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사람들은 하느님께 너무나 크게 죄를 지어서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쳤으면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옥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확고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거부해야 합니다.
고해실은 사탄이 죄인들이 아주 최후의 순간에 가기를 원하는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권능으로 사탄의 억압으로부터 죄인들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꾼이 말하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중의 하나를 듣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탕자의 이야기'로 언급되지만, 그 제목으로는 '탕자와 그의 형의 이야기'가 더 적절할 것입니다. 두명의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방황하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방탕한 생활중에 모두 써버리는 극적인 방법으로 방황하였습니다.
큰아들도 역시 사실상 육체적으로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방황하였습니다. 이 일화에서 아버지는 하느님 아버지를 나타냅니다. 그분은 교만과 사랑이 결핍된 모습을 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에 대해서도 불굴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 일화를 생각할 때마다 프레드릭 윌리엄 파버(1814-1863)가 지은 아름다운 찬미가가 생각납니다. 그는 성공회를 떠나 복자 존 헨리 뉴면을 따라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 찬미가의 제목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심은 바다와 같이 큽니다.... 죄인들도 환영받으며, 착한 이들에게는 더 큰 영광을 주십니다. 구세주의 자비하심은 그분의 피로써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얼마나 호소력이 있는 말입니까. 얼마나 매혹적입니까!
'참으로 죄인들도 환영을 받는다.' 이것이 이 주님의 일화에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은 죄인들을 향해서도 아낌없이 자비심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사순의 시기에 교회가 우리앞에 놓은 성서구절은 명백하게 이점을 지적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첫째 독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 너와 같이 있는가? 상속자을 위하여 죄를 없애시고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아닌가?" 그리고 오늘 화답송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하느님은 너의 모든 악을 용서하시고, 너의 병고를 모두 치유하신다. 그분은 파멸로부터 너의 생명을 구해내시고. 친절과 연민으로 왕관을 씌워주신다."
이번 주 초에 우리는 예언자 이사야의 유명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하여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비록 너의 죄가 자홍빛과 같더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다. 너의 죄가 심홍색 같을지라도 양털과 같이 희게 될 것이다. 우리는 듣고 있는가? 우리는 심장을 꿰뚫는 하느님의 엄청난 자비심에 대한 이 메시지를 따르고 있는가? 우리는 "나는 모든 것이 올바르게 되기를 원한다."라고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가?"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2012년 10월 11일 개시한 신앙의 해에 우리는 복자 요한 23세에 의해 50년전에 소집된 거룩한 제2차바티칸 공의회를 돌이켜봅니다.
또한 20년전에 복자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공포된 가톨릭교회교리서에 대해서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교리서에서 내가 즐겨 인용하는 부분중의 하나는 982항목입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수없이 많이 기도하였고 묵상하였으며, 강론하였습니다.
사실, 나는 이 페이지를 너무나 자주 찾아보았기 때문에 글자 하나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아무리 중대하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없다. 아무리 그 죄인이 사악하고 유죄라고 하더라도 그의 회개가 충실하다면, 용서받을 희망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안에서 용서의 문이, 죄로부터 돌아선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열려있기를 바라신다."
주님께 돌아오고 그분의 자비를 찾는 사람들에게 필요로 하는 것으로 어떤 것이 더 장려되어야 합니까?
이 '용서의 문'은 교회의 고해의 문들입니다. 고해실에서 좋으신 목자인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준비하시고 계시며, 기꺼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지막으로 좋은 고해를 한 후 몇 달 또는 몇 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고해실로 들어가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같이, 좋은 고해를 위하여 매우 어려운 발걸음을 떼는 것은 고해실 출입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려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단 그안으로 들어오면, 하느님의 거룩한 성령의 도우심과 우리들의 어머니 성모님의 기도로 인하여 그 나머지는 쉽습니다. 정말로 쉽습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성사를 멀리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해실에서 우리를 용서해주시려고, 이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자비의 성사안에서 사제의 직무를 통해서 우리를 치유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성사를 집행함에 있어서 사제의 역할에 관하여, 가톨릭교회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제가 고해성사를 거행할 때, 사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탕자를 기다리다가 아들이 돌아오자 환영하는, 그리고 공정하고 자비로운 판단을 하는 공명정대한 심판자이신 좋으신 목자의 직무에 충실해 있다. 그 사제는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도구이며 징표이다."
이 고해성사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죄의 고백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고백'이라고 부릅니다. 진실한 참회를 요구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우리의 죄에 대한 참된 후회를 요구하기 때문에 '참회'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성사의 결과로서 '화해'라고 부릅니다. 이 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다시 화해하고 다른 사람과 화해합니다.
고해(Confession)는 'C'자로, 참회(Penance)는 'P'자로, 화해(Reconciliation)는 'R'자로 시작합니다. 그 글자를 함께 놓으면 C.P.R.(Cardio Pulmonary Resuscitation, 심폐기능소생법)입니다. 이 용서의 성사는 하느님의 심폐기능소생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심폐기능소생법으로 우리를 죽음과 죄로 병든 영혼을 되살리십니다.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십자가의 길 제5처 '키레네의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다'를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비록 너에게 그렇게 보일지라도. 비록 수많은 불행의 목소리가 그렇다고 말하더라도. 비록 네가 군중과 회의적인 방관자에 의해 포위되더라도. 절대로 늦지 않다.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다.... 너는 지금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구속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예수님은 많은 키레네의 시몬을 필요로 하신다."
2013년의 사순시기가 앞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찾는 것은 결코 늦지 않습니다. 고해성사를 한 지 몇 주, 혹은 몇 달, 몇 년이 되었는지 상관없이 오늘 화해의 성사를 보러 가는 것을 결정하십시오.
그것을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자비와 친절의 주님이 너를 위하여 고백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성모님, 자비의 어머니의 기도에 의지하십시. 성모님은 여러분의 손을 잡고 홀로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L.A. 대교구의 소속으로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Holy Innocents Church의
주임사제인 Peter Irving Ⅲ 신부님의 사순 제2주 토요일 강론입니다.---
첫댓글 30년 기도를 하여도 기도가 늘지 않고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은 아마 그 때 그 때의 진실한 고해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바티칸 온라인' 이 아니라 '가톨릭 온라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