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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오는 것 뿐인 세상에서 늘 때에 대하여 할수있는 일은 맞추어 살아가는 것 뿐인 것을 알때쯤 때는 가고 있는 것을 아는 산꾼도 호사로운 산들바람 따라 백덕지맥 사자산 백덕산 줄기를 새털처럼 다녀왔다.
결함決陷이란 제대로 갗추지 못하여 흠이 되는 부분이다. 결決은 결단을 위한 뜻이고, 함陷은 모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모자라는 것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결함을 말하면 우선 인간을 말할수 있다. 신이 만든 결함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신은 완벽한 것을 만드는데 이찌 인간을 결함으로 만든 것일까? 완벽하면 신이 되기 때문이다.
신이 되는 착각에 종종 신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특혜를 알때쯤은 성숙이라는 신의 선물을 받아보아야
인간인줄 아는 것이다. 결함을 가진 인간들의 관계는 항상 결함투성이기 때문에
끝없는 반목을 가지는 것 뿐이다. 인간이라는 것을 잊고 끝없이 우위를 접하는 위치를 찻으려 하는 괸계는 늘 불안하고 고뇌하는 것이다. 신의 이름을 빌려서 결함을 감추고 가상의 진리를 만들어 존재하려는 욕망은 수세기 전부터 종교의 탈을 쓰고 자행하는 최대의 결함 이다. 앞으로도 계속 진리라는 탈을 쓰고 사는 것들에 대한 사유가 없어면 결국은 노예의 길로 가는 것이다.
결함이란 항상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서부영화의 대부는 단연 존ㆍ웨인을 모른 사람은 드물다. 물론 젊은 분들은 서부영화의 매력을 잘모르지만 세대전에는 외국영화의 절반은 서부영화였다. 미국사회에서 서부영화는 옛 향수의 추억이고 미국사상의 개척정신의 원조이기에 자주 보는 것이다.
존ㆍ웨인이나 같이 촬영에 노출된 동료들도 '징기스칸 ' 이라는 영화촬영을 위해 네바다 평원을 돌아다녔는데 이곳은 원래 핵실험 장소였지만 그때는 방사선을 모르고 살아갈때 였으니 모든 영화인들은 쉽게 방사선 에 무지하였다. 감기나 피로가 있어도 그냥 열심히 촬영하고 힘드는 것이 당연한 일인줄 알고 지냈지만 한사람 한사람 모두는 암이나 질병으로 고생하다 사망하였다. 물론 존ㆍ웨인도 암이나 질병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셨다. 인간은 새로움에 쉽게 노출된다.
그것이 주는 결함은 지나고 나면 알아지는 것이 인간들의 생리이고 진실인 것이다. 결과는 항상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지나고 나서 아는 것이 문제지만 결함투성이라는 새로운 것들은 처음에는 모른다는 것이다.
문명이란 항상 새로움에 열광하지만 그것은
결함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완벽을 향해가는 첫 이정표일 뿐이다. 마치 새로운 안나프르나 의 등산로를 찻기위해 목숨받친 박영석대장 처럼 결함으로 처음가는 길은 항상 위험한 시도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한다. 뇌가 진화 과정에서 지금도 발달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유일하게 동식물 중에서 도구를 끊임없이 만들고 지금도 사용한다. 동물과 인간의 구별법은 단순하게 구별을 할수있다.
도구를 사용하는가 안 사용하는가 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기에 진화과정에서 점점 도퇴되는 것인지 모른다. 지구상의 동물들 중에 의식주를 가지는 종은 인간이 유일하다.
동물들은 의식주를 자연에서 얻기에 소유의 개념이 없다. 노자가 무위자연을 좋아하지만 아마 동믈들을 닮어라 하지 않는 것은 사유의 그늘을 벗어날수 없는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얻은 것이 인간들은 소멸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용불용설의 유전인자 법칙에서는 불필요한 것은 도퇴되고 소멸된다. 옷을 입기에 가죽과 털이 사라지고
집이 있기에 자연속에서 살수없고 먹을수 있는 것을 저장하기에 자연속에서 먹을거리를 못찻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소멸의 길로 가는지 모른다. 그리고, 생각을 하기에 뇌는 발달되지만 행동은 점점 사라진다. 걷는 것을 싫어하기에 운반도구를 발전시키기에 언젠가는 음직이지 않을지 모른다. 지금도 모든 것을 배달이나 핸드폰으로 해결한다.
지금의 모든 인류는 점점 하체나 상체나 근육의 퇴화의 길로 들어섰는지 모른다. 요사이 모든 분들의 걷는 시간이나 모습은 부실한 하체근육으로 소멸되는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달하는지는 모른다. 어릴때 부모님이나 모든분들은 하체가 부실한 분들이나 허벅지 근육이나 엉덩이 근육이 없는 분들은 드믈었다. 지금은 모든 분들은 마치 근육없는 하체를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뇌가 없는 원시상태의 동물들은 지금도 깊은 심해나 미지의 진훍속에서 이억만년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인류는 이십만년전에 탄생한 철부지이다. 진화과정에서 소멸할지는 발전할지는 일억만년 정도에도 유지한 종은 지구상에 얼마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나라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선진국의 문제인 출산률이다. 민족이 없어지면 나라도 사회도 역사도 사라지고 없다. 오욕칠정 중에서 식욕이나 성욕은 기본적인 욕망이다.
동물의 기본 욕구이고 종족보존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선진국일수록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오욕칠정 중에서 정신세계의 가상을 즐긴다는 것이다. 하루종일 컴퓨터를 하던지 즐기는 것들이 이미지의 형상을 찻어서 하는 독단적인 생활을 즐긴다는 것이다. 관계의 딘절은 이미 앞선세대에서
시작한 일이기에 어찌 할수도 없다는 것이다.
마약이나 최음제나 늘어나는 정신의학의 발전은 인간을 점점 행동에서 정신세계로 가는 길을 만든다 는 것이다. 도구의 발전이나 경제적으로 해결하려는 단순한 즐거움이나 쾌락으로 즐기는 문화도 일조한다는 것이다. 가상의 인물이나 바라는 연예인이나 모두는 남따라 허상을 실체와 구별하지 않고 빠져드는 컴퓨터나 핸드폰, 심지어는 AI와 종일 빠져사는 것은 인간관계의 단절로 가는 길이고, 후손이나 상대에 대한 관계설정의 어려움으로 공동생활로 지내기 싫어하는 문화의 생태 때문인지 모른다. 가족은 점점 소단위에서 떨어져서 사는 가족이나 타 민족과의 교류로 생긴 다문화 결합도 지나고 나면 원거리 생활이 되는 것이다. 문화의 다양성 또한 사회나 가족의 이별은 정해진 일이 되는 것이다. 가족이란 원래는 한 지붕밑에서 같이 생활하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구조는 경제적 이득이 많이 존재하는 곳으로 모였다 헤어지는 구조로 바뀐다. 세상이나 사회구조나 빠르게 바뀌는 것은 같이 존재할수 없는 시간이 빠르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발전하다 우주로 나아가면 더욱 더 멀어지는 것이 인류의 관계로 나타난다. 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결국은 소멸로 가는것은 자연현상이다.
잘아는오래된 동생이 있다. 인연은 살아가면서 맺어지는 것은 전생의 결과이라 한다. 서로가 좋아하니 따르는 것은 관계의 절정이다 보니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기 마련이다. 서로가 미세한 맛에 대해서 찻는 것이 다르지만 일단은 따라디리기로 하고 같이 어울리기도 한다. 그런데, 어울리다보니
술이나 기타 언어의 개념도 다르다. 살아가는 방식이나 성장과정이 다르다보니 약간의 차이가 없을수 없다. 선 후배의 사이는 항상 선배는 듣고 있어야한다. 요사이는 후배나 동생이나 자기의 주장이 강하기에 무어라 하는 조언은 삼가해야 한다. 선배의 장점은 경험이 많고 연륜이 많다보니 아는 것이 많다고 하지만 후배는 그것이 자신에게 필요한지 안하는지가 중요하다. 오래지날수록 관계라는 것은 쌓이기 마련이지만 어떻게 보면 좋은 관계란 일정한 거리가 정답인것 같다. 때가 되면 오는 만남이 계속될려면 상호관계보다 배려하는 선배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다. 싫어하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모습을 아는 것보다 지금의 시간이나 장소에 따라 오래된 서로의 모습은 간직할수 있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오늘도 동생들은 술자리에서 언성과 폭음이
많아지고 즐거움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바라만 보는 것이 좋을지 안좋을지는 지나고 나면 알수있는 것이 진리인듯 다가온다.
우리가 남들이 살아가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본 모습인가?
일상의 세계는 그들의 논리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게 틀을 씌우고 있는 논리는 포근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상적인 안락함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일상적인 것이 무너질까 항상 노심초사하고 불안하다. 이는 하이데거의 불안과 양심이라는 이론이다.
일상에 사는 우리는 항상 불안에 전전긍긍 한다. 혼자있는 불안을 잊기위해 어울려 술도 먹고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같은 짓을 하는 안정감으로 미친듯이 몰두한다. 바쁘다거나 같은 문화의 틀에 메인 지배를 받어면 안심하는 것도 불안때문이다. 불안감 없이 사는 사람일수록 철저하게 그들에게 빠져산다는것이다. 불안속에서 늘 대면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자신이다.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 가장 보기싫어하며 두려워하는 자신을 소스라치게 보게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늘 하는 대답이 양심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거리, 불거리를 끊임없이 찻는 이유는 자신의 불안감을 잊기위한 것이다.
불안은 도망가지 않는다. 늘 혼지서 대면하는 것 뿐이다. 불가에서나 명상에서 그렇게 나 자신을 찻아라 하는 이유는 단지 나 자신을 마주하는 용기가 양심이고 나의 존재를 바라보는 실존주의 철학이다. 자기 자신의 고요함 속에서 침묵 속에서 찻아야 한다. 불안을 이기는 방법은 자신의 모습을 갇는 것이다. 현대는 모든 것들의 지배를 받는 문화이다. 하루 한순간도 지배를 받지 않는 순간은 어려울 것이다.
지구에 산다는 것은 조금만 긴장을 늧추어도 일이라는 것이 잔뜩 쌓이고, 경쟁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정치 경제 사회는 문제가 여러개 일어나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전쟁들, 불확실한 미래와 현재 미래가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번잡한 일상과 복잡한 관계의 얽힘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여유의 시간을 찻는 것이다. 한가한 것은 지혜의 길이라는 고대 로마의 키케로의 말대로 일에서 벗어나 한가한 시간에 독서를 하고 자연을 벗 삼아 유유적적한 삶을 가지는 것은
새로운 직무를 가지는 길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아예 공부한다는 일 그자쳬가 한가함을 전제로 하는 스콜레schole 라는 학교를 말한다. 공부는 여유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 하고 죽자살자 먹고사는 일은 노예나 노동에 메달리는 사람들의 몫이라 했다. 공부는 물론 어떤 일이든 쉬지않고 무리하게 계속하면 병이 날수 밖에 없다. 자유시간을 통해 우리는 더 열심히 일할수 있는 힘을 얻는지 모른다. 공부하면서 놀고 놀면서 공부한다는 논어의 "놂" 이 공자의 육경에서 '논다는 공부의 최상급 경지' 배우다이다. 육경은 유가의 최고의 경전이다.
공부하기의 반대가 놀기를 공자는 최고의 공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장자의 첫구절은 소요유 逍遙遊는 소요하면서 논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처럼 지내며 노는것을 가르킨다. 산꾼들은 늘 산에서 공부하고 배우는 것은 유가나 도가나 가르침을 깨닫는 길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늘 듣는 논어의 첫구절이다. 산꾼이 되는 순간 논어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멀리한다. 그러나 죽음이 없는 영생불멸이 있다면 가질 것인가?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을 끝내고 7년을 오기기아 섬에서 칼립소 여신에게 붇잡혀 매일 진수성찬에다 밤마다 여신에게서 영생불멸의 삶을 얻고 지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폭풍이 일렁이는 바다에서 죽을지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가도 늙어가는 마누라가 기다린다는 것도 알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삶보다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삶이 좋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끝나기에 한순간 한순간이 인간의 삶이 좋다는 것이다. 끝이 있기에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야 한다. 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이 죽음이고, 인생의 순간 순간 가치는 인간만이 가지는 특권이다.
"짧은 인생에서 긴 희망은 잘라버려라. 샘많은 세월은 말하는 사이에도 달아나지 않는가. 내일은 최대한 조금만 믿고, 오늘을 즐겨라."
'오늘은 즐기라 카르볘 디엠' 이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환희도, 흐르는 시간에 모두 한여름 밤의 빛처럼 사라진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지금 내 곁에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즐겨라. 저녘 노을이 붉게 물드는 것은 밤이 다가오는 것 뿐이다. 산에 올라와서 즐기는 것보다 내려가는 일이 우선이다.
반복은 길들여 지는 것이다. 순환은 바뀌어 지는 것을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반복과 순환은 모두 무언가가 되풀이 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순환은 차이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반복과 다르다. 이때 차이는 되풀이될 때마다 다르게 형성되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반복이 사람들의 시선을
자이보다는 같음에 묶어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의 운행을 두고 순환한다고 하지 반복된다 하지 않는다. 순환은 차이를 빚어내는 관계를 함께 드러내기에 되풀이 되어도 같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고, 반복은 그러한 관계보다는 드러난 양상에 집중케 하기에 동일하다고 여기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이 생기면 순환하는 듯이 여긴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나면 우리의 삶은 반복으로 치부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되풀이 되는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보는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고,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은 매 순간 똑같을리 없다. 우리의 하루는 지루한 반복으로 느끼고 살아가지만, 이 순간 매번은 다시 오지 않는 생의 유일한 시간이다. 소동파의 적벽부라는 천하의 명문장에는 이런 글이 있다. " 변하지 않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변하는 것이 없고,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푸르디 푸른 하늘도 검은 것인데, 우리는 태양의 굴절에서 오는 푸른 빛의 굴절이나 반사로 푸르게 보인다. 우리의 생각도 지나간 산길은 늘 그대로 푸르고 하이얀 백설로 언제나 담겨져 있다. 내 생각이나 사고도 순환하기를 늘 노력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우린 항상 아름다운 꿈을 꾸는 동물이다. 결함은 반복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동일성에 갿혀 사는 존재이다. 자신의 마음이 늘 자신에게 전달되고 그에게 따르는 응답이 오기를 바라는 믿음이 균열이 생기는 것을 바탕으로 본인 스스로 존재의 기초, 근원, 본질등이 완결하기를 바라는 목적이 삶의 방향이나 존재해야 하는 인정이나 외로움을 나눌 기대를 타자에게서 얻기를 늘 갈망하는 목마른 나그네이다. 결국은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려는 반복의 시도에 갇혀산다. 이것이 자기 동일성 중심의 사유는 타자를 억압하고, 결국 전체화하려는 욕망이 극단적 폭력과 학살을 가능케 한다.
나치즘이나 파시즘이나 극우주의 사상이 될수있다. 오디세우스는 10년동안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결국은 자아의 동일섬을 재확인하고 회복하는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여정은 신의 부름으로 익숙한 자아에서 낯설은 알수없는 여정의연속이다. 자기 동일성의 중심 에서 벗어나 타자를 향해 나아가서 응답의 윤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은 타자의 응답의 무게에 따르는 연약한 존재이다. 인간은 결함을 타자에게 동일성을 갈구하는 반복적으로 순환성과 환원성에 따라
심리적 갈등에 갇혀사는 사유의 존재이다.
타인의 죽음은 사실은 자기자신의 죽음을 남는다. "세계는 저 멀리있고, 나는 너를 짊어지고 가야한다." 데리라가 자주 인용하고 오랫동안 음미했던 시귀이다. 우리가 맞이하는 타인의 죽음은 하나의 끝이지만 삶이나 살아있는 존재의 끝은 아니다. 살아남은 자는 혼자 남게된다. 죽은 자의 세계를 넘어, 혹은 그 이전에 있게된다. 세계 밖의 세계, 세계가 결여된 세계 속에, 최소한 그는 전적으로 책임을 느끼며 사라진 다른 사람과 그의 세계를 모두 지고 가야 할 책임을 부여받는다. 그는 세계 없는 세계 속에서, 마치 세계의 끝을 넘어 지구 없이 있는 것처럼, 애도는 끝맺을 수 없고 불가능한 것으로, 이미 시작되었으며 결코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죽은 이와의 관계, 그 사람과의 특별한 경험을 담아내려 애를 쓰지만 이미 거기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 들었을 법한 말들이 펼쳐지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분명 단 하나의 사건 일 텐데, 그 고유한 세계의 종말은 이미 반복되고 중첩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또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두 세계의 종말을 겪지만 이미 죽은 자에게 대해 불충 할 수밖에 없다.
식음을 전페하고, 몇년을 괴로워하고, 남은 세계를 보답하듯 살아도 두 세계는 이미 죽은
자들의 세계에 갇히는 것이다. 세계는 이미 끝이 났고 나는 홀로 남았기 때문이다.
무더운 산등성이 이리 고운 바람을 주는 산은 어찌 끝없는 산에 대한 의구심 뿐인가?
때가 되면 오는 것이고 가는 것인데 산속에서
무엇을 찻아다니는 것인가?
산속에서 산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없지안
그리 오래 산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