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松 건강칼럼 (301)...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박명윤(보건학박사,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일반적으로 귀족(貴族)들이 평민(平民)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의무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내면에는 권리(權利)만 주장하지 말고 책임(責任)도 수행하라는 도덕적인 철학이 담겨 있다. 이런 정신에서 서양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사회봉사와 복지에 앞장서고 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 1937년 일본 도쿄 출생)는 로마(Roma) 2000년 역사를 지탱한 힘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찾았다. 작가는 로마제국(Roman Empire)의 성공요인으로 (1)패자까지 포용하는 개방성, (2)법과 제도가 움직이는 시스템 구축, (3)제국을 지탱하는 인프라 구축, (4)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등을 꼽았다.
사회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지도자가 특권을 양보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앞장서서 싸우고, 솔선수범하면서 부(富)를 사회에 환원하는 전통이 노블fp스 오블리주의 중요한 덕목(德目)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은 이후 유럽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 윤리(倫理)가 되었다.
‘로마인 이야기’는 작가가 이탈리아 현지에 머물며 15년에 걸쳐 집필한 작품으로 1995년에 제1권, 그리고 2007년에 제15권이 완간된 고대 로마의 역사를 기술한 기념비적 대작(大作)이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부자는 있지만 철학과 도덕성을 제대로 갖춘 상류층의 부재가 직면한 문제이다. 존경받는 계층이 없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이며 병(病)든 사회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 사상을 가지고 돈만 많고 법도(法度)를 모르는 졸부(猝富)를 옛 어른들은 ‘부자 상놈’이란 뜻으로 부한(富漢)이라고 불렀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지조와 의리를 꺾으면서 관직(官職)에 나가지 않았고, 명예를 목숨처럼 지키려는 가문(家門)이 많았다. 청렴(淸廉), 강직(剛直), 기개(氣槪), 배려(配慮), 예의(禮儀) 등 전통사회의 명문가들이 지녔던 이 같은 ‘선비(scholar)정신’ 즉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회복이 시급하다.
남을 돕는 것은 동시에 나를 돕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남을 도우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병원을 세운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씨는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You are no happier to receive it than I am to give it.)”라고 1900년에 말했다.
세브란스씨는 석유사업을 통해 큰 부자가 되었고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자선가(慈善家)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번 돈으로 한국에 의학교육을 뿌리내리게 해준 고마운 사람이다. 미국 장로교단의 ‘세브란스 기금’은 지금도 매년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후원금을 송금하고 있다. 집안 대대로 자선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세브란스가(家)이다.
법정(法頂) 스님은 “부자가 되려하지 말고 베푸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부자는 덕(德)을 닦으며 이웃에게 베푸는 사람이다. 재물은 인연에 의해 잠시 내게 맡긴 것으로 바르게 관리하면 연장되지만, 흥청망청 낭비하면 곧 회수 당한다. ‘나눔’이란 내 몫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잠시 맡았던 그의 몫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 재물을 올바로 쓰는 일은 재물을 가진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다.
불교에서 부처님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말씀하셨다. 뭇생명의 평안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자심(慈心)이며, 남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비심(悲心)이다. 남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면 희심(喜心)이며, 일체의 편견과 분별을 버리는 것이 사심(捨心)이다. 따라서 ‘慈ㆍ悲ㆍ喜ㆍ捨’는 이웃과 함께 나누고, 함께 누리는 삶이다.
흔히 경주(慶州) 최부잣집을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거론하고 있다. 옛말에 “부자는 3대를 못 간다.”고 이야기한 이유는 선대(先代)가 축적한 부(富)를 후대(後代)에서 사치와 낭비 등으로 탕진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무려 12대 400년 동안 그 부와 명예를 유지했다.
최 부잣집이 부(富)를 400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경주최부자’의 수신제가(修身齊家)인 처세육연(處世六然)과 제가육훈(齊家六訓)에 있다고 한다. 육연은 이 집안의 가정교육 원리이자, 인품을 닦는 수신(修身)철학이기도 하였다. 여섯 가지 연(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자처초연(自處超然) 세속을 초월하는 경지로 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2)대인애연(對人靄然) 누구에게나 평등한 마음가짐으로 남에게 온화하게 대한다. (3)무사징연(無事澄然) 잡념을 자제하며,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진다. (4)유사감연(有事敢然)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일을 당하면 용감하게 대처한다. (5)득의담연(得意淡然) 경거망동을 삼가며 뜻을 이루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6)실의태연(失意泰然)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교훈을 새기면서 뜻을 못 이루어도 태연하게 행동한다.
경주 최 부잣집 가정교육은 유년 시절부터 매일 아침 일어나면 곧바로 조부(祖父)님이 기거(起居)하시는 사랑채에 가서 붓글씨로 이 ‘육연’을 썼다. 매일 반복해서 수년 동안 이 글씨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내용이 익숙하게 되고 실천하게 된다.
최근 천년 고도(古都) 경주(慶州)에서 경주시 주최,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주관으로 ‘경주 최부자 400년 신화(神話) 21세기 시대정신으로 부활(復活)하다’를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경주 최부자(崔富者) 400년’이란 최진립(崔震立ㆍ1568〜1636) 장군부터 12대 최준(崔浚ㆍ1884〜1970) 선생까지 이어지는 402년으로 12대 만석(萬石)꾼, 9대째 진사(進士)를 배출한 집안이다. 최준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 환국하여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인물이다. 1947년 대구대학(大邱大學)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1967년 대구대학과 대구 청구대학이 통합하여 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가 세워졌다.
심포지엄을 통하여 최부잣집의 독특한 ‘부자 정신(富者精神)’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양극화 문제 해법과 상생 경영의 지혜를 모색했다. 경주대학교 이강식 교수(경영학)은 최부잣집 여섯 가지 행동지침인 제가육훈(齊家六訓)을 현대 경영학의 원리로 아래와 같이 풀어냈다.
(1) 과거(科擧)를 보되 진사(進士)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최부잣집은 과거에 합격해 양반 신분을 유지했지만 관직이나 정치에는 나서지 않았다. 오늘날 ‘정경(政經) 분리’를 실천한 선구자였다.
(2) 만석(萬石)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1년 소작료(小作料) 수입을 만석으로 미리 정하고 초과분에 대해서는 소작료를 깎아준 것으로 ‘목표초과 이익(利益) 분배제’다.
(3) 흉년(凶年)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사회적 약자(弱者)의 약점을 이용해 치부(致富)하지 말라는 뜻으로 ‘공정경쟁(公正競爭)’의 실천이었다.
(4) 사방 백 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이 들면 주린 이웃들에게 죽을 쑤어 주었고, 곳간을 열어 쌀도 풀었다. ‘복지(福祉) 경영’이다.
(5)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부잣집은 사랑채를 개방하고 1년에 쌀 2000가마니를 과객 접대에 썼다. 당시 과객들은 소문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정보 교류를 통하여 오늘날 ‘소통(疏通) 경영’과 연결된다.
(6)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신혼(新婚) 초 서민들의 옷인 무명옷을 입게 해 근검절약(勤儉節約)을 익히게 했다. 또 은비녀 이상의 패물(佩物)을 갖고 오지 말라고 해 혼수품(婚需品) 절제도 앞장섰다.
이강식 교수는 “최부잣집의 상생(相生) 경영 원리와 실천(實踐) 경험은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충분히 응용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부(富)를 오랫동안 유지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고도의 인격수양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영남의 어른 집안으로 줄곧 존경을 받았던 최부잣집은 단순히 사회에 공헌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삶 전반의 지표로 삼아 실천하였다.
포스코(POSCO)에서 ‘경주 최부자를 알자’라는 캠페인을 하고 있으며, ‘경주 최부자 경영아카데미’ 설립을 추진하고 있어 기업인들의 관심과 동참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경주 최부잣집의 ‘상생경영’은 세계 여러 나라에 소개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공수래(空手來)공수거(空手去). 사람은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이 말은 “이승에 살 때 너무 욕심 내지 말고 남과 더불어 나누어주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더 일했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을 좀 더 배려(配慮)했더라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마음을 썼어야 하는데...’라고 뒤늦게 후회한다.
일생을 마친 다음에 남는 것은 우리가 모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에게 준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베푼 적선(積善), 따뜻한 격려의 말 등은 언제까지나 남아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더 많은 배려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글/ 靑松 朴明潤(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서울대학교 保健學博士會 고문)
<청송건강칼럼(301). 2013.7.19. www.nandal.net www.ptc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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