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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端의 追憶 #86, ‘우메다’상을 생각하며...
이 땅위에서 오늘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내일의 ‘파라다이스’를 약속하는 집단이 둘 있다. 그 하나는 ‘꼬뮤니스트’들의 공산주의집단, 또 다른 하나는 허공에 방망이 달겠다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 이 둘의 공통점은 세포조직의 끊임없는 세뇌공작이요, 다른점이라고 한다면 이쪽은 저쪽을 ‘불신자’들이라고 쌍심지를 돋우어 질타하고 저쪽은 이쪽을 ‘아편같은 마약’이라고 맹공격을 가한다는 점일 것이다.
직장의 업무관계로 일본을 자주 왕래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시절 만났던 재일교포중의 한사람, 일제치하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돈벌이를 떠난 부친은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계속 일본에 눌러 앉아 살게 되었고,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고향이 경상도 진주라는것 정도만 겨우 알고 있었고 한번도 가 본적은 없다고 했다. ‘조센징’이라고 불리우며 타국땅에서 온갖 서러운 생활을 이어가던 그의 가족중에 형님은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 혼슈의 북서쪽 니가타항에서 그 유명한 북송선 만경봉호를 타고 ‘인민들의 지상낙원’ 북조선으로 가서 어버이 수령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래도 부모님과 동생만은 일본땅에 남게 되었는데 형님은 인민의 지상낙원, 원산항에 내리던 바로 그 순간, 아차! 내가 돌이킬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구나. . . 장탄식을 했었다고 후일의 어느 상봉시에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회한의 심정을 토로했었다고 한다. 형님을 어버이 수령의 품으로 보내고 혼자 남아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에서 열심히 일해서 어느정도 기반을 잡아 이제는 해마다 북조선으로 바리 바리 어깨에 무거운 선물을 짊어지고 형님을 방문하고 있는 그의 한국이름은 최 O O 이었고 일본명은 ‘우메다’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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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요엘 출간 얼마 후 서울의 모 대기처(천국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에 있는 큰누님으로 부터 전화가...
‘너거들이(너희들이) 그란다꼬(그렇게 한다고- 책 출판을 말하는 듯) 이 좁은길과 성민(동방교 신도를 일컫는 통칭하는 은어-隱語)들이 흔들릴 줄 아나. 응!’
누님은 노기에 심기가 불편하고 흥분해 있었다.
‘내가 보는 사람(성민)들 마다 창피해서 얼굴을 못들고 다니겠다’고...
나는 이 자서전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최대의 걸림돌은, 혹시나 불이익을 받을까 해서 80십 평생을 그곳에 몸담고 있는 큰 누님이었다. 혈육의 정... 큰 누님 생각하면 저 역시 마음이 쓰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와 변명과 누님의 곡해는 "샬롬요엘" 291페이지짜리 책으로 대신합니다.
(질곡의 삶, 애증의 세월 -문정열 자서전- '나의 동방교 입문기' 덧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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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카페 <샬롬 요엘>의 ‘나의 동방교 입문기’ 덧글중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어 요엘의 큰누님을 생각하는 오늘, 자서전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현재도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에 기거하는 큰누님이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했다는 ‘샬롬 요엘’의 저자와, 북조선에 형님을 두고 형님이 불이익을 받을까 노심초사해서 한국으로의 고향방문도 못하고 있는 그 ‘우메다’상이 오버랩되어 가슴 찡하게 떠오른다.
‘사시미’집에서 ‘사케’ 한잔을 같이 하면서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무엇이 두려워 알고 있는것을 감추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비겁이다. 보고 듣고 체험해서 알고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의무요,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글을 배운자의 책무다. 그리고 사실에 대한 증언과 기록은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야 하는 이땅의 역사에 대한 우리 모두의 소명이다.
‘우메다’상의 형님은 17세가 되던 해, 오늘의 ‘유토피아’를 설파하고 내일의 ‘파라다이스’를 약속하는 아편같은 마약에 취해 북송선 만경봉호를 타고 어버이 수령의 품으로 들어가 지금은 북조선 모처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뼈빠지에 일하고 받는 한달 월급이 80원이라고 한다. 이 80원도 외화를 바꾸면 일본돈으로 8엔의 가치밖에 안되어 일본 담배 한갑도 살 수 없는 가치라고 한다.
'우메다'상이 형님 방문차 북조선에 갈때는 쌀을 약 100Kg 정도 현물로 가지고 가는데 그 쌀로 밥을 지어놓고는 형수가 조카 아이들은 못먹게 하는데 이유인즉 벌써부터 흰 쌀밥을 먹으면 고생을 모르고 자라 나중에 사람이 제데로 안되기 때문이라고 하는 웃지못할 얘기를 한다는 것이다. 사는것도 입는것도 지상낙원이 아니라 그 형편을 일일이 말할 정도가 아니라고 한다.
집을 장만해 들어가려면 북조선 돈으로 30만원이 필요하고 자전거 하나도 3만원 정도하니 평생 모아도 엄두도 낼 수 없는데 일본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도움을 많이 받으니 그렇게 부러워한다고 한다. 얼마전에 방문 할때는 자전거를 한 대 사서 고장 날때를 대비해서 수리기구까지 일체를 갖추어서 직접 갖고 가서 드렸는데 자전거 한대면 벤츠 한 대 소유하고 있는것 이상으로 으시되게 되는데 자전거를 타고 나들이를 다녀오면 아파트 8층까지 자전거를 끙끙 메고 올라가서 그 비좁은 집안에 갖다 놔야지 밖에 두면 도둑때문에 절대 안된다고 한다.
차는 한 대 갖다드리고 싶어도 기름이 없어 쓸 수가 없다고한다. 매년 상당한 금액의 일본돈을 형님에게 보내는데 북조선에서는 아주 큰 돈이라 한다. 전기와 수도는 나오다가도 언제 끊어질런지 알 수가 없으니 불안하고. 한번은 형님이 형수를 자전거에 태워 어디를 다녀오다가 형수가 발을 잘못 움직여 자전거를 넘어뜨렸는데 발은 다쳐도 시간이 지나면 나을 수 있지만 자전거가 부서지면 어쩔번 했느냐고 너무 심하게 나무라는 것을 보고 사람이 중요하지 그까짓 자전거가 뭐가 중요하냐고, 부서지면 내가 새로 갖다 줄테니 그러지 말라고 형님을 달랬다고 한다.
사람 다치는 것은 뒷전이고 자전거 걱정을 더 하는 이상한 세상이다. 발전기도 한대 사 보냈지만 기름이 없어 사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지만 형님이 직장에서 목 잘릴까 싶어 욕도 못하고 인민의 지상천국 북조선의 눈치가 보이고 형님에게 불이익이 돌아갈까봐 그렇게 가 보고 싶은 한국으로의 고향방문도 못한다고 한다. 형님이 살고있는 북조선을 방문해도 마음데로 다닐수도 없고 신고해야만 다닐 수 있다고 한다.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어서. . . 부아가 치밀어서. . .’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 하고 있었다.
북조선에서는 닭을 방안에서 키우는 사람들이 많은데 밖에서 키우면 누가 잡아가버리기 때문에 안된다고 한다. 주로 할머니들이 공원같은데서 잡초며 닭모이 될만한 것을 주워 방안에서 먹여서 키워 달걀을 받아서 먹던지 팔던지 한다고 한다. 북조선의 세관에서는 무엇을 가져가도 처음에는 안된다고 트집을 잡지만 현찰 1-2천엔만 주면 만사 오케이라고 한다. 결혼을 하면 따로 나가 살 만한 집이 없고 셋집에 들어가려 해도 너무 비싸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한집에서 모두 같이 산다고 한다.
한방에 한가족씩,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들부부, 작은아들부부등 한칸씩 차지해서 그렇게 사는데 그 비좁은 한칸 방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낳는지 신기하기만 하다고 한다. 북조선에서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집은 얼마 없는데 사람들이 어디서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한집에서 그렇게 많이 공동으로 살고 있으니 그럴수 밖에 없다고 한다. 참 재미있는 나라 북조선, 민족은 같은 민족이로되 불쌍한 민족적 비극이다. 말을 함부로 하면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지 모르게 없어진다고 한다. 어제 있다가 오늘 없으면 어디갔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얼마전에 조카 결혼식에 다녀왔는데 행사와 식사를 포함해서 일본돈으로 5만엔 가량의 돈이 든다고 한다. 북조선 사람들의 한달 평균 월급이 60원인데 일본돈으로 환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 그 돈으로는 일본 담배 한갑도 못사고 1년 계속 모아야 720원인데 결혼식장 비용은 엄두도 못내고 일본에 친척이 있는사람 외에는 행사, 식사 포함해서 5만엔 정도 들어가는 이런 결혼식마져도 올리지 못한다고 한다.
김일성 묘지를 한번 방문 간 일이 있는데 콘베아를 타고 들어가게 되어있고 여자들이 바지입고는 들어가지 못하고 반드시 치마를 입고 들어가야 된다고 한다. 수령님을 만나는 예의를 지켜야하기 때문에 여자들의 바지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버이 수령님은 죽은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머리맡에서는 절대 인사할 수 없고 좌우나 다리쪽에서 절을 해야 된다고 한다.
자기가 보기에 북조선 사람들은 다른 생각할 겨를없이 오직 먹는것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한다. 선풍기만 소유하고 있어도 대단한 부자라고 한다. 형님에게 지금도 매년 돈을 가지고 가는데 한번 방문하는데 여행경비가 수월찮게 들어간다고 하니 이제는 오지말고 그돈을 현금으로 보내달라고 한단다.
아. . . 인민의 지상낙원, 어버이 수령의 나라. . . 새천년의 미명이 밝아오던 1990년대의 이바구다.
무산대중의 해방을 기치로 내세우지만 한없이 인민을 억압하고, 세습 정권으로 절대권력의 칼날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희대의 공산집단, 그리고 기독교의 탈을 쓰고 유불선의 잡종교리로 뒤범벅이 된 세칭 동방교의 뿌리깊은 이중성과 세습 교주, 이 어쩌면 닮은 꼴이 아닐까. 극난한 오늘의 현실을 ‘유토피아’라 강변하고 이룰 수 없는 내일의 ‘파라다이스’를 건설하겠노라 미혹하는 허망한 두 집단들. . .
이미 숱한 증언과 유죄판결로 드러난 신도들의 헌금갈취와 연단선님들에 의한 껌팔이등의 강요로 이루어진 그 재력의 기반위에 세워진 이단사이비 종교집단, 일탈된 방법으로 수없이 긁어 모은 재물, 그 돈으로 과연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참으로 궁금해 진다. 근검절약의 대명사 ‘팔작밥 오작죽(註)’의 천국, 세칭 동방교의 그것은 검(儉)이 아니라 인색(吝嗇)이었다. 자신은 검소하지 않고 타인에게만 검소를 강요하면 그것이 인색이다.
하나님(?)이 죽어 이땅에 남긴 왕릉같이 꾸민 죽은 자의 묘지, 경기도 소사의 소래에 소재했던 교주 노광공의 제각과 묘소가 바로 그 증거요, '청해' 노광공, '부남' 노영구, 부자지간인 이들 1, 2대 교주의 우상화를 위해 일백수십억원이 넘는 엄청난 돈을 들여 지어놓은 충남 금산의 '청남수양관'이 그 표본이다. 지독한 자린고비, ‘팔작밥 오작죽’의 천국,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천국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가 오늘따라 무던히도 생각나누나. . .
지금은 많이 변했으리라. . .
(註 : 아침에는 팔작(0.8홉)밥을 먹고 점심은 대충 떼우고 저녁에는 오작(0.5홉)죽을 먹는다는 말)
첫댓글
사이비 이단과 공산주의의 이론은 닮았습니다. 세뇌와 집단광기! 그러기에 김일성을 어버이 수령이라 부르고, 노굉공을 이레 조부님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레 조부님은 하나님의 아버지가 된다는 건가요? 동방교는 이걸 대답해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