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규정
‘의’
발음의 어려움
1990년대 중반, 부산 서면교차로 인근 서점과 은행 건물을 두루 돌면서 매월 시낭송 행사를 펼치던 강영환 강은교 김형술 최영철 등 시인이 있었다. 하루는 낭송행사가 끝나고 뒤풀이 시간에 옆자리 중년사내가 ‘의’자의 발음에 대한 얘길 꺼냈다. 그가 젊을 때 기독교방송 아나운서 시험에서 낙방한 체험담이었다. 그때까지도 그의 억양엔 남도사투리가 강하게 남아있었는데 시험문제는 ‘역사의 의의’를 제대로 발음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방송국 측에서 제시한 답안은 [역사에 으이] 라고 했다. 그 답이 정말 맞는지 어디 한 번 자세히 살펴보자.
1989년부터 시행하고 있는《표준어규정》에는 <표준발음법>이 있어 우리말을 제대로 발음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당시 그 규정이 생기면서 ‘의’ 발음은 그 이전보다 한결 쉬워지긴 했었다. 원래 ‘의’는 [으]에서 시작해서 [이]로 발음이 옮아가는 이중모음이다. 그러나 조사로 쓰이는 ‘의’는 물론이고 ‘희망’이나 ‘민주주의’ 속에 들어있는 ‘의’는 원칙대로 발음하기가 아주 힘들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희철’이나 ‘의수’인 사람은 남들은 물론이고 자신도 제 이름을 제대로 못 불러서 [히철]이가 되고 [이수]가 되곤 했다.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희’ 발음을 제대로 발음했던 최후의 인물은 이희승 선생이었다고 한다. 선생께서 생전에 자신을 소개할 땐 꼭 힘을 주어 “나는 이희승입니다.”라고 또박또박 발음하셨다는 것은 국어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문제로 인해서 <표준발음법>에선 ‘희망’이나 ‘띄어쓰기’처럼 자음을 첫소리로 가지고 있는 음절의 ‘의’는 [히망] 또는 [띠어쓰기]와 같이 [이]로 발음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또 ‘민주주의’나 ‘정의’와 같이 단어의 첫음절 이외에서 사용된 ‘의’는 [민주주의]나 [정의]로 발음할 수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그 발음이 어렵다면 [민주주이] 또는 [정이]로 발음하는 것도 허용했다. 특히 많은 어려움을 불러왔던 조사 ‘의’는 [의]로 발음함이 원칙이지만 그 발음이 잘 안 되면 [ㅔ]로 발음해서 ‘우리의 소원’을 [우리에 소원]이라고 발음할 수 있도록 했다. ‘맞춤법 강의의 의의’는 [맞춤법 강:의의 의의]라고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의’를 두 개 연이어 발음하는 것이 어려울뿐더러 자연스럽지도 않으므로 [맞춤법 강:이에 으이]라고 발음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표준발음법>의 제정으로 우리말 발음이 쉬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단순화 경향이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다소 까다롭고 어려운 발음이어도 연습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스 사람들은 고대에 자신들이 [아테네]라고 부르던 자기 나라 수도를 [ㅔ] 발음을 잃어버림으로써 오늘날 [아티나]로 부르고 있다. 우리도 어느 날 “[궁민으 으무를 다하자]”라고 말하는 날이 오지 말란 법이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