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1805~1875)은 1805년 덴마크 오덴세에서 태어나 70세에 코펜하겐에서 사망했다. 신낭만주의 운동의 작가로 관료주의 문화와 농민 문화 사이의 갈등을 묘사했다. 농가에서 태어나 크리스티아니아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공무원으로 일했다. 젊었을 때 특히 E. T. A. 호프만의 환상적인 이야기와 같은 독일 낭만주의에 매료되었지만, 문학과 문체에 대한 관심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에 의해 계발되었다.
주요작품 가운데 〈상담원의 나날 I cancelliraadens dage〉(1897)은 각 단편들이 중심 인물을 통해 서로 연결되는 소설집으로 노르웨이 시골 공무원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또다른 소설 〈저녁 무렵 Mot kvoeld〉(1900)은 지식인과 일반인들 사이의 문화적 격차를 다루었다. 그밖에도 4권의 단편집을 출판했다. 1902년 아내와 아들이 죽은 후 했던 바다 여행을 기록한 일기가 1923년 〈Dagbog fra en sjoreise〉로 출판되었다.
〈미운 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백조 왕자〉, 〈눈의 여왕〉, 〈벌거숭이 임금님〉, 〈인어공주〉. 이 동화들은 '아동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으로 노소를 불문하고 사랑받고 있는 안데르센의 작품들이다. 안데르센은 기존의 민화적, 교훈적 요소가 강했던 동화 창작 방식에서 벗어나 불행하고 소외된 계층을 휴머니즘적인 시각에서 다루고, 단순한 이야기 구조에서 탈피해 일상적인 구어와 관용구를 과감히 도입하는 등 동화 창작 분야에 있어 혁신을 일으킨 작가이다. 동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소설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1805년 4월 2일 덴마크 오덴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역시 한스라는 이름을 지닌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었고, 아버지보다 열 살이 많던 어머니는 빨래나 허드렛일을 했다. 아버지는 초등교육만 간신히 마쳤고, 어머니는 거의 문맹이었다. 그러나 문학과 연극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아라비안 나이트》나 루드비그 홀베르그의 희극 등을 읽어 주었다고 한다. 안데르센은 마을의 빈민층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에 다녔으나,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해야만 했다.
안데르센은 어린 시절의 외로움을 문학과 연극에 몰두하면서 극복했다고 한다. 14세 때 그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혈혈단신으로 수도 코펜하겐으로 갔다. 높은 소프라노 미성을 지니고 있던 덕분에 덴마크 왕립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곧 변성기가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연극 대본을 썼으나 초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인지 맞춤법이 엉망이어서 극단 관계자들이 제대로 읽어 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극단 동료 한 사람이 시를 쓰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고, 안데르센은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에 왕립극장 감독이던 요나스 콜린이 그를 슬라겔세 문법학교에 보내 주었고, 안데르센은 이후 헬싱괴르 문법학교를 거쳐 코펜하겐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역시 맞춤법, 철자법 등 문법상의 오류가 많아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듣곤 했다.
1829년, 안데르센은 〈홀름 운하에서 아마크 동쪽 끝까지 도보 여행기〉라는 짤막한 여행기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833년에는 국왕의 후원금을 받아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를 여행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때 그는 이탈리아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고 첫 소설 《즉흥시인》을 쓰기 시작한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광과 소박한 서민들의 일상생활, 예술적 풍취를 토대로 젊은 시인의 사랑과 모험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이 소설은 출간 직후 큰 호평을 받으면서 그를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안데르센, 1805~1875) >
키에르케고르 (1813~1855) 는 덴마크의 철학자,신학자, 시인이다.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코펜하겐에서 사망햇다. 그는 각 개인이 삶의 여러 길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는데, 그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실존주의 사상과 저술에서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를 실존주의의 창시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철학 단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그리스도교가 자유의지를 전제로 존립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불확실성이 실존적인 인간에게는 최고의 진리임을 주장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성격은 아버지 미켈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서부 유틀란트의 황무지에서 한 가난한 소작인의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어느날 신이 자신의 고통과 가난에 무관심한 데 절망과 격분을 느껴 언덕 위에 올라가 준열하게 신을 저주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코펜하겐에서 목재상을 하고 있던 삼촌에게 갔는데, 그때부터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죽을 때는 수도 코펜하겐에 5채의 집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그 덕분에 금전문제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저술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키에르케고르가 한 사람의 인간이자 작가로서 성장한 데는 재정적 유산보다는 심리적 유산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통 루터교를 엄격히 고수했고 형식논증의 논리를 좋아했지만, 아들 중에서 가장 총명한 키에르케고르에게 시킨 엄격한 종교적·지적 훈련은 상상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강한 성격과 경건한 모습 이면에 불안하게 놓여 있는 억눌린 우수의 영향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죄의식을 알게 되었으며, 뒷날 그 이유가 아버지가 어릴 적에 신에게 퍼부었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죄를 알고 충격을 받은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어머니의 죽음과 6명의 형제 자매 중 5명의 죽음이 신의 저주를 증거한다는 확신이 늘 그를 괴롭혔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러 코펜하겐대학교에 갔으나 오히려 철학 쪽에 관심을 가졌다.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신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2년 뒤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목표를 바꾼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레기네 올센이라는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 어린 소녀와 설명할 수 없는 죄의식과 복잡한 인간정신에 대한 유별난 의식에 짓눌리고 있는 자신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파혼했고 베를린으로 가서 6개월을 살았다. 이 사소한 연애사건은 통속소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몇몇 저작에서 반성과 해설의 자료가 되었다.
<키에르케고르, 1813~1855 >
심 산
덴마크 국회의사당▼
오페라하우스 , 1956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건축한 덴마크 건축가 우촌이 설계한 것으로 인공섬에 건축하였는데 항구에 정박한 선박 모형으로 객석의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외관은 유리로 장식하여 자연채광이 잘 되도록 했다.▼
뉘하운항구 ,과거에는 선원들이 휴식을 즐기던 술집 거리였으나 현재는 야외 테라스를 갖춘 세련된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는 거리.
나하운 항구 근처에는 안데르센이 살았던 것으로 유명함.▼
덴마크 증권거래소 , 1600년대 건축물로 지붕이 뾰뽁한 것이 특징. 코펜하겐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서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 4마리의 용이 꼬리를 틀어올린 모습의 청녹색 탑이 붉운 벽돌의 건축물과 함께 고풍스럽다.▼
크리스티안 보그성 - 현재 국회의사당, 총리실 ,대법원,왕실접견실이 있다.▼
크리스티안 9세 동상▼
시청사- 1905년 붉은 벽돌로 지어진 덴마크 양식과 북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혼합건물로 건물 정면 가운데 위쪽에 코펜하겐을 만든 압살론 주교의 황금상이 있다.건물 탑까지 높이 106m , 시청 옆에는 1843년 문을 연 티볼리 공원을 바라보고 있는 안데르센(1807~1875)의 동상이 있다.▼
안데르센 동상▼
키에르케고르▼
상가 ▼
[ 키에르케고르, 인생 철학 명언 ]
🔹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 행복의 90%는 인간관계에 달려있다.
🔹 인품이 훌륭할수록 뉘우침의 깊이도 깊다.
🔹 장수하기 위해서는
느긋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 열정을 잃는 것보다
열정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이 더 낫다.
🔹 사람은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 때
인격이 무르익는다.
🔹 아직 갈길은 멀고 낯설지만
바람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동등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
🔹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자기자신이 되는 자가 가장 위대하다.
🔹 청년은 희망의 그림자를 가지고
노인은 회상의 그림자를 가진다.
🔹 삶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현실이다.
🔹 적당히 불안해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을 배운 셈이다.
🔹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은
자신다운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 인생은
뒤돌아볼 때만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앞으로 가면서 살아야 한다.
🔹 삶에는 숨은 힘이 있다.
하지만 그 힘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삶을 살아야 한다.
🔹 삶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를 잊지 않는 것이다.
🔹 바보가 되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진실이 아닌 것을 믿는 것
다른 하나는 진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것.
🔹 인생은 과거를 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임과 동시에
미래를 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