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 테마 여행의 막을 내리다 / 최종호
알람을 맞춰 놓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는지 눈이 자동으로 떠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 다시 잠을 청했다. ‘드르륵 드르륵’ 다섯 시가 되자 핸드폰이 울린다. 얼른 일어나 살금살금 걸어 현관 옆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욕조에서 쪼그려 앉아 옹색하게 머리를 감았다. 안방 욕실에 있는 샤워 공간에서 씻으면 편하지만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고 그랬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다. 총무가 빌려 온 9인승 카니발이 깜빡이고 있다. 비슷한 시간에 모두 도착했다. 시내를 지나며 두 사람을 더 태운 다음 어둠을 뚫고 복잡한 도시를 빠져나갔다. 한 시간쯤 지나자 동쪽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더니 여명이 밝아 온다. 지난 주말, 이렇게 옛 직장 동료 일곱 명은 파주 쪽으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모임 이름은 즐찾사.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함께한 지 20년이 다 되어 간다. 예전에 같은 학교에 근무하면서 ‘교육부 지정 연구학교’를 추진하느라 많이 고생했다. 그래서 끈끈한 연대감으로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 쇠도 녹고 바윗덩어리도 부스러지기 마련이지만 아직도 건재한 까닭은 1년에 두 번 테마 역사 여행을 즐겁게 다녀오기 때문이다.
이번에 계획한 곳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오릉(西五陵)과 서삼릉(西三陵), 파주에 있는 삼릉과 화석정(化石亭)이다. 서오릉은 서울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다섯 개의 능(陵) 즉, 세조의 첫째 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였던 장(璋)과 그의 비(妃) 소혜왕후의 경릉, 세조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의 8대 왕 예종과 그 계비(繼妃) 안순왕후의 창릉, 19대 왕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가 묻힌 익릉,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21대 왕 영조의 정비(正妃) 정성왕후의 홍릉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왕릉은 대부분 도성에서 100리(약 40㎞) 안에 있다. 그것은 임금이 하루에 성묘를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능(陵)은 풍수 지리적으로 명당이라고 하는 곳에 자리를 잡아서인지 경관이 뛰어나다. 묘지 주위를 잘 관리해서 아름드리나무도 많을 뿐만 아니라 묘와 넓은 터에 있는 잔디도 잘 가꾸어져 지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 또 대부분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걷기에도 좋다.
능(陵)의 구성은 대개 비슷하다. 속세와 능역(陵域)을 구분하는 금천교(禁川橋)를 지나면 홍살문을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신성한 지역이라는 표시다. 그 문을 지나면 제사를 지낼 때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향로(香路)와 왕이 다니는 어로(御路)가 길게 뻗어 있다. 곧고 넓은 길이 끝나는 곳에 정자각(丁字閣)이 있는데 이곳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그 뒤편 높은 언덕에 봉분(封墳)이 있으며 널따랗고 평평한 혼유석(魂遊石)이 앞에 놓여 있다. 능(陵)의 주인을 보호하고 지키라고 만든 문석인(文石人)과 무석인(武石人)도 볼 수 있다.
서오릉에서는 특히 숙종의 후궁 장희빈의 묘가 눈길을 끌었다. 그녀가 누구인가? 조선 역사에 밝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녀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임금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고 왕자(훗날 경종)를 낳은 뒤에 정1품 빈(嬪)의 품계에 오른다. 그녀의 모략과 음모로 숙종의 정실부인인 인현왕후가 폐위되었으나 복위되면서 희빈은 다시 후궁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 후 자리를 되찾으려고 왕비를 저주하는 주술을 사용한 정황이 드러나 사약을 받고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지 않는가. 그녀가 묻혀있는 대빈묘(大嬪墓)가 숙종과 인현왕후의 명릉 가까이 있어 '지금도 호시탐탐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중종의 아들 인종과 그 비(妃) 인성왕후가 있는 효릉, 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의 희릉, 철종과 철인왕후 안동 김씨의 예릉이 있는 서삼릉을 둘러보고 조선의 왕릉 여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파주 삼릉은 시간이 없어 가지 못했으나 본 것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 동안 많이 본 왕릉과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남쪽에 있는 조선 시대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자연 지형과 조화를 이뤄내는 독특한 건축과 조형 양식, 40기 왕릉 모두 완벽하게 보존된 점을 높이 평가해서다. 통일되면 개성에 있는 조선의 2대 임금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厚陵)에도 찾아갈 날이 올 것이다.
이번 여행도 오가는 데 시간을 많이 걸렸으나 잊지 못할 추억을 많이 남겼다. 율곡 이이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논했다는 화석정도 보고 임진강에서 황포돛배를 타고 송악산을 바라보며 경치도 즐겼다. 이런 경험 못지않게 재미있었던 건 차에서 나눈 회원들의 정담 때문이다. 이제는 현직에 있는 사람보다 퇴직한 사람이 대다수지만 오랜만에 나이를 잊은 듯 많이 웃고 떠들었다. 이런 날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저녁에 빈 술병도 많았다.
첫댓글 아내를 배려하는 첫 문단만 봐도 선생님의 가정생활이 그려집니다. 배려심이 깊은 게 저랑 비슷하네요. 하하.
즐찾사의 답사기, 재밌습니다. 왕릉을 보면 그냥 진짜 크다로 끝이었는데 저도 안목을 좀 키워야겠습니다.
역사여행 잘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