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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됨의 신비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다 신비로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더라고 하신 ‘나’는, 인간인 그대로 신비롭습니다. 그 ‘나’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순간들 역시 있는 그대로 신비롭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나’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은 다 신비롭습니다.
독일어에는 신비, 혹은 신비주의를 가리키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스티지스무스(Mystizismus)’이고 다른 하나는 ‘미스티크(Mystik)’입니다.(『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오강남, 성혜영, 69) ‘미스티지스무스’는 기적이나 신기한 현상에 집착하는 광신적 열광적 신비주의를 말합니다. 반면에 ‘미스티크’는 종교의 깊은 면을 파고 들어가는 것으로서, 신적 존재에 대해 말로 설명하거나 표현하려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깊이를 그대로 경험하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비주의를 추구한다 하면서 어떤 기적 같은 현상이나 마술적인 능력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왜곡된 신비주의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경험한 신비로 인하여 스스로 독선에 빠지고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권력을 휘두른다면, 그리고 신비로부터 얻어지는 어떤 물질적인 복과 이득을 강조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신비주의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보다 신비한 분이셨던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신비를 추구함으로써 자비, 사랑, 평화, 자유, 그리고 비폭력 등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신비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나타나는 용납과 자비의 감정이 솟구친다면 그것은 신비주의라기보다는 보다 더 깊은 신앙의 성숙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스티크’라는 의미에서의 신비주의적 신앙인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순간들이 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것은 다름 어떤 일상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청년 시절, 전철 1호선을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때는 오후였고 전철은 다소 한산 했습니다. 영등포를 지날 때 즈음 내가 탄 객실에 한 걸인이 바구니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구걸하면서 지나갔습니다. 당시 멀쩡한 사람들이 걸인 행세를 하며 구걸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기에 저는 그 걸인도 아마 가짜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전에도 차에선 검은색 선글라스에 지팡이를 짚고 구걸을 하다가 전철에 내려서는 선글라스를 벗고 멀쩡히 걸어가던 사람을 본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전철은 구로역에 정차했고, 그 걸인은 제가 서 있던 출입문으로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구로역은 수원과 인천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종종 앞차와의 간격 맞춤을 위해 다른 역에 비해 길게 정차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동안 전철 문이 열린 채로 정차했습니다. 내 앞에서 머뭇거리던 그 걸인이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습니다. 나는 그의 눈을 확인하기 위해 바로 보았고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정말로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의 뒤로 저녁 붉은 저녁노을이, 땀을 닦고 있던 그 걸인을 비췄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나 신비롭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전기에 감전되듯 그 걸인의 모습에 감동되어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시각장애 걸인이었을 뿐인데, 그 순간 제 눈에 비친 모습은 걸인이 아닌 한 인간 존재의 경이로움이었고 숭고함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감이 저를 감쌌습니다. 이것이 제가 경험했던 신비 중에 잊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또한 제가 들었던 신비로운 하나님의 음성은 바로 “먼저 인간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신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제게 아직까지도 잊지 못할 신비를 선사했던 그 시각장애 걸인은 어떤 특별한 존재나 천상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의 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거짓으로 걸인 노릇하지도 않았고, 시각장애를 꾸미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자기 자신일 뿐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그분과 그분을 통해 경험한 저의 신비체험을 설명하기 위해, 그분을 ‘시각장애 걸인’이라고 명했습니다만, 그는 그 명칭을 갖기 전, 즉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그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신비로운 분인 것은 그분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각이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는 표현 불가한 것, 형언 불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편 46:10)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가만히’ 가장 고요한 침묵 가운데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만을 알 뿐입니다. 또 하나님에 대해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있음 이전의 있음’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 이전의 말, 언어 이전의 언어’인 침묵과 고요로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과 이름과 개념과 명칭으로는 도저히 규정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그저 계신 분입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봄으로서의 믿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다른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진정한 ‘나’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붙여진 수많은 딱지들, 이름과 명칭과 또한 내가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수많은 나의 감정, 나의 느낌, 나의 기분, 나의 이름, 나의 몸, 나의 생각 등, 진정한 ‘나’ 아닌 수많은 껍데기 ‘나’들을 벗겨낼 때에 진정한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앎 이전의 앎, 생각 이전의 생각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정한 신비주의자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믿음’으로 새롭게 이해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또한 진정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그 어떤 개념이나 문자나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계신 분, 있는 그대로 있는 분으로 바라볼 때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웃들에 대해서도,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에 거기서 사랑이 시작됩니다. 여기서도 나와 너, 우리와 그들, 내편과 네 편이라는 이분법적 구분, 둘로 나누려는 왜곡된 에고의 습성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아름답다 추하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하는 둘로 나누려는 습성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에 참된 사랑이 가능합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 개와 늑대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운 시간을 말합니다. 어느 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 아침이 시작된 순간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기다렸다는 듯이 제자 하나가 재빨리 대답했습니다. “늑대와 개를 두 눈으로 분명히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 스승은 맘에 드는 대답이 아닌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곁에 있던 다른 제자가 손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습니다. “육안으로 올리브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 이번에도 스승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습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제자들이 한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스승은 눈을 지그시 감고 답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를 형제라고 느낀다면 마침내 밝은 아침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 곧 마음을 보시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깊은 고요의 침묵 가운데 잠잠히 바라볼 때에 만나는 분은 바로 자비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바로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2:9-11)
우리가 낯선 자를 만났을 때 그를 형제로 느낀다면 우리는 빛 가운데 있다는 사실, 즉 우리에게 아침이 밝았다는 사실입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바로 서로를 ‘인간답게’ 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신다는 것은 바로 우리를 인간인 모습 그대로, 흠 있고, 연약하고 부족하고 넘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인간답게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완벽하라고, 결함이 없는 무결점의 사람이 되라고, 순백의 천사가 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십니다(시편 103:14).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인간이 되는 것,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저 있는 그대로 순전한 참 인간이 되는 것, 그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원래의 인간인, 사람인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 ‘나’가 무엇이 되어야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간으로 만드신 그 인간됨의 신비를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인간답다’는 것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인간적이라는 것 역시 따뜻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국민이 원하는 지도자는 신과 같은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인간적인 지도자, 인간다운 지도자’ 아닙니까? 국정농단으로 나라꼴이 엉망진창이 되었을 때에 대부분의 국민이 그리워한 지도자는 바로 인간적인 대통령이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탄핵되어 파면당하기에 이른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대통령 박근혜가 파면 당한 이유가 뭘까요? 헌재에서 법정 판단을 내리긴 했지만, 만일 그가 조금만 더 인간적이었다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주 드디어 3년 만에 침몰했던 세월호가 인양되었습니다. 만일 박근혜가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조금만 더 인간적이었다면, 그 후 유가족들에게 조금만 더 인간적으로 보듬었다면 국민들이 이 지경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국정농단 사건에서 가장 큰 핵심적인 공을 세운 것은 살아있는 언론이었습니다. 그 언론사의 수장인 손석희 앵커는 지난주 뉴스에서 언론의 사명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명확합니다. 저희는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모두가 동의하는 교과서 그대로의 저널리즘은 옳은 것이며 그런 저널리즘은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 존재하거나 복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나 기자들이나 또 다른 JTBC의 구성원 누구든. 저희들 나름의 자긍심이 있다면, 그 어떤 반작용도 감수하며 저희가 추구하는 저널리즘을 지키려 애써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과도 일치한다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시 어느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해 존재해선 안 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명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가장 명백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성경구절은 이것일 겁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특히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 합니다. 이것을 법적, 윤리적, 종교적 명령으로 생각하면 이만큼 괴롭고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합니까,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합니까,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미친 사람도 아니고.
그러나 이것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나’가 살고 있는 모든 삶, 모든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건 정말이지 놀라운 진리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있는 그대로의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가 사는 모든 ‘지금 이 순간’이 선한 분에게서 나온 선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지으신 있는 그대로의 나는 기뻐할 만한 존재요, 있는 그대로 나의 참모습에 감사할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나’가 사는 모든 삶의 순간, 즉 모든 ‘지금 이 순간’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는 살아가는 모든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 있기에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됨’ 그리고 ‘인간으로 사는 모든 삶의 순간’이 좋은 것이니,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말로 하는 것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항상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자체가 기도가 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묵상의 기도, 침묵의 기도로 이해하는 한에서 말입니다. 이 경우, 오히려 말로 하는 기도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아는’ 참된 기도를 방해합니다.
우리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나’ 아닌 수많은 껍데기들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착각합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참이 아닌 것을 참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아름답다 추하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나누는 것은 바로 우리의 착각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사람이든 상황이든 그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좋다 나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건 그저 있는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뭔가를 조건에 따라 좋다 나쁘다,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마음이 달라질 뿐입니다. 예를 들어, 간밤에 복권에 당첨되어 20억 원을 받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꿈 때문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출근한 후 상사가 별 일 아닌 것 가지고 지적하고 꾸중을 하는 통에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여기서 두 번이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꿈은 꿈일 뿐 꿈 때문에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습니다. 복권 당첨 꿈을 꾸었다고 해서 진짜로 실제 복권 당첨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꿈 때문에 마음이 움직였으니 그걸 좋다고 여긴 것이지요. 상사의 잔소리는 그저 그의 잔소리요, 그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 때문에 좋았던 기분이 다시 나빠졌으니 이것 또한 다른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게 마음에 걸린 것입니다. 내 마음에 좋은 조건이 걸리면 기분이 좋고, 나쁜 조건이 걸리면 나쁘고, 걸리는 것이 있으니 걸리는 것에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볼 수 있으면, 그저 그것일 뿐 좋다 나쁘다는 없습니다.
어떤 청년이 수도승이 되겠다며 홀로 깊은 산 속에 거하는 노수도사를 찾아가서는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수도사는 처음엔 거절했다가 청년이 하도 간곡히 부탁을 해서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거하는 작은 거처로 데리고 간 수도사는 제일 먼저 부엌의 아궁이와 걸려있던 솥을 고치라고 했습니다. 스승의 맘에 들기 위해 청년은 열심히 아궁이와 솥을 고쳐 스승께 검사를 받았습니다. 아궁이와 솥을 살펴보던 스승은 맘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아니야, 다시 해!” 뭐가 잘못되었을까 하면서도 청년은 다시 열심히 아궁이를 고쳤습니다. 그리고 “다 고쳤습니다.”며 스승을 찾았습니다. 다시 아궁이와 솥을 살펴본 스승은 이번에도 “아니야, 다시 해!”하며 말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고치고 다시 고치기를 아홉 번을 한 끝에 청년은 아예 부엌을 완전히 싹 뜯어 고쳐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칭찬하시겠지, 하며 청년은 스승을 모시고 왔습니다. 스승은 와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스승은 “아니야, 다시 고쳐!”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스승의 반응에 청년은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오기가 난 청년은 이번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두고는 부엌 아궁이 솥에 걸터앉아서 큰 소리로 스승을 불렀습니다. “스승님, 다 했습니다.” 다시 부엌으로 오던 스승은, 아궁이에 자신만만하게 걸터앉아 당당하게 소리치던 청년을 보고는, 아궁이와 솥은 확인도 안하고서 “좋아, 좋아” 외치면서 칭찬을 했습니다.
수도사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하여 수도생활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대단히 확신에 찬 행동입니다. 자신의 결심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웬만한 믿음이 없고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해 받아들이고 믿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하기 쉬울 수 있음을 스승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을 만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었음을요. 그래서 스승은 제자의 마음을 시험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무엇에도 좌지우지 되지 않을 만큼 마음이 강한가. 자신의 있는 그대로에 대해서 큰 믿음이 있는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딱지들, 즉 나의 생각, 나의 조건, 나의 느낌, 나의 상황에 대한 고집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말합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과 철저한 자기를 버림이 있을 때에만, 진정한 ‘나’, ‘나’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요.
청년의 마음은 아궁이를 열심히 고쳐놓고 스승이 ‘아니야, 다시 해!’ 할 때마다, ‘이런가, 저런가.’하면서 마음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분명 아궁이를 잘 고쳐놓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아니라고 말하는 스승의 말을 믿어 왔다 갔다 했던 것입니다. 스승의 말에, 스승의 기분에, 스승의 판단에 그의 마음이 걸렸던 것입니다. 거기에 걸려서 좋다 나쁘다, 옳다 틀렸다 왔다갔다 마음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매우 신비로운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이를 사랑하며 도우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가장 흠모할만하며 존경할만한 일입니다. 인간이라는 사실, 인간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정말로 신비롭고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인간답게’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문자주의 종교는 다른 이를 나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고 차별하고 분리시킵니다. 또 인간적인 것을 죄악시하고 폄하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비주의자는 자신의 존재와 삶이 신비롭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른 이를 신비롭고 경이롭게 알고 존중하며 배려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자비롭게 볼 줄 압니다. 또 다른 이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를 자비롭게 대합니다. 인간이라는 것,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참 생명이 ‘나’라는 인간으로, ‘나’라는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지금 이 순간에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신비롭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 즉 하나님의 신비이십니다(골 2:2).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신 한 사람인 ‘나’도 역시 하나님의 신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