보시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선택하셨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에게 당신 자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이유가,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셔야 할 이유가 더 많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을 구석입니다. 이는 곧 올바른 두려움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고백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고백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찬미의 기도로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이 지으신 한 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 “저지르고 넘어간 제 패악과 육체적 부패를 저의 영혼에서 기억해 내려고 합니다. 그것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서입니다. 당신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그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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