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한 분노 내려놓고 무심의 붓질
한·중·일 學藝의 최고봉 60 이후 꽃피다(1)
글 이상국 월간중앙 전문기자 [isomis@joongang.co.kr]
1840년 9월, 55세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인생 최대의 위기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삶에는 어쩌다 이런 때가 있는 법이다. 가장 잘나가던 시절 문득 발을 헛디딘 듯 벼랑으로 추락해, 이제 생이 끝났구나 싶은 시절이 닥쳐온다.
평상시에 나는 세상을 다 알았노라 생각하며 사는 일 별 것 없다며 은근히 깔보는 마음까지 들 무렵 마치 폭풍노도처럼 시련이 한꺼번에 몰아쳐온다.
인생의 2막은 그냥 펼쳐져도 낯설고 외롭고 힘겨운 법인데, 이처럼 비류직하(飛流直下)로 땅바닥에 내려 꽂히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삶은 그야말로 오기와 울분의 랩소디일 수밖에 없다. 그런 시절 추사는 왕의 분노를 사 궁형(宮刑)을 당한 사마천(司馬遷)을 생각했다. 불후의 걸작인 <사기(史記)>를 써나간 사마천의 제2의 인생은 절망과 수치 속에서 찬연히 빛나지 않았던가?
세상에서 ‘상징적 궁형’을 당한 수많은 삶은 끝내 그 비극을 감내하지 못하고 비참한 종말로 치달았지만, 추사는 사마천처럼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찬란하게 되돋아 천하의 문명(文名)을 가슴과 머리에서 피워 올렸다.
우선 절망이 덤벼드는 그때로 가보자. 51세 때 병조참판(종2품, 국방부 차관)을 지냈고, 이어 성균관 대사성(종3품, 서울대 총장)을 지낸 뒤 54세 때 형조참판(종2품, 검찰청 차장)을 맡았던 김정희는 그해 여름인 6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임명돼 청나라의 연경(燕京)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절단 리더로서 중국에 가는 일은, 당시로서는 폭풍의 눈이었다. 추사는 24세 때인 1809년 친아버지 김노경(당시 호조참판)을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자격으로 연경에 갔다 온 바 있다. 그해 10월8일 들어가 이듬해인 2월1일 돌아왔는데, 약 넉 달간의 연행(燕行)은 그를 국제적 스타로 만들었다.
그는 당시 청나라의 최고 석학이던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스승 제자 관계를 맺었고, 그곳의 일류 지식인과 줄줄이 교유해 ‘추사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랬던 그가 이제 학문적으로도 완숙하고 정치적으로 노련한 존재가 되어 21년 만에 다시 연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가 이번 외교활동에서 돌아오면 정계의 확실한 핵심이 되는 것은 정해진 절차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급해진 것은 그의 정적(政敵)이던 안동 김씨 세력이었다. 부랴부랴 10년 전의 사건 하나(윤상도 옥사)를 다시 꺼내 상소를 올리기 시작한다. 워낙 급조한 것이어서 안동 김씨의 김양순이 이 사건의 배후로 드러나 곤장을 맞다 죽는 일도 생겨났다.
그런 대가를 치르면서 그들은 추사 김정희를 옭아맸다. 안동 김씨는 그를 처형해 화근을 없애야 한다고 벌떼처럼 상소를 올렸다. 추사는 그해 여름 벼슬을 내놓고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내려가 있었는데 8월20일 형리가 잡으러 왔다.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당시 우의정이었던 조인영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가 받아들여져 제주도 위리안치(가시울타리 속에 갇히는 중벌) 유배형을 받고 떠났다. 조인영은 추사의 오랜 친구였다.
출세길 달리다 제주도로 유배
당대 잘나가는 집안에서 승승장구해온 추사는 인생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갑자기 모든 것을 잃었다. 언제 정적들이 공격할지 몰랐기에 살아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그는 제주도의 골방에 들어앉아 이 기막힌 상황을 생각하며 미칠 듯한 날들을 보냈다. 한 번도 부족함이 없이 살았던 그는 시골 흙방에서 밤낮으로 물어뜯는 온갖 벌레와 싸웠고, 돼지들이 꿀꿀대는 노천 변소에서 혈변(血便)을 내놓으며 끙끙거렸다. 곤장을 맞은 몸에는 상처가 덧나 곳곳이 욱신거렸고, 물이 맞지 않아 두드러기가 났다.
그런 것들보다 더 힘겨운 것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에게 몰려왔던 것은 안동 김씨에 대한 저주와 분노였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가 저 패당(牌黨)의 무리를 척결하리라.’ 그는 이를 갈고 눈썹을 세웠다. 그로서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김홍근의 얼굴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러다 김유근이 생각났다. 김유근은 김홍근의 숙부로, 안동 김씨지만 어린 시절부터 추사를 짝사랑하다시피 했던 한 살 많은 친구였다. 그는 몇 년 전 평안감사로 발령받아 부임하다 괴한의 습격을 받은 뒤 쇼크를 받아 중풍이 와서 식물인간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기만 해도 추사를 구해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김유근은 그해 12월 숨을 거둔다.
추사는 다시 정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자신의 친구들을 생각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를 살려낸 조인영은 이듬해인 1841년 영의정에 올랐다. 가장 친했던 권돈인은 사건 당시 형조판서였고, 1842년 우의정이 된다.
추사는 그들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자신을 아낀 군주인 헌종이 때를 보아 해배(解配)를 명령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소식은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적들이 미웠는데 갈수록 동지들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등 따뜻하고 배 부른 자리에 있으니 나를 아예 잊어가는구나. 나를 천하의 벼랑에 내던져놓고 저희들끼리 권세에 취해 희희낙락한다는 말인가? 좋은 시절 내게 했던 맹세는 다 무엇이며, 내게 표현했던 그 많은 우정은 다 헛것이었다는 말인가?’ 유배당한 지 2년, 1842년 11월 그의 부인 예안 이씨가 돌아갔다.
추사는 그것도 모르고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보냈는데 한참 뒤에야 부인의 죽음을 알고는 통곡한다. 쓸쓸한 시절에는 슬픈 일이 꼬리를 문다. 바다 끝의 가시울타리 속에서 조강지처의 뒤늦은 부음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도 뒤따라 죽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으리라. 마음고생만 시키다 결국 해원(解寃)도 못한 채 보냈으니 면목도 없고 살 맛도 잃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추사는 한양에서 날아올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시간만 흘러갈 뿐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는 듯했다. 처음에는 친구 몇몇이 미워지다 이제는 세상 모든 사람이 오직 권세와 부귀만 좇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고, 모든 사람을 향해 개탄하는 염세(厭世)의 심정으로 치달았다.
처음에는 돌아가면 손봐줄 자들의 명단을 짜고 복수심을 잊지 않겠다고 다지기도 했지만, 그런 일조차 부질없었다. 차츰 복귀의 희망을 버리고 유배지에서 그런대로 삶의 즐거움을 찾아 나섰다. 마음을 기울여 주변을 살피니 이곳 또한 아주 나쁜 곳은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희귀하게 모셨던 수선화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마을이었다.
수선(水仙)은 물의 신선이니 욕심만 버리면 이곳 또한 신선처럼 살 수 있는 곳 아니겠는가? 차를 마실 수 있는 좋은 물이 나오는 샘도 발견했다. 고개 너머에 있는 향교에서 어린 제비 같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맛도 괜찮다. 한양 살던 높은 선비가 선생으로 왔다 하니 무서워 눈만 멀뚱거리는 시골 학동들에게 “의심 나면 뭐든지 물어보려무나” 하는 의미로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도 써서 달게 했다.
1844년 6월, 유배당한 지 4년. 그의 나이 59세. 한여름 더위로 절절 끓는 골방의 쪽마루에서 추사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지난해 연경으로 가서 책을 구해 보내준 뒤 올해 다시 연경의 책을 보낸 제자 이상적에게 쓰는 글이었다. 통역관이어서 연행(燕行)이 잦기는 했지만, 어렵사리 외국의 책을 구해 제주도에 유배된 스승에게 책을 보내주는 마음이 고맙고 기특했다.
이 사람인들 어찌 세상의 흐름과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이 엄벌해 내려 보낸 죄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이 제 일신에 어찌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 별 이익도 기대할 수 없는 이런 일을 계속하는 그가 놀라웠다. 그는 사마천을 떠올린다.
“태사공(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친 자들은 그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진다’고 했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인데 초연히 세상의 권세와 이익을 좇는 풍조 밖으로 벗어났으니, 그대가 나를 권세와 이익으로 대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이렇게 편지를 쓰고 나니 그의 마음 속에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돋아 올랐다. 그는 급히 종이를 펼쳐 마른 갈필로 죽죽 그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미 편지를 쓰면서 마음 속에 그려졌던 그림이었다. 글씨를 쓰듯 그림을 그린다. 삐딱한 집 한 채, 굽은 가지의 노송 한 그루와 푸른 소나무 하나. 그리고 집 앞쪽에 쭉쭉 솟은 잣나무 두 그루.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추워진 뒤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뜻을 그린 것이었다. 이 <세한도>는 당대 조선은 물론 중국의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명화가 된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염량세태(炎凉世態)에서 ‘한결같음의 고마움’을 표현한 화의(畵意)가 더욱 절절하게 닥쳐온다. 푹푹 찌는 여름날에 그린 사무치는 ‘인간세의 추위’를 그린 그림은 마침내 국보 제180호가 되어 여전히 우리의 감회 속에 머무르고 있다.(계속)
첫댓글 무림선생님 평안하셨지요? 반갑습니다.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무림선생님~이제부터 불을환히 밝혀주실거지요? 감사하는마음으로 새롭게 잘읽었습니다...
계속 잘 읽겠읍니다.
다음회차가 기다려집니다.
욕심만 내고 댓글을 아니 달 수 없어서 ...
이런 실례가...^^
암튼 기다리겠읍니다....감사.
오랫만에 불 밝혀진 방..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마음에 새겨야 할 많은 것을 가르켜 주시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