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 국적을 아시나요?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K-’당신의 리스트 17
탁석산
편집 디자인=홍은주·김형재
입력 2021.05.26 03:00
그룹 블랙핑크의 모습 /연합뉴스
문화는 선별과 여과의 오랜 역사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리스트를 제출하느냐는 것. 이번엔 최근 ‘한국적인 것은 없다’를 펴낸 철학자 탁석산씨가 리스트를 선정했습니다. 그는 “한국 고유의 문화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중요한 것은 한국적인 문화가 아니라 수준 높은 문화”라고 주장합니다.
/홍은주·김형재
애국가 한 소절을 듣고도 눈물을 삼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팝에서 드라마, 푸드, 심지어 방역까지, 한국산임을 뜻하는 ‘K’를 줄줄이 앞에 달고 뿌듯해하던 게 불과 얼마 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 시대에 역행하는 지나친 애국주의의 촌스러움을 경계하는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습니다. 손흥민이나 블랙핑크처럼 더 이상 ‘대한의 아들딸’로만 볼 수는 없는 스타들이 있는가 하면, 벚꽃이나 아파트처럼 이제는 한국 꽃이고 한국 주택인데도 여전히 불편한 마음으로 ‘외국산’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탁석산이 뽑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다섯 가지 ‘K’’.
/www.unsplash.com
벚꽃 - 과연 일제의 잔재인가
한 국회의원이 일제 잔재인 ‘벚꽃축제’ 대신에 ‘봄꽃축제’로 명칭을 바꿔야 하고, 일제 청산 차원에서 벚나무를 뽑고 그곳에 무궁화를 심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벚꽃은 일제가 우리 민족의 해방에 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심은 나무지만, 무궁화는 국가 상징이자 독립운동의 상징이기 때문에 국민 모두가 동참해 줄 것도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벚꽃이 일제의 잔재여서 즉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기에 바꿔야 한다면, ‘축제’도 바꿔야 할 겁니다.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을 보면 ‘축제’는 일본어 ‘슈쿠사이(祝祭)’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다쿠앙을 단무지로 바꾸자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앞 국회의원의 말에는 일본어에서 온 말이 수두룩합니다. 민족, 해방, 국가, 독립, 운동, 국민, 상징 모두 일본어에서 왔습니다. 해방은 중국 고전 ‘위지’에 나오는 말이나 오늘날의 의미로 변한 것은 19세기 말부터라 하며, 독립 또한 중국어에 전거가 있으나 1860년대 이후 정치 용어로 일본에서 일반화되었다는 게 주류 해석입니다. 나머지는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죠. 이런 어휘를 모두 없애는 것이 현실 언어생활에서 가능할지는 의문입니다. 일본어에서 왔어도 이제는 우리 생활에 녹아들어 우리말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현실적입니다. 앞의 사전 이름도 ‘우리말’ 사전 아닙니까. 순수하고 고유한, 때 묻지 않은 말만으로는 언어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벚나무를 뿌리 뽑거나 벚꽃 명칭을 바꾼다 해도 일제 잔재가 없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벚꽃이 아니라 벚꽃놀이가 일제 잔재이기 때문입니다. 벚꽃이야 아무 잘못이 없지요. 한국이든 일본이든 봄이 되면 필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벚꽃놀이를 하겠지요.
Do You Know~? - 외국인만 만나면 묻는다… 강남스타일 아십니까?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만 해도 지하철에서 한국인과 외국인이 이야기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60대로 보이는 한국인은 비교적 큰 소리로 자신 있게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단어를 나열하는 수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화는 아저씨의 선공으로 시작됩니다. 가만히 있는 외국인에게 대뜸 물어보죠.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그리고는 두 유 노가 시작됩니다. 김연아를 아는가, 싸이를 아는가 등. 계속 나옵니다. 외국인은 당황합니다. 대부분은 모른다고 하지요. 그러면 아저씨는 아는 이름이 나올 때까지 계속할 태세를 갖춥니다. 외국인은 다음 역에서 내립니다. 예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외국인이 말을 걸면 도망가기 일쑤였고,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영어를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곤 했죠.
/www.graphicpear.com
예전에는 해외 체류 경험도 거의 없었고 영어도 할 줄 몰랐기에 위축되었을 겁니다. 여기는 한국 땅인데 왜 영어를 못한다고 위축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요. 여행객은 불편하면 통역과 함께 다니면 되는 것이고,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불편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요. 하지만 이제는 역전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역전이 과도하다는 겁니다. 즉 자신이 그냥 승객이 아니라 한국 대표가 된다는 겁니다. 한국을 대표하여 한국의 자랑스러운 것을 알려주겠다. 갑자기 민간 외교관이 된 겁니다. 불행히도 상황이 맞지 않습니다. 지하철 안은 외교 무대가 아니라 개인들의 일상 공간입니다. 장소와 상황 그리고 관계를 착각한다면, 아무리 선의로 해도 금방 ‘국뽕’으로 변합니다.
손흥민 - 대한의 아들인가, 개인의 성취인가
손흥민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세계적인 축구 선수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말한다면 어색해지겠지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대한민국이 그를 위해 해준 것이 있어야 할 겁니다. 오늘날의 그를 만드는 데 국가가 지원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병역 혜택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차라리 그 공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에게 있다 해야 옳을 겁니다. 즉 개인적 차원의 일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성취가 곧바로 대한민국의 성과가 되는 것은 스포츠에서 흔합니다. 골프, 프로야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습니다. IMF 시절 박세리와 박찬호의 활약은 곧바로 한국의 자부심으로 연결되었고, 새벽에 그들의 경기를 보는 것을 국민적 성원이라고도 했습니다. 물론 국난 극복에 많은 힘이 되었지만, 역시 개인적 성취가 먼저가 아닐까요.
/이철원
1960~70년대에는 더 심했습니다.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따면 시청역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쳤고 어김없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들딸이라 불렀습니다. 월드컵이 열리면 평소와 달리 ‘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호칭이 바뀝니다. 모든 것이 국가적 차원으로 바뀐다는 신호이겠지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던 예전에는 더 심하게 스포츠의 승리를 국가의 승리로 포장했습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한 시대가 다른 시대를 오해한다. 그러나 왜소한 시대는 자기 고유의 추한 방식으로 다른 모든 시대를 오해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왜소한 시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국가주의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주위에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인 손흥민의 플레이 자체를 즐겨도 될 것 같습니다.
아파트 - 한옥만 우리 것일까
한옥 마당은 어디로 갔을까요? 한옥 예찬이 끊이지 않는 요즘, 마당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파트는 삭막하고 비인간적이며 획일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마당을 다시 떠올리곤 하는 것이지요. 마당은 아파트 안으로 옮겨갔습니다. 모여 놀기도 하고 구경도 하는 공간이었으며 또한 장독을 놓는 공간이었던 마당은 사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장독은 다용도실로, 모여 노는 공간은 거실로, 구경하는 공간은 발코니로 변했습니다. 그럼 한옥의 가장 큰 장점인 온돌은 어디로 갔을까요? 온돌은 보일러 덕분에 아파트의 방과 거실로 성공적으로 옮겨갔습니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과 재래식 아궁이의 결합은 어색해 보였지만 성공했습니다.
/고운호 기자
이런데도 아파트를 계속 깎아내리는 것은 문화를 겉모습으로 판단하기 때문일 겁니다. 즉 기와, 문양, 창, 마당 유무에 신경을 쓸 뿐 행동 양식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전통적 창살이 없으면 아니라는 식이지요. 사람의 생활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갑자기 신발 신고 들어가는 서구식 아파트를 지을 리 없고, 부엌이 빈약한 홍콩식 아파트는 지을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기존 행동 양식을 최대한 유지하려 하는 것이 문화이니까요. 사람들은 실제 생활에서는 아파트가 편하고 좋다는 것을 알고 있죠. 하지만 관념적으로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몸은 아파트에 있으면서 정신은 한옥을 예찬하는 게 아닐까요. 여기에는 서구 문화에 대한 열등감도 숨어있습니다. 즉 서구 문화에 대해 자존심을 세우고 싶은 것이지요. 우리 것이 더 훌륭하다고. 하지만 서구 콘크리트 구조물을 우리 것으로 성공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즐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블랙핑크 - 이 걸그룹의 국적을 아시나요
4명 중 지수와 제니는 한국, 로제는 한국과 뉴질랜드 이중 국적, 리사는 태국 국적입니다. 이렇게 구성된 팀을 한국의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구성하기 어려운 조합이었습니다. 국적은 민감한 문제였고 국적이 다르면 남으로 여기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국적으로 따지자면 블랙핑크는 한국 아이돌이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도 그다지 한국적이지도 않습니다. 즉 노래 가사만 해도 영어가 꽤 많습니다. ‘하우 유 라이크 댓’만 보아도 반쯤은 영어 가사입니다. 그렇다고 판소리나 민요를 부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YG
어떤 것을 근거로 K팝이라 부르는지 전문가 아닌 저로서는 알기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국적이 아니라 수준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춤, 노래, 음악성 등에서 세계적 수준에 이르지 않는다면, 지역 불문하고 인기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블랙핑크가 한국 그룹이라서가 아니라 노래와 퍼포먼스가 훌륭하기에 열광하는 것이겠지요. 물론 블랙핑크 생산지가 한국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준에 미달한다면 어느 누가 생산지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한국이 우수하다기보다 블랙핑크가 대단한 것이지요. 이것을 착각하면 맹목적 한국 찬양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국적 불명이라는 말이 비난의 의미로 쓰인 적이 있었습니다. 국적을 알 수 없게 된 짬뽕과도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하지만 짬뽕도 짬뽕 나름. 그 짬뽕이 맛이 훌륭하다면 국적 초월이라 불러도 좋을 겁니다. 아니 창의적 융합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해 보입니다.
탁석산
☞탁석산씨는
서울대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한 뒤 한국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 책 ‘한국의 정체성’에서 “서편제보다 쉬리가 더 한국적인 영화”라는 도발적 주장을 한 뒤 ‘한국의 주체성’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책을 통해 “진정한 한국 문화는 뿌리보다 수준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