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이 터졌을 때, 연민(Karuna)과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
누가 들어 오나
수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에 찾아 온다. 이름 없는 한 개인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 글을 보아 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 드리고 싶다.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를 맞이하여 한 개인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시대와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블러그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관리자 항목에 방문자 분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월평균 방문자 분포
연령별로 분류된 표이다. 월평균방문자에 대한 것이다. 로그인해서 들어 오는 순방문자가 22,514명이니 일평균 750명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연령대별 방문자 비율에서 주목하는 것은 20대이다. 통계표를 보면 7%에 달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어려운 것이고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것이라는 인식이 국민들에게 퍼져 있는 마당에 이렇게 20대에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안면이 있는 스님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주로 초기불교에 대하여 글을 쓰다 보니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있는 스님들도 많이 들여다 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나 관심있는 타종교인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본 블로그에 쓰여 있는 글은 보통불자의 일상적인 글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전문적은 학술논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담준론의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철저하게 경전을 바탕으로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사항에 대하여 글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송현시인의 ‘사모곡(思母曲)’
인터넷의 속성상 대부분 익명을 전제로 한 필명으로 통한다. 또 로그인 없이 들어 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누가 들어 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로그인으로 들어 온 경우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누가 오셨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누가 글을 보고 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남겨 주신 분들이 종종 있다. 그런 분중에 사회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송현시인님이 있다. 종종 방문하시어 글을 남겨 주시는데, 시인은 블로그를 가지고 있다.
송현시인님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았다. 시인님의 블로그에서 눈에 띄는 시가 보였다. 그것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모곡’에 대한 것이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참회(1) --치매 어머니를 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면서
송현(시인)
아, 어머니
어머니가 안에 계시는데 밖에서 문을 잠그는
저는 이제
어머니 아들도 아니고 불효 자식은 커녕 인간 말종도 아니고 사람새끼도 아닙니다.
어차피 아들을 못 알아보시니 옆짚 아저씨나 길가는 사람으로 생각하셔요. 그래야 어머니 마음도 편하실 거 아니겠어요.
열여섯에 손이 귀한 집에 시집와서 십여년 아들을 못 낳아 은진 송가네 대가 끊어지는 줄 알고 온 동네 사람들 다 걱정할 때
그 구박, 그 눈총에 꽃이 피면 뭘하고 새가 울면 뭘했겠습니까.
칼을 물고 아니면 목을 매고 죽을 때 죽더라도 그 잘난 고추 달린 아들 하나 낳아주고 죽어야겠다던 그 모진 마음을 이제사 저도 알겠습니다.
보잘것 없는 고추 하나 달고 나온 저를 낳았을 때 온 동네가 다 기뻐했댔으니 잔치 중에 그런 잔치가 어디있겠으며 경사 중에 그런 경사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 귀한 아들이 벼락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하늘 무서운 줄도 모르고
백발이 성성한 것만도 불효막심한데 어머니를 안에 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어머니 아들도 아니고 불효 자식은 커녕 인간 말종도 아니고 사람새끼도 아닙니다.
저는 이제
아예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이 되고 말았습니다.(2005. 4. 17) ------------------------------------
{시}
참회(2) --치매 어머니를 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출근하면서
송현(시인)
아, 어머니
이제 개도 소도 저를 비웃고
산천초목이 저를 비웃고
세상 사람들이 저를 비웃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가는 길은 길이 아닙니다.
하늘도 어제 그 하늘이 아니고 땅도 어제 그 땅이 아닙니다.
어차피 어머니 몸도 성치 않으시니 오늘부터 집에서 편안히 쉰다고 생각하셔요.
고향도 잊고 노인대학 동무들도 잊고 회갑이 넘은 큰딸 둘째딸 적정도 마시고 독일 사는 셋째달 걱정도 마시고 아무리 심심해도 창밖도 쳐다보지 마시고 시계는 절대로 보지 마셔요. 그래야 어머니 마음도 편하실 거 아니겠어요.
거실에 알맞은 소리로 종일 나오는 유선방송을 틀어놨으니 텔레비 앞에 놓아둔 박하사탕 드시면서 송해가 나오는 전국노래자랑 재방송도 보시고 웃으면 복이 와요 재방송도 보시면서 천하장사 이만기 나오는 씨름 재방송도 보시면서 제가 퇴근하고 돌아올 때까지 어머니 혼자 노셔야 해요.
딴 방송 보시려고 이것저것 만지다가 다시못 켜실까 봐서 테이프로 채널을 고정해놨어요.
전기세 아끼려고 절대로 텔레비 끄지말고 종일 켜 놓고 보셔요.
어머니 제게는 이길 밖에 길이 없으니 이런 방식에 익숙해져야 어머니도 편하고 저도 편할 거예요.
점심 때 배고프면 백발이 성성한 2대 독자 아들과 손녀딸이 개다리 상에 차려놓은 점심상을 챙겨 드셔요.
밥도 식고 국도 식었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밥은 아랫목에 넣어둘까 하다가 혹시 어머니가 못찾으실까 봐 상위에 올려뒀어요.
어머니 아들도 못 알아보는 지금 그 모습으로라도 하루라도 더 사셔야 해요.
그래야 제 불효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게요(2005. 5. 7)
(송현시인, “에비야, 집에 가서 같이 살면 안되냐?”--시 후레자식 감상)
‘웃겼다, 울렸다’ 하는
송현시인을 알게 된 것은 불교TV사이트에서이다. 불교TV 사이트를 들락거리다가 어느 날 시인이 진행하는 프로를 발견하였다. 제목은 ‘BTN특강 송현시인의 행복발견’ 이었다.
이미 종영된 이 프로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투박하고 박력있는 부산 토속어로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는 시인의 이야기에 사람들을 ‘웃겼다, 울렸다’ 하는 마력이 있다.
그런 시인의 이야기중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 대하여 수발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중년의 나이에 이혼하고 홀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신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것은 ‘이 땅에서 치매에 걸린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은 자식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어느 누구도 치매에 걸린 사람의 뒤치닥거리를 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위 두 편의 시에 표현되어 있다. 그 내용중에 “어머니가 안에 계시는데 밖에서 문을 잠근다”는 표현이 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일하러 나갈 때 피치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그는 비통하고 처절한 심경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괴로움이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수발하며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의 불행을 보며 겪는 그런 고통을 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불교는 ‘괴로움’에 관한 종교이다. 부처님이 늘 강조한 것은 괴로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그 해법에 대해서 말씀 하신 것이다. 따라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먼저 괴로움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본질을 알아야 정확한 처방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이란 어떤 것일까.
괴로움에 대하여 가장 잘 표현 한 것이 초기경에 실려있다. 초전법륜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Ida?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 ariyasacca?? 둑캄 아리야삿짬 j?tipi dukkh?, 자-띠삐 둑카- jar?pi dukkh?, 자라-삐 둑카- by?dhipi dukkho, 뱌-디삐 둑코 mara?ampi dukkha?, 마라남삐 둑캄 appiyehi sampayogo dukkho, 압삐예히 삼빠요고 둑코 piyehi vippayogo dukkho, 삐예히 윕빠요고 둑코 yampiccha? na labhati tampi dukkha? 얌삣참 나 라바띠 땀삐 둑캄 sa?khittena 삼킷테나 pa?cup?d?nakkhandh? dukkh?. 빤쭈빠-다-낙칸다-나 둑카-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질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대상, 또는 싫어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만나고, 접촉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오취온(五取蘊)자체가 괴로움이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 Dhammacakkappavattana Sutta-초전법륜경)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등각)’을 이루시고 난 후 최초로 설법하신 내용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고 해서 ‘초전법륜경’이라 한다.
이런 초전법륜경은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 매우 중시하는 경전 중의 하나로서 마치 우리나라의 반야심경과 같은 위치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웃불로거 ‘후박나무’님의 글을 보면 인도에 성지 순례온 스리랑카 불자들이 흰옷을 입고 초전법륜경을 독송하는 것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초전법륜경을 독송하고 있는 스리랑카불자들 인솔하는 스님 없이도 스리랑카의 불자들이 초전법륜경을 독송하고 있다(사르나트). 사진; http://blog.daum.net/whoami555/13741955
우리나라의 경우 성지에서 “석가모니불” 정근하는 등 매우 단순하지만, 스리랑카 불자들은 성지에 적합한 경을 독송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사르나트(녹야원)에서는 초전법륜경을 독송한다든지, 열반지에서는 그에 해당 되는 경을 독송하는 식이라 한다. 이처럼 불교성지는 그에 해당되는 경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성지에 적합한 경을 독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괴로움의 종류
초전법륜경에서 위의 내용은 고성제에 대한 것이다. 괴로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으로서 괴로움의 종류에 대하여 나열하고 있다. 그렇다면 괴로움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은 청정도론에 실려 있다. 5부 니까야의 주석서라고도 볼 수 있는 청정도론에서 고성제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는데, 괴로움의 종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류 하여 놓았다.
고성제에서 고의 종류
1. 태어남(j?ti) 2. 늙음(Jr?) 3. 죽음(mara?a) 4. 슬픔(soka) 5. 비탄(parideva) 6. 육체적 고통(dukkha) 7. 정신적 고통(domanassa) 8. 절망(up?y?sa) 9.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asampayoga) 10.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piyavippayoga) 11.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icchit?l?bha) 12. 오취온(up?d?na-kkhandha)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괴로움의 종류이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에 대하여 종류별로 분류 하여 놓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이 위 열두가지 중의 하나에 반드시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의 불행으로 인하여 겪는 고통은 어디에 속할까.
폭탄이 터졌을 때
치매에 걸린 어머니로 인하여 겪는 정신적 고통은 어디에 속할까. 위 열두가지 괴로움 중에 아홉번째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asampayoga)’이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고통이라는 것이 반드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만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자신은 지금 평안하고 행복할지라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행을 보면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더구나 가족내에서 불행이 발생하였다면 한 마디로 ‘폭탄’을 맞은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폭탄이라는 말이 지나친 표현일지 몰라도 실제로 치매환자가 있는 집안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폭탄이 터지면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쑥대밭’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내에 치매환자가 발생하였을 경우 폭탄이 터진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상이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치매환자로 인하여 겪는 정신적 고통과 슬픔과 절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남의 불행으로 인하여 야기된 고통에 대하여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asampayoga)’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과의 만남
그렇다면 이와 같은 ‘싫어하는 것과 만남’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어떻게 주석하였을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싫어하는 자들과 만나는 것은 원하지 않은 중생들이나 상카라들을 만남이다. 이것의 특징은 원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다. 마음을 괴롭히는 역할을 한다. 해로운 상태로 나타난다.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싫어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첫 번째로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들의 행위로 생긴 괴로움이 그다음에 몸에도 일어난다.
이것은 두 가지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대성자께서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괴로움이라 하셨다.
이것이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판별이다.
(청정도론, 제 15장 감각장소와 요소 52절)
싫어하는 자들과 만남이 반드시 남과의 만남에 대한 것은 아니다. 가장 가까운 가정내에서도 그런 만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치매에 걸렸다든가 육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발생한 경우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청정도론에서 싫어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첫 번째 괴로움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더구나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생긴 괴로움이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만일 치매 환자가 발생하였다면 치매 환자를 뒤치닥거리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고뇌, 슬픔, 절망 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 내에 육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발생한 사람이 나타났다면 이는 싫어하는 자들과 만남이라 볼 수 있다.
불교적 해법은 무엇인가
타인의 불행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괴로움이다. 더구나 가정내에서의 가족의 불행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마치 폭탄을 맞은 것과 같다. 모든 일상이 뒤바뀌어 마치 쑥대밭이 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타인의 불행이 발생하였을 때, 특히 가정내에서 폭탄을 맞은 것과 같은 불행이 발생하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불교적 해법은 없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팔만사천가지가 된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모든 해법이 들어 있다는 말과 같다. 가정내에서 폭탄을 맞았을 때 역시 해법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적절한 해법이 사무량심일 것이다. 사무량심중에서도 ‘연민’이 있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남의 불행을 보면 연민이 생긴다. 그런 연민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청정도론에서 연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해 놓았다.
“어떻게 비구가 한 방향에 연민과 함께한 마음을 가득 채우고 머무는가? 마치 고통에 빠져있고 불운이 닥친 어떤 사람을 보고 연민이 가듯이 이과 같이 모든 중생들에 대해 연민을 가득 채운다.”라고 ‘위방가’에서 설했기 때문에 우선 제일 먼저 볼품없고, 고난에 빠져있고, 고통에 빠져있고, 불운이 닥쳤고, 거지 신세이고, 손발이 잘렸고, 걸식할 밥그릇을 앞에 놓은 채 빈민 구제소에 앉아 있고, 손발에 구더기가 끊고, 신음하는 어떤 불쌍한 사람을 보고 ‘이 중생이 고난에 빠져있구나,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하고 연민을 일으켜야 한다.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죄를 지은 사람이 비록 행복해보일지라도 그를 사형선고 받은 사람에 비유하여 연민을 일으켜야 한다.
(청정도론, 제9장 거룩한 마음가짐 78절)
사람들은 전철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았을 때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불행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역시 연민을 느낀다. 그럴 때 마움속으로 “이 중생이 고난에 빠져있구나,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하고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이 연민수행이라 한다.
그런 연민의 마음은 비록 지금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사는 사람들을 보았을도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쓰여 있다. 왜냐하면 언젠가 반드시 과보를 받아 고통받을 것을 생각하면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연민의 마음, 까루나(Karuna)
이와 같이 타인의 불행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善心)’에 속한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 52가지 마음부수에서 연민 (karuna)은 믿음(saddha), 양심(hiri), 탐욕없음(alobha), 성냄없음(adosa), 함께 기뻐함(mudita) 등의 19가지 ‘아름다운 마음부수(sobhana-cetasika)’에 속한다.
The Smile of Karuna, 연민의 마음
출처 【生命電視】慈悲的微笑.wmv http://www.youtube.com/watch?v=1Ax6m8bH2fU&feature=related
The Smile of Karuna
Do you hear the cries Do you see the tearful eyes The cries that deafen The tears that blind Are we listening Do we see Do we care Let me sit by your side Breathe as you breathe Wish deep listening seeing and understanding May our hearts be light May our love be wide Let’s free our mind There’s smile that shines through the tears Smile of understanding calmness and strength Smile that receive embrace and transform For the gift of love and fearlessness is the smile of karuna
Lyrics(작사):Karamen chia Music(노래): wendy tiow 노래 : 보디찌따그룹 중국계 싱가포르인들로서 음악을 통하여 불법을 전파하기 위하여 결성된 그룹 보디찌따그룹 홈페이지 : http://www.bodhicittaproductions.com/ Bodhicitta Productions菩提吉他製作室 合十
연민이 지나치면
아름다운 마음으로서 연민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하루 빨리 “고통에서 벗어 나기를!”하고 바라는 거룩한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인하여 선한 사람의 가슴을 동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연민이 지나치면 어떻게 될까.
가족내에 치매환자와 같은 육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있을 경우 그로 인하여 싫어 하는 자들과 만남과도 같은 괴로움을 야기 하였을 때, 더구나 그 불행을 바라봄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정신적 고통 뿐만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을 느낀다.
타인의 불행을 보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하고 바라는 마음은 거룩한 것이지만, 이것이 지나쳐 ‘근심’과 ‘걱정’으로 이어진다면 연민수행은 실패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가정내에서 볼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가족을 두었다는 것은 연민의 차원을 떠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슬픔과 절망에만 사로잡혀 마치 폭탄을 맞은 것처럼 쑥대밭이 된 것처럼 그대로 놔 두어야 할까.
어떻게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평온(uppekkha)’이 있다. 사무량심에서 자애와 연민과 더불어 기뻐함과 함께 언급되어 있는 평온을 말한다.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근심과 걱정으로 이어진다면 연민은 실패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럴 경우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
평온수행에 대한 청정도론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평온수행을 닦고자하는 자는 먼저 자애 등에 대해 세 번째 선(禪)과 네 번째 선(禪)을 얻어야 한다. 이미 익숙한 제3선으로부터 출정하여 처음 세 가지 자애 ? 연민 ? 더불어 기뻐함에 대해 위험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복하기를!’하는 방법으로 중생의 즐거움에 대해 마음에 잡도리함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고, 적의와 찬사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고, 기쁨과 관련되어 거칠기 때문이다. 아울러 평온의 고요한 고유성질을 통해서 평온의 이익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평소에 무관한 사람을 평정하게 쳐다보면서 평온을 일으켜야 한다. 그 다음에는 좋아하는 사람 등에 대해서 일으켜야 한다. 이처럼 설하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비구가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는가? 마치 마음에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은 사람을 보면서 평온을 유지하듯이, 그와 같이 모든 중생에 대해 평온으로 가득 채운다.”
(청정도론, 제9장 거룩한 마음가짐 88절)
청정도론에 따르면 평온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하여 “마치 마음에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은 사람을 보면서 평온을 유지하듯이”라고 표현 하였다.
평온이 실패할 때
이는 마치 남을 보듯이 평등하고 평정한 마음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평온은 중생들에 대해 중립적인 상태로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중생들에 대해 평정함을 보는 역할을 한다. 적의와 찬사를 가라앉힘으로 나타난다.
중생들은 업이 자신의 주인이다. ‘업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있어 중생들이 행복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이미 얻은 영화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여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적의와 찬사를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무지에 바탕한 무관심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무지는 감각적 욕망에 바탕하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제9장 거룩한 마음가짐 96절)
평온은 항상 ‘중립적인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 것이라 한다. 그래서 남의 불행을 볼 때도 “어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하고 바라는 연민의 마음과 함께 ‘업이 자신의 주임’임을 반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온이 실패 할 때가 있다. 그것은 타인의 불행에 ‘무관심’할 때이다. 타인의 불행이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집안에서 폭탄을 맞은 것처럼 육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는 가족이 있을 때 무관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노심초사하거나 근심, 걱정하게 된다면 이 또한 고통스런 일이다.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이란?
이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어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하고 연민을 일으키되 모든 것이 ‘업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며 자신이 업의 상속자로 보았을 때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이라 한다.
업자성정견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실려 있는 주석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업자성정견
‘업이 자신이 것이라는 바른 견해’로 번역한 깜마사까따-삼마디띠(kammassakata-samm?di??hi)는 ‘kamma(업)+sakata(자기, 자신)+samm?(바른)+di??hi(견해)’로 분해가 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라는 의미이다. 이를 설명하는 표준적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는 자기가 지은 업의 주인이자 자기 업의 상속자이다. 그들 각자는 자기 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며 자기 업에 매여 있고 자기 업으로 지탱된다. 선악 간에 어떤 업을 짓든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A10:206)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은 맛지마 니까야,「대사십경(大四十經, Mahacattarisaka-sutta)」(M117)에 나온다. 예컨대, 남에게 무엇을 주거나 보시를 하는 등의 덕스러운 행위는 도덕적 중요성을 안다는 것, 선행과 악행은 그에 상응하는 과보로 수반한다는 것, 누구나 그 어머니와 아버지를 섬길 의무가 있다는 것, 재생이 있으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선 세계가 있다는 것, 또 스스로 체득한 높은 깨달음에 기초해서 법을 설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업이 자신이 것이라는 바른 견해이다.
(마하시 사야도 법문집 주해서, 김한상(수마나)님 역)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업자성정견이란 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를 말한다. 이는 초기경전에 근거하고 있는데 앙굿따라 니까야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Kammassakomhi kammad?y?do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isara?o ya? kamma? kariss?mi kaly??a? v? p?paka? v? tassa d?y?do bhaviss?m?ti” pabbajitena abhi?ha? paccavekkhitabba?.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나의 권속이고, 업이 나의 의지처이다.
좋은 업이건 나쁜 업이건, 업을 지으면 나는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라고 출가자는 끊임없이 반조해야 한다.
(다사담마경-Dasadhamma sutta?, 앙굿따라니까야 A10.48, 대림스님역)
Should constantly reflect, `I am the owner of actions, the inheritor, the origin, the relation and refuge of actions. Whatever actions I do, good or evil I will be their inheritor.' Should constantly reflect,
(tipitaka)
경우 경(A10.48).docx 경우 경(A10.48).pdf
부처님은 좋은 업이건 나쁜 업이건 간에 나는 그 업의 상속자(d?y?do, inheritor) 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을 끊임 없이 반조한다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고 타인의 불행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서도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반조해야 하는 것
이와 같은 업에 대한 반조는 반드시 출가자에 대해서 한정된 것은 아니다. 같은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업자성정견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경이 또 있기 때문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셋의 모음 쭐라왁고에 ‘경우경(A5.57)’이 있는데, 이 경에서 부처님은 여자든 남자든 재가자든 출가자든 끊임없이 반조해야 하는 것 다섯가지에 대하여 설하였는데, 경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나 혼자만 나의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나 혼자만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나의 권속이고, 업이 나의 의지처며, 내가 선업을 짓건 악업을 짓건 그 업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고 가고 죽고 태어나는 모든 중생들도 그들의 업이 바로 그들의 주인이고, 그들은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들의 권속이고, 업이 그들의 의지처며, 그들이 선업을 짓건 악업을 짓건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그가 이것을 끊임없이 반조할 때 도가 생겨난다.
(앙굿따라니까야 경우경 A5.57, 대림스님역)
경우 경(A5.57).docx 경우 경(A5.57).pdf
업의 상속자가 나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유정중생이 이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고통을 받고 있는 나 또는 주변의 사람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이 모두가 업에 의한 것이라는 바른 견해 즉, ‘업자성정견’에 대하여 말씀 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답이 있다
폭탄은 언제 터질지 모른다. 이미 폭탄이 터진 경우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폭탄이 터지면 졸지에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폭탄은 누구나 하나씩 안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 잠재적인 폭탄인 셈이다.
그런 폭탄중에는 치매처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폭탄을 맞으면 모든 일상이 180도 바뀌어 버리고, 타인의 불행으로 인하여 자신 역시 불행과 고통을 맛 보아야 한다. 고성제에 있어서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asampayoga)’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팽개치고 도망갈 수 없다. 세속과 인연을 끊고 도망간다면 마치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마치 ‘조손(祖孫)가정’과도 같이 될 것이다.
이렇게 비통하고 처절하고 절망스런 고통을 당했을 때 부처님의 말씀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라고 생각하며 초기경전을 찾았을 때 신기하게도 그 안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업자성정견도 그와 같은 케이스라 볼 수 있다.
타인의 불행으로 인하여 고통받을 때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하고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지나쳐 근심과 걱정으로 발전되면 안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고, 또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 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삶의 행복한 맛에 빠져 있는 중생들에게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에 대한 사성제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사성제를 설한 이유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삶의 행복한 맛에 빠져있는 중생들에게 분발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괴로움을 말씀하셨다.
짓지 않은 것이 스스로 오는 것이 아니며, 신 등이 만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이 원인으로부터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 다음으로 일어남을 말씀하셨다.
그것의 원인과 함께 괴로움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분발심을 내었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남을 찾는 중생들에게 벗어남을 보여 주어 위로를 주시기 위해 소멸을 설하셨고, 그 다음으로 소멸을 얻게 하기 위해 소멸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말씀하셨다.
(청정도론, 제 16장 기능과 진리 30절)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한 여러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행복에 취해 있는 중생들에게 ‘분발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괴로움의 진리에 대해서 설하셨다고 표현 하였다.
그런 괴로움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신이 벌주기 위하여 내린 것도 아니라 한다. 오로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것으로 본다. 이는 업이 자신이 주인임을 반조하는 업자성정견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모든 것이 고요하게 되었을 때
부처님이 오로지 괴로움에 대한 진리만을 설하였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부처님의 담마가 전승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진리 뿐만 아니라 그 해결책도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고요함’이다. 모든 것이 고요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고통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압박 없는 괴로움 없고 괴로움 떠난 압박 없으니 압박하는 것이 확실하므로 이것을 진리라 한다.
그것을 떠나 따로 괴로움 없고 그것으로부터 생기지 않은 괴로움 없다.
애착이 고통의 원인됨이 확실하므로 이것을 진리라 한다.
열반을 떠나 따로 고요 없고 그것으로부터 생기지 않은 고요 없다.
고요한 상태가 확실하므로 이것을 진리라 한다.
길을 떠나 따로 출구 없고 출구가 없는 것은 길이 아니다.
진실한 출구이기 때문에 진리라 한다.
이처럼 지자들은 괴로움 등 네 가지 진리에 예외 없이 진실하고 헛되지 않으며 사실인 진리의 뜻을 설하셨다.
(청정도론, 제 16장 기능과 진리 25절)
2012-03-31 진흙속의연꽃
|
출처: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