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진하게 / 조미숙
점심을 먹고 부지런히 나갈 준비를 마친다. 토요일 오후라 가벼운 옷차림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것저것 입었다 벗었다 한다. 가볍게 청바지에 티를 걸치고 조끼를 입었다. 약간 썰렁할 것 같았는데 거리의 햇볕 아래 서니 반팔 차림이 아닌 것이 아쉬웠다.
어제부터 커피 집 사장이 보이지 않는다. 아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안 지 십수 년이 된 것 같은데 가게를 안 나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꽤나 건강한 체질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햇빛이 빛나는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책을 읽는데 졸음이 쏟아진다. 바깥에 내 놓은 꽃양귀비의 가녀린 꽃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스무 살이 지나서 커피를 알았다. 동서 맥스웰 커피는 불후의 걸작이었다. 냉동 건조된 알맹이에 프림과 설탕을 더한 맛은 신세계였다. ‘일 대, 일 대, 일’ 아니면 ‘둘, 둘, 하나’ 라는 공식이 맛을 좌우했다. 생전 접해 본 적 없어 타는 법도 몰랐던 시절을 지나 본격적으로 믹스 커피 맛에 중독된 시기에 접어들었다. 이는 시골 부모님께도 전해져 밥 먹으면 으레 밥그릇에다 푸짐하게 타서 마셨다. 항상 시골집에 사 가던 단골 식품 중의 하나였다.
사장은 처음에 까페를 준비하면서 내게 맛이 어떠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메리카노는 생소했다. 내 입에는 쓰기만 할 뿐 밍밍했다. 달고 묵직한 맛의 믹스 커피를 먹어야 제대로 입가심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친분을 핑계 삼아 놀러 다니면서도 잘 마시지 않았다. 커피 맛도 모르면서, 찻집에 앉아 있으면 멋있게 보인다는 겉멋도 들어 자주 들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커피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기호품이 되었다. 여유 시간을 즐기는 데 딱이다. 내겐 전에 없는 호사다. 사실 한 달 커피 값은 무시 못 한다. 오롯이 나를 위한 지출이다.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면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듯하게 보인다. “오! 책, 멋지다.”는 탄성을 들으면 어깨가 으쓱한다. 거기에 집중력이 흩어지고 졸음이 쏟아지는 집에서보다 분위기 있는 까페가 책 읽기에 좋았다. 익숙한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따뜻함이 나를 부른다.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쳤다.
돈 없다고 징징거리면서도 매일 꼬박꼬박 카페에 가는 나를 나도 이해하지 못해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큰마음 먹고 비교적 싼 커피 머신을 샀다. 바쁘면 까페 들를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광고처럼 맛있는 커피가 나오지 않았다. 거품이 너무 많아 옛날에 먹던 프림을 잔뜩 넣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아직 서툴러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 아니다. 압력이 높은 기계에서 나오는 맛과 같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아직도 커피 맛은 잘 모른다. 어쩌면 이 집 맛에 처음부터 길들여져서 그런 줄도 모르겠지만 여기만큼 맛있는 곳도 없다. 풍부한 크레마(커피 위의 거품)가 고소한 맛을 더한다. 쌉싸레한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난 항상 아메리카노이다. 가끔 다른 것을 마시고 싶어 라테나 카푸치노를 시키기도 하지만 이내 후회한다. 역시 깔끔한 맛이 최고다. 드립 커피는 부드럽긴 하지만 내 입맛에는 온도나 묵직함에서 약간 부족한 맛이다. 더치커피도 아니다. 아무리 뜨거운 물을 섞어도 식은 커피다. 난 첫모금은 혀를 델 정도여야 한다. 아이스아메리카노는 너무 더워 견딜 수 없으면 찾기도 하지만 금방 호로록 마셔버리면 느낌이 안 난다. 한 여름에도 난 뜨겁고 진한 아메리카노다.
바쁘지 않으면 사장과 앉아서 속내도 꺼내 놓는다. 때론 냉정하게 판단해서 조언을 한다. 가끔 내가 철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정치 얘기를 하면 침을 튀기며 열변을 쏟아내기도 하는데 난 정치는 문외한이라 주로 듣는 쪽이다. 그이는 조국과 문재인 전 대통령과 유시민을 좋아하는 좌파다. 여럿이 모이면 함께 수다를 떨기도 한다. 가끔 맛있는 간식도 기꺼이 내어 놓는다. 대부분 단골이니 꼭 아는 사람을 만난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모인다. 항상 앉는 우리 자리가 있다. 누군가 카톡에 “출근했소?”라고 물으면 우리는 안다. 그 출근이 무얼 말하는지. 퇴근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밥을 먹어도 커피는 이곳에서 마시기도 한다.
내 커피 사랑은 아프면 주춤한다. 아니 까페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나를 우울하게 한다. 어젯밤도 갑자기 속이 쓰렸다. 낼 점심 먹고 나가야 하는데 걱정이 앞섰다. 점심을 많이 먹었다. 든든하게 먹으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많이 아프지 않으면 커피를 먼저 마시고 시간을 두었다가 약을 먹기도 한다. 혹시 모를 속쓰림에 대비해서다. 요즘 자주 속이 쓰리는데 다른 걱정보다는 커피를 마시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더 크다.
가끔은 혼자 있고 싶은데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기도 한다. 누군가는 꼭 오기 마련이기에 몇 시간 수다만 떨다가 가는 날이면 후회하기도 한다. 그래서 혼자 가도 부담스럽지 않고 커피 맛도 좋은 예쁜 곳을 단골로 만들고 싶은데 쉽지 않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찾더라도 차를 끌고 나가기에도 좀 그렇다. 어쩔수 없다. 그 집만큼 좋은 곳도 없는데. 문을 닫는 일요일이면 할 수 없이 다른 곳에 간다. 스타벅스가 동네에 있긴 하지만 커피 맛이 너무 쓰고 사람이 많아 거의 가지 않는다. 무료 쿠폰이 있으면 모를까? 다른 가게도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차선책이다. 일요일이면 자주 가기에 가게 사장님도 나를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준다. “아메리카노 뜨겁고 진하게 드릴까요?”
언젠가 티비에서 기후위기가 계속되면 커피도 사라질지 모른다고 했다. 세계 커피 원두 생산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브라질이 극심한 한파와 가뭄 등으로 물이 부족해 생산량이 줄었다. 2016년 호주기후연구소에서는 2050년이면 커피 재배지가 반으로 줄어들고 2080년에는 야생 커피가 멸종할 것이라는 경고도 내놓기도 했다. 좋아하는 커피 가격이 폭등하고 결국에는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섬뜩하기도 한다. 기후위기가 커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기어이 속이 말썽이다. 오늘은 입맛만 다신다. 당분간 자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