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썩고 병든 것들을 뿌리째 뽑고
너절한 쓰레기며 누더기 따위 한파람에 몰아다가
서해바다에 갖다 처박는
보아라, 저 엄청난 힘을.
온갖 자질구레한 싸움질과 야비한 음모로 얼룩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벌판을
검붉은 빛깔 하나로 뒤덮는
들어보아라, 저 크고 높은 통곡을.
혁명은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더러 곳곳하게 잘 자란 나무가 잘못 꺾이고
생글거리며 웃는 예쁜 꽃목이
어이없이 부러지는 일이 있더라도,
때로 연약한 벌레들이 휩쓸려 떠내려가며
애타게 울부짖는 안타까움이 있더라도,
그것들을 지켜보는 허망한 눈길이 있더라도.
- 신경림, <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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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무엇 하나 자랑스레 내세울 만한 것도 없이 야속하게 시간만 흘려보냈습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더 희망찬 내일을 바라지만 왠지 역사는 자꾸 퇴보하는 것만 같고, 더 좋은 세상은커녕 비인간화의 현실이 점차 심화되어 간다 여겨지는 건 단지 저만의 생각일까요?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에 이어 서울 시청역 앞 교통사고로 9명의 목숨이 허무하게 유명을 달리하게 되는 등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안타깝고 우울하기만 합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반년동안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으레 해왔던 감사의 고백을 드렸겠지만, 과연 나 하나 무탈하게, 안전하게 잘 살아왔다고 쉬이 감사의 고백을 드리는 게 옳은 일인지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우리들의 삶의 고백이 딛고 선 환경과 무관하지 않기에, 도처에 슬프고 우울한 소식들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며 지나온 삶을 규정하는 데에 말을 아끼게 됩니다. 우리의 감사와 기쁨의 고백들은 더 나은 세상을 담보하고 있어야 그 진정성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그 누구도 예외없이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좋은 변화는 성숙을, 좋지 않은 변화는 타락을 가져오지요. 역사는 진보(성숙)와 퇴보(타락)을 수없이 반복하며 지금껏 이어져 왔습니다. 역사가 퇴보를 거듭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지요. 사회의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공동의 선이 무너지고, 사익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준동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세상 안에는 폭력이 일상화 되고, 공동체가 와해 되는 등 타락의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가시적으로 보이게 된다면, 그때 필요한 건 혁명입니다. 그야말로 이전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져 내리고, 전혀 새롭게 천지개벽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려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 삶의 혁명, 우리 사회의 혁명, 종교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바로 지금!
한 해의 절반을 마무리하고 다시 절반을 새롭게 시작하는 시점에서 ‘혁명’을 떠올려봅니다. 하수상한 시절을 보냈다고 푸념만 늘어놓은 채 뒤숭숭한 마음으로 남은 반년을 살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작심하고 삶의 틀을 전혀 새롭게 바꿔 시작하는 혁명의 반년을 살 것인지 우린 그 기로에 서 있습니다. 반년이랄 것도 없습니다. 우린 매일 매일 이전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사는 혁명의 순간순간을 맞이할 뿐입니다. 이 혁명을 거부하고자 한다면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지지부진한 삶이 이어지는 분들에게 신경림 시인은 말합니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혁명은 이전의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는 것은 바울은일생의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그 경험 이후 그를 지탱해주었던 지식과 신념, 출신 등 모든 바탕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혼란을 겪게 되지요. 바울이 눈이 멀게 되는 것은 그런 상태를 나타내 보여줍니다. 그런 어둔 밤의 경험이 있을지라도 온전한 변화, 혁명의 순간을 맞이하려면 반드시 그 과정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그 선택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대의 참 혁명가로 사셨던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입니다. 자,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024. 7. 6.>
첫댓글 💌 아무것도 두렵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고 날뛰면서도
아무도 참회하거나 책임지려 하지 않을 때
그럴 때 누군가는, 우리는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그런 생각, 그런 마음을 먹게 됩니다.
진정학 혁명은 나로부터 시작해야겠지요.. 거대한 사회구조가 바뀌는 것도 그 첫 시작은 결국 '나'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인습에 길들여진 '나'에 대해 혁명작업을 시작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