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논어반 가을 야외수업
다산문화유적지 |
11월11일 가을야외수업은 서울근교에 있는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적지를 찾기로 했다.
모처럼의 야외나들이이므로 수업에 국한하지 않고 엔터테인먼트도 겸해서 하기로~
다산 정약용 유적지에서 수업을 마친 뒤 드라마 촬영장소로 유명한 두물머리(양수리)
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계획이다. 점심은 라이브카페에서 가을노래를 들으면서
또 마술쇼도 보면서 고급요리를 먹고~거기다 오후에는 용문에 새로 설치된 레일바이
크도 탈 예정이란다.
아침에 비가 내려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시간이 되기 전에 대부분의 동지들이 버스
에 타고 있었다.
오늘 야외수업의 주인공은 다산 정약용선생이다. 다산은 우리 국민 누구나 존경하고
좋아하는 역사의 인물이다. 필자도 그 중의 한사람으로 그에 관한 저서와 소설을 제법
읽었었다. 오늘 찾는 그의 유적지도 여러차례 다녀온 곳이다. 그러나 늘 숙연하고 존경하
는 마음으로 찾게 된다.
다산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였다. 어머니의 5대조는 효종과 현종
때의 남인 거두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이다.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이 사도세자를 뒤주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한 괴변을 보고 정치에
환멸을 느껴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 얼마 안되어 1762년 6월16일 아들 약용을 낳았다.
네째 아들(첫 이름 귀농)로 태어난 그는 워낙 어릴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했다.
(1) 성장기
다산의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 송보이고, 호는 사암, 열수, 다산, 자하도인, 문암일인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세때 지은 '산'이라는 시
가 지금까지 이를 입증해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
문이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또 다산이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산은 성호의 길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1) 득의 시절
다산은 22세 때(1783)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당시의 임금인 정
조의 눈에 띄어 인정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뛰어난 재능과 학문 때문이었다.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
·참의·좌우부승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
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옥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유교옥사건은 표면적
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은 없으나 16세 때 이미 서울에
서 이가환(다산의 생질)·이승훈(다산의 매형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에 접하였고, 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 뱃길에서 이벽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기술적 업적으로는 1789 년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
다.
1791년 윤지충·권상연의신해박해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795년
주문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도 채 못 되는 짧은 기
간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 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을 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앉지 않고 더욱 거
세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2) 환난의 시절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 지 채 1년도 못 되어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그를 둘러싼 화
기가 무르익어 1801년 2월 책롱사건으로 체포, 투옥되니, 이로써 그의 득의시절은 막 을 내리고 말았다.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니 이 로써 그의 제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으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고, 강진에 도착하자 첫 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가이다. 이곳에서는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거처하였고, 자기가 묵던 협실을 사의재(四宜齋:네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라 명명하
기도 하였다. 사의(四宜)란 "생각을 맑게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
히,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은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
였다. 이 시절은 유배 초기가 되어서 고적하던 시절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주가
의 한 늙은 주모의 도움이 있었고, 1803년 봄에 때마침 만덕사 소풍길에 10년 년하인
혜장선사를 만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기도 하였다. 다산은 보은산방에서 학문을 연구
하는 틈틈이 다도(茶道)를 즐겼다. 혜장도 그곳에 자주 와서 차와 시를 나누었다. 그의
소개로 초의선사를 만났고 혜장스님(아암)이 세상을 등진 후 초의에게 유학을 가르치
고 유서를 읽게 했다.
1805년 겨울에는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 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갔다. 한편, 9개월 만에 다시금 이학래 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 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으니, 이때에 이학래로 하여금 다산역의 준공을 맞게 한 것을 보면 경함을 다시금 목리로 옮긴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간 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3) 유유자적의 시절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저술을 계속하였다. 이때 미 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 놓았다. 또한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 며, 북한강을 유람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 · 김매순 · 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 을 추스리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고향으로 돌 아온 지 18년 만에 7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836년 헌종 2년이다.
학문과 사상
다산의 저서는 방대하고 다양하다. 한자가 생긴 이래 세계적으로 방대한 500여권에
이르는 저술을 남긴 대철학자요,사상가이며,과학자,예술인이기도 하며,2천오백 여수
의 유시를 남긴 세계적 대문호의 한사람이기도 하다.특히 우리가 배우는 논어에 대한
주석서로서 '여유당전서' 제2집 제7~16권에 '논어고금주'가 수록되어 있다. 논어고금
주는 다산의 경학관련 저술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것이다. 당시 영구불변
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떠받들어 오던 주자(朱子)의 해석을 170여 군데나 바로잡아 자
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밝혔다.
다산 스스로 말하기를 '6경4서로써 자기 몸을 닦게 하고,경세유표와 목민심서,흠흠신
서, 이른바 1표2서(一表二書)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고자 하니, 이로써 본
(本)과 말(末)이 구비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꾸짖는 사람
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주지를 않는 것으로 생각하여 불속에 처넣어 불살라 태워버려
도 좋다'고 절규하였다. '우리나라를 새롭게 개혁하자'는 다산의 신아지구방(新我之舊
邦)사상은 500여권의 방대한 저서 가운데 그 3분의 1이 정책관련 개혁론이라는 점에서
잘 나타나 있다.
다산유적지/ 다산 생가와 다산문화관
버스에서 내리니 지난 10월2일까지 열렸던 다산문화제의 안내판이 시선을 끌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유적지는 다산문화관,다산기념관,생가
인 여유당(與猶堂),사당 문도사(文度詞),묘역으로 총 7천평에 이른다.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으며 선생의 생가내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업적을 모아 기념관을 건립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개방하고 있다.다산 기념관에는 18년간의 강진 유배 생활 중 거처하던 다산초당의 모형과 성이나 집을 축조할 때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계인 녹로와 거중기를 1/2 모형으로 제작해 놓았다. 그리고 다산 전시실에는 다산의 주요 저서 중 경세유포, 목민심서, 흠흠신서, 논어 고금주 등을 요약해서 쉽게 설명해 놓았다.
먼저 다산문화관에서 서문숙 문화해설사의 설명믈 들었다.
어가행렬도(御駕行列圖)가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노량주교도섭도,시흥환어행렬도,득중정어사도,서장대성조도,낙남헌방방도,화성성묘전배도,낙남헌양로연도,봉수당진찬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다산이 부인의 붉은 치마에 그린 매조도는 유명하다. 또 자녀 9명 중 생존한 자식은 2남2녀로 편지글로 교훈을,서첩에 매조도를 전하고 있는데 딸에게 전한 한점의 진품이 현재 고려대학에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1762년(영조 38) 음력 6월16일 다산 선생이 태어난 곳이자 1836년 2월22일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여유당이라는 당호는 익히 알려진 대로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노자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여유당을 거쳐 뒷동산 묘역으로 안내되었다. 묘역은 2개의 망주석이 서 있고 묘 앞에는 상석과 혼유석이 자리한다. 부부의 묘로서 곡장처리 되어 있었다. 당시로서는 엄두를 못낼 것이나 훗날 남양주군에서 묘역을 꾸몄다고 한다. 묘 앞에서 선생을 존경하는 의미로 후세의 논어 동지들 모두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문도사(文度祠)를 마지막으로 보면서 다산유적지 탐방을 마쳤다. 추모사당인 문도사
(文度祠)는 1910년 조정에서 내린 시호인 문도공(文度公)을 바탕으로 붙은 이름이다.
다산문화제 행사간판
천일각과/다산유적지 입구의 석조물.
다산의 500여 권의 저술과 그 속에서 타오르는 실학 정신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다산 정약용선생상(像)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
다산 유적지 현황판
다산문화관에서 문화해설사의 열변
다산문화관의 어가행렬도(御駕行列圖)
(좌)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橋渡涉圖)/조선 정조가 1795년 화성에 행차를 하기위해 한강에 설치한
배다리를 그린그림이다.
(우)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시흥(始興)에 있는 행궁(行宮)으로 행렬이 도착하는 모습이다.
(좌)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어사대가 있는 득중정에 임어하여 활을 쏘고 불꽃놀이를 즐겼는데. 이 불꽃놀
이의 광경을 그린 것이 득중정어사도이다. 득중정이라는 명칭은 현륭원 천봉후 첫번째 맞는 사도세자의 탄신
일에 수원부로 행차하였을 때 어사하고 그 사정을 득중정이라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우)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1795년 화성행차 8일간의 기록을 그림으로 남긴 <원행을묘의궤> 중
서장대성조도. 행사의 넷째 날인 윤 2월 12일 밤, 정조가 화성의 서장대에 행차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장면
을 묘사한 그림이다.
(좌)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공자 사당에서 참배를 마친 정조는 행궁으로 돌아와 정화관((丁?觀)에서
무과시험을 보이고, 낙남헌에서 문과시험을 보였는데, 잇달아 합격자 발표인 방방(放榜)에 친림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우)화성 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 정조가 화성행궁에 도착한 이튿날(11일), 화성 향교에서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 나가 참배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좌)낙남헌양로연도(落南軒養老宴圖)/양로연은 진찬례를 치른 다음날인 윤 2월 14일 신시에 정조가 친림한
가운데 낙남헌에서 베풀어졌다. 낙남헌 안의 어좌를 중심으로 2품 이상의 노인들이 융복 차림으로 좌우로
나뉘어 위쪽을 상위로 하여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우)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윤2월 13일, 정조가 화성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년을
기념하여 진찬례를 올리는 잔치 장면이다.
다산 詩/봄날 수종사에 노닐다.
마당에 세워놓은 시비 詩/치마폭에 매화를 그리다.
마당에 설치해 놓은 거중기
매조도
다산의 명필감상
문화해설사의 설명
여유당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길
다산과 부인의 묘
다산의 사당 문도사
해설사의 설명에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다.
두물머리(兩水里)의 가을풍경
양평 방향으로 가는 양평대교 길에서 늘 아름다운 풍경으로 시선을 끄는 곳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곳으로 사진작가,시인,그림 그리는 화가
들도 자주 찾는 곳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지나는 길에 잠시 쉬어가고 싶은 곳이 양수리
의 느티나무가 있는 나룻터이다. 이곳에도 문화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화해설이라기 보다는 자연풍경의 설명이 맞다. 두물머리 양수리는 말 그대로 두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금강산 금강천에서 내려온 북한강 하류와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되어 내려온 남한강 하류가 만나는 지점이다. 운길산 수종사의 통유리로 된 찻집에서 내려다보는 양수리 풍경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팔당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팔당댐은 2억4천만톤의 물을 저장하여 1급수로 서울과 경기도 일부의 상수원 역할을 한다.
양수리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년이나 되고 높이 30m, 둘레가 8m나 되는 긴 역사와
함께 많은 애환을 간직한 나무이다. 영월에서 마포나루까지 황포돛배가 다녔으며 이 지역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가야만 했다고 한다. 말을 탄채 가려면 말이 움직이질 않았다나--매년 음력 9월2일에 무사 운행을 기원하는 제사를 이 느티나무에서 지냈다고 한다. 마침 오늘은 아침에 비가 내려 황포돗배의 돛대가 내려져 있었다.
북쪽편을 보니 둥그란 섬이 있다. 병풍섬으로 예전에는 사람도 살고 있었고 토끼의 천국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무인도로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있단다. 또 남쪽을 보니 작은 섬에 검정색 열매 같은 것이 나무에 달려 있었다. 열매가 아니라 중국 남방 계림 여행시 본 가마우찌라는 새란다. 목에 실을 매어 호수에서 부리로 잡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고 어부에게 바치는 새의 기묘한 광경을 본 일이 있다.
큰섬이라고 불리는 이 섬은 1500평이나 되는 큰섬이었으나 팔당댐이 생긴 후 장마후 떠
내려가서 작아졌다고 하는데 뱀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뱀섬이라고도 불린다.
오전수업과 관광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러 간다. 양평가는 길의 만남의 광장과 국수역 사이에 있는 '예마당'이라는 라이브카페 식당이다. 정확히는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에 있다.
호박오리라는 메뉴를 시켰는가 보다 .막걸리 한잔을 곁드린 음식 맛은 특별했다.
노대홍선생이 마치 이 집에 고용된듯이 도우미 역할을 한다. 라이브카페라 당연히 생음악이 있다. 남자답게 잘생긴 이준오라는 가수의 가을노래는 여심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 등 주옥같은 가을노래들이 그의 구수한 음색으로 조용하던 마음에 자그마한 파문이 인다. 노래가 끝날 때 마다 힘찬 박수가 터져 나온다.
뒤이어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이 마술쇼를 벌인다. 마술은 언제 봐도 신기하다. 우리 일행 중 한 여성동지가 무대에 불려나가서 춤도 춰가면서 조연 역할을 했다. 갑자기 스타가 되었다. 즐거운 식사시간을 마치고 다음 여정인 양평레일바이크장으로 향했다.
두물머리(양수리)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
두물머리 느티나무 설명판
문화해설사라기보다 풍경해설사라 할까~
황포돛배는 아침에 비가 온 탓으로 돛대를 내리고 있다.
(좌)황포 돛을 단 모습
박문재시인의 詩
뱀섬/열매처럼 보이는 것은 가마우찌라는 새이다.
라이브카페식당/예마당
예마당 입구
낙엽,단풍,가을을 노래부르는 저음가수의 목소리가 매력적이다.
라이브카페의 가을노래에 흠뿍 젖어드는 분위기
마술쇼도 흥미롭다.
마술쇼를 흥미롭게 구경하는 동지들
강물이 흘러들어 호수처럼~
수도권 최초의 레일바이크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레일바이크. 처음엔 어린애들이 타는 레일바이크를 나잇살이나 먹은 할배들이 타기엔 좀 뭐하다는 반응이었으나 정작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신이 난다. 아래자리에 두명, 윗자리에 두명이 앉아 네명이 한조가 된다. 브레이크가 두개 달려 있어 앞차와 부닥칠 우려가 있을 때나 속도를 조절할 때 사용한다. 바퀴를 저어가며 달리는 상쾌한 기분은 말로 표현키 힘든 즐거움이 있었다. 왕복 6.4km의 거리를 도착지에서 쉬는 시간까지 합해 총 1시간20분이 걸린다. 절반은 반환지에 도착후 매점에서 쉬는 시간이다. 야간에는 조명이 휘황찬란하여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고 한다. 가운데 터널이 있어 또다른 묘미를 느끼게 한다. 남녀 동지들 모두 신이 난 표정들이다.
레이바이크 지정번호에 앉아 출발을 기다린다.
레일바이크는 4명이 한조이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달린다.
터널도,논밭도,강물도 지난다.
반환점에서 방향을 돌린다.
호박터널
이렇게들 모두 즐거울수가--?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 돌아갈 시간이다. 원래는 양평 재래시장에 들를 예정이었으나
어둡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하루의 즐거웠던 야외수업시간도 막을 내렸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복습 겸 스케쥴별로 회상을 해본다. 다산을 좀더 가까이 보고 느끼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 야외수업에 이벤트가 합쳐진 멋진 가을 야외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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