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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2024년 8월 18일 마 18:21-35
마 18:21-35 / [용서의 교훈]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라.’ 23) [무자비한 사람의 비유] 하늘나라는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정해진 날에 셈을 맞춰 보는 것에 비할 수 있다. 24) 셈을 하는 중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나왔다. 25) 그가 빚을 갚을 돈이 없음을 알자 왕은 그의 아내와 자녀들과 그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는 왕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제발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놓아 보내며 빚도 탕감해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을 만나자 멱살을 잡고 당장에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29) 그 사람이 엎드려 조금만 시간 여유를 달라고 빌었으나 30)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고해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용서해 주었던 그를 불러서 말하였다. ‘이 악독하고 뻔뻔한 놈아! 네가 애걸하기에 불쌍히 여겨 내가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느냐? 33) 그러니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34) 왕은 몹시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보내고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게 하였다. 35)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본문의 주제는 용서이다. 본문의 첫 절인 21절에는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물음이 나오고, 22-35절 전체 속에는 예수님의 답변이 들어있다. 예수님의 답변의 내용을 다시 보면 22절은 21절에서의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일차적 답변이고, 23-34절은 그 답변의 의미를 설명하시기 위한 비유의 말씀이며, 마지막 35절은 본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는 결론적 가르침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먼저 여쭈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니까?’ 그리고는 곧바로 자기가 모범답안을 제시해 보았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일곱 번이라는 횟수는 그냥 어쩌다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어떤 잘못에 대해서 세 번까지는 용서할 필요가 있다는 랍비들의 견해가 있었다. 앞서서 용서의 중요성을 배운 베드로는 자기 깐에는 랍비들의 생각보다 두 배를 생각했고 거기다 조금 더 보태서 완전수인 일곱 번을 채워서 이 정도면 최대한으로 용서하는 것이겠지 여기며 예수님으로부터 그 확인을 받고자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의 기대와는 너무나 큰 격차를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일곱 번을 일흔 번 하면 490번이 된다. 번역자에 따라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어떤 한 사람을 그것도 같은 잘못에 대하여 490번이든 일흔일곱 번이든 거듭 용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신 것은 용서의 한계를 정확한 횟수로 정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용서에는 한계가 없음을 말씀하시려는 의도로 보아야 한다. 즉 끝까지 용서해야 함을 가르치려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당신의 답변이 베드로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뿐 아니라 그와 나머지 제자들을 당혹게 할 것을 아시고는 답변하신 말씀의 뜻을 그들에게 이해시키시기 위하여 한 가지 비유의 말씀을 더 하셨다. 그 비유를 요약하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가 탕감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갇히게 했다는 것이다.
▶ 이 비유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 속에서 왕 혹은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종이라 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 인간들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는 자를 말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달란트와 데나리온이란 화폐단위에 관해서 알아두어야 한다.
달란트는 로마제국 내에서 알려진 최고액의 화폐단위였다. 그리고 만이라는 숫자는 헬라어에서 그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숫자 단위였다. 그러니까 가장 큰 숫자 단위만큼의 가장 큰 화폐단위인 일만 달란트는 오늘날 화폐가치로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지만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다. 아마도 만 달란트라는 것은 그 당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액수를 가리키는 것이고 거의 무한대의 금액을 표현하는 것이다.
▶ 예수님의 이 비유 속에서 만 달란트가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로 보아야 한다.
❶ 종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크나큰 죄인이라는 것이다. 주인이 종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거저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주인은 그의 종의 간청을 듣고는 아무 조건도 주저함도 없이 용서했다.
❷ 27절에 보면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용서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말로 다 할 수 없이 죄인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반면 데나리온이란 로마의 은전으로 보통 근로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의 돈이다. 달란트와 데나리온 사이의 비율에 관해서는 정확한 환산기준을 알 수 없고 이에 관한 견해의 차가 대단히 크다. 한 달란트는 최소 60데나리온에서 최대 만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의 비율은 최소 6,000배에서 최대 100만 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문의 비유 속에서의 악한 종은 최소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6,000만 원을 탕감받고도 자기에게 겨우 만원 빚진 사람을 옥에 갇히게 만든 사람이다. 그리고 최대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100억 원을 탕감받고도 자기에게 단돈 1만 원 빚진 동료를 옥에 갇히게 했다.
▶ 예수님께서 이 악한 종의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려고 의도하신 것은 무엇이겠는가?
❶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에 비해 우리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용서하는 것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❷ 그런데도 그렇게 작은 용서 하나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32-35절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속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고 가르치신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도의 가르침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맞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논리이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라 하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을 먼저 앞세우고 그 뒤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구하라’라고 가르치신 데에는 더욱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본문의 마지막 절 말씀이 그 뜻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즉 나는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내 죄를 용서받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내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사람은 자신도 이미 남의 죄를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앞서서 가르치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단지 용서의 양적 한도에 관한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용서의 깊은 의미와 그 근거를 가르쳐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일까?
❶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이 큰 것이라는 말씀이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용서의 무제한성을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것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❷ 은혜받은 자에게 있어서의 용서의 당위성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토록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우리도 마땅히 우리에게 잘못하는 형제자매들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할 터인데 배은망덕하여 서로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한 종이고,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라는 것이다.
❸ 그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자가 받을 무서운 심판이다. 그 심판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생명에서 배제된 자라는 심판이다.
요즈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악한 종’이라는 질책을 들을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불쌍히 여기심과 모든 죄의 용서를 받고도 우리의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험하게 다루며 정죄하고 심판하기를 즐기지는 않는지?
우리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왔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야기(요 8:3-11)를 알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하시자 슬며시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뿐 아니라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도망가고 말았다. 누구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돌팔매질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또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가?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질러댔고, 빌라도는 민란이 날까 봐 여론에 밀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막 15:15)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다. 이 모든 군상(群像)의 행태가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통렬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며 삶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라면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무리 해도 갚을 수 없는 그 용서의 빚을 사람들을 향하여는 일생을 통해 갚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용서의 삶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모든 문제해결의 방법은 언제나 용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서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일상의 생활에서도 크나큰 문제를 일으킨다. 상담전문가들이 종종 발견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개인적 문제의 밑바닥에 깔린 것이 ‘용서하려고 하지 않음이다’라는 사실이다. 즉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온갖 종류의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의학계의 견해에 따르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건강에 제일 나쁘다고 한다. 그래서 유명한 병원마다 그 안에 ‘용서’센터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잘 알려진 미국의 주간지 ‘Time’ 최근호에 따르면 어느 교수가 25년간 두 종류의 사람들을 비교 연구했는데, 늘 고민을 안고 살고 항상 불평을 일삼으며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보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고 매사를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평균 7년 반 수명이 더 길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이렇게 용서는 우리의 건강에도 아주 좋은 것이다.
물론 용서를 악용하거나 자기 편리한 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용서를 앞세우며 자기의 할 일을 제대로 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려 하지는 않고 끊임없이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일을 자행한다. 그래 놓고는 공동체가 도저히 그냥 놔둘 수 없어서 어떤 조처를 하면 그들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아우성을 친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남이 해야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고함칠 말이 아니다. 공동체의 건덕과 질서유지를 위해서 어떤 잘못은 무조건 덮어두지 않고 제재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데도 국가공동체의 안보를 위해 당연한 법적 조치나 교회의 건덕상 필요한 치리의 문제를 개인적 용서의 문제와 마구 뒤섞어서 자기 편리한 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말에 현혹되고 휘둘리는 어리석은 군중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용서는 상대방의 어떤 선결 행위가 없어도 먼저 행할 때 더 가치있다. 용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할 때 더 아름답다. 용서는 마음으로 하고 끝까지 할 때 참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하나님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간구하심으로써 그 온전한 용서의 본을 보이셨다. 이런 놀라운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라면 마땅히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히고 우리의 완악해진 심령들을 쪼개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용서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았다면 그 사실에 대해 통회하는 우리가 되자. 그리고 용서하자. 용서할 줄 아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용서에 대한 몇 가지 예화
■ 크리스웰 목사 / 35세 된 목사님이 사냥하러 갔다가 멀리 노루 한 마리를 보고 조준하여 쐈는데 달려가 보니 노루가 아니라, 사람이 총에 죽은 것이다. 법의 심판도 받아야 하지만,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지고 목사직을 사임해야만 하는 극심한 절망감에 빠졌다. ‘이제 내 인생은 내 목회는 끝났구나!’ 생각했다. 교회와 언론이 들끓었다. 교인들은 사람을 죽인 목사가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느냐,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나가라고 난리가 났고. 교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중직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여러분! 사람 죽인 젊은 목사님을 어느 교회가 받아주겠습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목사님은 평생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목사님을 한번 용서합시다!” 이 한 사람의 용서의 제안을 온 교인들이 받아들이고, 믿어주고, 용서를 베풀어서 그분은 그 교회에서 계속 사역하게 되었고, 그 뒤로 목회 철학은 ‘용서’가 되었다. 목사님이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설교할 때마다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 교회는 미국 최대의 교회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 목사님은 미국 침례교 총회장, 세계 침례교 총재를 지냈고, 54권의 저서를 쓴 크리스웰 목사이다.
■ 원수에 대한 사랑 / 대학생선교회 CCC를 운영하면서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신 김준곤 목사님의 실화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목사님의 가족이 다 공산당에게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목사님의 눈앞에서 목사님의 부친과 아내가 공산당에게 맞아 죽는 것을 보아야 했다. 목사님도 너무 매를 많이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때 미군 함정이 나타나는 바람에 겨우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급기야 김 목사님의 가족을 죽인 공산당원들을 미군들이 잡아들였다. 그런데 목사님은 빵을 들고 미군에게 찾아가서 공산당원에게 주고, 미군에게 사정사정해서 풀어달라고 하였다. 미군이 목사님의 간청에 못 이겨서 풀어주었다. 그런데 그 공산당원들이 산속에 들어가서 계속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때 김목사님은 성경책을 들고 산속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공산당원들을 찾아 들어갔다. 그 결과 그들 공산당원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108명이 모이는 시골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 김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를 죽이고, 아내를 죽인 사람까지도 용서했다.
■ 용서의 기적 / 크리스 캐리어는 열 살 되던 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유괴를 당했다. 숲에 버려진 그가 발견되었을 때, 그의 머리는 피범벅에다가 눈은 멍들어 있었다. 그 일로 크리스는 한쪽 시력을 잃었고, 몸을 움직이는 운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여론이 크리스가 살아남은 것을 ‘기적’이라고 떠들어 대자 그는 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무슨 ‘기적’이냐며 분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열세 살 되던 해에 그는 부상이 훨씬 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악몽 같은 지난 사건을 저주가 아니라 은혜로 보기 시작했다. 또한, 언제까지나 분노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적개심과 복수심 그리고 자기연민에서 돌아서기로 결심했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크리스를 유괴했던 사람이 밝혀졌다. 그는 데이빗 맥앨리스터란 사람으로 크리스의 집에 고용되었다가 음주 문제로 해고되었었다. 크리스는 다음날 데이빗을 찾아갔다. 그는 이제 병들어 앙상하게 뼈만 남은 노인이 되어 외롭게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는 그날 데이빗을 용서했다. 크리스는 말한다. “용서를 해야 하는 데에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 우리가 복수를 선택했다면 우리의 삶은 분노로 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앙갚음을 했다 하더라도 남는 것은 공허함뿐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또한 용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이런 용서를 통해 저는 정말 삶의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다.”
■ 용서의 기적 / 미국 캘리포니아에 오션게이트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갑자기 성장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어느 날 밤, 마을의 불량 10대 소년 9명이 일제히 교회를 향해 돌을 던졌다. 문화재로 지정된 아름다운 교회의 형형색색 유리창이 무려 73장이나 파손됐다. 재산상의 손실도 엄청났다. 당연히 소년들은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어 모두 법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때 웰스 목사와 교인들이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교회에 돌을 던진 소년들은 나이가 어립니다. 우리 지역의 소년들을 우리 교회가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잘못도 큽니다. 소년들을 용서해 주세요.” 교회의 간절한 탄원 덕분에 소년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자 소년들이 동네를 다니며 외쳤다. “우리가 교회 유리창을 깨뜨린 소년들입니다. 그런데 웰스 목사님과 교인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도소를 가지 않고 풀려났습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을 만나보세요. 이 교회야말로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입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소년들은 마치 전도특공대가 된 것처럼 이 소식을 알렸고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했다. 사랑과 용서가 낳은 큰 선물이었다. 우리는 내게 손해를 입히거나 피해를 준 사람에게 바로 되갚거나 후일 갚아 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용서는 용서를 낳고 결국 사랑과 은혜로 돌아온다.
■ 용서를 받을 줄 아는 인간 / 돈멀루의 「붐비는 우회로」라는 책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자금 중 수천 달러를 몰래 빼돌린 한 젊은 회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행위는 적발되었고, 젊은이는 사장실에 가서 그 경위를 보고해야 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질 법적 조치가 두려웠다. 그의 행위가 모두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자네를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젊은이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했다. “예,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사장이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네. 가서 일을 계속하게.” 젊은이와 대화를 끝내면서 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갔다가 관용을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사람이야. 첫 번째 사람은 나야.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었지. 자네가 받고 있는 자비를 나도 받았다네.”
■ 형제를 용서하는 자의 유익 열 가지 ❶ 보복당하지 않음(잠 24:29) ❷ 하나님의 상을 얻음(잠 25:21-22) ❸ 성도로서의 온전함을 이름(마 5:48) ❹ 하나님께 자신도 용서받음(마 6:14) ❺ 하나님께 기도가 상달됨(막 11:25) ❻ 진정한 화평을 이루게 됨(롬 12:18) ❼ 성도간의 교제가 회복됨(고후 2:7) ❽ 타인에게 자신도 용서받음(엡 4:32) ❾ 마음에 감사 찬양이 있음(골 3:16) ❿ 주의 심판 때 긍휼을 얻음(약 2:13)
■ 그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이 / 세상을 아름답게 사람들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무조건 사랑하려고 한다. / 사람을 비판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도 거절한 자일 것이다. / 그러니 받은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니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선하고 또 선하려는 의지를 갖는다면 또 세상은 늘 행복으로 가득할 것이다. /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을 원망한다면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을 미워한다면 어디를 가든지 불행할 것이다. / 나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늘 선한 의지를 갖는다면 세상은 늘 아름다운 모습으로 늘 곁에 있다. / 나를 이기는 순간 세상에 악한 영은 사라지고 세상은 주변에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 세상을 원망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 우린 주님의 생명을 받았다. 그 생명을 받으면 이제 내가 아니다. / 그분이 날 대신해 사셨다. / 그 생명은 다른 이를 미워할 수 없다. 그분은 세상도 사랑하셨다. 세상을 향하여 원망하지 마시라. 우리 마음을 선하게 가져야 한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
■ 말없이 사랑하여라 / 내가 한 것처럼 아무 말 말고 자꾸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사랑하여라. / 사랑이 깊고 참된 것이 되도록 말없이 사랑하여라.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봉사하고 눈에 드러나지 않게 좋은 일을 하여라. / 그리고 침묵하는 법을 배워라. 말없이 사랑하여라. 꾸지람을 듣더라도 변명하지 말고 마음 상하는 이야기에도 말대꾸하지 말고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 네 마음을 사랑이 다스리는 왕국이 되게 하여라. 그 왕국을 타인 향한 마음으로 자상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 사람들이 너를 가까이 않고 오히려 멀리 떼어 버려 홀로 따돌림을 받을 때도 말없이 사랑하여라. / 도움을 주고 싶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오해를 받을 때도 말없이 사랑하여라. / 네 사랑이 무시당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슬플 때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 주위에 기쁨을 나누어주고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도록 마음을 써라. 타인의 말이나 태도로 인해 초조해지거든 말없이 사랑하여라. 마음 저 밑바닥에 스며드는 괴로움을 인내하여라. / 네 침묵 속에 원한이나 인내롭지 못한 마음, 어떤 비난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여라. 언제나 타인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도록 마음을 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