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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63)
【금강경】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於後末世에 有受持讀誦此經하는 所得功德를
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어후말세 유수지독송차경 소득공덕
我若具說者면 或有人이 聞하고 心則狂亂하야 狐疑不信하리라
아약구설자 혹유인 문 심즉광란 호의불신
<번역>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받아지니며 읽고 외워서 얻는 공덕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산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
<해설>
오는 말세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수지독송하면(有受持讀誦此經) 얻는 공덕을 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전에 간화선 모임에서 스님들에게 법문․화두(話頭)와 공안(公案) 게송(偈頌)․사구게(四句偈)가 갖는 위력을 참으로 알고 얼마나 믿고 있는가? 라는 문제에 관해서 논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간화선과 조사선이 세상에 유용하고, 공덕이 있다는 것을 스님들 스스로 자각해야 법을 펼 수 있다. 이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나의 체험담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스님이 절에서 사무장으로 계시던 분의 시다림을 가자고 계속해서 부탁하기에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분이기에 맨손으로 가기보다는 사구게 게송 하나를 들고 갔습니다. 평소에 갈 때는 사구게 게송을 들고 간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들고 갔습니다. 입구에 들어가 화환을 보니까 서울대 법대 출신이었고, 절에서 사무장으로 여러 곳에 계시다가 이 스님의 절에서 돌아가신 겁니다.
사무장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좋은 머리에 불교 공부도 많이 했겠지요. 그러나 머리가 좋으면 알음알이가 많기 때문에, 이런 분은 공부 체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인이 약사이고 불자라서, 약사불자회에서 온다고 하기에 같이 염불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깐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이 꽉 막혀서 답답함과 두려움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뭘까? 생각해보니, 아, 그 사람이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이때 가지고 간 게송을 읊었습니다.
삼천대천세계도 없고,
삼라만상 만물만생도 없고,
너도 없고 나도 없는 가운데,
산은 푸르르고 물은 잔잔하더라.
이 게송을 마음으로 계속 읊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야! 삼천대천세계도 없다. 임마!
삼라만상 만물만생도 없는 거야! 그런데 네가 어디 있고, 내가 어디 있냐! 너와 나라는 것이 본래 없는 거야! 네가 바로 두려운 나다. 나를 잡고 벌벌 떨면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앞으로도 못가고 뒤로도 못 가는구나!
이렇게 마음속으로 크게 외치니까, 막혔던 가슴이 뚫리면서 편안해졌습니다. 잠시 후 약사불자회 회원들이 와서 시다림을 하는데 그 법문과 내가 가지고 간 사구게가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더 경쾌해졌습니다. 이어서 잠깐 법문을 하고 끝냈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 설한 살구게가, ‘한생각의 천도’입니다.
이 이야기를 간화선 모임에 오신 스님들에게 하면서, 조사스님의 법문과 화두와 공안이 그런 위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가르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 사구게의 깊은 뜻을 100%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다 알았다면 그 스님과 똑같이 확철대오한 것이거든요. 그렇지만 다 모르더라도 믿음과 앎이 있었기에 그런 위력이 나타난 것이고, 이걸 알아야 간화선과 조사선의 위대함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법문과 화두와 공안은, 저절로 살아있는 법문이 되고, 살아있는 화두가 되고, 살아있는 공안이 됩니다. 이런 체험이 없어도, 천 년 전 임제스님의 그 법문 속에 온통 드러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도 그 스님의 말만 남은 것이 아니고 법문 속에 그 스님이 있습니다. 법문이 그 스님의 껍데기가 아니고 본체라는 것을 알면, 그 법문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법문입니다. 이런 법문을 우리가 쓰는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를 통달한 분이고, 진리는 시공을 초월해 있으므로 그분이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법문 속에 엄청난 위력과 공덕이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이 경을 수지독송차경(受持讀誦此經) 하면 엄청난 공덕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말씀을 여러분이 진짜 믿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나도 사구게를 다 알지 못합니다. 알아서 쓰는게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믿는 구석이 있으면, 법문들이 살아서 움직여 무량한 공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받아지니며 읽고 외워서 얻는 공덕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산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六祖】
佛言하사대 末法衆生이 德薄垢重하고 嫉妬彌深하야 衆聖이 潛隱하고 邪見이
불언 말법중생 덕박구중 질투미심 중성 잠은 사견
熾盛하리니 於此時中에 如有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하면 圓離諸相하고
치성 어차시중 여유선남자선여인 수지독송차경 원이제상
了無所得하야 念念常行慈悲喜捨와 謙下柔和하야 究竟成就無上菩提어니와
요무소득 념념상행자비희사 겸하유화 구경성취무상보살
或有聲聞小見은 不知如來正法이 常在不滅일새 聞說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人이
혹유성문소견 부지여래정법 상재불멸 문설여래멸후후오백세 유인
能成就無相心하며 行無相行하야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면 則心生驚怖하야
능성취무상심 행무상행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심생경포
狐疑不信하리라
호의불신
<번역>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말법중생은 덕이 엷고 번뇌는 무거우며 질투는 더욱 깊어져서 많은 성인들이 숨어버리고 삿된 견해는 치성하리니, 이러한 때에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모든 相을 원만히 떠나게 되어 본래의 얻을 바 없음을 깨달아서 생각생각에 항상 자비희사(慈悲喜捨)와 겸하(謙下)와 유화를 行하여 끝내는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成就)하거니와 혹 어떤 성문(聲聞)의 小見은 如來의 正法이 멸하지 않고 항상 있음을 알지 못하므로 如來가 멸한 뒤 후 오백세에 어떤 사람이 無相心을 성취하고 無相行을 行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함을 들으면 곧 마음이 두려움을 내어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
<해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말법중생은 덕이 엷고 번뇌는 무거우며 질투는 더욱 깊어져서 많은 성인들이 숨어버리고 삿된 견해는 치성하리니, 이러한 때에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모든 相을 원만히 떠나게 되어”
말법시대가 이와 같더라도, 자기 분상에서 이 경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든 상을 원만하게 떠나는 것이 진리입니다. 모든 상에 머무르지 않음(부주제상 不住諸相)으로 진리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무상의 도리(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본래의 얻을 바 없음을 깨달아서 생각생각에 항상 자비희사(慈悲喜捨)와 겸하(謙下)와 유화를 行하여 끝내는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成就)하거니와 혹 어떤 성문(聲聞)의 小見은 如來의 正法이 멸하지 않고 항상 있음을 알지 못하므로 如來가 멸한 뒤 후 오백세에 어떤 사람이 無相心을 성취하고 無相行을 行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함을 들으면 곧 마음이 두려움을 내어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
얻을 바 없는 것이 진리이므로, 우리는 얻을 바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각생각에 항상 자비희사(慈悲喜捨)와 겸하(謙下)와 유화를 行하여”라 했는데, 겸하는 겸손하게 낮추는 것이고, 유화(柔和)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하는 것으로, 이것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행하게 되면 저절로 겸하와 유화를 행하게 되는데, 이게 보살행입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成就)하나, 혹 어떤 성문(聲聞)의 小見(작은 견해)을 가진 사람들은 여래의 정법(바른 법)이 멸하지 않고 이 세상에 항상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여래가 멸한 뒤 후 오백세에 어떤 사람이 능히 무상심(無相心)을 성취하고 무상행(無相行)을 行하여”라 했는데, 무상심이란 상이 없는 마음으로, 사상(四相)이 없음을 뜻하고, 무상행이란 무상심으로써 작용하는 것으로 사상이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문의 작은 소견을 가진 사람들은, 이와 같이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함을 들으면 곧 마음이 두려움을 내어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 했습니다.
성문이란, 수행자 중에서 선과 악, 법과 법 아닌 것, 옳고 그르다는 분별을 가진 사람으로, 여기서는 성문을 “如來의 正法이 멸하지 않고 항상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래의 정법은 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생긴 적도 없습니다. 진리는 항상 여여하게 흘러가기 때문에 진리를 떠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도에서는 부처님 법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불교란 진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불교라는 이름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이 불교입니다.
부처님 법은 상(相 모습)으로서도 있어야 하고, 체(본체)로서도 있어야 원만 구족 합니다. 우리가 불법을 널리 전하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금강경】
須菩提야 當知是經은 義도 不可思議며 果報도 亦不可思議니라
수보리 당지시경 의 불가사의 과보 역불가사의
<번역>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은 뜻도 가히 생각할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생각할 수 없느니라.
<해설>
이 경은 뜻(義)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과보(果報)도 또한 불가사의(亦不可思議)합니다. 불가사의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기에 이 자리에 들어가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선에서 생각할 수 없는 자리란, 생각과 말의 길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를 알고자 분별을 내려놓고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은 뜻도 가히 생각할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생각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說誼】
廣讚持經說經之功德을 不可得而思議라하시고 乃云所得功德을 我若具說者면 或有人이
광찬지경설경지공덕 불가득이사의 내운소득공덕 아약구설자 혹유인
聞하고 心卽狂亂하야 狐疑不信이라하시며 乃至云果報도 亦不可思議라하시니
문 심즉광란 호의불신 내지운과보 역불가사의
聞經不信受하면 良藥이 現前不知服이요 果報不思議여 服來平地에 便升仙이로다
문경불신수 양약 현전부지복 과보부사의 복래평지 변승선
<번역>
“경을 가지고 경을 설하는 공덕은 가히 생각할 수 없다.”고 널리 찬탄하시고, 이에 이르러 “얻을 바 공덕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듣고 마음이 산란 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 하시며 “내지 그 과보도 또한 생각할 수 없느니라” 하시니 경을 듣고도 믿어 지니지 않으면 좋은 약이 앞에 있어도 먹을 줄 모름이요. 과보도 생각할 수 없다 함이여! (좋은 약을) 먹으면 평지에서 당장 신선이 되어 오름이로다.
<해설>
이와 같기에 “(좋은 약을) 먹으면 평지에서 당장 신선이 되어 오름이로다.”고 했는데, 이 뜻은 경을 믿어서 받아들이면 깨달아서 한순간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圭峰】
無著이 云此는 顯示彼福體及果가 不可測量故라하다
무착 운차 현시피복체급과 불가측량고
<번역>
무착이 이르되 이것은 복의 體와 과보를 가히 측량할 수 없음을 드러낸 연고라 하다.
<해설>
복(福)의 체(본체)와 그 과보도 불가사의합니다.
가끔 생각으로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가사의(不可思議)란 생각을 뛰어넘어 있기에 불가사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해가 안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해가 안되는 것도 받아들여서 놓아야 합니다.
【六祖】
是經義者는 卽是無着無相行이요 云不可思議者는 讚歎無着無相行이
시경의자 즉시무착무상행 운불가사의자 찬탄무착무상행
能成就阿耨多羅三藐三菩提也니라
능성취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번역>
이 경의 뜻이란 곧 無着, 無相의 行이요 가히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무착 무상의 행이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함을 찬탄한 것이니라.
<해설>
“無着, 無相의 行”이란, 집착이 없고 사상(四相)이 없는 행(行)으로, 이런 행이 있으면 반드시 실천궁행이라는 작용이 나와야 합니다. 즉 알고만 있을 것이 아니고 자기 분상에 맞게 사상이 없는 행을 해야 하고, 또 분별 상이 올라오면 그것을 알아채고 놓는 작용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으로, 순간순간 마음 쓰는 것을 알아채고 여기서 깨달아야 합니다.
“無着, 無相의 行”이 이와 같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함을 찬탄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특별한 방편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 삶 속에서 그대로 무착 무상행을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다는 것으로, 이 말을 참으로 믿고 우리 삶 속에서 실천궁행 해야 합니다.
여기에 좌선․염불․절 등의 수행을 하라는 말은 없지만, 이것을 같이 하면서 이와 같이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즉 각각의 수행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같이 하면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冶父】
各各眉毛眼上橫이로다
각각미모안상횡
<번역>
각각의 눈썹은 눈 위에 가로놓여 있도다.
<해설>
거울을 보지 않으면 눈썹이 보이지 않습니다. 선가에서는 “눈속의 눈동자는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여기서는 “각각의 눈썹은 눈 위에 가로놓여 있도다.”고 했습니다. 본래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이렇게 아는 것이 믿는 것이고 아는 것이 보는 것으로, 꼭 눈에 보이는 것만 의지해서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눈에는 육안(肉眼)․천안(天眼)․혜안(慧眼)․법안(法眼)․불안(佛眼)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실체일까요? 실은 보는 것도 실체가 아닙니다. 눈에 보여서 있다고 하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인데, 육안으로 보지만 그게 공(空)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줄 알아야 하는데 다 보기가 어렵습니다. 지혜가 풍부해야 육안뿐만 아니라 천안․혜안(지혜의 눈)․법안(법의 눈)․불안(부처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정되게 육안으로 보이는 형상에 집착되어 있으면 나머지 눈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상이 상이 아닌 것을 보아야 여래를 보리라(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아야 진리(여래)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제사 지낼 때 법식(法食)으로 둥근 떡 7장에 과일 3가지 물 한 그릇을 올려놓습니다. 왜 7장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또 부처님께 올릴 때는 5장을 올립니다.
상주(喪主)가 생각하기를, 밥도 없고 국도 없고 반찬도 없이 떡만 먹으라는 건가? 하고 의혹을 일으키니, 꿈에 부모가 나타나서 왜 밥은 안 주고 떡만 주느냐? 했다고 하는데, 그건 자신의 분별입니다.
우리가 큰 행사 할 때 부처님께 육법공양을 합니다. 그냥 공양이 아니라 여섯 가지 법공양입니다. 향․초․꽃․쌀․차․과일 등 여섯 가지 공양물이 물질이지만 법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법을 다 몰라서 물질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눈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무착(無着 집착이 없음)․무상(無相 상이 없음)이 되면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무착(無着)․무상(無相)을 알아야 혜안(慧眼)․법안(法眼)․불안(佛眼)을 얻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눈으로 보는 것만이 옳다는 생각을 놓아야 합니다. 상에 취착하는 마음은 중생심으로 이 취착상을 놓기만 하면 혜안이 생깁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듣고 감촉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분별하는 것까지를 본다고 한 것입니다.
또 들리지 않는 것도 들을 줄 아는 것이 진짜 들음을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장마로 인해 많은 비가 와서 산에 있는 흙이 빗물에 깎이면, 작은 나무는 뿌리가 드러나서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때 나무가 하는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뭐라고 할까요? 나 흙 좀 덮어줘! 이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게 듣는 겁니다. 이렇게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알고 보면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자기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스님이 말하는 유정 설법만 들을 것이 아니라,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을 줄 알아야 듣는 지혜가 넓어집니다. 소리라는 것도 상(相)입니다. 항상 공부에 젖어 있으면 저절로 그 소리가 들립니다.
누가 산에 가다 보니 작은 꽃들이 피어 있는데 거기에 벌레가 날아와서 여여하게 여기저기 해치고 다니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래서 벌레가 사라지고 나서 자신의 손가락으로 꽃을 닿을뚱 말뚱 했는데도 꽃이 떨어졌다는 겁니다. 여기서 무심(無心)의 도리를 체험합니다. 즉 내가 무심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벌레는 무심하기에 날아다니면서 서로 이익이 되는 행을 한 것입니다.
TV에 보면 벌이 꽃에 다가가면 그 꽃이 벌을 위해서 꿀을 가져갈 수 있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이건 벌만을 위한 일방적인 작용이 아니고, 꽃은 자신의 꽃가루를 벌의 몸에 붙여서 번식합니다. 이 작용이 무심에서 이루어집니다. 서로 이익되게 하는 보살행입니다.
【說誼】
佛所說法은 只說得眼上眉毛시니 若是眼上眉毛인댄 生而固有라 誰獨且無리오
불소설법 지설득안상미모 약시안상미모 생이고유 수독차무
<번역>
부처님이 설하신 법은 다만 눈 위의 눈썹을 말한 것이니, 만약 눈 위의 눈썹이라면 나면서부터 본래로 있음이라.
누군들 홀로 없으리오.
<해설>
우리는 본래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冶父】
良藥은 苦口요 忠言은 逆耳라 冷暖自知가 如魚飮水로다 何須他日에 待龍華리오
양악 고구 충언 역이 냉난자지 여어음수 하수타일 대용화
今朝에 先授菩提記로다
금조 선수보리기
<번역>
좋은 약은 입에는 쓰고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림이라.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은
고기가 물 마심과 같으니
어찌 모름지기 다른 날에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기다리리오.
오늘 아침에 벌써 보리(菩提)의 수기를 받음이로다.
<해설>
“좋은 약은 입에는 쓰고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림이라.”
앞에서 벌과 꽃의 작용이 무심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립니다. 쓰고 거슬린다는 것은 유심이고, 이미 분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은 고기가 물 마심과 같으니
어찌 모름지기 다른 날에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기다리리오.
오늘 아침에 벌써 보리(菩提)의 수기를 받음이로다.”
용화세계(미륵부처님 세계)가 올 때까지 기다린 후에 공부하여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오늘 아침(경계가 닥치는 순간)에 진리를 깨달아 보리의 수기를 받아야 합니다.
【說誼】
旣皆同有인댄 聞不信受는 怎麽요 只爲太近難曉니라 雖然如是나 飮啄隨時에
기개동유 문불신수 즘마 지위태근난효 수연여시 음탁수시
飢飽自知라 伊麽則人人이 位同毘盧요 一一同居寂光이니 何待龍華記莂이리오
기포자지 이마즉인인 위동비로 일일동거적광 하대용화기별
擧足卽是寂場이로다 以本分으로 論之則理合如斯어니와 若據今時하야 論之則此經이
거족즉시적장 이본분 논지즉이합여사 약거금시 논지즉차경
如良藥하야 服來에 萬病消라 超然作金仙이언마는 只是不肯下口요 亦如忠言하야
여양약 복래 만병소 초연작금선 지시불긍하구 역여충언
信受에 自知非라 能爲衆中尊이언마는 只是不肯信受니라 唯有利根人은 言下에
신수 자지비 능위중중존 지시불긍신수 유유이근인 언하
自知非하야 一聞에 能總持하리니 鯤鯨이 飮海水라 位同大覺已이니 極果를
자지비 일문 능총지 곤경 음해수 위동대각이 극과
更何疑리오 果報不思議라하시니 誠哉라 佛所說이여
갱하의 과보부사의 성재 불소설
<번역>
이미 다같이 갖고 있지만 듣고도 신수(信受)하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단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알기 어려움이니라.
비록 이와 같으나 마시고 먹는 것은 때를 따르는 것이며 주리고 배부름은 스스로 아는 것이로다. 이러한즉 사람사람의 지위는 비로자나불과 같고 낱낱이 寂光土에 함께 있으니 어찌 용화의 기별(授記)을 기다리리오. 발을 들면 곧 이곳이 적광의 도량이로다. 本分으로써 논한다면 이치가 합당히 이와 같거니와 만약 今時(新熏:현재의 입장)를 들어 논한다면 이 경은 마치 좋은 약과 같아서 먹으면 만병이 없어짐이라. 초연히 金仙(佛)을 짓건만 다만 기꺼이 입에 넣지 않음이요. 또한 충언과 같아서 信受하면 스스로 그릇됨을 알도다. 능히 대중의 존중함이 되건만 다만 기꺼이 信受하지 않느니라.
오직 영리한 사람은 언하에 스스로 그른 줄을 알아서 한번 들으면 능히 다 가지리니 고래(鯤鯨)가 바닷물을 마심과 같도다. 그 지위가 大覺과 같거니와 지극한 과보를 다시 어찌 의심하리오. “과보가 불가사의하다”하시니 진실하도다! 부처님의 설하심이여!
<해설>
“이미 다같이 갖고 있지만 듣고도 신수(信受)하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단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알기 어려움이니라.”
신수(信受 믿어 받아 가짐)나 신입(信入 믿어 들어감)은 같은 뜻입니다.
다음은『명추회요』에 있는, 진리에 대한 문답 내용입니다.
“어떻게 믿어 들어갑니까(如何信入)?” 물으니까
‘부동일심(不動一心)’ 일심은 부동하다고 믿어 들어가라 했습니다.
일심이란 한마음(참마음)으로 왜 부동하냐면, 그 자리는 상대성의 세계가 아니라 절대성의 세계 즉 본체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부동(不動 움직이지 않음)하고 생멸이 없습니다.
또 ‘부주제법(不住諸法)’ 모든 법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 선이다 악이다 하는 제법(諸法)을 고정되게 보지 말라(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동일심’․ ‘부주제법’이 되면 ‘무능소지증(無能所之證)’입니다.
능소(能所)란 너와 나라는 분별로써, 이것이 없으면 거기서 체험하게 됩니다.
나와 너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반야심경』에서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이와 같이 계속 무(無)를 설하는데, 그 뜻이 능소(能所)가 없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기는 어렵지만, 이치로라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악을 쓰고 욕하면, 나쁜 놈! 이라고 하다가도 저 모습이 내 모습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연기법에 의해서 저 사람이 있으므로 내가 있듯이, 악을 쓰고 욕하는 사람이 내가 없으면 없습니다. 즉 나와 저 사람은 두 단의 갈대가 의지해서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두 개는 의지해야 서 있지 홀로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과 저것이 마주치는 그곳은 겉으로 보면 둘로 보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 지점이 하나인지 둘 인지 비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지혜의 눈입니다.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혜안(지혜의 눈)을 얻은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여기서 말하는 신수(信受)․신입(信入)에 대해서 해설하기를, ‘부동일심 부주제법’이 되면 ‘무능소지증[(無能所之證 능소가 없는 것을 증득(체험)했다]’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망지해지심(亡智解之心)’이라 하여, 지혜와 알음알이가 사라진 마음이 된다. 즉 완전한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는 것입니다.
공부는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만 제대로 통해도 전체가 다 통합니다.
다시 말해 “이미 다같이 갖고 있지만 듣고도 신수(信受)하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단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알기 어려움이니라.”고 말한 것은,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법문을 자주 들어야 조금씩 참된 믿음에 가까와 질 수 있습니다.
“비록 이와 같으나 마시고 먹는 것은 때를 따르는 것이며 주리고 배부름은 스스로 아는 것이로다. 이러한즉 사람사람의 지위는 비로자나불과 같고 낱낱이 寂光土에 함께 있으니 어찌 용화의 기별(授記)을 기다리리오. 발을 들면 곧 이곳이 적광(상적광토, 극락세계)의 도량이로다. 本分으로써 논한다면 이치가 합당히 이와 같거니와 만약 今時(新熏:현재의 입장)를 들어 논한다면 이 經은 마치 좋은 약과 같아서 먹으면 만병이 없어짐이라. 초연히 金仙(佛)을 짓건만 다만 기꺼이 입에 넣지 않음이요.”
경(經)이란 만병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구게(四句偈)에 대한 체험 이야기를 할 때, 사구게의 뜻을 다 알지 못했지만, 그곳에 들고 갔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게송을 읊은 나와 돌아가신 분이 한마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심은 부동(不動)하여 오고 감이 없습니다. 내가 한생각을 내자마자 그 원력(願力)을 쓰는 겁니다. 이게 바로 부처님의 위신력인데, 여러분이 쓰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못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經은 마치 좋은 약과 같아서 먹으면 만병이 없어짐이라. 초연히 金仙(佛)을 짓건만 다만 기꺼이 입에 넣지 않음이요.”라고 했습니다. 즐겨 먹지 않는다는 것으로, 좋은데 좋은 줄 모릅니다. 이것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받아들여서 해봐야 참으로 좋은 줄 알거든요. 그러므로 앞뒤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누가 무각스님을 믿으라고 한다면 의심해봐야 합니다. 그러나 어록에 나온 큰스님들은 이미 증명된 분들입니다. 이게 믿을만한 이유입니다. 내가 잘 모르지만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어 들어가서 공부하다 보면 신수(信受)․신입(信入)하여, 그 공덕을 스스로 맛을 보고 알게 됩니다.
“또한 충언과 같아서 信受하면 스스로 그릇됨을 알도다. 能히 大衆의 尊重함이 되건만 다만 기꺼이 信受하지 않느니라.”
신수(信受 믿어 받아들이면)하면 스스로 그릇됨을 알게 되어 대중의 존중함이 되지만 스스로 신수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리한 사람은 언하에 스스로 그른 줄을 알아서 한번 들으면 능히 다 가지리니 고래(鯤鯨)가 바닷물을 마심과 같도다. 그 지위가 大覺과 같거니와 지극한 과보를 다시 어찌 의심하리오. “과보가 불가사의하다” 하시니 진실하도다! 부처님의 설하심이여!”
그 지위가 부처님과 같으므로 지극한 과보를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종경】
宿業緣墮惡報어늘 今人賤而罪卽消하고 供諸佛誦此經하면 功德勝而喩莫及이로다
숙업연타악보 금인천이죄즉소 공제불송차경 공덕승이유막급
只如無着無相底는 還有果報也無아 妄心滅盡業還空하니 直證菩提超等級이로다
지여무착무상저 환유과보야무 망심멸진업환공 직증보리초등급
惡因誰作罪誰招오 眞性이 如空不動搖라 曠劫無明이 俱蕩盡하니 先天後地寂寥寥로다
악인수작죄수초 진성 여공부동요 광겁무명 구탕진 선천후지적요요
<번역>
숙업(宿業)의 인연으로 惡의 과보에 떨어질 것이거늘 지금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므로 죄가 곧 소멸되고, 諸佛께 供養하는 것보다 이 경을 외우면 그 공덕이 수승하여 어떤 비유로도 미칠 수 없음이로다. 다만 저 無着, 無相한 것은 또한 과보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망심이 멸하여 다하면 업도 또한 공하리니, 바로 菩提를 證得하여 등급을 초월하도다.
악한 인연은 누가 짓고 그 罪는 누가 부르는가,
참된 성품은 허공과 같아서 동요하지 않도다.
오랜 세월 무명을 모두 다 없애니
하늘보다 먼저하고 땅보다 뒤에 하여
고요하고 고요하도다.
<해설>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 이 경을 외우면 그 공덕이 수승하여 어떤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무착(無着),무상(無相)행을 하면 깨달음의 과보가 있기는 하지만, 그 깨달음이 본래 공(空)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과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은 앞에서 말한 ‘망지해지심(亡智解之心)’지혜와 알음알이가 사라진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리입니다.
하권(下卷)에서는 대체로 이미 견성체험 하고 나서 그 마음을 닦아나가는 법에 대해 설하고 있으니, 이렇게 알고 공부해 나가십시오.
여기서 하는 말씀이 항상 “교화해도 교화했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하고 “제도했어도 제도한 바가 없느니라.”고 하시고 “내가 일체 응당 중생을 멸도하고 나서는 한 중생도 멸도한 바가 없느니라.”는 말씀이 바로 ‘망지해지심’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놓았다’,‘깨달았다’하는 생각도 놓아버리고, 놓아졌다는 생각도 놓아야 ‘망지해지심’입니다. 이게 완전한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