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 호수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오죽헌이 있고 남쪽에는 허균 생가가 있다.
조선시대는 전반적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여성은 고려 시대와 비슷한 지위와 권리를 누릴 수 있어서 그나마 재능을 펼치기가 쉬웠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는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면서 그 능력을 펼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재능 있는 여성들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다.
신사임당은 어릴때부터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시서화에 능했다고 한다.
부모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투자했는데,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의 그림을 강릉까지 사와서, 그림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재능있는 최고의 화가였지만,
조선 후기 정치 싸움으로 인해 조작되어 지금까지 현모양처로 그 이미지가 전해져 온다.
조선 중기 천재 화가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고 역사가는 강조한다.
조선전기는 여자가 결혼을 해도 시집으로 가지 않고 친정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사임당 또한 그랬다.
친정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히 마음도 편하고 가진 재주를 마음껏 펼칠수 있었다.
또한 조선전기에는 딸도 아들과 함께 동일하게 재산을 나누어 받았고 부모님 제사도 돌아가면서 지냈다.
허난설헌도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양반 가문 출생으로 타고난 문장가이자 호방한 성격의 아버지 밑에서 아들과 동등한 배움의 기회를 얻으며 자랐다
8살에 시에 천재성이 드러났는데, 아버지는 허난설헌의 재능을 알아보고 12살 오빠 허봉을 개인 교사로 붙여줬지만, 관직으로 '이달'을 개인교사로 두게 했습니다.
조선시대 여성으로 태어나 결혼을 피할 수 없었는데, 당대 권력가 집안인 안동 김씨 가문과 혼담이 오고 가는 중, 머슴으로 분장을 하고 아버지를 따라 남편 집안을 보게 되는데, 보수적인 집안으로 자신과 맞지 않음을 알아 결혼을 거부, 시대적 구조를 이기지 못하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다가 27살에 생을 마감한다.
허난설헌은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라 유언했는데 남긴 시는 방한칸 분량이 되었다고 한다.
허균은 허난설헌이 친정집에 남겨놓고 간 시와 자신이 암송하는 누이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 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후에 명나라 사신에게 전해져 중국에서 출간되어 큰 인기를 누리고, 일본으로 전해져 역시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신사임당 아버지는 아예 가문도 학식도 한참 모자라는 데릴사위를 데려와 딸이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친정집에서 눈치 보지 않고 펼치게 했지만
허난설헌 아버지는 문필에 능한 자기 딸을 5대가 문과에 급제한 안동 김씨네 명문 가문에 시집보내기로 했다.
문필가 집안에 문필가 며느리가 들어오면 귀여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오판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반기까지 내려오던 혼례풍습인 남귀여가는 남자가 여자집에 의탁한다는 뜻으로 데릴사위로 신랑이 신부집에 들어가 사는 것이다. 신사임당이 그랬다.
반면에 허난설헌은 운이 나쁘게도 친영례의 첫 세대가 되었다.
“내가 한스러운건
첫째 조선에 태어난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것이요
셋째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것이다”
허난설헌은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고 한다.
허난설헌은 이러한 불행을 책과 시로 달래다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동생 허균이 누이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을 펴내 그녀를 만날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