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장구한 세월이다.
그런데 그 긴 세월도 지내 놓고 보니 금방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바로 그 첫 직장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 회사는 향기로운 비전과 소명을 갖고 있던 '미션 컴퍼니'였다.
나도 그랬지만 그 회사에 지원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 회사의 이념과 지향점이 좋아 입사 지원서를 냈던 거였다.
대부분 그랬고 또 그렇게 고백했다.
나의 입사 동기였던 '김화식'.
사랑하는 후배였던 '이기수'.
이 두 형제는 18년 전인 1993년 9월 3일에 거래처를 가기 위해 회사차로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동작대교'에서 차가 가드레일을 뚫고 한강으로 추락했다.
강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 사고로 두 형제는 한 순간에 하늘의 별이 되었다.
충격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거였다.
같은 건물에서 매일 얼굴을 보며 동고동락했던 형제들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동료들은 극심한 심적 고통과 트라우마를 겪었다.
그 당시, 부산 출신인 '화식이'는 단란한 가정을 꾸린지 채 2년도 안된 상태였고 갓난 아기의 재롱에 하루 하루를 꿈같이 살고 있었다.
광주 출신인 '기수'는 싱글이었지만 한참 뜨겁게 직장생활을 펼쳐가고 있었던 핸섬하고 유능한 남자였다.
두 사람 다 착하고 미소가 아름다웠다.
배려심과 신앙도 깊고 신실한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타의 모범이었고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던 형제였다.
그날은 가을의 어느 주말이었다.
그 당시엔 주말에도 정상근무를 할 때였다.
점심 무렵에 긴급하게 전화가 울렸다.
생산부 '성진 선배'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현 주임. 만사를 제쳐놓고 빨리 '동작대교' 북단 고수부지로 택시 타고 와. 최대한 빨리"라고 했다.
"회사차가 한강으로 추락했는데 잠수와 수중수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현 주임 뿐이니 잠시라도 지체하지 말고 신속하게 달려오라"는 부탁이었다.
"승합차는 누가 운전했어요?"
"기수가 했대"
"동승자는요?"
"김화식 주임이 조수석에 있었고, 박경희 주임은 같이 타고 가다가 '동작대교' 직전인 '이수역'에서 내렸대".
"오오, 주여"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데 나의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또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세상의 온갖 사물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나 판단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동작대교' 북단 고수부지에 어떻게 도착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도착해 보니 경찰관 몇 명, 소방관 몇 명, 우리 직원들, 그룹 본부 직원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는 고양시에서 출발하느라 조금 늦은 편이었다.
사고발생 2시간 가량이 흐른 상황이었다.
대교의 두꺼운 가드레일이 흉물스럽게 뜯겨져 나간 상태였고 수면 위로는 차도, 사람도, 어떤 물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심한 강물만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사고 발생 한참 후에 '동작대교' 아래 수중에서 크레인으로 건져올린 '기아 베스타' 승합차는 그야말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사고 당시에 두 사람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공포가 엄습했을 지 삼척동자라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찌그러진 차를 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애통함에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가슴도 미어졌다.
잠수와 '수중수색'을 하고 싶었으나 나에겐 장비가 없었다.
잠수장비를 빌리고 싶어 다방면으로 연락해 보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도처에 수중 장비가 그리 흔하지도, 여유있는 편도 아니었다.
'소방 특임대 요원들'이 잠수장비를 갖고 도착했지만 어느 누구도 나에게 자신의 장비를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싶었다.
할 수 없었다.
나는 잠수요원들과 고무보트에 동승해 그들을 강 가운데로 안내했고, 그들의 수중작업을 보트 위에서 돕는 '서브역할'을 하기로 했다.
승합차는 무게 때문에 추락지점 바로 밑 수중에서 인양했다.
다리 위에서 대형 크레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겨지고 찌그러진 차량을 인양했으나 그 안엔 사람이 없었다.
벌써 대여섯 시간이 지난 상황이라 형제들이 이미 유명을 달리했을지라도 안전벨트 덕에 육신이 차와 함께 물밖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바람도 끝내 물거품이 되었다.
자동차가 속도를 내면서 달리다가 대교의 보도블럭에 한 번, 난간에 또 한 번, 16-20미터를 수직으로 낙하해 수면과의 부딪힐 때 또 한 번, 그때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을 터였고 그 극한의 충격으로 인해 형제들이 기절한 상태로 폐차 직전의 승합차에서 튕겨져 나갔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상상도 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특수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십중팔구는 생존할 가능성이 거의 희박할 터였다.
해가 떨어져 어둠이 드리워질 때까지 '스쿠바 요원들'이 물속을 수색했지만 끝내 형제들을 찾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물이 고여 있는 저수지가 아니라 강이나 바다의 경우엔 물의 흐름이 호수와는 현저하게 달랐다.
그랬으므로 수색 포인트를 다시 잡아야 했다.
경험이 많은 전문 '머구리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수중의 물살은 수면부의 흐름보다 더욱 빨랐다.
추락지점으로부터 20-40미터 하류 지점을 중심으로 구역을 나눠 강바닥을 샅샅이 훑기로 했다.
통상 사람이 익사하면 '시강현상'이 발생하는데 무거워진 신체는 강이나 호수 바닥에 그대로 가라앉는다.
부패가 시작되는 2-3일 후면 '시강'이 사라지고 '부력'이 작용해 다시 수면 위로 뜨는 특성이 있다.
아무튼 바닥을 이잡듯이 수색하기로 결정했다.
밤이 깊어 지고 있었다.
세상은 캄캄했고 한강 물속의 시계도 거의 제로였다.
그랬던 탓에 '수중렌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물 속 유영 스타일의 '스쿠버 장비'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머구리 장비'를 쓰기로 했다.
보트 위에서 '컴프레셔'로 공기를 주입해 주었고, 머구리는 무거운 '납벨트'를 허리에 찬 채 공기흡입기(레귤레이터)를 물고 들어가 하상을 지그재그로 걸어다니면서 100% 촉감만으로 시신을 인양하기로 결정했다.
전문성과 오랜 경험 그리고 강철심장에 담력이 없으면 애시당초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나는 고무보트 위에서 강력한 랜턴을 비추면서 머구리가 내뱉은 버블을 매순간 체크하며 쫓았다.
그 버블의 크기와 양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체크를 해야만 수중 작업자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버블의 이동에 따라 공기호스를 더 풀어주거나 당기면서 수상과 수중 작업자들 간의 호흡을 한몸처럼 맞춰야만 했다.
그리 하기를 약 한 시간 반 가량, 드디어 '기수 형제'를 찾았다.
이윽고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서 다시 '화식 형제'를 찾았다.
운전했던 '기수 형제'는 핸들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옆자리에 동승했던 '화식 형제'는 우측 천장에 있던 안전고리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 인양되었다.
고무보트 위로 두 형제를 끌어올렸다.
무거웠다.
형제들이 입었던 옷은 그 모습 그대로인데 '시강현상'으로 인해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강한 힘으로 그들의 굽은 팔과 다리를 펴주려 했지만 형제들의 육신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좁다란 보트 안이라 한계도 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고수부지를 향해 이동하는 어두운 보트 안에서 형제들의 차디찬 몸을 어루만지는데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쳤다.
뭔가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다시 벌컥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이미 밤은 깊었지만 드넓은 고수부지엔 사랑하는 가족들과 동료들, 경찰, 운구차량, 장례 관계자, 그룹 임직원들이 많이 운집해 있었다.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남편과 아들을 부등켜 안고 절규하는 가족들과 동료들의 애통한 눈물이 어둠 속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그렇게 그해 9월 3일의 밤하늘은 비통과 참담함 그리고 씻을 수 없는 통한의 슬픔으로 메워졌다.
통곡의 강이었고 한의 바다였다.
18년 전 9월 3일.
바로 내일이 두 형제의 '추도일'이다.
어젯밤 성진 선배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내일 두 형제를 추모하는 조촐한 모임을 갖기로 했다.
사랑하는 형제들은 떠났어도 그들이 남기고 간 배려와 열정 그리고 추억과 감동은 계속 간직하려 한다.
18년이 아니라 30년, 40년, 50년이 흐를지라도.
정말로 순수한 열정과 헌신의 자세로 최선을 다 했던 형제들이었다.
'내 일', '네 일'이 없이 하나처럼 똘똘 뭉쳐 재미있게 일했고 그 덕분에 성과도 매년 놀라웠다.
해마다 거의 두배씩 성장했으니까.
자신의 소중한 꿈과 비전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며 기도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자나갔다.
모태 신앙인으로서 '해외 선교사업'에 비전을 갖고 있었던 '화식이'와 가난한 학생들의 교육과 복지에 관심이 많아 미래에 '장학사업'에 매진하고 싶어했던 착한 동생, '기수'.
비록 사랑하는 두 형제는 하늘나라로 갔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순수한 사랑과 섬세한 배려의 마음만은 꼭 잊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내 심장이 박동하는 한 고이 고이 그들의 훈염과 인간애를 간직하고 싶다.
하늘나라에서 지금도 환하게 웃고 있을 아름다운 두 형제들.
그들에게 진한 그리움과 사랑을 전하며 다시 한번 '화식이'와 '기수'의 명복을 빈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더 예쁘게 살아야 한다.
더 열정적으로, 더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그게 바로 산 자들의 몫일 테니까 말이다.
오늘 새벽 Q.T 시간에 두 형제를 생각하며 그렇게 기도했고, 그렇게 다짐했다.
2011년 9월 2일.
18주기 추도일 하루 전 아침에.
그리운 두 형제를 추모하며, 한 자 한 자 마음으로 눌러 쓰다.
(사진 뒷줄 좌측부터 장성진 선배, 고 김화식 형제, 나, 고 이기수 형제, 나원석 팀장님 그리고 아랫줄 좌측부터 이미경 자매, 김영 자매의 행복했던 모습. 블루진 사업부 생산부 대성리 MT 때. 두 형제의 마지막 미소였다. 나 팀장님은 보트를 타다가 조그만 보트가 기우뚱하는 바람에 그대로 강물에 빠졌다. 내가 바로 뛰어 들어가 팀장님을 끌고 나왔다. 목재 데크 아래는 꽤 깊어 위험할 뻔했다. 그의 검정색 뿔테 안경도 수중으로 사라졌다. 그 일로 인해 정작 본인은 기분을 잡쳤지만 동료들은 한동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세월은 비호 같이 흘렀고 그리움과 추억과 가슴 아픈 별리는 끝내 우리들의 골수에 새겨졌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진한 그리움과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