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뒤의 땅은 더 굳어지고 비온뒤의 하늘은 더 활짝 개이기 마련이다.
한차례의 어려운 시련을 겪고 나서 우리는 비로소 상대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재삼 느끼게 된것 같았다.
나도 내가 사랑이라고 일컫는 불륜에 큰 대가를 지불한셈이였다.
이쯤이면 우리 둘 사이에 어려운 고비도 여러번 있었고 그 고비를 무사히 넘겼으니 행복해야 할 일만 남아야 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로 나는 또 한번 그 사람을 버려야 했다.
애 아빠가 재혼하면서 친정엄마가 딸애를 돌보게 되였었다.
거기다가 언니네가 가게를 오픈하면서 조카애까지 엄마네 집에 오게 되였다. 워낙에 복잡한것을 싫어하는 딸애가 엄마 이제 돌아오면 안돼냐구? 엄마랑 살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딸애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메일을 보고나서 가슴이 찢어지는듯 아파서 견딜수가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한 가정의 따사로움도 안겨주지 못한것도 미안했고 따뜻한 엄마의 사랑을 마음껏 누릴수 없게 한것도 미안했다.
그런 딸애한테 차마 쪼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할수가 없었다.
나는 단연히 귀국을 결심했다.
그도 언젠가 이 날이 올꺼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일줄은 몰랐다면서 그다지 놀라워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그가 내심 서운하기도 했지만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몇차례의 시련으로 그한테 면역력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돌아갈 날짜를 미리 정해놓고 나니 어쩐지 시간이 너무 촉박하게 흘러가는것만 같아서 안타깝기만 하였다. 마치 시한부 삶을 사는 것처럼 서로가 대방에게 다 못해주었던 사랑을 몰붇기에는 그 나머지 시간들이 너무나 짧았다. 그동안 못 갔던 1박2일 여행도 다녀왔고 미루다가 못 봤던 영화도 보았다.
그가 물었다.< 언제면 다시 한국 나올려구?>
<아마도 애 고등학교까지는 있어줘야 할것 같슴다.>
그때까지 날 좀 기다려주면 안되겠냐구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그냥 꿀꺽 삼켜버렸다. 벼룩이도 낯짝이 있다는데 차마 나는 내 욕심 다 챙기면서 무작정 그한테 나를 위하여 희생해 달라는 말을 할수가 없었다.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그한테 아무것도 해줄수 없으면서 4년동안이나 내 곁에 붙잡아 둔 나는 욕심쟁이인가보다. <사랑해서 미안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것 같았다.
만약에 사람의 인생에도 드라마나 영화 찍듯이 리허설이 있다면 나는 내 인생을 다시 한번 멋지게 가꿔보고 싶다. 그렇지만 아무리 값비싼 고무지우개로 빡빡 문질러도 지워버릴수 없는 삶을 40년이나 살아왔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드디여 헤여지기 전날 저녁식사가 끝나고 두사람이 마주 앉았다. 서로를 마주보는 눈길이 그보다는 애처로울수는 없었을것 같았다. 드디여 내 눈에 눈물이 고였고 그는 그러는 나를 품에 안아주었다.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말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단지 모든 에너지를 대방을 느끼는데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이튿날 출근때문에 그는 일찍 떠나야 했다. 리별은 너무나 슬픈것이였다.그냥 <잘가라><잘 있으라>는 한마디만 하였다. 나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가끄스로 참았다. 이런 살점을 도려내는듯한 아픔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모를것이다.
이왕의 행차와는 달리 이제는 더는 그를 못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프기만 하였다. 겉으로는 아닌척 아무렇지도 않은척 했지만 내 속은 속이 아니였다. 그한테서 걸려오는 전화 그리고 메신저대화가 나한테는 유일한 락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갑자기 물었다.<자기 나랑 살면서 나한테 뭐 속인거 없었어?>
뜬금없는 말에 도대체 왜 이런 말을 할까 하면서 가슴이 섬찍해났다.
<뭘 속였다고 그램까?>
<너 진작에 리혼했다면서? 왜 나한테는 말 안했어?>
뜻밖인지라 나는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꺽꺽 거렸다.
<자기 ... 어떻게 알았슴까? >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왜 속였어?>
흥분된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들려왔다.
순간 화가 난 그의 모습이 상상되면서 아무런 변명도 할수 없었다.
<왜? 도대체 왜? 내가 이런 말을 다른사람 통해서 알아야 했니? 우리 서로 사랑한거 아니였니?
너 리혼한줄 알았더면 널 그렇게 보내지 않았어, 니가 아이때문에 간다고 하니까 보내준거지.>
... ...
<참으로 너 무서운 사람이구나, 너한테 난 도대체 뭐였니? 실망스럽다.>
뚜ㅡ뚜ㅡ
전화가 끊겼다.
나도 맥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세상에 비밀은 하나도 없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알길이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던건 나의 착각일뿐이였다.
그후 그는 나한테서 완전 사라져버렸다. 전화해도 받지 않았고 메신저는 아예 잠수함을 타버렸다. 메일을 보내도 속수무책이였다. 내가 아무리 미안하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그는 받아주지를 않았다. 나는 퀭하니 언제면 그가 뜰가 하고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애꿎은 가슴만 쥐여뜯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달, 두달이 지나고 반년이 넘도록 그는 나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해도 마무리가 깔끔하고 맺고 끊음이 잘 되는 사람인줄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감정정리도 이렇듯 매끄러운 줄 몰랐었다. 하긴 내가 준 상처가 그만큼 컸으니까 절망도 더 컸으리라.
나는 마지막으로 그한테 메일을 보냈다.
<자기야, 잘 지내지?
모든건 다 내가 잘못한거니까, 이젠 그만 화풀어,
그동안 자기랑 함께 했던 날들이 내 일생에서 제일 소중한 날들로 될꺼야.
고마웠어. 그리고 미안해,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를 너무 오래 내곁에 붙잡고 있었어.
이제라도 착한여자 만나서 재미있게 남은 인생 잘 살아... 자기는 좋은 남편 될꺼야.>
이렇게 마지막메일을 띄워보냈어도 나는 마지막 한가닥 희망의 끊을 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다. 그는 마치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렸다. 그해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듯한 봄이 오는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속은 여전히 떵떵 얼어붙은 겨울이였다.
어느 주말, 딸애랑 백화점슈퍼마켓에 가게 되였다. 생활용품코너를 돌고 있는데 앞에서 가고 있는 한쌍의 부부가 너무 다정스러워보였다. 카트를 밀고 가는 남자의 뒤모습이 어쩐지 신통하게 그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설마 아니겠지?세상에 닮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하고 인차 생각을 고쳐먹었다. 여기저기 돌고 마지막코스로 야채코너로 갔는데 방금전에 봤던 그 부부와 마주치게 되였다. 순간 너무나 익숙한 그 얼굴에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넋잃고 서있었다. 그 사람도 바라보는 나의 눈길을 느꼈던지 고개를 들었다. 두사람의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눈에서 놀라움인지 반가움인지 아니면 당황스러움인지 하는 겉잡을수 없는 표정이였다. 순간 나는 그의 곁에 있는 여자의 존재를 실감하고 몸을 돌렸다.
어떻게 계산을 하고 계산대를 빠져나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도 보고싶어하던 사람이 몇메터 앞에 서 있었는데 아는척도 못하고 나는 돌아서야 했다. 좋은 여자 만나서 잘살기를 바란다고 말로만 했었지 마음속으로 그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심정은 어떠할까? 아무튼 너무 잘 어울려 보이는 두 사람을 보니 은근슬쩍 질투도 나고 마음이 놓이기도 하였다. 그한테 내가 줄수 없는 행복을 다른사람이 대신해줄수 있다는게 고마운 일일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의 사랑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했지만 그 사람한테는 지금 좋은 여자가 생겼으니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의 행복을 축복해주는것뿐이였다.
첫댓글 소박하고 진실한 글 잘 보고 갑니다,진짜 아쉽네요,행복은 늘 곁에 있는거 아닌데,너무 손쉽게 자기 행복을 놓쳐버린것같네요,근데 세상에 단 한번뿐이라고 여겼던 사랑도 세월가면 또다른 사랑에 묻혀질때가 있어요,부디 좋은사람 만나서 다시 행복하세요
안타깝네요...행복은 쉽게 오는게 아닌데 잡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님의 글을 읽어보면서 제가 햇던 아픈 사랑을 떠올려보면서 갠히 제 마음도 짠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