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는 네 아버님은 네 아버지 이전에 이 에미의 남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남편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상
옥아! 네가 이 에미의 간절한 소망마저도 들어 줄 수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네 아버님이 세상을 뜨시는 날 나도 함께 갈 것
이다. 이 점을 명심하고 네 뜻대로 하거라."
어머니!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오."
어머니의 표정은 단호했다 비장한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어머
니는 아직껏 단 한 번도 상옥이 가슴 아파할 말을 한 적이 없었
다. 그런데 지금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
이다.
아, 수빈아! 나는 어찌해야 하는 거니? 어찌해야 하느냐구
어쩔 수 없었다. 못난 자식 하나 때문에 어머니를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녕 이것이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이라면 주어진 대
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상옥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
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던 것이다.
상옥은 기가 막혔다. 달걀도 굴러가다 서는 모가 있다는데 이놈의
팔자는 언제까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머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
어머니의 뜻을 따르겠다고 한 날부터 상옥의 결혼 준비는 일사
천리로 진행되었다. 신부가 될 사람은 상옥도 잘 아는 여자였다.
그녀는 상옥네 토지를 소작하는 농부의 딸이었다. 여고를 졸업했
는데 학교 다닐 때 왈가닥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여자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상옥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저 부모의 뜻
을 거역할 수 없어 치르는 결혼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옥은 자신의
결혼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상옥이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유수빈뿐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될 바에는 부산의 오선영에게 부탁하여 위기를 넘겨 볼까
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를 너무 괴롭히게 될 것 같아 마
음을 돌리고 부모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상옥의 결혼이
확정되고 혼인식 날이 잡히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가 싶던
아버지의 병환이 호전되는 것이었다. 상옥은 어쨌든 다행이라 생
각했다.
상옥은 그 동안 방관자로 있었지만 막상 결혼 당일에 이르자 자
신의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결혼을 해야 하는 자신의 무능한 처지
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예정된 대로 상옥은 결혼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신부측의 요
구대로 2박 3일 예정으로 온양 온천에 신혼 여행을 갔으나 초야
에 손목 한번 잡아 보지 않은 채 아버지의 병환을 핑계삼아 다음
날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상옥은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고 칩거해 버렸다.
상옥은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집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아버지가 그렇게 고대하는 아이를
낳는 일이었다
결혼한 지 두 달째 들어서면서 상옥의 아내는 임신을 했다. 그
리고 세월이 흘러 출산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원망에도 불구하고 손자를 고집하던 아
버지가 드디어 당신의 손자를 가슴에 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호
사다마라 했던가 그토록 기다리던 손자가 채 백 일도 되기 전에
아버지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내 욕심 때문에 네 가슴을 너무 아프게 했구나. 상옥아
그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아버지는 76년에 걸친 한많은 인생
의 막을 내렸다.
상옥은 아버지가 운명하는 순간, 엄청난 허무감에 몸을 떨었다.
이 모두가 윤회생사(輪廻生死)인 것을!
이 모두가 부질없는 일인 것을
사람들은사실상 자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만 자신이 된다.
- p. 발레리
나그네 되어
아버님의 49제가 끝난 뒤 상옥은 서울집을 정리했다. 서
둘러 서울집을 정리하게 된 것은 분가하여 서울에 올라가 살자는
수영(첫아들)이 엄마의 끈질긴 닦달 때문이었다. 상옥이 어떤 일
이 있어도 어머니 모시고 동생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수영 엄
마를 윽박지르며 아예 분가의 씨앗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마음놓고 집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옥은 수영이
의 두 돌 잔치를 해주고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그래, 무슨 얘긴데?"
"예 잠시 집을 떠날까 합니다. "
어머니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상옥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
보았다.
"아범아! 내가 어찌 아범의 마음을 모르겠니? 하지만 이
제 수영이 생각도 해야지."
"어머님,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시고 허락해 주십시오."
"이번엔 얼마나 걸리겠느냐?"
'그건 저도 알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
다. 제가 곧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지난번처럼 상심하지 마십시오.
저는 어딜 가더라도 몸 성히 잘 있을겁니다. 어머님이 건강하셔야
동생들(2남 )녀)도 마음 걱정 안 할 것 아닙니까."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상옥은 다음날 등산복 차림으로 집을 나
섰다 어디를 가느냐고 따지듯이 묻는 수영이 엄마에게는 잠시 여
행을 다녀오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상옥은 마
음속으로 수백 번 다짐했다.
수빈이를 찾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수윈역에 도착한 상옥은 행선지 안내판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어디로 가야 수빈이를 찾을 수 있나? 망설이던 상옥은 무조건 호
남선의 종착역인 목포행 승차권을 샀다.
그리고 목포행 열차에 실려 미지의 낯선 고장으로 떠나가고 있
었다. 문득 수빈이를 처음 찾아나섰을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
쳐갔다 무조건 달려간 부산에서 선영이를 만났었다. 그러나 그것
은 실수였다 결국 선 영에게도 상처만 남겨 주고 말았다. 지금쯤
은 지난 일 모두 잊고 열심히 살고 있겠지
상옥이 타고 있는 목포행 완행열차가 데전역 플랫폼으로 진입하
고 있었다. 상옥은 갑자기 대전역에 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상옥은 배낭을 어깨에 메고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뒤에
서 역무원이 상옥을 불렀다.
"여보시오. 여기는 목포가 아니고 대전입니다. "
상옥이 알고 있다며 머리를 끄덕여 주고 돌아서려는데 승무원
이 승차권이 목포까지가 아니냐고 따지듯이 고함을 쳐댔다
"여보쇼, 승차권이 목포까지라고 꼭 목포에서 내리라는 법 있
소? 내가 대전에 내리고 싶어 내린 건데 뭐 잘못된 게 있소?"
역무원은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상옥의 위아래를 훌
어보았다
상옥은 대전역 광장으로 나왔다.
그러나 어느 길로 들어서야 수빈이를 찾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
만 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은 이 골목, 내일은 저 골목을
이 잡듯 뒤지는 수밖에는.
상옥은 역에서 가까운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인쇄소에 들러 전
단을 만들었다 전단에 수빈이 사진을 넣고 현상금도 적어서 신문
에도 끼워 넣고 손수 뿌리고 다니기도 했다.
이제나 저제나 소식을 기다린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도 가
끔 장난 전화만 올 뿐 기다리는 수빈의 소식은 감감했다. 상옥은
이제 더 이상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대전을 떠났
다. 대전을 떠난 상옥은 논산 강경, 이리, 전주를 거쳐 수빈의
고향 정읍에 도착했다. 정읍은 벌써 몇 차례 다녀간 일이 있었지
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다시 들러 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허탈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시 힘을 내 고창, 영광, 장성을 거쳐 광주에 도착했
다. 그곳에서도 대전에서 한 것처럼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
하여 열심히 수소문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수빈이 소식은 오리
무중이었다. 벌써 집을 떠나 온 지 넉 달이 지나가는데도 실오라
기만한 단서 하나도 못 찾고 있는 것이다.
상옥은 그 뒤로도 거의 한 달을 광주에서 더 보내고 나주, 함평
을 지나 목포에 도착했다. 유달산 너머로 지는 해가 너무도 아름
다웠다.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쪽 하늘의 황혼을 바라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빈아! 제발 나타나
다오. 수빈아
상옥은 목포항 연안부두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통통통 새
벽 공기를 가르며 고기잡이 떠나는 어선의 발동기 소리가 쓸쓸하
게 들려왔다.
내일이면 또다시 이 낯선 타향에서 오직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수빈이를 찾아야 하리라. 상옥은 눈을 감았다. 수빈의 잔잔한 미
소가 떠오른다 오선영의 요염한 눈웃음도 보인다 노기 띤 현식
의 얼굴도 어른거린다
'아 현식아, 나 좀 도와다오! 수빈이가 있는 곳에 나
를 데려다 다오
다음날 아침 상옥은 일찍부터 목포 시내로 수빈이를 찾아 나섰
다. 아침, 점심을 거른 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전단을 뿌리고 돌
아다녔다 이제 힘이 없어 더 이상 걸을 수도 없었다. 상옥은 한
적한 도로변 가로수 밑에 주저앉아 럴브러져 있었다.
"고물 삽니다. 고물, 철컥 철컥
철가위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고물장수가 상옥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옥의 머릿속으로 뭔가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
다. 멀정한 날에 등산복에 배낭을 메고 다닐 게 아니라 고물장수
라도 하면서 찾아보자 가져 온 돈도 이제 거의 바닥나고 있으니
고물장수라도 하면 용돈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등산복 차림
으로 시내를 배회하는 것보다 남이 보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아저씨, 잠간 말 좀 묻겠습니다. "
'물어 보시쇼."
"저어 실은 저도 고물장사 한번 해볼까 해서요."
고물장수는 상옥의 행색을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
'당신이 시방 날 놀리는 거여?"
'제가 아저씨를 놀리다니 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또라이여?"
"아닙니다. 정신 멀정합니다. "
"사지가 멀정하고 시퍼렇게 젊은 것이 엿장사를 헌다고라?"
'젊은 놈은 엿장사도 못하나요?"
"못헐 것은 없지라. 그려서 댁이 참말로 엿장사 해볼라고 그라
요?"
'말입니다. "
'별 요상헌 사람 다 보겄는디 ! 혹시 죄 짓고 쫓기는 사람이여?"
"아닙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럽니다. 아저씨 어디 가
서 대포나 한잔 하십시다. 술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고물장수는 의아해 하면서도 공짜술에 구미가 당기는지 더 이
상 묻지 않고 앞장 서 걸었다.
상옥과 고물장수는 허름한 대폿집 드럼통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상옥은 왜 자신이 고물장사를 하고자 하는지를 말해 주고
그 고물장수에게도 수빈을 찾는 전단을 수십 장 건네 주면서 각
별히 부탁을 했다.
"아, 그렁께. 고물장수를 험시로 색시를 찾겄다 이거여?"
'네 ."
"내가 댁헌티 헐 말은 아닌디 마려. 그 샥시 찾는 거 포기허
는 게 좋을 거 같은디."
"왜요?"
"씨발, 나도 말이여. 젊을 적에 기집년이 삼십육계를 왔는디,
나중이 찾어 봉께 이 씨발년이 시퍼렇게 젊은 거 허고 붙어서 살
잖여 그려서 두 년놈을 직사게 패 번졌는디 아 이거시 고소를
혔당게. 그려서 세 바꾸나 돌고 나왔당게."
"아저씨, 저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하고든 정말로 행복하
게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의 행복을 축하해 줄 것입니다. "
"씨발, 빙신 육갑허는 소리 말어야! 현장을 목격혀 보랑게. 그
때도 그런 부처님 중간 토막 같은 소리 나오나 말이여. 아따 축하
좋아허네. 눈깔이 뒤집히는디 축하를 혀? 좇같은 소리 말으랑게."
50대 중반의 고물장수는 막걸리 몇 잔에 얼큰해져 도망간 마누
라 욕을 해대며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막걸리 사발을 쭈욱 들이키고는 바쁜 듯 자
리를 털고 일어섰다.
골목길을 빠져나온 고물장수는 상옥을 만날 때보다 더욱 신나
게 철가위를 두드리며 앞장 서 가고 있었다.
"고물 삽니다. 고물 팔아요. 찌그러진 냄비, 다 떨어진 고무신,
입다 버린 삼베잠뱅이, 짝 잃은 구두짝, 모두모두 받는당게요. 자
고물 파시오. 고물씨발, 고물 팔으랑께. 아, 고물 팔으란 말
여 . 씨발 오늘 재수가 옴붙었능 게빈디
상옥은 고물장수를 따라 고물상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
본적인 상식과 요령을 배웠다. 사야 하는 것과 사지 말아야 할
것 등이 복잡했다. 무엇이든 쉬운 게 없다. 리어카에 강냉이 자루
만 싣고 다니면 되는 줄 알았던 고물장수도 알아둘 게 많았다
세상에 거저 먹는 것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상옥은 그
날부터 고물장수를 시작하였다. 중고 리어카 한 대, 철가위 하나,
기본 장비에다 강냉이 한 부대를 사 가지고 거리로 나왔다 영락
없는 고물장수였다. 처음으로 리어카를 끌고 나오니 '고물 파시
오' 하는 소리가 목구멍에서만 뱅뱅 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
았다. 까짓거 부끄러을 게 무어냐. 수빈이만 찾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상옥은 구멍가게에 들어가 삼학소주 한 병을 사서
단숨에 들이켰다 빈 속에 소주 한 병을 부어 넣으니 눈알이 뱅글
뱅글 돌기 시작하였다. 상옥은 취기에 힘을 내어 철가위를 두들기
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고물 사시오. 고물!"
옆에서 걷고 있던 행인들이 갑작스런 고함소리에 질겁을 했다.
"고물 사시오. 고물!"
한참을 그렇게 고함을 치고 다니는데도 누구 한 사람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거 개업 날부터 파리 날리려나 상옥
은 다시 소리쳤다 고물 사시오, 고물. 아니, 이게 아닌데! 그러
고 보니 여지껏 목이 터지게 외친 것은 '파시오가 아닌 '사시오'
였다. 어쩐지 행인들이 상옥을 보고 힐끔거리며 웃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뒤늦게 무안한 생각이 들었다.
"원, 제기랄. 뭐 이리 어려워
상옥은 그렇게 개업한 고물상을 목포에서 근 20여 일 동안을
했다 목포 시내는 물론 변두리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녔으나 수빈
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목포에도 수빈이는 없었다. 이제 목
포를 떠나야 했다.
리어카에 강냉이 한 자루를 싣고 상옥은 목포를 떠났다 영암,
장흥, 보성, 벌교, 순천. 목포에서 순천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
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목포를 떠난지 20여 일 만에 상옥은 리어
카를 끌고 도보로 순천까지 온 것이다.
순천까지 오는 동안 상옥은 고물을 사고팔아 식생활을 해결하
였다. 무작정 걷다가 여관이 있으면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그나
마 없으면 적당한 곳에 텐트를 치고 노숙을 했다. 순천에서도 며
칠을 묵으며 수빈을 찾아보았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상옥은 다시
여수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여수에도 수빈이는 없었다.
상옥에게는 이제 더 이상 걸어다닐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발바닥엔 온통 물집이 생겨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뼈마디
마디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그저 아무 곳에나 쓰러져 눕고 싶
은 마음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고물상을 할 수는 없었다. 상옥은
여수 변두리에 있는 고물상에서 고물과 철가위, 리어카를 함께 팔
아 치웠다.
상옥은 아무래도 며칠 쉬어야 될 것 같아 여관에 들었다. 거의
60여 일을 리어카를 끌고 다녔으니 기력이 다하여 몸살이 났던
것이다 꼬박 주일을 죽도록 앓았다. 그렇게 호되게 앓고 나서도
하루빨리 수빈이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회복되지도
않은 육신을 이끌고 또다시 거리에 나섰다 혹시나 하는 막연한
바람으로 여수 시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길 한켠에 많
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상옥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 보니 약장수였다. 50대 후반으
로 보이는 피에로가 등에 큰북을 메고 가슴에는 아코디언을 안고
서 열창을 하고 있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
에 :를 신나게 뽑는 것이었다. 그들 일행은 마음씨 좋아 보이
는 50데 중반의 피에로와 열일곱이나 열여덟종으로 보이는 귀엽
게 생긴 소녀가 전부였다.
상옥은 무릎을 쳤다. '그렇다! 저 약장사를 따라다니자. 혼자
다니는 것보다 덜 외로을 것이고, 수빈이도 약장사 구경을 좋아
했었지: 상옥은 왠지 그 약장사를 따라가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옥은 그들의 사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긴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약 파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더 이상 약이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
자 그들은 숙달된 동작으로 짐을 챙긴 뒤 소녀를 앞세우고 어디
론가 떠나고 있었다. 상옥은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시장
초입의 허름한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상옥도 그들을 따라 들어가
그들이 먹고 있는 국밥을 주문했다. 국밥을 한 수저 뜨는데, 예의
그 약장수가 상옥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젊은이 !"
"네 ?"
상옥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흠칫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마치 그
들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우리 뒤를 따라온 것 같은데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
는게요?"
"맞습니다. 실은 아저씨한테 부탁 드릴 일이 있어 따
라왔습니다. "
"나 같은 사람한테 무슨 부탁을
'죄송하지만 합석을 해도 될까요?"
"괜찮소, 이리 오시오."
상옥은 무엇 때문에 그들을 따라오게 되었는지를 대강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 저를 데리고 다녀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돈 같
은 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아저씨 자는 데서 같이 재워 주면 되
고 아저씨 드시는 데서 조금만 먹여 주면 됩니다. "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상옥에게 물었다.
' 잘하는 특기 같은 것 있소?"
특별히 잘 하는 것은 없구요. 기타를 좀 칠 줄 알고 하모
니카도 불 줄 압니다. "
"그래? 그럼 같이 한번 해봅시다. "
상옥은 그날로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구입해서 3인 오역의 돌팔
이 약장사 악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때로 여인숙 방에서 악기의
음을 맞추어 보다가 주인에게 쫓겨 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상옥 일행은 새로운 기분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마스터 아저씨
는 드럼과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상옥은 기타와 하모니카, 그리고
소녀는 탬버린을 연주했다. 어설프지만 그래도 혼자서 하는 것보
다는 한결 좋아 보였다.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밑에
말을 메는 아가씨야 해가 저문다
쉬지 말고 쉬지를 말고 달빛에 길을 물어
꿈에 그리는 꿈에 그리는
항구 찾아 가거라
모여 드는 관객들 앞에서 그들은 신들린 듯이 노래를 불렀
다 노래와 연주가 끝나면 마스터 아저씨의 약 선전이 시작되었
다. 위장병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약 한 병으로 못 고치는 병이 없
었다.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었다
다음은 상옥의 차례였다. 상옥은 준비한 전단을 돌리고 수빈의
용모와 인적 사항을 소상히 설명하고 거처를 알려 주면 충분한
사례를 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나면 그날의 장사는 끝나
는 것이다
상옥은 돌팔이 약장수의 일원이 되어 여수를 시발점으로 광양,
하동, 삼천포, 마산, 진해, 창원, 김해를 거쳐 부산에 이르렀다.
상옥은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부산에는 야화의 사장, 오선영이 있
는 곳이었다 부산을 떠난 지도 어언 3년이 넘었다. 선영은 그 동
안 어떻게 변했을까?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달려가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상옥은 찾아가지 않았다. 이미 아물었을 선영의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지난번
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상옥 일행은 광안리, 송도, 해운대, 태종대 등에서 20여 일을
묵으면서도 끝내 수빈이를 찾지 못했다. 상옥은 선영이도 만나지
않은 채 부산을 떠났다
첫댓글 즐감
잘보고갑니다
보고 갑니다.............
불쌍한 인생 이군요!
어찌 한여인을 잊지 못하고 그리도 애절한지!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