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교? 가시나가 무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갑분아, 니 오늘 학교 가지 말고 집에서 돌식이 좀 봐라.“
"어무이요, 지는 오늘 학교에 꼭 가야합니다.
어제 선생님이 오늘 산수시간에는 구구단 가르쳐준다고 했어예.“
"핵교? 이 가시나가 무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노.
오늘 엄마가 이장댁 밭을 매주고 쌀 됫박이라도 얻어 와야 우리 세 식구 저녁 굶지 않는다.
굶어죽을 판에 핵교가 다 뭐꼬.“
"알았어예. 어서 당겨 오이소.“
남편은 전쟁터에 나간 뒤 소식도 없었다.
학교를 못 가서 훌쩍거리는 딸에게 젖먹이를 맡겨두고, 동산댁은 밭 매는 삯일을 하고자 고샅을 벗어났다.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 없어 학교에 가려는 딸을 붙잡아 동생을 맡길 수밖에 없는 어미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엄마가 마을을 벗어난 걸 확인한 갑분이는 동생 돌식이를 업고서 몰래 학교로 갔다.
6·25 전쟁으로 불타버린 학교.
하급생에게는 아직도 교실이 없었다.
불탄 교실 자리 맨땅에 돌멩이를 주워다놓고 앉아 수업을 받았다.
갑분이는 돌식이를 무릎에 앉히고 칠판을 바라보면서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 장면은 소설이 아니라, 한국전쟁 중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초등학교 노천수업 광경이다.
1952년에 구미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그나마 임시로 지은 초가지붕 교실에서 가마니를 깔고 배웠다.
도시 학교들은 천막교실도 많았다.
폭격에 용케 남은 교실은 5~6학년 상급생들이 썼다.
학교 정규수업이 끝나면 책보를 들고 냇가로 가서 모래와 자갈을 담아다가 학교 운동장에 날랐다.
나의 모교인 구미초등학교 본관 건물은 우리들이 나른 모래로 지었다.
우리 세대는 거의 대부분 그렇게 학교를 다녔다.
그나마 학교를 다녔던 사람은 행복한 축에 들었다.
숱한 전쟁고아들은 해외에 입양되기도 했고, 가정부(그때는 식모라고 했음), 트럭 조수, 버스 안내양(차장이라고 했음), 넝마주이, 구두닦이, 양담배 팔이 등으로 집안을 돕고 자신의 주린 배를 채웠다.
정규 학교는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못 다니고, 전수 학교나 통신 강의록으로 저 혼자 공부한 이들도 숱했다.
어른들 가운데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자식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적십자 병원에다 피를 파는 사람도 있었고, 미군 부대 철조망을 넘어 물건을 훔쳐 파는 이도, 미군에게 몸을 팔아 부모를 부양하고 동생을 공부시킨 누이도 있었다.
부자의 나라 미국에 가고자 일부러 양공주가 된 누이도 있었다.
그래, 미군을 만나 재수 좋게 태평양을 건너기도 했다.
남의 나라 전쟁터에 가면 전투수당을 많이 준다고, 그 돈으로 집에다 송아지 사준다고, 제대 후 복학할 때 등록금 마련한다고 자원해서 월남 불구덩이로 떠난 이도 있었고, 중동 건설 현장에 가서 한 밑천 마련해 온다고 떠난 이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영영 돌아오지 못한 이도, 장애인이 된 이도, 여태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이도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가서 청계천 평화 시장 다락방에서, 구로 공단 후미진 공장 희미한 형광등 아래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각성제를 먹어 가며 재봉틀을 돌렸던 이도 있었다.
이분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옛 모습들이다.
대체로 사람은 올챙이 시절은 잊으려 하고 또 숨기려 한다.
하지만 그때의 그 가난은 3년 동안 계속된 전쟁 탓이었다.
부산, 대구 일부 지역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이 성한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란의 잿더미가 됐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 시절의 아픔이 너무 컸기에 그런 가난만은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불같은 집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 오늘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