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 둘째 날
가. 남산 탑골
아침 식사를 위해 뷔페 식당으로 내려오니 아직 어제의 전투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원우들도 보인다. 후후! 이놈의 술이 먹을 땐 좋긴 한데... 김교수는 숲속 산책을 하면서 술을 깨라고 하는지 우리를 남산으로 안내한다. 남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산 곳곳에 신라의 숨결이 서려있기에 남산만 다 보려 하여도 하루 갖고는 어림도 없는바, 김교수는 그중 가볍게 산책하며 볼 수 있는 탑골의 마애조상군(磨崖彫像群)으로 안내한다.
남산은 지금은 경주 교외에 있는 산같이 보이나 경주가 인구 87만의 - 지금도 경주는 경주시만 7만이요, 경주군과 합해도 20만밖에 안 된다고 한다. - 세계 3대 도시의 하나로 융성할 때는 남산은 도시 안의 산이었다. 경주가 세계 3대 도시의 하나였다면 당연히 비단길(silk road)의 종착점은 경주다. 그렇기에 그 먼 옛날 아라비아인들이 그 길고 긴 비단길을 횡단하여 경주까지 와 괘릉의 무인석으로, 또 처용가의 주인공 처용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차에서 내려 5분 정도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니 높이 약 10m의 바위에 돌아가면서 불교에 관한 여러 도상들이 새겨져있는데 총 34점의 도상이 새겨져 있단다. 다가가는 우리에게 바로 보이는 것은 9층탑과 7층탑. 김교수는 목탑을 새겨놓은 거라며 황룡사 9층탑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바위에는 돌아가면서 여러 불상과 승려상, 비천상(飛天像) 등이 새겨져 있는데, 비스듬히 숲을 뚫고 들어오는 아침의 광선에 조각들은 살아나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다. 바위를 돌아 위로 올라가니 머리에 후광을 두르고 있는 3 부처님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앞에선 한 남자가 등에는 카메라 배낭을 메고 손에는 고급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촬영중이다. 김교수는 안장원이라는 사진작가가 이곳 바위들을 찍는데 1년이 걸렸다나? 매일 특정 시각에 자기가 바라는 광선이 비칠 때만 사진을 찍으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고... 소나무 사진으로 유명한 배병우 작가도 이 곳 경주 남산의 소나무 사진으로 유명해졌고...
나. 안압지
탑골을 나온 우리들은 안압지로 향한다. 이번 답사여행에서 내가 유일하게 가본 곳. 못 이름은 원래 월지(月池)인데,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어 안압지(雁鴨池)라고 부르게 되었다는데, 안내판 제목은 안압지가 아니라 임해전지(臨海殿址). 즉 이곳에 단순히 신라귀족들이 놀던 호수만 - 연못이라기엔 조금 규모가 크기에, 이곳을 바다로 상징한 신라인의 기상을 따라 호수로 부르고 싶다. - 있었던 것이 아니라 궁궐이 있었다. 길 바로 건너편은 반월성인데, 신라가 통일의 자신감으로 반월성을 넘어 이곳까지 왕궁을 확장하였으니 동쪽의 궁이라 하여 동궁이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니, 이곳은 '뜨는 해'인 왕세자가 거처하는 곳. 그래서 왕세자를 동궁마마라고 하지 않는가.
안압지는 인공호수다. 즉, 이곳의 땅을 파내어 물을 끌어들여 호수를 만든 것. 그럼 파낸 흙은? 호수의 북동쪽으로 둔덕들이 펼쳐지는데 파낸 흙으로 가산(假山)을 만든 것이다. 이는 신선이 거주한다는 중국의 무산 12봉을 생각하고 만든 것이고, 호수 내에도 3개의 섬이 있는데 이 섬들도 신선이 사는 발해만 동쪽에 있다고 믿었던 중국의 3개의 섬인 삼선도(영주, 봉래, 방장)를 생각하고 만든 것. 12봉과 3개 섬을 만든 후 이곳에 온갖 기화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들을 놓아길렀다. 임해전은 동궁의 여러 전각중 안압지에 접해있는 한 전각을 말함인데, 바다에 임한 전각이라고 이름 지은 것으로 보아 안압지를 바다로 상징한 듯. 실제로 안압지 오른쪽을 따라 호수를 한 바퀴 도는데 구불구불한 호안(湖岸)에 나무들을 심어 안압지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가면서 계속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다를 상징할 만도 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가다보면 물길이 길게 안쪽으로 들어온 곳도 있어 그곳을 돌아가자면 바다를 향하는 강을 생각하게 한다. 호수의 한쪽 면이 꺾이는 곳에서는 물이 흘러들어오고 있다. 단순한 물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2개의 복숭아 모양의 수조(水槽)가 연결되어 물은 이 수조를 감아 돌다 자기 몸을 따라 들어오던 불순물을 떨궈내고 호수로 들어가고 있다. 이걸 보니 경복궁 향원정 연못에도 북한산의 물이 열상진원에서 감아 돌면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던 생각이 나는구나. 이렇게 호수로 흘러들어간 물은 바로 앞의 섬에 의하여 또 한 번 회전하여 호수 중심지로 나아간다. 물이 고이지 않고 계속 흐르게 하려는 선조들의 지혜. 당연히 또 하나의 섬은 출구 쪽에서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걷다보니 이제 호안은 곡선에서 직선으로 변한다. 직선은 가다가 몇 번씩 직각으로 꺾이면서 그 위에 전각을 올려놓는데, 신라인은 이렇게 한쪽은 곡선, 다른 쪽은 직선으로 만들어, 자연과 인공의 세계, 신선과 세속의 세계, 여성과 남성의 세계를 대비시키는데, 김교수는 안압지는 이렇게 신라적인 직선적 요소와 백제적인 곡선적 요소를 잘 조화시킨 멋진 호수라고 한다. 흐~유~~ 이렇게 설명을 들으니 안압지의 멋진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원우들끼리 와봐야 장님 코끼리 만지기 아니었겠는가?
호숫가에 복원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김교수는 복원 건물도 문제가 많다고 한다. 아무도 신라 건물이 어떤지를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순전히 후대의 건물을 참조로 하여 상상으로 복원한 것이라나. 출토된 유물중 주사위 같이 생긴 주령구(酒令具)라는 유물이 있는데,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놀이기구로 사용된 것이라는데 이를 주사위처럼 굴려 거기에 나오는 대로 행동을 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술 석잔 한 번에 마시기', '얼굴을 간질여도 꼼짝 않기',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등등. 두 사람이 함께 팔을 구부리고 술을 마시는 벌칙도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러브 샷'과 비슷한 것 아닐까? 신라인들도 술 한 잔 들어가면 지금이나 비슷한 놀이를 하였구나. 하긴 사람의 성정(性情)이야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겠지.
다. 월정교
안압지를 나온 우리는 근처 남천(南川)의 월정교지(月精橋址)로 향한다. 월정교라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맺어진 다리로 길이 63m, 너비 13m로 지금도 왕복 4차선의 도로에 해당하니 당시로서는 정말 대교(大橋)라 할 수 있는데, 현재 복원공사중이다. 이곳을 발굴조사해본 결과 불에 탄 목재조각과 기와조각이 출토되었기에 현재 다리 위로는 누각이 연결된 누교(樓橋)로 복원하려고 한다는데, 김교수는 다리 모습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 짐작대로 다리를 복원하는 것에 대해 반대 의사를 명확히 표시하였다고 한다.
김교수가 우리 역사상 최고 승려임을 확신하는 원효는 그 유명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 불교의 여러 분야에 걸쳐 150권이나 되는 책을 내고는, 이제는 불교 대중화에 앞서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요석공주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려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라는 노래 하나를 퍼뜨린다. 그리고, 이 월정교에서 일부러 아래 남천(南川)으로 빠져 바로 인근의 요석궁에서 옷을 말린다.
당연히 요석공주와의 사랑이 이어지고 여기서 태어난 이가 바로 설총. 원효대사의 아들이 설총이라는 것은 원효대사의 성이 설씨라는 것. 설총은 우리나라 유학의 시조이다. 원효로서는 자신은 불교로서 극치를 이루었으나 이것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아들 설총에게는 유학을 공부하도록 한 것 아닐까? 이후 원효는 환속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소성거사(小性居士)라 부르며 무애(無碍)춤을 추고 무애가를 부르며 스스로 막힘이 없는 자유와 해탈의 삶을 살았다. 이제 요석궁은 사라지고 없으나 그 자리엔 요석궁이라는 식당이 있다고 하니 오늘 점심은 그곳에서.
라. 경주향교
이제 김교수는 우리를 경주 교동에 있는 - 항교가 있는 동네라 교동 - 경주향교로 안내한다. 향교라면 신라의 유적과는 거리가 좀 있을 듯한데, 김교수가 하필이면 그 많은 경주 유적지중에서 이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는가 하였으나, 김교수의 관심은 향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향교 건물에 있었다. 김교수는 경주향교는 조선 시대의 많은 향교중의 하나인데 그 건물이 다른 향교보다 유달리 크다고 한다. 그 이유는 건물은 조선시대 건물이지만 건물이 터 잡고 있는 건물의 대(臺)나 초석의 자리 등은 신라시대의 것이라며 원래 이곳에는 신라의 국립대학인 태학이 있었다 한다. 신라의 국립대학이 있던 곳이니 향교보다는 건물의 규모가 컸을 것 아닌가? 그러니 조선에 들어와 이러한 큰 기초 위에 건물을 지으려니 당연히 건물은 넓게 높게 올라갔어야 한단다. 그래서 김교수는 비록 오늘날 신라시대 건물은 없지만 여기서 간접적으로나마 신라시대의 건물의 모습을 느껴보라며 우리를 이리로 안내하였단다. 으~음 이런 설명은 건축과 교수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것이겠지?
향교로 들어서니 건물은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로 우리가 들어선 마당은 명륜당 앞마당이고, 그 앞으로는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대성전이 있다. 김교수는 '明倫堂' 현판 글씨는 중국의 주자가 직접 쓴 것이라 한다. 그런데, 주자의 글씨치고는 좀 품격이 떨어진다 했더니, 김교수는 아마 저 글씨를 탁본해와 100번은 더 베껴 썼기에 원래의 주자 글씨보다는 맛이 많이 떨어지게 된 것이라고... 하여튼 나라 안에서 주자의 글씨를 보기는 처음이다.
우리가 명륜당으로 들어설 때에는 대성전 마당으로 통하는 문은 잠겨 있었으나, 그새 관리인 와서 열어주어 우리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마당은 그냥 들어올 수 있었으나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은 그냥 들어갈 수 없다. 김교수는 관리인의 요구대로 대성전을 향하여 4번의 절을 하고 - 그것도 정면에서 하는 것이 아닌 모퉁이에서 해야 한다. - 신발을 벗고 대성전 위로 오르고, 우리도 공손하게 신발을 벗고 조신하게 대성전 안으로 들어선다. 김교수는 답사를 숱하게 다녀보지만 이렇게 절을 하고 들어가보긴 처음이라나. 대성전은 초록의 단색으로만 단청이 칠해져 있는데, 초벌단청만 칠한 것이라 한다. 하긴 공자의 그의 제자들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을 울긋불긋한 단청으로 칠할 수는 없을 것. 안으로 들어가니 중앙에 공자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고, 양옆으로 공자의 제자들과 우리나라 유학자 18명이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1대는 바로 원효의 제자 설총이다.
마. 최부자집
경주향교를 돌아 나오니 바로 이웃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그 유명한 최씨 고택이 있다. 경주 최씨가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살다가 최언경(1743-1804) 때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였는데 400년 동안 12대 만석지기가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이런 만석군이면 단지 불우한 이웃을 돌봐주면서 적당히 편안하게도 살 수 있었을 것이나 12대 만석군의 마지막 부자인 최준(1884-1970)은 암울한 일제 시대를 그냥 편안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고, 본인이 직접 대한광복회의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르는 등 본인이 직접 몸으로 독립운동을 하였고, 해방 후에는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영남대 전신인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였다. 지금은 5,16. 재단에 학교를 뺏겼는데,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명문가가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이 아닐까? 아니 그보다도 불법적으로 뺏은 것은 원상 복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전 재산을 내 놓으니 이런 99칸의 집을 유지할 수 없어 이 집도 영남대에 기증하여 현재 영남대에서 이 집을 관리중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눈에 띄는 편액은 '大愚軒'과 '鈍次'.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내지 않는다는 중용의 덕을 실천한 최부자집이라 최준의 증조부 최세린은 호를 크게 어리석다며 '大愚'라 하였고, 아버지 최현식은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하다며 '鈍次'라고 하였다. 어찌 이들이 어리석고 둔하단 말인가? 자신들을 어리석고 둔하다며 몸을 낮추면서, 그러면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이들에게 절로 머리 숙여진다.
또한 마당에는 육훈(六訓)과 육연(六然)의 내용을 새긴 목판이 세워져 있다. 최부자집은'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라는 가르침을 바탕으로 육훈과 육연을 가슴에 새겨 베푸는 삶을 실천했다. 인용이 길어지더라도 우리도 이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 전부 인용해보자.
육훈 -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 -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마라. 2.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3.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4.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5.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육연 - 자신을 지키는 지침
1.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自處超然) 2.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對人靄然) 3.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無事澄然) 4.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有事敢然) 5.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得意淡然) 6.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失意泰然)
봄에 우리 원우들과 같이 남도 답사를 갔을 때에도 운조루에서 어려운 사람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행랑채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쓴 뒤주를 갖다놓은 것을 보았는데, 최부자댁은 운조루의 양반 유이주보다 한발 앞선다. 최준의 독립운동 활동을 보노라니 또 하나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우당 이회영 일가가 생각난다. 한일합방이 되자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키고 지금의 가치로 600억원이나 되는 전재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옮겨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한 우당 이회영의 6형제. 우당은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관동군 사령관 무토온 노부요시를 암살하려다 배신자의 밀고로 일본놈들의 몽둥이에 맞아죽었지. 도올 김용옥이 교육방송의 한국독립운동사 프로의 사회자로 나와 우당 선생의 발길을 따라가 우당 선생의 최후를 전하며 울먹일 때 나 또한 우당 선생의 숭고하고도 비참한 삶과 그런 우당 선생을 그때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부끄러움에 울먹였었지.
다시 밖으로 나오니 최부자집 바로 옆에는 교동법주 제조장이다. 안내문을 보니 법주는 최부자댁에 전해 오는 비주(秘酒)로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하던 관직에 있던 최국선이 고향으로 내려와 최초로 빚었다고 하는데, 그 재료인 물은 최씨댁 마당의 우물물을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널리 알려진 경주 법주보다는 이것이 보다 정통의 경주법주라는 얘기가 되는 모양이다.
이제는 점심을 먹어야 할 때. 예약해 놓은 요석궁 안으로 들어가니 정원을 예쁘게 꾸며놓은 것이 평범한 음식점이 아니다. 이곳은 신라시대에는 요석궁이 있던 곳이고 지금 바로 이 음식점은 최준 선생의 동생 최윤의 집으로 의병대장 신돌석 장군이 이곳에 은둔한 적이 있다고 한다. 최부자집에 뿌리를 둔 음식점이기에 이곳에서 제공하는 한정식은 최부자집 전통 가정음식으로 영친왕 이은 전하와 이강 왕자도 이곳의 음식을 즐겼다는군.
그런데, 김교수가 요석궁과 관련하여 들려주는 에피소드 하나. 학교 다닐 때 최부자집 답사를 위해 택시를 타고 최부자집에 가자고 하였더니, 택시 운전사는 최부자집보다는 요석궁이 좋다며 요석궁으로 안내하더라나. 그런데, 요석궁 앞에 내리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네들이 나와 반갑게 맞이하는데 당시 요석궁은 요정. 당황한 김교수가 자기가 찾는 곳은 이런 곳이 아니라고 하니, 여인네는 자기네를 낮게 본 것으로 생각하고 이런 곳이 뭐가 어때서냐며 화를 내더라나. 흐흐. 당시로서는 순진한 청년이었을 김교수가 많이 당황하였겠군. 서울의 유명한 요정 삼청각도 세월의 흐름 속에 식당으로 변신하더니 이곳 요석궁도 그렇게 변신한 모양.
바. 황룡사 터
이제 마지막 행선지는 황룡사 절터. 황룡사는 4개의 블록을 하나의 절터로 한 신라의 최대의 절이라고 하더니만 정말 넓은 풀밭에 아무 것도 없이 휑하니 뚫려있다. 우리는 풀밭 한가운데의 9층탑 터로 간다. 김교수가 손을 대고 있는 큰 돌은 9층탑을 세울 때 탑의 중심을 잡아주던 고주(高柱)가 있던 자리. 9층탑은 가로 7칸, 세로 7칸, 높이 80여 미터의 어마어마한 목탑이었다.
신라가 이런 어마어마한 탑을 세운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 신라는 요즈음 드라마로 뜨고 있는 선덕여왕이 통치하고 있을 때인데, 여왕이 제왕의 자리에 있으니 나라 안에서도 얕보는 귀족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 실제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다. - 다른 나라에서도 얕보고 왕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당 태종은 자기 종친 한 사람을 보내 임금으로 삼게 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또, 신라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다가 당의 철수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게다가 백제가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를 공격해 오니 선덕여왕은 나라 안팎으로 곤경에 처하게 된 것. 이런 때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인 자장율사가 귀국하여서는 이곳에 9층탑을 세우면 주변 9개 나라가 신라에 조공을 바칠 것이라 했다나? 하여 선덕여왕은 백제의 건축가 아비지를 초청하여 9층탑을 세운 것. 신라와 백제가 적대관계에 있으면서도 이런 문화의 세계에서는 서로 소통하고 있었나보다. 신라가 어려울 때에 이런 거대한 불사(佛事)를 벌인 것은 고려가 몽고 침입 때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것과 같은 심정이리라.
이런 웅장한 황룡사는 1238년 침입한 몽고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놈들! 이런 세계적으로 보존할만한 유물은 좀 남겨두어야 하지 않았나? 그 후 이곳에는 민가가 들어서고 농토로 변하였으나, 정부에서는 민가 100여호를 다른 데로 이주시키고 1976년부터 8년간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지금과 같이 건물터를 남겨둔 것. 일부에서는 이런 너른 터를 이렇게 공터로 남겨두기보다는 황룡사를 복원하자는 얘기도 있다고 하나, 김교수는 황룡사의 원모습이 어떤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복원하자는 것이냐며 반대를 하였단다.
9층탑지 옆에는 장중한 기념비가 서있다. 어째 이것은 온전하게 서있나 했더니 이 9층탑을 건립한 아비지의 건축예술을 기리기 위하여 1987년 경주시에서 문화재위원 문명대님에게 글을 짓게 하고 정수암님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세운 비석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9층탑을 세우면 조공을 바칠 나라에 백제가 들어가 있는 것을 안 아비지가 많은 갈등을 겪었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인 정신으로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의 아름다운 탑을 세운 아비지에 대해 이런 기념비를 세워줄 만도 하겠다.
이제 9층탑지에서 황룡사의 중심 건물이었던 그 옆의 금당지(金堂址)로 발길을 옮긴다. 금당에는 장육존상(丈六尊像)과 양옆으로 협시보살을 세웠는데, 장육존상의 높이만 4.8m나 되었다고 한다. 이 불상들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즉 진흥왕 때에 서축아육왕(西竺阿育王)이 황철 57,000근(斤)과 황금 30,000분(分)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해 인연 있는 나라에서 장육존상 완성을 기원하는 내용과 일불, 이보살상의 모형을 바다에 띄어 보냈는데, 신라의 관리가 이를 발견하고 왕에게 전하니 왕은 동축사(東竺寺)를 세워 이들 삼존모형을 안치하게 하였단다. 이후 황금과 철을 옮겨와 장육존상과 두 보살상을 주조하여 황룡사에 모신 후 10년 뒤에 금당을 지어 이곳에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장육존상이 안치되었던 주춧돌을 가리키면서 네모난 구멍은 무엇이었겠냐고 묻는다. 장육존상이 너무 커서 장육존상이 넘어지지 않도록 받치는 물체를 세웠던 구멍이란다. 이 정도의 불상이었으니 장육존상은 황룡사 9층탑과 함께 신라인들이 제일 애지중지하는 보물에 꼽혔을 것.
이제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버스로 돌아간다. 가면서 생각해본다. 우리 선조들은 삼국통일도 되기 전인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이런 거대한 탑을 만들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그 후에는 이런 거대한 탑이 나오지 않았을까? 최소한 1238년 몽골군에 의해 이 탑이 불 타 없어졌다면, 고려와 같은 불교국가에서 왜 이를 다시 세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선덕여왕 때는 여러 가지 정치적 고려에 의해 이런 거대한 탑을 세울 절실한 필요가 있었지만 고려에는 굳이 이를 거탑을 다시 세울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일까?
아까 우리를 내려준 버스는 우리를 내려다주고 분황사 앞 주차장에서 조용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주차장으로 접근하니 담 너머로 분황사 모전석탑이 보인다. 학교 다닐 때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아 올렸기에 모전(模塼) 석탑이라고 배우던 것이 생각난다. 경주 오면 많이 거쳐 가는 곳이라 김교수는 그냥 지나치는군. 이제 모든 답사 여정이 끝났다. 이제 차는 대구역으로 향한다. 버스로 그냥 올라갔다간 혹시라도 늦을까봐 학교에서 자상하게 KTX 기차를 예약해주었다.
버스는 경주 시내를 벗어나기 전에 어느 가게 앞에 잠시 멈춘다. 여태까지 문화유적 답사로 정신을 살찌웠으니 몸을 살찌우기 위해 경주의 명물 황남빵을 사기 위해 잠시 멈춘 것. 학교측에서 우리에게 황남빵을 선물로 주겠단다. 나는 새로 뜨는 경주의 또 하나의 명물인 찰보리빵도 사고 싶어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차가 멈춘 곳 바로 앞에는 조그만 공사 현장 같은데 녹색 울타리를 둘러쳐놨다. 의아하여 쳐다보니 태종로 지중화 사업을 하느라고 땅을 팠더니 문화재가 나와 공사를 중단하고 유적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것. 하여튼 경주는 시내 어디를 파더라도 문화재가 묻혀 있을 것이다.
길 건너 찰보리빵 가게로 가는데 바로 그쪽으로도 길 건너편에는 신라의 옛무덤이 있고, 무덤을 두르고 있는 담에는 선덕 여왕 행차를 재현한다는 펼침막이 걸려있다. 흐흐! 요즈음 드라마 선덕여왕이 뜨니까 재빨리 이런 행사도 기획하여 하는구나. 다시 버스는 출발하여 고속도로에서 경주시로 들어오는 곳에 전통 성문 형식으로 세운 관문을 지나 고속도로로 올라탄다. 1박2일의 경주 답사.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주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 의미 있는 답사의 여정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