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술의 역사
우리나라의 술은 민족의 형성과 더불어 자연채취식 시대의 원시생활이 시작된 이래,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 당분이 많은 과일이나 곡류에 야생의 곰팡이와 효모가 자연발생적으로 생육하여 알코올이 생성되었으며, 이것을 사람들이 우연하게 맛을 보게 되었고 그것이 기호에 맞고 기분을 좋게 하므로, 이후부터는 곡물에 곰팡이를 번식시킨 것(누룩)에 익힌 곡물과 물을 첨가해 직접 술을 빚어 마시게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술은 태초에 자연신ㆍ조상신을 위한 천신의 목적으로 제조되어 사용되었다.
전통주의 발아기 삼국시대
동ㆍ서양에서의 술의 발달과정을 추측하건대, 프랑스 등의 서양 유럽의 문화권은 여름이 건조한 탓으로 목축형 식생활이 형성되어, 누룩이 아닌 포도와 같이 당분을 함유한 과실을 발효시킨 과실주와 브랜디, 보리의 싹을 틔운 호프를 이용하여 만든 맥주와 위스키를 탄생시켰다.
반면, 우리나라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고온다습하여 농경형 식생활이 형성되었고, 농경에서 산출한 곡류에 자연적으로 곰팡이를 번식시킨 누룩을 이용한 술을 담아왔다.

전통곡주는 거르는 방법에 따라 청주와 탁주, 막걸리로 나뉜다.
그러나 우리나라 술에 얽힌 신화에서 보듯, 해모수가 유화를 유혹했던 술이 무슨 술이었는지, 이름이나 종류, 만드는 법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제조기술은 상당히 발달했다고 〈위지(魏志)〉 ‘고구려전’에 전한다. 고구려 건국 초기(AD 28년)에 ‘지주(旨酒)를 빚어 한나라의 요동 태수를 물리쳤다.’는 기록과, 중국인들 사이에 ‘고구려는 자희선장양(自喜善醬釀)하는 나라’로 주목을 받았으며, 일본의 최고 기록인 〈고사기(古事記)〉에 의하면, ‘백제 사람 인번(仁番 : 수수보리)이 누룩을 이용한 술 빚는 기술을 전해와, 천황이 이 술을 마시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으며, 인번을 주신(酒神)으로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술 빚는 기술은 상당히 발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에는 발효식품의 기술이 발달하였는데, 장(醬)과 시(豉), 혜(醯)를 상비하는 풍습이 그것이다. 이때 소금과 함께 술이 식품의 저장에 이용되었고, 어패류와 수조육류, 산류(蒜類), 죽순 같은 자연 채소류의 절임에도 술이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이미 이때부터 술이 쌀이나 기름, 장과 같이 필수식품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또 당시의 저장음식의 하나였던 포(脯), 채소절임 등에 소금과 함께 오늘날의 ‘주정침지법(酒精浸漬法)’과 같이 술이 이용되었으며, 주정침지법과 같은 식품저장법은 여러 민족이 거쳐 오는 방법으로서,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태평어람(太平御覽)〉에 고구려 여인이 빚은 ‘곡아주(曲阿酒)’가 강소성(江蘇省) 일대에서 명주로 알려져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일본의 〈고사기〉 ‘응신조(應神條)’에 ‘양주법을 아는 명인 인번(仁番) 등이 참래(參來)하여 수수보리(須須保理)가 빚은 술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본조월령(本朝月令)’ ‘6월령(月令)’에 ‘응신천황 때 수수보리가 참래하여 조주(造酒)가 처음으로 시작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조주법은 쌀로 빚은 것으로 여겨지며, 아울러 백제의 양조기술이 일본에 처음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태종춘주공조’에 그 당시 왕의 식사 내용에 대해, ‘왕의 식사는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 먹더니, 경신년에 백제를 멸한 후로는 점심을 그만 두고, 다만 아침, 저녁 뿐이었다. 그러나 계산을 하여 보면 하루에 쌀 엿 말, 술 열 말, 꿩 열 마리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로, 술이 상식(常食)으로 이용되었다는 것과, ‘반주(飯酒)’로 식사와 함께 술을 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쌀로 빚은 전통주
전통주의 성장기 고려시대

술의 종류가 다양해짐과 동시에 몽골로부터 증류법이 도입되면서 우리의 양조기술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술의 종류가 다양화됨과 동시에, 특히 증류법이 도입되어 전대의 양조기술과 함께 술은 더욱 발달하였다. 이때 양조업(釀造業)은 인력과 재력이 집중되었던 사원을 중심으로 경영되었다. 당시 사회는 사원과 승려들이 사회의 중심을 이루었으므로, 왕실은 사원과 밀착된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사원에서는 사원 소속의 각종 토지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이용하여 만든 술을 시판하게 되었는데, 당시 한 사원(통도사)에서 만든 누룩으로 빚은 술이 영남일대의 수요를 담당하였고, 당시 기록에 ‘현종 18년에는 밀주에 소요된 미곡이 360여 석이었다.’고 하니, 사원의 양조업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 국가에서 주전(鑄錢, 해동통보)의 유통을 목적으로 공설주점과 원(院)을 세우면서, 주점 외에 객관이 증설되어 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양조업이 성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술은 크게 청주(淸酒), 탁주(濁酒), 소주(燒酒), 과실주(果實酒)로 분류되는데, 청주를 위시하여 법주, 과일주와 생약재를 가미해서 빚은 약용약주(藥用藥酒), 꽃의 향을 가미해서 빚은 가향주(佳香酒) 등 다양한 기술의 발전을 보였다.
한편, 원나라로부터 도입된 증류법은 획기적인 일로, 우리의 음주문화와 양조법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고려사〉 ‘정사(正史)’에 신우왕 원년 교서로 ‘소주음용금지령’이 공포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신우왕 원년(1375)은 소주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지(1277) 근 100년에 달한다. 이때 중국으로부터 소주 빚는 법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아랍문화의 하나였던 증류법이 12세기경 서구라파로 전해지면서, 브랜디와 위스키의 시초를 이루었으며, 동양(몽골)에 전해져 오늘날의 소주를 낳게 되었고,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소줏고리’의 등장과 함께 증류법은 더욱 발전하여 소주의 유행을 불러왔다.
전통주의 전성기 조선시대
조선 전기에는 멥쌀보다 찹쌀 위주의 양조원료 사용이 증가하고, 양조기법도 단양법(單釀法)에서 중양법(重釀法)으로의 전환이 뚜렷해지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멥쌀에서 찹쌀 위주의 원료 사용이 증가하고 중양법의 전통주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양조기법 면으로는 점차 고급화 추세를 지향하는 한편,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중양주를 선호하게 되어 백로주, 삼해주, 이화주, 청감주, 부의주, 향온주, 하향주, 춘주, 국화주 등이 명주로서 주품을 자랑했다. 특히 고려말엽에 정착된 증류주들은 조선시대에 들어 급속한 신장과 함께 일본, 중국 등으로 수출이 빈번해지는 등 증류문화가 국제화 단계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특징으로는, 지방색을 띤 다양한 고급 양조주류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즉, 지방과 집안마다의 가전비법(家傳秘法)으로 빚어졌던 명주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전통주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때 주품을 자랑하던 명주로는, 이른바 3차 중양법의 ‘춘주(春酒)’로 지칭되었던 서울의 약산춘 등과 평양의 벽향주, 김제와 충주의 청명주, 제주도의 초정주, 충남 한산의 소곡주, 그리고 두견주, 과하주, 도화주, 송순주 등이 주막에서 팔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양조기술 가운데 ‘혼양주(混釀酒) 기법’을 빼놓을 수 없다. 혼양주류는 양조곡주와 증류주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이채롭다. 혼양주법은 곡주 양조기법을 골격으로 양조용수 대신 소주를 이용한 양조기술로서, 우리나라만의 양조 기법으로서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기온과 습도가 높은 여름철에는 술빚기가 용이하지 못하고, 더욱 장기 저장이 어려웠던 과거 시대 상황에서의 혼양주 제조 기술은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인 혼양주류로는 과하주와 송순주가 있다. 특히 〈동의보감〉의 간행 이후 약재와 가향재를 곁들인 향약주의 등장으로 가양주들의 수적 증가가 두드러진다.〈동의보감〉의 ‘잡병편’에는 음료수를 위시하여 각종 식품에 대한 해설과 함께 술, 죽 등 질병 치료와 예방에 필요한 음식물이 구체적으로 수록되면서 양생음식(養生飮食)이 발달하였고, 다양한 종류의 향약을 가미한 재제주와 혼양주, 약용약주가 개발되었다.
조선시대의 술빚기를 앞서의 시대와 비교해 보면,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찹쌀로 빚은 술이 증가하였다. 찹쌀술의 증가는 찹쌀의 산출량이 그리 많지 않았던 조선시대로서의 술의 고급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술 빚는 과정에 있어 여러 번에 걸쳐 덧술을 한다. 즉, 이양주와 삼양주 등 여러 번의 덧술 과정을 거친 중양주를 즐김으로써, 술의 고급화는 물론이고 알코올 함량을 높이면서 많은 양의 술을 빚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고려시대에 비해 소주의 선호도가 증가했다. 또한 소주를 기본으로 한 약용약주, 재제주, 혼양주가 많아졌다. 그리고 이들 술은 지역에 따라 특징을 띠게 되었는데, 남부(탁주), 중부(약주), 북부(증류주) 등 주종별 제조법과 이용 분포가 지역성을 띠고 있다.
전통주의 침몰기 또는 표류기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1907년 7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주세령(酒稅令)’이 공포되었다. 또 같은 해 8월에는 ‘주세령 세칙(시행규칙)’의 공포가 있었고, 다시 9월에는 주세령을 근거로 한 강제집행이 시작되었다.

〈조선 총독부령의 주세령 전단〉 〈밀조방지 선전전단〉
주세령의 강제집행은 곧 전통주의 말살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수 백종에 달했던 전통주가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각 지방과 집안마다의 가양주는 밀주형태로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되는데, 이에 일제는 1916년 1월 밀주제조에 대한 단속 강화와 함께 모든 주류를 약주, 탁주, 소주로 획일화ㆍ규격화시켰다. 특히 순곡청주류와 가향주류, 약용약주류를 약주류로 묶고, 일본술을 청주류로 분리함으로써, 조선주로서의 청주류는 사라지고 약주란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서 집안 제주에 일본술인 정종(청주, 상표이름)을 사다 쓰는 웃지 못 할 풍속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일부에서는 술의 높임말로 ‘약주(藥酒)’라고 이른데서 “약주 대접한다” “약주 한 잔 드시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후 모든 술을 일컬어 ‘약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든 이 기간은 36년으로 1세대를 뛰어넘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광복 이후 우리 정부의 주세정책이었다. 조선총독부 치하의 주세행정을 그대로 이어받아, 전래의 유명 전통주와 토속주들이 설자리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6ㆍ25 동란 이후 식량난의 도래로 밀주단속이 계속되었고, 1965년 급기야 ‘양곡관리법’이 제정 발표되면서, 표면화된 밀주단속과 강제집행은 전통주의 단절, 멸실을 가속화 시켰다.
우리 정부에 의한 가양주 및 밀주 금지정책은 1982년에 이르러, 전통주 발굴 및 무형문화재 지정 등으로 급진전을 보이다가, 1995년 12월에 이르러서야 가양주 금지 정책은 ‘밀주(密酒)’의 멍에를 벗게 되었지만, 지난 80년간의 시간은 그간 단절되었던 가전비법의 가양주를 되살리기엔 너무나 긴 세월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전통주, 가양주들은 소위 ‘가전비법’이라고 하여 집안 살림을 맡아하는 여인네들에 의해, 그리고 글을 알지 못했던 관계로 구전과 경험에 의존하여 그 명맥을 이어왔을 뿐, 술 빚는 법의 기록과 보존에는 너무 소홀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입국으로 제조한 술덧
입국으로 제조한 술덧일제에 의한 양조장 제도 도입으로 입국방식의 양조가 성행하면서
전통청주는 자취를 감추었고, 동동주와 막걸리는 획일화로 치닫게 된다.
출처 : 한국의 전통명주 1 - 다시 쓰는 주방문, 박록담, 2005.8.10, 코리아쇼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