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와 할배(손주 2) 소운/박목철
예전에는 결혼 상대를 고를 때 나이 차이를 대단히 중요시했다.
남자가 3살 정도 많은 것을 선호했고 5살 이상 차이가 나면 결혼을 꺼리기도 했다.
특히, 연상녀의 경우는 극히 드문 일로 사실이 알려지면 주변에서 수군대는 얘깃거리가 될 정도였다.
지금은 나이 차이에 대한 기준이 흐려진 것은 물론, 남자 나이가 한참 어려도 별 화제는커녕
"그럴 수도 있지" 정도로 넘기는 세상이다. 장가 못 간 시골 노총각이 나이 어린 동남아 여자를 신부로
맞이하는 일이 잦은 것도 이런 현상을 부추긴 측면이 있을 거라는 추측이다.
(일부 나라에서는 나이 차이가 정도 이상이면 국제결혼을 금하는 법도 생겼다고 한다.)
얼마 전 어느 목욕탕에서 머리를 깎다 한 갑을 넘긴 노인이 서너 살 어린 애를 데려왔기에,
손주가 있는 할아버지들이 흔히 그렇듯 아이가 참 귀엽게 생겼다며 몇 살이냐고 말을 걸었지만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아 "뭐야 이 친구! "하는 마음에 기분이 상한 적이 있다.
옆에서 지켜본 이발사가 나중에 슬쩍 귀띔 한 말은 -손주가 아니고 아들이며, 28세의 부인은
필리핀 출신으로 낮에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나간다고 했다) 노인이 어린 애를 아들이라고 하기가
멋쩍어 누가 물으면 대답을 꺼리는 것이니 기분 나빠 하지 말라며 이해를 구했다.
이런 세상이니, 요즘은 노인이 아이를 데리고 다녀도 손주인지 아들인지 선뜻 말하기가 꺼려진다.
딸이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는 관심이 둘째에게 쏠려 며칠 만 보지 못하면 안달이 난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뻐한다는데, 내 손주이고 이쁘기까지 하니 이뻐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이런 둘째에 대한 애착이 옆에서 보기에는 편애로 보이는지 때로는 핀잔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큰 손주도 아이인데 상처 입으면 어쩌려고" 둘째는 아직 어리니까 그렇다는 변명으로 대충 넘기긴
하지만 녀석이 노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너무 이쁘다는 생각이 절로 드니 무의식중에 편애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도 한다.
둘째 손주는 할아버지를 보면 반갑다는 표시를 확실히 해 더욱 정이 붙게 만든다.
할아버지를 보면 겉옷을 벗으라고 성화이다. 옷을 벗으면 가지 못한다는 아이 나름의 생각인 듯하다.
외출하고 싶으면 제 옷을 꺼내 와 입혀 달라거나 양말을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기도 하는데
녀석의 의사 표시를 보노라면 할아버지와 같이하고 싶은 간절함 같은 것이 느껴져 뿌리치기도 어렵다.
만날 때 반기는 것까지는 좋은데 아이를 떼어놓고 올 때는 마음이 편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이의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게 한 후 살짝 빠져나와야지 간다는 걸 알면 울고 난리를 친다.
혹시 가족에게 전화할라치면 어떻게 아는지 할아버지를 외치는 아이의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쨍쨍해
그럴 때 마다 마음이 찡하다.
나이가 들면, 삶의 장에서 소외되게 마련이다. 이런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못 가게 울고 매달리는 손주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
아이를 길러 본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남자아이는 말 배우기가 늦다고 한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아이가 머리가 나쁠 리는 없는데, 하면서도 손주의 말이 늦어 걱정되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알려 줘도 발음이 어려운지 늘 아빠, 아빠! 다.
아이를 데리고 마트에라도 가면, 아빠! 아빠! 하며 큰 소리로 불러 대는 통에 예전 목욕탕에서의 일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이 나이에 -세 살 배기가 아들이라니-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는 말도 있듯, 어느 날 부터 인가 아빠가 할아버지로 변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하다가도 기분이 좋을 때나 애정을 표시하고 싶을 때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빠로
호칭이 바뀌곤 한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신뢰의 호칭이 아빠이고 신뢰의 표시로 아빠로
불러야 한다는 나름의 의사 표시일 수도 있다는 이해에서 녀석의 아빠! 는 정겹기까지 하다.
* 손주가 한 번 다녀 가면 한 시간은 정리해야 할 정도로 온갖 물건을 다 꺼내 가지고 논다.

종종 아이를 집에 데려와 실컷 놀게 하며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한다.
생각 같아서는 썰매를 만들어 태워 주고도 싶지만 요즘 애들은 싸서 기른 탓인지 조금만 찬바람을
쐬면 감기에 걸려, 아이를 데리고 나올 때면 신신당부를 듣게 마련이다. "애 찬바람 쐬지 마세요"
도 모자라 "아무거나 먹이지 마세요" "애가 너무 뛰어놀면 땀이 나니 등에 손 넣어보고 땀을
흘렸으면 내복을 꼭 갈아입히세요" 등 주문도 많다. 바람도 쐬고, 험한 것도 먹여야 면역력이 생기지
하는 마음은 있지만 혹시 아프기라도 하면 하는 우려에 등에 손을 넣어보게 된다.
누룽지 삼계탕을 같이 먹자는 전화를 받고 "대한이도 데리고 오는 거지?" 물었다.
녀석 아빠 손을 잡고 식당을 들어서다 발을 멈추고 기다리더니 할배 손을 다른 손으로 꼬옥 잡았다.
제 아빠가 있을 때면 아빠 손만 잡는 게 미안한 듯 꼭 할배 손도 잡으려 한다.
듣는 이들은 무슨 애가? 하지만 손주가 할배에게 애정을 보이려고 한다는 느낌은 확실히 전해진다.
나이 들면 애가 된다는데, 녀석 할배 노년에 좋은 놀이 친구가 돼 줘서 정말 고맙고 행복하다.
* 입이 짧아서 뭐든 안 먹으려 든다. 식당에서 핸드폰을 주면 동영상 보느라 조용하다.

* 문득 돌아보고, 근래 쓴 글들이 어둡거나 무겁다는 반성을 해 봅니다.
설날 쓰는 글이나마 따뜻한 얘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가족 얘기 만큼 따뜻한 얘기는 없겠지요,
일몰의 여명이 아름답게 보이는 할아버지와 세 살배기 손주의 얘기를 행복한 마음으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