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한 짐승
신 14:1-21
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3 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4 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름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가 흰 노루와 뿔이 긴 사슴과 산양들이라
6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7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10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 부정함이니라
11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으려니와
12 이런 것은 먹지 못할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13 매와 새매와 매의 종류와
14 까마귀 종류와
15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6 올빼미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17 당아와 올응과 노자와
18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며
19 또 날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는 것은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먹지 말 것이나
20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을지니라
21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은 먹지 말 것이나 그것을 성중에 거류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파는 것은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신 14:1-21 / [죽은 자들에 대한 규정] 여러분은 여호와의 백성입니다. 여러분과 여호와의 관계는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슬퍼할 때에 살을 베어 상처를 내지도 말고 미간 위의 머리를 밀지도 마십시오. 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뽑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지상에 있는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여러분을 선택하여 주님의 귀중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3)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더럽게 여기시는 것들은 아무 것도 먹지 마십시오. 4) 여러분이 마음대로 잡아먹을 수 있는 짐승들은 소와 양과 염소와 5) 사슴과 노루와 꽃사슴과 들염소와 들소와 들양과 산염소들입니다. 6) 곧 굽도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도 하는 짐승은 여러분이 모두다 잡아 먹을 수 있습니다. 7) 그러나 새김질만 하거나 굽만 갈라진 짐승은 잡아 먹을 수 없습니다. 낙타와 토끼와 사반은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부정한 짐승입니다. 8) 돼지의 경우에는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여러분에게 부정한 짐승입니다. 여러분은 돼지 고기를 먹지 말고 돼지의 주검도 만지지 마십시오. 9) 물 속에 사는 것들 가운데에서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 먹을 수 있습니다. 10) 그 밖의 물고기는 모두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에게 부정한 것입니다. 11) 정한 날짐승은 모두 먹을 수 있습니다. 12) 여러분이 먹을 수 없는 것은 독수리와 수염수리, 흰꼬리수리와 13) 검은소리개와 각종 붉은 소리개와 14) 까마귀 종류와 15) 타조와 올빼미와 갈매기와 각종 매와 16) 부엉이와 따오기와 백조와 17) 사다새와 흰독수리와 가마우지와 18) 고니와 각종 푸른해오라기와 오디새와 박쥐 등입니다. 19) 날개가 달린 곤충들도 모두 여러분에게 부정한 것이므로 먹어서는 안됩니다. 20) 그 밖에 날아다니는 것들은 모두 정한 것이므로 먹어도 됩니다. 21) 여러분은 저절로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의 마을에 함께 사는 외국인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다른 나라로 팔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선택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런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염소새끼를 제 어미의 젖에 삶아 먹어서도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민으로써 지켜야 할 규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민족과 구별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두 가지가 용모와 음식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1-2) 죽은 자를 위해 애도할 때 금하신 명령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당시 고대사회에 죽은 자를 애도할 때 자기의 몸에 상처를 내거나 머리를 미는 의식이 광범위하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피를 통해서 음부의 신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자녀인 이스라엘이 이런 행위를 본받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성민이기 때문입니다(2).
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3-21)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먹는 것을 통해서도 이방 민족과 구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는 조건 중의 하나에 위생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음식법에 있는 위생적인 이유를 이해할 만큼 의학적인 지식이 발전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기생충이나 질병을 옮길 가능성이 있는 동물들은 불결한 음식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기생충이나 질병을 옮길 가능성이 적은 동물들은 정결한 동물로 규정되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도록 하지 않고, 부정한 것을 분별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짐승이라면 차라리 멸종시키도록 명령하실 수 있지만 먹지만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부정하다고 나쁜 짐승이고, 정결하다고 좋은 짐승이 아닙니다. 강조점은 짐승의 부정함이 아니라 그것을 먹지 말라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명령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 숭배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분별하게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치고 먹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의 풍습을 따르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한편 죽은 것을 이방인에게 줄 수 있었지만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21). 대신 그것을 성중에 있는 객이나 이방인에게 파는 것은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되었습니다. 이는 이방 종교의 예식의 하나로써 이방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는 명령이며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악습으로 금지시키신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은 당신이 구별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당신은 성도로써 구별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잘못한 것이 있을 때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 충만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용서하라 하시면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라 하시면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 설 교 >
지느러미 인생, 비늘 인생 철학
신 14:9-10 / 강문호 목사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요즈음 나는 바울처럼 <몸안에서 사는 지 몸 밖에서 사는 지> 성령에 취하여 살고 있습니다. 요즈음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주신 일들을 정리하여 봅니다.
우선 장경동 목사님을 모신 집회가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이 교회를 정성드려 지은 머릿돌 교회 성도들이 장 목사님 집회를 기회로 향수를 느끼며 몰려 들었습니다. 모두가 감격하였고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 등록자만 20명입니다. 금년에 출석이 장년부만 150명이 늘었습니다.
작은 교회 하나가 생긴 셈입니다.
지난 주일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집을 팔았습니다. 토요일 잔금을 받아 614,000,000원을 강대상에 올려 놓고 설교하였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도 헌금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장로님들과 저와 하나님만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저의 생애에 가장 헌금을 많이 한 주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긴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예산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으로부터 긴급 전화가 왔습니다. 교회가 파산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꼭 내려와서 살려 달라는 긴급전화가 왔습니다.
나는 후배 목사의 목소리에서 생사가 달린 문제인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만사를 다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 저녁에 내려 갔습니다. 이렇게 급하게 집회를 갑자기 한 것은 처음입니다.
70명 모이는 데 거의 노인들이었습니다. 한 달에 300만원 헌금이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크게 짓고 7억 빚이 있고 한 달 이자가 400만원입니다. 이제까지 견디어 왔습니다. 이제는 카도도 가득찼습니다., 4월 이자 내려고 자동차까지 맡겼습니다. 이제 5월은 파산입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할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상황 설명을 듣고 나는 기도에 들어 갔습니다.
우선 400만원 헌금자 24명을 모집하면 2년간 숨을 쉴 수 있게 된다는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첫 시간에 교회가 파산 지경임을 설명하면서 400만원 헌금자 24명을 모집한다고 말했습니다. 초긴장이었습니다. 모두가 떠나려고 하는 데 물질 문제를 강력하게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도 놀라고 교인들도 놀랐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24명이상이 나왔습니다. 한 달 300만원 가량 헌금이 나오는 교회가 현금만 3000만원이 나왔습니다. 작정이 6000만원이 나왔습니다. 모두 금반지, 금목걸이, 금팔지를 뺐습니다. 70명 모이는 데 금반지가 50개 정도 나왔습니다. 일년 예산의 3배가 3일동안 헌금되었습니다.
더구나 더 큰 기적이 일어 났습니다.
한 집사님이 빚을 갚으라고 7억상당의 부동산 땅 257평을 바쳤습니다. 모두가 해결되었습니다. 마지막 시간 모두가 붙들고 엉엉 울었습니다. 다시 해보자고 부등켜 안고 울었습니다. 나도 울어 버렸습니다. 내가 우니까 더더욱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나는 강사비도 받는 즉시 헌금으로 드리고 왔습니다. 한 교회가 천국이 되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립니다.
오늘부터 우리 장로님들 19명은 유니폼을 입고 성도들을 도울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하나가 되어 경영을 하고 계십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 아들 희일이 일년 등록금 5000만원도 지불하여 주셨습니다. 뉴욕 콜럼비아 공부도 이제 다 끝나 갑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립니다.
기쁜 마음으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물에 있는 어족 중에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무릇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무릇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 부정하니라>(신 14;9-10)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는 신명기 14장을 본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4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너는 가증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신 14;2-3)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도는 성민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스럽다는 말은 하기오스인 데 이는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민이 있는 땅은 성지입니다. 성민이 먹는 쌀은 성미입니다. 성민이 사용하는 가구는 성구입니다. 성민의 영은 성령입니다. 성민의 책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민은 먹는 것도 아무 것이나 먹지 말고 구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탈무드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의사가 아침마다 자기 환자들을 돌아 봅니다. 이 때 간호원이 옆에 따라 갑니다. 한 환자를 보더니 간호원에게 말했습니다.
<간호원! 이 환자에게는 고기를 먹이지 말아요. 돼지 고기는 절대 금물이요. 커피도 당분간 피하시오.>
의사는 다른 병실로 들어가더니 환자를 보고 말했습니다.
<간호원! 이 환자에게는 아무 음식이나 주어도 좋아요. 아무 것이나 먹고 싶다고 하는 대로 공급하시오.>
병실에서 나온 간호원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느 환자에게는 음식을 금하는 것이 있고 어느 환자는 금하는 음식이 없이 아무 것이나 주어도 좋은 것인가요?”
의사가 대답하였습니다.
<처음 환자는 조금만 노력하면 살릴 수 있는 사람이요. 그러니 음식을 조심시켜야 하오. 그러나 나중 환자는 죽을 환자요. 아무 것이나 먹어도 좋은 이유가 이왕 죽을 사람이라는 의미요.>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얻을 우리에게는 음식을 금하셨습니다. 그러나 지옥갈 이방인에게는 음식을 금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민인 우리가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여 주셨습니다.
우선 땅위에 짐승들 중에는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짐승만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날라다니는 동물중에는 날라다니기도 하고 기기도 하는 동물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물속에 있는 물고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셨습니다. 지느러미와 비닐이 있는 물고기만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뱀장어, 미꾸라지는 먹을 수 없습니다. 지느러미는 있지만 비늘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이 성경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2년 전 우리 교회에 탈무드 일인지 돈 미카 랍비를 초청하였습니다. 첫 날 저녁 식사를 차려 놓았습니다. 먹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나중에 물었습니다.
<새우가 들어 있었고, 돼지 고기가 들어 있었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랍비를 초청하여 놓고 음식 때문에 곤역을 치루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구약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지 말아야 하는 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는 오늘 언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그 영적 의미만 파헤치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지느러미와 비닐이 있는 것만 먹으라고 하셨을 가요? 성민은 성민답게 먹어야 합니다.
1. 지느러미 인생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지느러미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물고기에서 지느러미를 잘라 버리면 어떻게 될가요?
말할 것도 없이 한 자리에서 맴돌며 전진하지 못 하게 됩니다. 큰 고기가 와서 잡아 먹으려고 하여도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지느러미는 생명입니다.
지느러미는 목표를 향하여 나가게 합니다. 지느러미 인생이란 목표를 향하여 줄기차게 전진하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동물은 생존하고, 사람은 살아가고, 성도들을 싸워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바울은 죽을 때 말하기를 일생 싸워 온 생애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인생을 다 살고 나서 바울은 인생을 싸워 왔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싸우는 것입니다. 병과 싸우고, 돈과 싸우고, 사람들과 사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목표 달성을 위하여 지느러미를 계속 움직이면서 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목표가 좋은 목표일가요?
1. 큰 목표가 좋은 목표입니다.
목표를 세울 때 큰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말로는 뱃장이고, 성경적으로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큰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별을 보고 활을 쏘다 독수리를 잡는 것이 독수리를 겨냥하다가 돌을 건드리는 것보다 낫다.>
시편기자는 외치고 있습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좀 크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느 재벌이 죽으면서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너 이 많은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니?>
<아버지. 넓은 땅을 사고 싶어요.>
아버지는 아들의 꿈이 큰 줄 알고 좋아 하면서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그득히 심고 싶어요.>
<그래서?>
<이빨쑤시게 만들고 싶어요.>
생각이 커야 합니다. 꿈이 커야 합니다. 지느러미 인생이란 꿈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목표를 크게 세워야 큰 능력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목표를 가지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목표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하늘과 땅, 모든 권세가 내게 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런 말들은 얼마나 큽니까? 시간적으로 크고 공간적으로 큽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본받으면 됩니다.
지느러미 인생은 목표인생입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목표가 좋은 목표입니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목표는 좋은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목표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아라비아 전설입니다.
한 여행자가 사막을 걷고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였습니다. 그는 샘을 발견하였습니다. 신기하게 좋은 물이었습니다. 그 신하는 왕을 사랑하였습니다. 한 나라 정치를 잘 하여 달라고 늘 기도하였습니다. 그 물을 가죽부대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가지고 갔더니 물이 썩었습니다. 그럴 줄도 모르고 왕에게 그 물을 드렸습니다. 왕은 그 물을 마시면서 말했습니다.
<맛있다. 나는 물을 마시지 않고 사랑을 마시고 있다.> 사랑이 있기에 썩은 물일 망정 맛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신선한 물이라고 그렇게 맛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는 목표가 좋은 목표입니다.
어떤 여자가 투신 자살을 결심하고 강 다리위로 올라 갔습니다. 여자 경찰이 죽으려고 하는 그 여자를 보고 밑도 보지 않고, 뒤도 보지 않고 잽싸게 교각위로 올라 갔습니다. 교각에 올라서자 너무나 무서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겁에 질려 꼼짝도 못 하고 시퍼렇게 질려서 서있었습니다.
자살하려던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여자 경찰에게 오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내가 모시고 내려 갈테니 내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여자 경찰 손을 잡고 내려 왔습니다. 후에 서로는 사랑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사랑이 있는 관계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사랑이 있는 목표가 좋은 목표입니다.
뉴욕에 국제 공항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죤 F 케네디 공항이고. 다른 하나는 라구아디아 공항입니다. 역대 뉴욕 시장 중에 가장 유명한 시장이 라구아디아입니다. 라구아디아는 시장이 되기 전에 판사였습니다. 그가 판사로 있는 동안 언제나 사람들을 사랑하였기에 시장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남의 빵을 훔쳐 먹다 잡힌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라구아디아가 물었습니다.
<왜 남의 빵을 훔쳤습니까?>
<배가 고팠습니다.>
<10불 벌금입니다.> 그리고 라구아디아는 자기 모자를 벗어 들고 말했습니다.
<이 노인이 배고파하는 동안 나는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나는 그 벌금으로 10불을 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배고픈 사람이 있는 데 배부르게 먹었다면 벌금을 내세요.> 그리고 모자를 돌렸습니다.
노인은 10불 벌금을 내고 47불을 손에 들고 나가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목표가 남에게 감동을 주는 목표입니다. 지느러미 인생, 바로 목표 인생입니다.
크고 사랑하는 목표를 향하여 지느러미를 힘차게 움직이는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시기에 지느러미 있는 물고기만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 비늘 인생관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비늘은 물고기에게 어떤 역할을 하여 주는 가요? 비늘은 물고기의 피부를 보호하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마치 갑옷을 입은 사람처럼 자기 몸을 잘 보호하여 주는 역할이 비늘의 역할입니다.
비늘 인생이란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인생관을 철저히 갖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3요2-4)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제일 좋은 길이 있습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부모님에게 최대로 효도하는 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잘 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최대로 효도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범사가 잘 되어야 합니다.
건강하여야 합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느 마을에 재벌에 가까운 갑부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하나도 없고 외동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은 난폭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결혼하라고 총각을 붙여 주면 죽을 정도로 패주는 난폭한 여자였습니다. 누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 아버지와 친구가 그 마을에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하여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친구에게 잘 말해 주어서 나와 그 여자와 결혼하게 해주세요.>
아버지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너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 줄 아니? 잘못 하다가는 너 죽는다.>
그러나 아들은 말했습니다.
<모두를 좋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나도 좋고, 그 여자도 좋거, 아버지도 좋고, 장인 어른도 좋고, 동네 사람들도 좋게 하겠습니다.>
자꾸만 조르기에 아버지가 친구를 찾아가서 청혼하였습니다. 처녀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 딸이 어떤 딸이지 알지 않나? 결혼시켰다가는 우리 우정까지 끊어지겠네.>
그러나 아들의 간곡한 청혼을 전하자 결혼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결혼하고 그 날 밤이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어쩌면 내일 아침 신랑이 시체가 되어 나올지도 모른다고 수근거렸습니다.
밤에 자기 전이었습니다. 신랑이 개에게 말했습니다.
<손닦고 자게 세수대야에 물떠오거라.>
개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부엌으로 가서 칼을 들고 개에게 달려 들었습니다. 개는 놀라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대문을 닫았기에 앞마당에서 뱅글뱅글 돌았습니다. 한참을 돌다가 드디어 개는 잡혔습니다. 신랑은 개를 잔인하게 조각조각내 버렸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칼을 들고 신랑은 옆에 있는 고양이에게 말했습니다.
<손닦고 자게 세수대야에 물떠와!>
고양이는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신랑은 칼을 들고 고양이에게 달려 들더니 사정없이 조각조각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뛰어 나가더니 말을 보고 말했습니다.
<손닦고 자게 세수대야에 물떠와!>
말도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그 신랑은 역시 말을 조각 조각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신부를 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 살아 있는 것 또 있나?>
신부는 겁에 질려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습니다.
<손닦고 자게 세수대야에 물떠와!>
신부는 벌벌 떨면서 세수대야에 물을 떠왔습니다. 손을 닦으며 신랑이 말했습니다.
<너도 물을 안 떠왔으면 저렇게 되었을 것이다.> 손을 닦은 신랑은 이불속으로 들어가면서 말했습니다.
<나 첫 날밤부터 스트레스가 많아. 푹 자게 내일 아침 깨우지 말아. 아침 다 해놓고 깨워.>
신부는 겁에 질러서 대답하였습니다.
<알았어요.>
아침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궁금하여 그 집앞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신부만 일어나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기들끼리 수근거렸습니다.
<신랑을 또 죽였나보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신랑은 어디 있어요?>
신부는 손가락을 입에 대면서 말했습니다.
<쉿! 조용해요. 밥도 안 했는 데 깨어나면 큰일나요.> 그래서 동네도 조용하여지고, 신부도 신랑도 만족하고 양 사돈도 만족하고 모두가 만족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관리를 잘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비늘있는 고기만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는 고기만 먹으라고 하니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목표 지향적이고 자기 관리를 잘 하라고 하시는 영적인 말씀입니다.
양과 염소
신 14:3-5 / 이성희 목사
오래 전에 한번 하였던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세족식을 성례로 하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교회는 분기마다 세족식을 합니다. 목사님이 장로님들의 발을 씻어주면 장로님들이 온 교우들의 발을 씻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그 교회의 장로님의 발을 씻을 때마다 왼쪽 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한번은 용기를 내어 장로님은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가급적이면 오른발을 먼저 씻어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오른발, 왼발의 말씀은 없고 발을 씻었다는 말만 나오는데 이런 것을 가지고 시비하니 목사님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묵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장로님은 자신의 말이 묵살 당했지만 그래도 다음 세족식 때는 기대했습니다. “말씀은 저렇게 하시지만 다음에는 오른발을 먼저 씻으시겠지”. 그런데 그 다음 세족식 때 목사님은 다시 왼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장로님은 너무 화가 나서 교인을 선동하여 교회를 나누었습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성례의 한 부분 때문에 교회가 분열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습니다. 그 교회의 이름을 ‘오른발 교회’라고 지었답니다. 참 우스운 일이지만 우리가 버리지 못한 관념은 이런 어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른쪽과 왼쪽이 굉장히 민감합니다. 오른쪽을 일반적으로 선호합니다. 오른쪽, 왼쪽은 교회의 분열뿐만 아니라 사상이나 국가의 분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오른쪽과 왼쪽은 영원한 심판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의 분열이라는 점입니다. 오른쪽은 구원받은 쪽이고, 왼쪽은 구원받지 못한 쪽이라고 합니다.
지난 8월 13일은 ‘세계 왼손잡이 날’입니다. 올해가 15주년입니다. 왼손잡이는 아직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대학교 강의실에도 왼손잡이 책상이 없습니다. 가위도 왼손잡이용 가위가 흔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왼손잡이가 4%로 약 200만 명입니다. 양손잡이가 8%이고, 나머지 88%가 오른손잡이입니다. 왼손잡이는 여전히 불편을 많이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왼손을 사용하는 아이들에게 오른손 사용을 강요하는 것은 왼손에 대한 편견 때문입니다. ‘좌익’이라고 하면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의 ‘right’라는 단어는 ‘오른편’이란 뜻도 있지만 ‘옳다’란 뜻도 있습니다. 오른편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통상 신생아의 17%는 왼손잡이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이 가운데 5%만이 왼손잡이로 남습니다. 그래서 왼손으로는 불편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적 전승에 의하면 구약시대 때부터 오른편은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이해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오른손”이라고 표현합니다. 힘 있는 정의의 손입니다. 왼편은 저주와 사망, 미련함 그리고 힘의 상실로 이해됩니다. 손 또는 뺨을 말할 때 오른쪽은 고상한 쪽을 의미합니다. 오른 편은 또 신의 힘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심판 때에 오른편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쪽입니다. 반면에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영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표현합니다.
마태복음은 ‘심판의 복음’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곡과 겨,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 밀과 가라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충성된 종과 불충한 종,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등 마태복음은 심판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나누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심판의 명료성을 의미합니다. 즉 제 3의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과 멸망 사이의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양이 더 가치 있고 값비싼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양은 흰색이고 염소는 검은색으로 선악을 대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백성들은 양떼라고 보는 당시인들의 유목민적 사고에 근거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염소는 풀밭을 못 쓰게 하고 나무를 상하게 하는 습성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양과 이리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짐승입니다. 그러나 양과 염소는 얼핏 구분하기 힘든 짐승입니다.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구분하기 힘들지만 분명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됩니다. 구분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은 구분하시고 따로 떼어 놓으십니다. 심판 때에 양 같지만 염소로 왼쪽으로 분류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염소 같지만 양으로 오른쪽으로 분류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양으로 오른쪽에 선택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양은 희고 온순하기 때문에 오른 편에서 복을 받습니다.
34절에는 말합니다. “그 때에 임금에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아”. 양이 오른쪽에 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양의 특징과 습성을 알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목자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요 10:11). 둘째는 작은 강아지에게도 무서움 느낄 만큼 겁이 많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온순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도망뿐이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전혀 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무기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양은 방어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날카로운 송곳니나 발톱이 없습니다. 빨리 달리는 재주도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약한 자가 강합니다. 강한 것은 지구상에서 자꾸 멸종당하지만 약한 것은 끈질기게 살아남습니다. 하늘나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살아남는 자는 강자가 아니라 약한 자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강한 자들이 살아남아 하늘나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양은 선한 동물입니다. 항상 이리와 대비되는 동물입니다. 양은 거룩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양은 가장 깨끗한 제물의 대표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양으로 묘사합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고난의 양으로 묘사합니다. 요한복음 2:29에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양이시니 당연히 양이 오른편 돼야 할 것입니다.
양은 흰 것으로 상징됩니다. 이사야 1:18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합니다. 사실은 양은 희지 않습니다. 약간 누런빛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흰 것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흰색은 선인의 상징입니다. 양이 오른쪽으로 분류된다는 것은 선인들이 오른쪽으로 분류된다는 뜻입니다. 선인들이 복을 받을 자리로 구분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늘나라를 흰 색으로 묘사합니다. 흰 세마포, 흰 돌, 흰 옷, 흰 구름, 흰 말, 흰 보좌 등 하늘나라에는 흰 색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하늘나라는 새 것으로 묘사됩니다. 새 하늘, 새 땅, 새 이름, 새 예루살렘, 새 노래 등이 하늘나라의 특징으로 묘사됩니다. 신학자 트렌치는 “흰 것과 새 것은 천국의 기본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의 기본어인 흰 것, 그 가운데 흰 양은 오른 쪽으로 분류되고, 천국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희고 온순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구별될 것입니다.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 좋은 편에 설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시편 24:3-4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거룩한 곳에 설 자입니다. 희고 깨끗한 자가 하늘나라의 사람인 것은 확실합니다.
지난 5월 호주에 집회인도 차 갔을 때에 그곳의 목사님들과 공원에 갔습니다. 쇠고기, 닭고기, 양고기 등을 가지고 가서 부인들이 바비큐를 하다가 어느 사모님이 그랬답니다. “목사님들이 양들 다 잡아 먹는다”고요. 그런데 성경대로 하면 잡아먹히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이 이기는 자입니다. 깎는 자보다 깎이는 자가 이깁니다. 먹는 자보다 먹히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런 자가 최후의 승자입니다.
이런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 “복 받을 자들이여”라고 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호이 율로게메노이’라는 말인데 완료분사입니다. 한번 받은 축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영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 그리고 앞으로도 복 받을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축복된 말씀입니까?
로또 복권 1등 당첨자 수칙이 있습디다. 첫째는 무조건 잠적하라. 둘째는 당첨금은 한두 달 후에 받으러 가라. 셋째는 기자회견 같은 것을 하지 말 것. 넷째는 집 전화, 휴대전화를 당장 바꿀 것. 다섯째는 즉시 이사할 것. 여섯째는 최소 한 달 이상 외국 여행할 것. 일곱째는 당첨 사실을 가족에게도 말하지 말 것. 여덟째는 통장 비밀번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 아홉째는 히죽히죽 대지 말고 표정 관리를 잘 할 것입니다. 이게 복권입니까? 아니면 저주권입니까? 하나도 복 같지 않아요. 세상에는 복 같은 저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의 축복은 저주 같은 복입니다.
둘째, 염소는 검고 파괴적이기 때문에 왼 편에서 저주를 받습니다.
41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을 자들아”. 염소는 저주의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염소의 특성이란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파괴적입니다. 거기다가 검기까지 합니다. 외모가 아니라 내면의 악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3의 지대가 없습니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선과 악의 완충지대는 없습니다. 비무장지대와 같은 곳은 없습니다.
열왕기서와 역대서를 보세요. 두 종류의 왕이 등장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라는 왕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는 왕입니다. 그 외의 왕은 없습니다. 모든 왕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보통으로 행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제법 괜찮게 행하여”란 말이 없습니다.
성경은 악인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잠언 12:7에는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고 합니다. 시편 37:20에는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라고 합니다. 악인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말로가 뻔합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검은색이란 악, 부정, 범죄, 멸망 등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6:5에는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고 합니다. 검은 말은 비애와 기근의 색을 의미합니다. 식량을 저울에 단다고 하는 것은 절박한 기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검은 색은 전통적으로 좋은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Black list, Black money, Black Monday, Black comedy 등 거의 모든 말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흑인들은 이런 말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왜 검은 색이 부정적이냐고 반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검은 것이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색에 대한 관념은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흑염소가 몸에 좋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아예 고아서 소주로 만들어 병에 넣어서 팝디다. 그런데 오래 전에는 염소를 팔려고 끌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 끌려가려고 다리를 뻗치고 버티는 염소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양은 목자가 앞장서기만 하면 따라옵니다. 염소는 그 성질을 봐도 왼편 성향이 다분합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검은 부분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도록 하였습니까? 인생은 어두운 곳을 통해서 밝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흰 곳을 통하여 검은 곳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악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소녀가 애완동물 가게에 들어왔습니다. “토끼 한 마리 주세요”. “어떤 토끼를 원하니 하얀 토끼를 줄까, 아니면 검은 토끼를 줄까?” “글쎄요. 우리 집 비단 뱀이 하얀 토끼, 검은 토끼를 따질 것 같진 않은데요”. 흰 것만 삼키면 착한 사람입니다. 가리지 않고 삼키는 사람은 검은 사람입니다. 검은 사람이라고 흰 것을 먹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검은 사람은 흰 것과 검은 것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웁니다.
염소는 아무리 양과 함께 살고, 양인 척해도 결정적 순간에는 염소의 습성이 드러납니다. 악한 성질이 나타나고 파괴적 성품이 드러납니다. 이런 자들이 왼편으로 분류되고 저주를 받을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악한 자는 그 마음이 이미 지옥이며 파멸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이 말은 “복 받은 자들이여 나아와”와 대칭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7:23에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합니다. 떠나라는 말씀은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 저주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분과 영영히 관계가 단절될 것입니다.
결 론
히말라야의 고산족들이 양을 매매하는 방법은 양의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정한다고 합니다. 성질을 테스트하는 방법은 팔 사람과 살 사람이 함께 양을 산비탈로 데리고 가서 위로 올라가면 아무리 말라도 비싸게 팔리고, 아래로 내려가면 아무리 살져도 싸게 팔린다고 합니다. 성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양이지만 가치 있는 성품이 있고, 그렇지 못한 성품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치 있는 성품을 지닌 양이기를 바랍니다.
양과 염소는 구별하기 힘듭니다. 양과 염소라는 말은 항상 비슷하게 사용됩니다. 양과 염소는 함께 우리에 삽니다. 신명기 14장 법전에 의하면 양과 염소는 똑같이 먹을 수 있는 짐승입니다. 거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는 구분이 됩니다. 풀을 뜯을 때는 무리 속에 구분 없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일교차가 심한 기후인 팔레스타인에서는 잠 잘 때는 양과 염소를 구별합니다. 양은 추위에 강하고, 염소는 추위에 약합니다. 그래서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목자들은 나누어 놓는다고 합니다. 양과 염소는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짐승입니다. 저희들끼리 무리 이룹니다. 희고 검기 때문에 함께 있지만 이미 구별이 됩니다.
여러분은 양입니까, 염소입니까? 양과 함께 있다고 양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습니까? 양인데도 염소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속의 검은 부분을 흰 것으로 바꿉시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양처럼 희게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나 지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양으로 고상하고 깨끗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오른 편으로 구별되어 복 받는 자가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구별된 삶
신 14:1-29 / 양인국 목사
1.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별된 삶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다. 여기 구별된 삶이란 차별화된 삶을 말하는데, 이와 같은 삶은 동기(動機)는 서로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차별화 할수록 더 많은 특권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차별화하려고 하고 이를 위하여 더 많은 재산과 지식과 권력을 얻고자 한다. 이와 같은 방식의 차별화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라는 외적 차별화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본질적인 차별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방식으로 차별화하고자 하는 것들은 모두 탐욕에 기원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스스로를 차별화하려고 하는 것은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여기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을 말하므로 내적 변화가 요청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차별화는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모두 샬롬을 누릴 수 있고 더불어 살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가? 본문은 이 물음에 대하여 대답해 주고 있다.
2.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별된 삶을 위하여 주신 세 가지 권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이방인들이 행하는 종교의식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고(14:1,2), 다른 하나는 음식에 관한 규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될 것들 말씀해 주셨다(14:3-21). 마지막은 소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14:22-29). 여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세 가지 권고의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방인이 행하는 종교의식에 참여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14:1,2)” 여기 이방인들의 종교의식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는 것과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미는 행위”는 자신들의 피로서 신들을 기쁘게 해 줄 때 신들로부터 호의를 얻을 수 있다는 그들의 종교관으로부터 나온 행위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와 같은 이방의 종교의식을 따라 행한다면 그 자체가 참된 신앙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이방종교 정신의 지배를 허용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행위를 금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종교 의식을 금하신 후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14:2)”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행하는 것들을 행함으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 이방인들이 행하는 것들 즉 그들의 종교의식과 관습은 그 시대정신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이 그 시대정신을 따라 행함으로 구별된 삶을 살 수 없었다는 것은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도 오늘의 시대정신을 따라 행함으로 구별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 오늘의 시대정신이란 재산과 지식과 권력을 추구함으로 스스로를 차별화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살았다는 것과 모든 일을 하나님과 의논하며 살았다는 것 그리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살 때 비로소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신 음식만 먹으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은 가증한 것이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정한 것이었다. 여기 중요한 것은 이방인들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은 의학적인 관점 또는 영양학적인 관점에서 구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음식을 구별하였다면 이 구별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먹은 이방인들에게는 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이와 같은 음식을 먹음으로 해가 되었다는 말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면 어째서 하나님은 먹을 수 있는 음식들 가운데 어떤 음식은 먹어도 되고 어떤 음식은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을까? 우리가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들에 비취 볼 때 하나님께서 음식을 구별해 주신 것은 우리의 구별된 삶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스스로 어떤 것들을 금함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들의 구별된 삶을 나타내며 살았다.
실례로서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초기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술과 담배를 금하고 노름을 금함으로 자신들의 구별됨을 드러냈고, 중국에서 아편을 금함으로 그리고 영국에서는 커피를 금함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들의 구별됨을 드러냈다. 이처럼 시공간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금하는 것을 달리했던 것은 그 시대 그 지역에서 사회적 문제를 가져다주는 해악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을 자체를 금함으로 자신들의 구별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의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드러내기 위하여 금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의 시대를 황폐하게 하는 것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탐욕일 것이다. 탐욕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만족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되고 또한 이웃과 다투거나 갈등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탐욕이 지배하는 곳은 어디에도 샬롬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도 소유를 더할 수 있다. 그러나 탐욕이 이 시대를 황폐하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스스로 탐욕을 금함으로 우리의 구별된 삶을 세상에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노후를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점점 더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림은 현재 짓고 있는 농사(農事)를 통하여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으므로 전기와 상하수도세 등 생활에 필수적으로 드는 돈과 그리고 각종 세금 등을 낼 수 있는 정도의 돈만 있다면 믿음의 삶을 사는 일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 이상의 재물을 얻는다면 나눔의 삶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별된 삶을 위하여 명하신 것에 따라 오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소유들 중에 필요한 것과 탐욕을 구별하여 탐욕을 금하고 필요한 것만 소유한다면 세상에 우리의 구별됨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과 그리고 그것으로 이웃과 애찬을 나눌 것을 말씀하셨다(14:22-29). 당시 십일조는 이방 세계에서 세금의 일종이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는 그것을 받는 자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매년마다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도록 요청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매년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라는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요청은 이스라엘의 복된 삶을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매년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림으로 자신은 무소유자임을 인정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하여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새롭게 깨달음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근심들 가운데 대부분은 소유문제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우리 것으로 오해함으로부터 오는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매년 십일조를 드림으로 소유권에 대한 오해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시고 또한 소유욕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소유욕으로부터 자유하여 은혜 안에 거할 때 비로소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별히 하나님은 드린 십일조를 가지고 이웃과 나누며 즐거워할 것을 말씀하셨다.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이웃과 나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면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러므로 나눔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은혜의 수단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일괄(一括)된 가르침이다(레19:2,마5:13-16).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별됨을 상실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는다(마5:13). 역사는 이스라엘이 세상에 복을 가져다주는 축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복을 누리지 못했고 세상에 대해서도 축복의 통로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들은 구별됨의 상실로 인하여 오히려 모든 민족으로부터 수치를 당했다. 이처럼 구별됨 즉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오늘 말씀은 이 물음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추구함으로 구별된 삶을 살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구별된 삶을 삶으로 그리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구별된 삶을 살게 해 주심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