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틀 에어컨 외기 사이에 둥지를 튼 비둘기 가족의 사랑놀이에 새벽잠을 설쳤다. 거실로 나왔다. 창문에 비치는 햇살이 눈에 부시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저만치에 남았는데 춘심이 벌써 창밖에서 서성거린다. 오늘 밤에는 각별한 송별회가 있는 날, 오십오 년을 함께 해온 곰삭은 우정을 뒤로 한 채 서울로 이주하는 친구와의 이별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살다 보면 수많은 이별을 경험한다. 숨이 짧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등진 사람. 삶에 지쳐 숱한 인연을 뒤로한 체 남쪽 섬으로 떠난 사람. 무심코 한 말이 가슴에 옹이가 되어 돌아선 사람, 이제는 이름마저 가물가물한 정 주고 떠난 사람, 모두가 못다 한 정 때문에 이별의 순간마다 가슴 아파했다. 그러나 오늘처럼 오십오 년 세월을 함께 정들인 친구를 서울로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은 더욱 아프다.
그에게는 중견기업의 최고경영자로서 웅비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식 농사도 남 부럽지 않다. 교육자 아내를 두어 노후가 여유로운 다복한 여생을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불어 닥친 세찬 바람에 황혼이혼을 감행해야 했던 삶의 궤적이 나를 짠하게 한다
저녁달이 숨바꼭질하는 꾸불꾸불한 골목길 따라 어둑한 물꽁 집으로 갔다. “어서 오이소, 다 와 있어 예.” 주인 아지매가 반갑게 손을 내민다. 오십오 년 지기 대학 동창들이 여럿이 모여 있다. 한 순배 술잔이 돌자 취기가 오른다. 혼밥으로 더욱 야위어진 어깨 위에 홀아비의 그늘이 드리워진 친구의 모습이 측은지심으로 다가온다.
거두절미하고 그에게 물었다. 추억을 먹고 사는 황혼인데 쌓이고 쌓인 흔적들을 여기에 남겨두고 어찌하여 서울로 떠나가느냐고, 생활의 터전마저 여기에 있는데 왜 물설고 낯선 곳으로 가느냐고 따지듯이 묻는다. “미안하네, 난들 어찌 쉬이 발길이 떨어지겠는가. 서울 사는 아들이 자꾸 오라고 해서 간다네.” 자식이 있어도 서울 가면 많이 외로울 텐데. 그 고독을 어찌 감당 할려고. “여보게 친구, 타향도 정 붙이면 고향일세. 생각해 줘서 고맙긴 하네만 인생이란 본시 구름 같은 것이라네. 바람 불면 흘러갈 수밖에, 별도리가 있겠는가.”
술잔이 가볍게 흔들린다. 혼자의 몸으로 낯선 거리를 서성거릴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릿해 진다. 이번 기회에 서울에 살고있는 전처와 재결합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다구친다. 미운 정보다 고운 정이 더 많지 않았느냐고, 돌이켜 보면 이혼의 사유가 당신에게도 조금은 있지 않느냐고, 듣기에 거북한 탓일가. 왜 남의 사생활에, 참견을 하느냐고 정색을 한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우린 남이 아니라 오십오 년 지기 친구일세.
꼬장꼬장한 성격의 소유자인 친구의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진심 어린 우정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신혼 시절, 우리는 앞뒷집에 살면서 부엌살림까지 알 정도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들의 재결합을 바라는 나의 진심은 월권이 아니라 사심 없는 의리의 발로였다. 진정으로 그들의 재결합을 권유하고 싶었고 말년의 행복을 빌어 주고 싶었다.
형광등 불빛 사이로 비치는 엷은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연민으로 다가왔다. “여보게 친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게. 나이 들수록 말벗 되어주는 사람이 절실하다네. 혼자보다 둘이 함께하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말을 잊으셨는가. 해 질 녘 서산에 걸린 노을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둘이 함께하기 때문일세. 혼자이면 노을마저 외로운 눈물일세. 그래도 친구는 말이 없다. 술잔이 심하게 떨린다. 무슨 뜻일까. 이래 볼까, 저래 볼까. 뉘우침의 눈물일까 아니면 캐세라 세라일까 침묵이 한참을 흐른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나는 이슥한 밤, 가슴 깊이 파고드는 아쉬움과 애잔함을 거나한 술잔 속에 타서 마신다. 몸도 마음도 휘청거린다. 이별의 순간이 밤을 재촉하건만 친구는 끝내 화답 없이 침묵으로 술잔을 비운다. 남의 속도 몰라주는 야속함 때문일까 스치고 간 인연의 아쉬움 때문일까. 이래 볼까, 저래 볼까, 기로에 선 몸부림일까. 자리를 툭 털고 일어선다. 이만하고 가세나.“
불 꺼진 창으로 돌아서 가는 친구의 어깨 위에 삶의 고독이 매달린다. 지리산 천황봉을 거침없이 내 달리던, 그날의 폐기는 사그라들고 야심한 밤, 띄엄띄엄 졸고 있는 불빛 사이로 함께 했던 우정의 오십 오 년이 하나둘 추억 속으로 사라져간다.
잘 가시게 친구, 언제라도 내가 던져준 말이 생각나거든 어디 한번 만나나 보시게. 아이 셋을 훌륭하게 키웠고 수많은 세월을 함께하며 부부간의 사랑을 키워왔던 그 여인을 이제 야멸차게 뿌리쳤던 그녀의 손목을 따뜻한 손으로 잡아주게나. 흐르는 세월에 지난 일들 묻어두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포시 안아주면 안 될까. 노후의 외로움을 나눌 수 있게.
4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는 서울 하늘 아래 청계산 기슭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