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과 성차별]
kjm / 2020.7.21
백인우월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세상이 넓고 깊음을 잘 알지 못한다. 또한 문화적 인간이 되지도 못한다.
남성우월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반쪽짜리 인생을 사는 셈이다.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여 본질적 물음 없이 현상적 답만을 기계적으로 내뱉는 얄팍한 존재다.
이런 백인월주의자들이나 남성월주의자들에게 빌붙어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 또한 있기에, 이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성차별주의자들이 끊이지 않고 연명하고 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이라는 차별의 꼬리표를 달고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고루한 습성과 독사(doxa)의 관념으로부터 침루되어 나오는 냄새가 아주 지독하다.
이들에게서 튀어나오는 주장은 '그들만의 자유'에 국한되지, '고르게 퍼지는 평등'엔 전혀 관심조차 없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 보여지는가 보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비주류의 삶을 사는 하층민들에게서 맡아지는 '냄새'에 주목했다면, 나는 오히려 반대로 주류의 삶을 자처하는 인종주의자들과 성차별주의자들에게서 맡아지는 '악취'에 주목하고자 한다.
'샤넬'이라는 고급 향수의 성장 이면에는 몸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백인들을 위한 고려가 전제됐다. 흑인들에겐 값싸고 강렬한 향수를 뿌려대면서, 백인 자신들의 피부엔 고급 향수를 뿌려, 냄새의 차별화를 통한 인간차별을 꾀했던 거다.
자신들이 주류라고 여기는 인종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비주류 인생들이 보여주는 '상승 욕구'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여기에 미움과 증오보다는 배신의 아이콘을 심어주면서 절대로 자신들 위에 서려 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경고한다.
성차별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여비서의 배신은 곧 모든 여성의 배신이며, 배반의 아픔을 안겨 주어야 한다는 집착과 오만에 빠져 있다. "내가 주어야 받는 것이며, 스스로 가지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망상까지도 겹쳐 있다.
가장 비근한 예로, 토론회에서 어느 의원이 부동산 가격 폭등을 막아야 한다고 열띤 토론을 하고 난 뒤, 마이크가 켜져 있는 줄 모른 채, "그런다고 부동산 가격이 안 오르겠어요?"라고 내심을 드러낸 사건에서 처럼, 성평등을 주장하는 남성의 내심은 성차별의 긍정인 것이다. 오죽하면 여성 법무부장관이 대놓고 "여성 장관이라고 무시하는 것이냐?"라고 일갈했을까?
이렇게 온갖 차별의 꼬리표를 달고서 악취를 풍겨대는 인종주의자와 성차별주의자들에게서 우리는 아주 심한, 그리고 심각한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이 깔아 놓았던 배신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혐오와 증오라는 감정들을 되돌려 선사하는 것이다. 마치, "노예도 아프냐?"라는 물음에, "(미친)개도 웃냐?"라는 물음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근거리에서, 우리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국소적 변종의 하나인 '아베 종족'에 대해서도 눈여겨보며 관찰해 본다.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