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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제소리 信天함석헌
씨알!
하늘의 별 보다도, 바다의 모래 보다도,많으면서도 한 알인 씨알,
한 알이면서도, 나서는 죽어서, 죽어서는 또 나서,죽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죽는, 무한 바퀴의 알!
사월이 또 왔습니다.
무지와 교만과 악독에 얼어 붙어
영원한 저주에 서는 얼굴을 녹이자
먹만 알 피눈물 되어 북악 등성이에 핀 진달네를
무너미 골에 처박은건 뭐냐?
너는 누구냐?
진달네야!
진달 네냐? 진달 내냐? 진달 누냐?
안진달라고 영원히 질 수 없는 너 나랄라고
일어섰다간 넘어지고는 또 일어서는 나무다, 남이다!
짓밟힌 진달 꽃 말발굽 밑에 부서져도
그 소리는 두견처럼 슬프다. 파드득 날았다.
솟적다냐? 속 적다고 비웃느냐?
아니다. 뻐꾸기다!
굳은 땅 날 보습으로 갈아엎고,
씨알 그 엄마 품에 던지며 귀 기울이면
그 소리 봄날 아침에 한없이 인자하더라
영원한 봄 씨의 소리!
맹인기할마(盲人騎瞎馬)
인권 문제가 시끄러워져서 국제적 외교 문제로까지 되게 된 것을 생각하다가, ― 옥에 들어가 있는 동지들을 생각하다가,― 사람 존중할 줄 모르는 이 역사라는 생각을 하다가,―옛날 당태종이 위징(魏徵)의 죽은 것을 슬퍼하여 “내가 이제 거울 하나를 잃었다”했던 말 생각이 나서,―그 원문을 찾으려고 사전을 뒤적거리다가,―우연히
“三眼”이라는 문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본래 눈이 셋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으로 이 세계를 보고 있는 이 눈도 눈 이지만,또 현미경으로야 하는 박테리아, 분자, 원자의 세계도 있고, 망원경으로야 아는 천체 우주의 세계도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현실과 극소와 극대의 세 세계를 보는 세 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三眼이라는 글자를 보자, 본래 그 출처가 어디 있나 알고 싶은 생각에 그 조목을 읽었더니 뜻 밖에 아주 재미있고 놀라운 시가 한 수 나와 있었습니다. 그 순간의 나의 느낌은 마치 정글 속을 헤매다가 어느 바위틈에 지금은 절종이 돼버린 석탄기의 어떤 희귀한 나무의 씨가 숨어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놈을 심었더니 아구를 트기 시작하는 것을 보기나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순간의 나를 위해 예비되어 기다리고 있었던 듯합니다. 시는 이렇습니다.
일진황풍일진사(一陣黃風一陣沙)
천리만리무인가(千里萬里無人家)
회두설소불감간(回頭雪消不堪看)
삼안화상롱할마(三眼和尙弄瞎馬)
설명을 보니 元 至正 15年 京師에 이러한 동요가 돌았다 했습니다. 작자는 물론 모릅니다. 동요란 길거리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인데 언론기관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 일종의 민중의 여론 노릇을 한 것입니다. 이런 동요는 대개 요샛말로 비상시기에 나타납니다. 예 나 이제나 권력자의 심리는 꼭 같은 것이어서, 자기 하는 일을 비평하면 극히 싫어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뜻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세상을 건질 생각이 있으면, 그것을 직접 말한댔자 악의로만 생각하고 생각해 보려 하지도 않고 죽이기만 할터이므로, 그것을 엇대두고 하는 짤막한 형식의 노래로 만들어서 애들에게 가르쳐 주면 애들은 멋모르고 호기심에 자꾸 불러댑니다. 그러면 작자가 없으니 자연 이것은 하늘이 하는 소리라 할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혹시 듣고 반성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을 악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민심을 흔들고 여론을 일으켜 역사를 새롭게 하는 한 힘이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지정(至正)을 찾아보니 元이 망하기 직전 순종이라는 임금 때 연호입니다. 그 15년이면 우리의 공민왕 4년 서기 1335년입니다. 그러면 그때 시국 형편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 이 동요도 무엇을 겨눈 것인지도 좀 알 수 있습니다.
일진황풍일진사(一陣黃風一陣沙) 한 바탕 폭풍이 몰아치니 누른 티끌 자욱하단 말입니다. 그러니 천리만리무인가(千里萬里無人家)라, 사방을 두루 봐도 이제껏 먹고 놀고 영화를 자랑하던 도시, 촌락이 다 어디로 가고, 그저 뽀얀 티끌뿐이란 말입니다. 회두설소불감간(回頭雪消不堪看) 그랬는데 머리를 돌려 보니 그것이 곧 저것이다. 눈 녹듯 사라져 간 곳을 알 수 없고, 보려고 해도 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삼안화상롱할마(三眼和尙弄瞎馬)라, 눈 셋 가진 중이 소경 말을 데리고 놀고 있더라, 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혁명의 폭풍을 내다보고 하는 말입니다.
三眼은 왜 三眼이라 했을까? 아마 욕심에 취한 어리석은 인간은 못보는 참을 뚫어본다는 뜻에서 한 말일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눈 둘을 가지고 있는데 그 두 눈으로는 못보는 것을 보니 딴 눈이 또 하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같은 의미를 어떤 때는 척안(隻眼)이라, 한 짝눈이라 합니다. 화상은 중인데 중은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저기(彼岸) 있는 참 세상을 찾는 종교인, 정신살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권력 쥔 사람이나 권력에 눌린 사람이나, 이 현상의 세계만을 찾는 사람은 이것이 억만년이나 갈 것 같아 죽이고 죽으며 싸우고, 그러는 동안에 세상이 온통 망하는 원인을 만들어 결국 다 망하고 나면 천리만리에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 모르는 원인은 눈이 있고 귀가 있어 아는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는 것이 아니다, 三眼, 곧 눈 아닌 눈을 가지고 세상을 한 번 내다보면 설소불감간(雪消不堪看)입니다. 아무 것도 없고 허망한 것뿐입니다. 이 동요는 아마도 어리석은 싸움에는 초연하는 눈으로 자비심을 가지고 보는 깨달은 사람이 어리석은 세상을 건져주자는 생각에 한 경고의 말일 것입니다.
그럼 할마(瞎馬)는 왜 할마라고 했을까? 무엇을 가르친 것일까? 瞎은 애꾸눈, 혹은 소경입니다. 소경 말이 무엇이냐? 삼안화상이 그것을 데리고 논다는 것은 무엇일까? 본래 작자의 뜻은 물어볼 수 없습니다 마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리의 이 몸 아닌가 합니다. 혹은 크게 말하면 사회라, 국가라, 정치라, 문명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말(馬)이라고 한데 뜻이 있습니다. 말이란 놈은 힘있고 재주있고 용기있고 빠릅니다. 욕심의 인간의 상징으로 적합합니다.
그 롱(弄)자가 좋습니다. 중도 사람이지, 아무리 도를 통했다 해도 몸 없이 살지는 못합니다. 나는 있으되 없는 듯이 不則不離의 태도로 무 집착의 태도로 삽니다. 그것이 농이라 한 이유 아닐까? 정신을 가지고 영원 무한을 향해 살자는 사람의 모양은 마치 말을 타고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소경이라 길을 못봅니다. 靈性은 잃어버리고 情欲에만 사는 사람은 문명했다 해도 결국 소경 말 탄 신세입니다. 그놈이 앞을 못보는데 그것을 믿고 멍청 올라 앉아 너 갈데로 가자 하는 것입니다. 깨달아 눈이 열린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말 내버리고 딴 길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억지로는 될 수 없고 소경 말을 소경 말만큼 알아서 사랑해 주어야 나도 살고 저도 삽니다. 弄이 그것 아닌가?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데리고 노는 것 같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일을 좋아합니다. 그래 일꾼을 존경하고 有事之秋를 기뻐합니다. 그러나 나이 많아 모든 맛을 다 보고 깨닫고난 할아버지 눈에는 그것이 다 우습고 불쌍한 것입니다. 일이 아니라, 이 세상은 놀자는 곳입니다. 노는 동안에 성인이 되어 지혜가 생깁니다. 정치란 것은 소꼽을 진짜로 여겨 코집 터지며 싸우는 개구장이의 일입니다. 보시오, 영웅이란 것이 허울 좋은 말이었지 어디 남아 있습니까?
瞎馬라고 했기에 할마의 출처를 찾았더니 거기
맹인기할마(盲人騎瞎馬)
야반림심지(夜半臨深池)
라는 구가 나왔습니다. 예로부터 인생을 이렇게 보아온 것입니다. 사람이 뭐냐 소경이 소경 말을 타고 캄캄한 밤 깊은 못가에 가 섰다는 것입니다. 정신의 눈이 뜨지 못하면 눈 뜨고도 소경입니다. 눈 떴기 때문에 소경입니다. 예수 말씀 옳습니다. “너희가 본다 하는 고로 죄 가운데 있다.” 차라리 소경인 줄 알았더라면 이 인생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래 이 詩句의 생긴 유래가 재미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위태로운 것을 표시하는 글귀 짓기 내기를 하는데 옆에 누가 그 詩句를 부르니 그 한 사람이 “돌돌핍인(咄咄逼人)”이라 부르짖었는데 그 이유는 그 자신이 애꾸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글을 보고 놀란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나 자신이 맹인기할마(盲人騎瞎馬)입니다. 또 개인으로는 설혹 게까지는 아니라 할 수 있더라도, 한 민족으로, 한 나라로 볼 때 소경이 소경 말탄 것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의 야반 아닙니까? 예수 말씀대로 때 다됐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깝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몰라도 역사는 그것을 보여주고, 역사는 또 그것을 몰라도 자연이 그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무엇입니까? 나의 보다 더 크고 보다 더 깊은 의식의 표현입니다.
자연이 보여주는 대조화, 초지혜의 입장에서 보면 이 문명은 선고 받은 문명입니다. 이 정치는 임심지(臨深池)입니다. 자기는 몰라도 자기네의 속에 잠자는 깊은 의식은 그것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옳게 밝히 깨닫지는 못하고 뭔지 모르게 충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초조합니다. 신경질적입니다. 발악적입니다. 눈을 들어 세계를 내다보시오. 그렇지 않은가?
어느 순간에 아차! 할 것입니다. 그다음은 불감간(不堪看)입니다. 제발 그때가 오기 전에, 이제, 바로 이제 경고를 듣는 것입니다. 멀리 들을 것 없습니다. 이상하게 뛰는 제 심장을 잠깐 가라앉히며, 속귀를 기울이면 들릴 것입니다. 귀가 눈보다 높습니다. 빛이 지나간 다음 소리가 들립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입니다.
지금이 고난주간인데 오늘이 금요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도 다 있는 것이지만 특히 기독교에서는 고난을 그 중요한 신조의 하나로 믿고 있습니다. 그 전통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원통한 죽음을 당했고 그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속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요일이 바로 예수가 그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날입니다. 하루를 지나고 사흘째 되는 날, 곧 일요일이면 부활하게 됩니다. 그래 그 교도들은 이 부활의 뜻을 다시 새로 체험하기 위해 해마다 부활절을 지키는데 그것은 우선 그 고난을 맛보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어제가 바로 그 금요일이어서 합동예배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도 하는 예식이지만 금년은 특히 긴장된 마음들입니다. 그것은 지난 3.1절 저녁에 명동성당에서 열렸던 기념 미사 때에 일어났던 명동사건이라 불리우는 사건으로 인해 많은 기독교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비상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되어 감옥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도 참석을 했었는데 김정준 박사의 설교 제목이 바로 십자가에서 운명 직전에 예수가 부르짖었던 이 구절이었습니다. 그는 한 시간 넘는 설교를 눈물로 엮어가며 했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상처는 깊고 우리 고통은 새롭습니다.
예수가 뭐요? 그리스도가 뭐입니까? 인간의 대표입니다. 십자가는 결국 인간의 십자가입니다. 고난도 인간의 고난이요, 죽음도 인간의 죽음이요 부활도 인간의 부활입니다. 사람은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여럿이 아닙니다. 남이 없습니다. 큰 나가 하나 있을 뿐입니다. 나는 스스로 자기는 기독교인은 아니노라고 했지만,H.G.웰즈의 말을 언제나 못잊습니다. Man may die, but Men never die 개인들은 죽겠지만 사람은 절대로 죽는 일 없다, 사람을 말할 때는mortal이라고 죽는 인생이라 하지만, 그것은 반 밖에 아니되는 진리입니다. 사람이 야말로immortal 불사체, 불멸체입니다. 이 不生, 不死, 不滅의 생명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속에 있게 된 데서 문제가 나옵니다.
예수는 인도식으로 표현하면 아바타르 곧 화신입니다. 인과법칙에 얽매임 없이 불가사의의 능력에 의해 이 인과의 세계 속에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본성이 그와 같이 자유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본래 영원한 것인데 그 죽지 않을 것이 죽을 것에 얽매였습니다. 거기 고난의 깊은 뿌리가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나는 아버지께로서 왔고 아버지께로 가노라는 그가, 이 세상에 있을 때는 근심할 수밖에 없으나 “두려워 마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한 바로 그 입이 이제 어찌 나를 버립니까 하니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 소리인 가? 구멍이 깊을수록 소리는 감동적입니다. 그 소리는 어떤 구멍에서 나오는 건가? 玄之又玄이 衆妙之門이지, 까맣고 또 까만데서가 아니고는 그 소리는 나올 수 없습니다. 이 날에 예수가 아니라 억만 고예와 억만 미래에 있을 모든 혼이 부르짖은 것이고 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것이 아니라 전 인류가 죽었고 또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은 슬픔의 고통인 동시에 또 무한한 기쁨의 부르짖음입니다. 아닙니다. 영원히 영원히 무한 번 죽고 무한 번 살아나는 것, 무한 번 지고 무한 번 이기는, 짐으로 이기는 것이 생명입니다. 감옥에 가 있고 교수대에 오르는 것은 누구가 아니라 곧 나, 이 나입니다. 내가 곧 사람이요 내가 곧 나라요 내가 곧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죽이는 자도 나요 죽는 자도 나인데 무한한 고통이 있습니다. 지옥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사실 지옥처럼 평안한 데는 없을 것입니다. 죽이는 자와 죽는 자를 구별하는 망상에 잡혀 내가 이겼다, 내가 옳다 하는 자의 갈 곳은 지옥 밖에 없는데 그렇게 갈라 생각하고 잘했거니, 강하고 지혜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선하거니 하니 그렇게 태평이요 마음 평안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대로 대적을 대적으로 아니보고, 선과 악의 뿌릴 뽑는 것은 못할 것으로 아는 마음은 얼마나 고통이겠습니까? 천당 지옥이 바뀌었습니다.
그 바뀐 것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자는 데가 십자가입니다.
울음 한숨이 나가거든 걱정 말고, 마음 놓고 마음껏 부르짖읍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들이여!
복 있도다, 너희 슬퍼하는 자들이여 !
씨알의소리 1976년 4월호 52호 (금지된 씨알의소리 생각사)
저작집30; 9-63
전집20; 8-278
말을 하는 사람은 한 마디 말을 ; 밑줄로 쓰여진 글은 박정희 정권의 사전검열에 의해 삭제 당했던 부분을 다시 살려서 당시의 원문 그대로 싣는다. (ssialso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