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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또는 연대의 서정
- 이 시대의 따뜻한 시
조 재 훈
시인‧공주대학교 명예교수
안지순은 금산이 낳은 시인이다. 산수가 곱고 유서가 깊은 이 고장의 얼을 담고 있다. 금산은 굽이굽이 금강이 감돌아 땅이 비옥하다. 좌도 농악이라 불리는 풍물두레가 일찍이 발달하여 그 고유한 두레 문화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서원이 많다. 선비의 그윽한 향이 서려 있다.
국난이 처할 때마다 의기를 보여준 역사의 묵묵한 흐름도 가득하다. 임진왜란 때 목숨 걸고 싸운 조헌, 영규대사 등 순정한 칠백여명의 혼을 모신 칠백의총은 그 상징이다. 그 뒤 척양척왜 및 부패한 관료와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한 을미(1895), 음 1월 24일의 농민 2차봉기 동학전쟁 최후의 전적이 금산 한덕산(대둔산)에 있다. 태생이 금산은 아니지만 이곳의 관직을 가졌던 아버지를 모신 길재의 선비정신도 은은히 풍긴다.
그런 속에서 태어난 것이 좌도문학동인회다. 안시인은 이 모임에 2006년에 들어가 그곳에서만 시작 활동을 해 왔다. 좌도문학 동인의 특성은 어디에 유혹되지 않고 문학(시)의 길만을 걷는다는 것이다. 향토의 향기가 가득 무르녹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전주나 대전이 근접해 있어도 그 움직임과는 아랑곳없이 오로지 문학의 정도만 걸어가는 모습이 훌륭하다. 무슨 어설픈 모더니즘의 흉내가 없다. 매 호마다 둘레의 현실을 주제로 하여 공동의 시를 발표하는 애향심은 자기 심화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탄탄한 실력을 보여준다.
안시인의 이번 시 모음도 그런 궤도의 탄생이다. 당당한 활동에 거듭 박수를 보낸다.
2.
4부의 시 전편을 두세 번 내 나름으로는 정신을 집중하여 읽었다. 전체의 느낌은 좀 어둡고 시인의 가난한 유년체험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연민은 사물이나 동식물한테도 이입되어 잔잔한 감동을 갖게 했다. 절대로 지적 거리를 두어 냉담하지 않고 그것을 마음으로 보듬는 따뜻함이 다가왔다. 그러면서 상호간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합되어 있다는 연대의식이 숨어 있다. 그러한 사실을 그의 몇 작품을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단장취의斷章取義라는 말이 있다. 남조 때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 처음 보이는 말이다. 그것은 필요한 부분만 잘라 그 의미를 취한다는 뜻을 가진다. 방대하고 심오한 것을 접근할 때 어쩔 수 없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리 연역을 해 놓고 이해하는 아전인수의 오류에 빠진다. 그 대상이 예술성을 갖는 작품일 때 엉뚱하게 이해될 가능성이 크다.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장취의를 피하는 이유이다.
3.
이 짧은 글에서는 4부에서 한 편씩을 골라 그 전부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도록 하려고 한다. 한 편을 선택하는 것도 편견이 따르는 일이지마는 이 글의 목표가 시인 안지순의 시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무난하다는 판단이다.
봇짐 이고 걸어가는 할머니 뒤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철쭉이 따라가고
펄렁이는 옷깃에
청보리 물결치는 의총리
그만큼 떨어져서
조팝꽃 조르르 몰려들고
그만큼 떨어져서
진달래 꽃무덤 묻어가고
십리장등 빛 따라
바람 같은 걸음 따라
묻어놓은 서러움도
몸 풀고 쉬어 가는 길
그리움도 무더기 꽃무더기
양팔 벌려 모여드는 의총리
사람도 그만큼만 그리워해라
가만가만 꽃처럼 피고 지어라
- 「의총리 가는 길」
안지순 시인의 시가 거의 그렇듯이 첫 1부도 ‘어머니, 큰어머니, 고모, 당숙, 식구들’ 등의 인정이 넘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구수한 인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객관적 거리를 두어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 「의총리 가는 길」이다. 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우다 산화한 칠백여명의 커다한 무덤이다. 보통의 경우는 격앙된 어조로 웅변이 나올 법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속의 깊은 정을 ‘봇짐 이고 걸어가는 할머니’의 정경으로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고단하게 사는 서민의 삶을 압축하는 ‘봇짐 진 할머니’는 우리 ‘조선’의 상징이다. 그 ‘할머니’의 뒤를 ‘앞서거니 뒤서거니’에 ‘철쭉’이 따라간다. 철쭉은 살아남은 민초의 상관물이다. 펄렁이는 옷깃은 그런 접근을 뒷받침 한다. 그 다음에 오는 ‘청보리’, 곧 백성의 물결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그 다음 연의 ‘조팝꽃’이 ‘조르르 몰려들고’ ‘진달래’의 ‘꽃무덤’이 더불어 묻어가는 심상을 통해 ‘의총’의 처절한 정신을 은근히 드러내 준다. 되풀이 되는 ‘그만큼 떨어져서’의 간헐적 반복은 예사롭지 않다. 높은 뜻을 받들어 이어가지만 감히 저기 묻힌 선열은 따를 수 없어 마음만으로 변치 않고 따른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셋째 연의 ‘십리장등’은 시인의 각주에 따르면 의총이 있는 마을의 산등성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마을에서 십리쯤 가는 산등성이로 생각되는데, 장수를 비는 장명등의 그것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뒤에 붙은 ‘빛 따라’가 그런 생각을 뒷받침 해 준다. 그 의로운 ‘빛’을 따라 바람 같은 걸음으로 가노라면 무덤 속의 서러움도 잠시 몸을 풀고 쉰다. 이것은 봇짐 머리에 인 우리 조국의 운명에 닿아 있다.
끝 연은 영탄조로 그러나 그것을 감추고 가만히 기원한다. ‘꽃무더기’의 칠백 애국지사-‘꽃무더기’(꽃무덤), 생전의 힘찬 만세 부르듯 두 팔 높이 들고 모여든다. ‘가만가만’ 꽃처럼 피고지라는 염원에 이 시는 머문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지만 그만큼 감동을 주는 시다. 이 시인의 건강한 시정신과 그것을 형상화 하는 시적 기량의 성숙을 보여준다.
큰 나무 아래 허공에 떠 있는 벌레가 있다
보일 듯 말 듯 가는 줄에 매달려
온 몸으로 발버둥 쳐도
한 뼘도 오르지 못하는 벌레 한 마리
장난기 돋친 손가락으로
가느다란 줄을 흔들어 본다
끊어질 듯 힘없이 흔들리는 줄
밥줄을 흔드는 손이 있다
높은 곳에 앉아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그들이
자본이라는 마법을 걸어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흔드는 줄
그 줄에 온몸으로 매달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다
손가락 하나만 가볍게 누르면
툭 끊어지는 줄에 내가 매달려 있다.
- 「줄 1」
2부는 주로 기계화 되고 자본화가 된 빈부의 양극을 형상화한 시편이 주종을 이룬다. 구두수선공, 수몰 지역 주민, 종이 줍는 할머니, 혼자 사는 아저씨, 치매 앓은 할머니, 청소부 아줌마, 맞벌이 부부 등등이 그렇다. 시인의 의롭고 따듯한 시선이 잘 드러난다.
이 속에서 고른 「줄‧1」은 뭐 뛰어난 시라 하기에는 좀 그렇다. 그러나 거미줄에 매달린 벌레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그 성찰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 시는 딱 두 연으로 되어 있다. 앞 연은 거미줄에 매달린 벌레, 뒤 연은 밥줄을 흔드는 줄로 바뀐다.
‘큰 나무 아래 허공에 떠 있는 벌레’,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 시의 출발을 보여주는 대목은 범상하지 않다. ‘큰 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그 나무 아래 왜 ‘허공’이 있는 걸까? 어쩌면 ‘큰 나무’는 우주의 크낙한 질서일까 아니면 힘을 가진 존재일까 그 위에 있어야 할 ‘허공’이 그 아래에 있는 걸 보면 뒤의 것 같기도 하다. ‘허공’은 글자 그대로 빈 하늘이다. 무슨 도교의 세계나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지레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그와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나약한 벌레가 누군가의 밥이 되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인이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줄’에 있다. 그 줄에 벌레도 사람도 매어 있다는 것이다. 끊어질 듯 힘없이 흔들리는 줄이지만 약자 중의 약자 ‘벌레’의 생사를 쥐고 있다.
뒤 연은 선언경 후언지先言景 後言志의 후언지에 해당한다. 앞에 것이 ‘벌레’라면 그 연장선상에 사람이 있다. 밥줄을 쥐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 그것은 ‘높은 곳’(실은 허공일지도 모른다)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다. 그것은 복수複數인 ‘자본’이다. ‘마법’을 가진 현대의 기계이며 물질의 신이다. 하찮은 ‘손가락 하나만 가볍게 누르면’ 그 줄은 툭 끊어진다.
밥줄이 그렇게 끊어지면 매달린 노동의 가족들은 숨을 거둔다. 잔인한 자본의 메커니즘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대와 마주 앉아
만면 웃음 너머로 실려 오는 잔잔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 위로 소소한 바람이 불어와
코끝으로 비누냄새 스치는 날숨 같은 것이다
가벼운 일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때
문득 이 시간들을 잡고 싶은 것이다
그대 머리 위로 이팝꽃이 하늘거린다
긴 겨울을 달려와
온몸을 다해 피워내는
저 봄꽃 같은 것이다
그대가 잠시 내게 온 것이다.
- 「내게 순간이란」
3부의 시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시편들이 많다. ‘봄똥, 하행, 맷돌, 쉼표, 엘리베이터 꽃’ 등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명‧耳鳴」을 고를까 망설이다가 그 고요하고 깨끗한 ‘밤새, 그대의 울음소리’와 잠시 작별하고 그와 가까운 「내게 순간이란」을 골랐다.
이런저런 삶의 고비를 넘겨,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시인의 담담한 자아 성찰이 돋보인다. 좀 진술이란 느낌이 들지만, 쓸쓸한 지혜가 적절한 비유로 드러나 있어 세련된 느낌을 준다. 첫 시작이 ‘그대’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생의 반려자일 수도 있고 자아의 다른 호칭일 수도 있다. 그 어느 면의 접근도 이 시는 허용한다.
소리 없는 웃음으로 가득한 ‘잔잔한 이야기’ 그것은 시적 화자(여기서는 시인)가 갖는 영원한 순간의 모순형용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촉감과 미각을 통한 신선한 이미지들이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 ‘그 위로 소소한 바람이 불어와’ ‘코끝으로 비누냄새 스치는 날숨’ 등이 그것이다, ‘
소소’는 쓸쓸하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하찮은, 작은’ 등의 의미이며 그 다음 다음 행의 ‘가벼운 일상’과 연결된다. 그리하여 ‘문득’ 지나칠 수 있는 그 일상의 의미를 소중하다고 깨닫는 것이다. 그때 ‘그대 머리 위’로 이팝꽃이 하늘거린다.
이팝은 이른 봄에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하얀 쌀밥 같은 꽃이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거울 앞’의 모습이다. ‘긴 겨울’의 고난을 헤치고 ‘온몸을 다해’ 피워 내는 저 ‘봄꽃’ 같은 감사의 깨달음이 아름답다. 비록 시장기를 채울 수는 없지만 그것은 ‘내’게로 온 ‘잠시’, ‘순간’을 둘러싼 삶의 고단함이 승화된 모습이다. 이러한 순간이 영원이 되는 슬기를 이 시인은 세상의 파도를 넘어 만나고 있다.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132번지 김판순씨 오이로 냉채를 하고
전남 순천시 추암면 백록길 46번지 오성길씨 호박잎으로 쌈을 만들고
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27번지 이정자씨 가지로 찜을 한다
팔도가 모인 식탁에는 흙냄새가 난다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132번지 김판순씨 오이는 봄에
전남 순천시 추암면 백록길 46번지 오성길씨 호박잎은 늦봄에
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27번지 이정자씨 가지는 이른 여름에
약속하여 같이 심고 거둔 너와 나의 살림이다
「어우리」
4부 중 한 편이다. 4부 시에는 서로 어울러 사는 따뜻한 모습은 담은 시편들이 많다. ‘그 밥에 대한 설, 풀을 먹다, 현암사, 상좌불, 은골, 그녀네 집’ 등이 그렇다. 읽다 보면 감동을 주는 싯귀가 자주 나타나곤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 소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시이지만 묘미를 발견한다는 생각으로 골라 보았다.
시의 구조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무슨 메시지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단순한 두 연의 시, 그러나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어보라. 비록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 살지만 서로 얽혀 상부상조 하는 상생의 삶이 흥겹게 숨어 있다.
주소, 그것도 번지수가 세세하게 드러난 김판순, 오성길, 이정자 씨는 실재하는 사람들이다. 고관대작도 하다못해 티브이에 자주 나오는 탤런트도 아니다. 평범한 장삼이사요,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이웃들이다. 흙을 바탕으로 사는 가장 깨끗한 백성의 모습을 그 이름과 오이, 호박잎, 가지 등의 채소와 함께 떠올리게 된다.
봄, 늦봄, 여름에 그들이 농사지은 것들을 음식으로 먹는 도시 소시민의 삶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호텔의 휘황한 배경에 고관대작의 진수성찬을 비교해 보라, 이 시를 모두 한번 크게 소리 내어 읽고 외우다 보면 이 땅에 민주주의가 봄처럼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4.
시인이 한 편에 기울인 시간만큼 소리 내어 또는 속으로 읽고 생각해야 비로소 그 시는 입을 연다. 어느 시인의 말이다. 우리는 만화 보듯 건성으로 시를 대할 때가 많다. 그것은 독자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바람직한 태도는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처럼 시인은 자기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인다. 그것을 편견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자칫 지적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으나 상대적인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양한 구조의 현대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안지순 시인의 시는 주로 시인이 살고 있는 혈연과 토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진실성이 배여 있는 이유다. 그러나 시각을 좀 넓혀 자연과 사회를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시는 시대를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대의 구속에 매몰되는 것도 아니다. 늘 새로운 눈으로 경이를 발견하도록 힘써야 하지 않을까, 두보杜甫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을 생사를 걸고 찾겠다고語不驚人 死不休. 대가도 그러하거늘 예사 시인이랴. 그러나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다. 쉬지 않는 자세는 남이 놓치는 걸 만나게 한다.
안 시인은 허울 좋은 관념의 유희에 빠지거나 뿌리 없는 낙원의식에 침몰되지 않는다.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착하고 가난한 사람의 편에서 그들을 옹호하고 연대하는 자세를 지켜 꾸준히 감동과 아름다움을 갖춘 이 시대의 따뜻한 작품을 써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