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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노희태
성경봉독: 누가복음 7장 36-50절; 갈라디아서 3장 23-29절
설교본문: 로마서 16장 1-20절
설교제목: “교회: 평강의 하나님께서 권속(眷屬)삼으신 사람들”
설교대지
1. 로마 교회의 시작
2. 교회: 거룩한 입맞춤의 공동체
3. 교회: 차이를 극복한 공동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성경이며, 복음을 가장 ‘순수하게’ 전하여 준 성경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16장만큼은 유달리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 16장에는 사람 이름이 큰 의미 없이 나열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연구하는 과거 여러 신학자들은 로마서 16장은 단지 로마서의 부록이나 편지의 추신(덧붙이는 글)과 같은 부수적인 글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다시금 로마서 16장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로마서 16장이 단지 로마서의 부록 정도라고 하기는 숨겨지지 않는 중대한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1세기 당시 로마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였는지를 알고자 할 때, 로마서 16장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설교는 바로 로마서 16장에 담겨 있는 1세기 당시 로마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전해주고자 하시는 교회의 참 모습에 대해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로마 교회의 시작
로마서는 주후 57년경에 사도 바울이 유럽 이탈리아 반도 지역에 있는 로마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주후 57년경은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을 마무리 할 무렵입니다. 바울은 총 제1차부터 제3차까지 소아시아와 동유럽을 오가며 교회를 세우는 말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역인 제3차 선교 여행 말미에는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생애 최후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 고린도에서 쓴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바울의 생애와 사역의 말미에 이르러 쓴 편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완숙했을 때였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다른 바울의 편지들이 갖고 있지 않는 유일한 한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이 기록한 편지들을 우리는 ‘바울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중에서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바울의 ‘목회 서신’이라고 불리는데, 이 세 서신은 디모데와 디도라는 개인 목회자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또한 빌레몬서의 경우도 빌레몬이라고 하는 개인 한 사람에게 특수한 이유로 보낸 편지입니다. 이렇게 네 개의 편지들을 제외하면 모두 소아시아와 유럽에 있는 지역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편지를 보낸 지역 교회들에서 목회를 하였고, 직접 방문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해당 지역 교회들의 형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바울이 아직까지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먼저 써서 보냈던 지역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로마 교회’입니다. 로마서 1:13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편지를 쓴 당시가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할 때였으며, 이제는 자신의 생애마저 마지막 단계에 있을 때였는데, 바울은 “지금까지 로마 교회로 가는 길이 막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아직까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으나 바울의 편지를 받았던 유일한 지역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 불구하고 어떻게 로마에서 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우는 사도 베드로가 바울 이전에 로마로 와서 세운 교회가 로마 교회였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성경에 없는 추정일 뿐입니다. 성경에서는 로마 교회의 시작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하게 로마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성경의 단서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하사 예루살렘에 처음 신약 교회가 시작되는 장면에서 우리는 로마 교회의 출발점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2:9-11에는 오순절 날 성령으로 충만하였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의 목록이 진술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보도와 아시아, 브루기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이 말씀에는 분명하게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이 성령 강림의 현장에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이라는 한 부류가 있습니다. 또한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본래 이방 사람들이지만 유대인들이 믿는 신앙에 관심을 갖고 유대교에 들어 온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두 부류 사람들은 모두 로마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은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로마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이 전했던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성경은 바로 여기까지만 말씀합니다. 복음을 들었다고까지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이때 로마에서 온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오순절 날에 했던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자세히 살펴보면 또 다른 단서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37-39, 41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는 말씀을 연구하는 중에 이 약속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라는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바로 이 말씀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 반드시 “로마에서 온 나그네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처럼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하셨던 그 날에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던 “로마에서 온 나그네들”로부터 시작된 교회입니다. 혹자는 로마 교회는 우연히 발생한 교회며, 사도들의 사역이 하나 없이 일반 성도들이 가정 교회로서 처음 시작한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로마 교회의 과연 어떻게 시작되었고, 로마 교회의 토대가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처음 시작하신 교회가 로마 교회이며, 이 교회는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서 세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한 번도 얼굴을 마주보지 못한 “로마에서 온 나그네들”을 향하여 로마서 1:7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당신이 작정하신 교회는 반드시 세우십니다. 교회를 위하여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사람이 먼저 교회를 시작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당신의 일을 이루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빌 1:6). 우리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로마 교회의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에서 온 나그네들” 뿐만 아니라 “부산과 기장과 김해와 거제도에서 온 나그네들”인 우리 유은 교회를 위하여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행하실 하나님의 큰일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 모인 모든 성도님들 모두가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큰일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된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되시길 바랍니다.
2. 교회: 거룩한 입맞춤의 공동체
이제는 로마서 16장으로 돌아가서 보다 상세하게 1세기 로마 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6장에는 총 36명의 사람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여기에는 직접적으로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두 사람도 있습니다. 13절에 “루포의 어머니”와 15절에 “네레오의 자매”는 그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도 포함하면 총 36명의 사람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는 로마 교회 성도가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16:21-23의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을 제외하면 총 28명의 사람이 남습니다. 바로 이 28명의 사람들이 로마서 16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로마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물론 28명만이 1세기 당시 로마 교회 성도들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로마 교회에서 주요했던 사람들이거나 바울이 다른 교류를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언급된 것입니다. 그러니 로마 교회에는 28명보다는 더 많은 성도들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28명의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문안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6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문안하라”입니다. 헬라어로 이 말은 역시 “인사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헬라어가 함의하는 “인사”는 동양식 예절과는 다릅니다. 본문의 “문안하라”는 말 속에는 “포옹하고,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스킨십(Skin-ship)이 동반된 인사법은 1세기 당시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인사법이었습니다. 현대에도 일부 유럽 국가의 사람들이 인사할 때 서로 간에 볼을 맞대는 인사 방식이 있는데, 이러한 인사법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6장에서 말하는 “문안하라”는 말씀은 단순하게 “서로 인사하라”는 말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로마서 16장의 인사말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구절은 16절입니다. 16절에서는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냥 인사가 아니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별 의미 없이 지나가기 쉬운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로마서 16장의 “문안하라”는 바울의 명령의 핵심을 담아내고 있는 핵심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16절에서 말씀하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나누는 인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약 성경에서는 16절에 나오는 “거룩한 입맞춤”과 동일한 말씀이 총 다섯 구절 있습니다(고전 16:20; 고후 13:12; 살전 5:26; 벧전 5:14). 이 다섯 구절 중에는 하나의 예외적 표현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14에서는 “거룩한 입맞춤”이 아니라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의 입맞춤”이라고 하니 연인들이나 부부간에 나누는 입맞춤을 상상하기 쉽습니다. 제가 볼 때 베드로전서에서 말하는 “사랑의 입맞춤”은 그러한 사랑하는 사람 간에 나누는 입맞춤의 고유한 아름다움도 함께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아가서에서도 이러한 “사랑의 입맞춤”을 연인 관계에 적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아 1:2).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 “사랑의 입맞춤”은 로마서 16장에 있는 “거룩한 입맞춤”과 함께 이해되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거룩한 입맞춤”은 교회의 성도들 간에 나누는 “사랑의 입맞춤”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인사를 가리켜서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의 교제”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분문에 나와 있는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의 교제”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또한 이러한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은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사실 바울이 말하는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을 처음 사용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서신서를 제외하고 신약 성경에서는 총 두 구절에서 “입맞춤”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두 구절은 모두 누가복음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나오는 입맞춤과 바울이 말하는 입맞춤 간에는 다소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룩한 입맞춤”과 “사랑의 입맞춤”이라는 긍정적인 인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도 말씀하지만, 이와는 정반대에 있는 “거룩하지 않고 사랑이 없는 입맞춤”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후자에 속하는 본문이 누가복음 22:47-48에 있습니다.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서 기도를 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잡혀 가시는 장면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배도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다는 자신이 팔아넘긴 옛 선생인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입맞춤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는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거룩하지 않는 자의 입맞춤을 거절하셨습니다. 자신을 죽음의 권세에 단돈 은 삼십으로 팔아넘긴 유다의 입맞춤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유다는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이 예수님께 입맞춤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입맞춤은 악하고 거짓된 사랑에서 비롯된 입맞춤이었습니다. 유다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진정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거룩한 하나님이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죄에 눈이 멀어서 거짓된 입맞춤으로 예수님과 작별 인사 정도는 하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입맞춤을 거절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의 정반대에 있는 “거룩하지 않고 사랑이 없는 입맞춤”입니다. 여기서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는 이러한 “악하고 거짓된 입맞춤”을 결코 따라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요, 성도 안에 분쟁을 낳는 거짓된 교제입니다. 이러한 “악하고 거짓된 입맞춤”을 피하고 경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누가복음 7:44-46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누가복음에서 말씀하는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이 나옵니다. 44-4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중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네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누가복음 7:36-50은 예수님께서 시몬이라 이름을 가진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 일어난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실 때, 한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하고는 예수님의 뒤편으로 가서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향유를 예수님에 발에 부었습니다. 이때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볼이 아닌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37절에 나오는 대로 그녀가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져 있던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어떤 죄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이 여인은 자기 동네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혔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그녀는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동네에서 사람들에게 천대 받았으면,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사람답게 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바리새인 시몬은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39절을 보면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시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만일 선지자라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이 여인이 그 동네에서 죄인이었음을 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곧 그는 예수님께서 “선지자인지 아닌지”를 그 여인의 정체성을 두고 시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래시인의 마음속 악한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44-46절과 같은 대답을 주셨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아, 너는 내게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고, 너는 내게 입 맞추지도 않았고,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셨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저는 내 발에 입을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고,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말씀으로 바리새인을 책망하시고 도리어 죄인의 낙인이 찍혀 있던 이 여인을 높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었습니다. 그녀는 단 한번만 입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45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며 거듭해서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녀는 진실로 예수님께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을 드렸고, 한 번도 모자라서 거듭해서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을 드린 여인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47-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며, 그 발에 입 맞춘 이 여인의 죄를 사하여주셨습니다. 그녀는 자기 동네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녀의 눈물 어린 섬김과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을 보시며, 그녀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사랑함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이 여인의 사랑함은 무엇을 향한, 누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씻겨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인 것입니다. 자신은 비록 자신의 눈물과 향유로서 그분의 발을 씻길 뿐이었지만,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실 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여인의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아셨고, 50절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여인이 보여준 이러한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이 바로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성도 간에 나누어야 할 “거룩한 입맞춤”의 참 모습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셨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아는 자들이며, 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의 교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아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나누는 교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성도 간에 나누는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을 통해서 다시금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로마서 16장에서는 “문안하라”는 말씀 앞에 반복적으로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문안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 간에 나누는 교제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이 계속하여 흘러 넘쳐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은 단지 형식적인 교제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십자가의 사랑의 풍성함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나의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이며, 함께 수고하고 땀 흘리며 한 마음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참된 헌신입니다. 특별히 고대 교회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을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실제로 나누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찬의 의미를 선배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기 모인 우리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을 나눕시다. 물론 예배 순서로 이것을 도입하자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된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의 진정한 뜻을 따라서 이제 성도들 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고 실현하자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랑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사랑 안에 참여할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더욱더 하나 되시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 차이를 극복한 공동체
이어서 끝으로 로마서 16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로마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6장에는 총 36명의 사람이 등장하지만, 이중에 28명의 사람이 로마 교회 성도들이었다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28명의 사람을 아무런 의미 없이 쭉 나열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등장하는 크게 여섯 부류의 사람들로 분류됩니다. 이 분류의 기준에 관해서는 갈라디아서 3:28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말씀에서처럼, 로마서 16장은 총 여섯 부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다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 여섯 부류의 사람들을 다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인종에 따른 분류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둘째는, 신분에 따른 분류로서, 종과 자유인입니다.
셋째는, 성별에 따른 분류로서, 남자와 여자입니다.
1) 인종: 유대인과 이방인
먼저 로마서 16장에서는 유대인이 총 5명, 나머지 23명이 있습니다. 로마서 16:7, 11, 21을 보면 “친척”(συγγενής)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여기서 “친척”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동족” 또는 “친족”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본문의 “친척”이라는 말은 사도 바울과 같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7절의 안드로니고, 11절의 헤로디온, 21의 누기오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3절에 등장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도 역시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유대인입니다. 브리스가는 “브리스길라”의 단축형 이름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핵심 인물들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로마시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이처럼 로마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였던 교회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그게 먼 대수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신약 시대 당시만 해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두 쪽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령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의 인식 속에 이방인들은 “지옥 불에 연료로 사용할 땔감”이라고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또한 유대인의 『탈무드』에서 왜 하나님은 이방인을 유대인과 같은 눈과 코와 입을 가진 모양을 지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부려 먹을 때 거부감이 덜 들기 위해서라고 답을 합니다. 이처럼 1세기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하찮고 더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에는 이러한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놓여 있는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교회 안에 인종 때문에 발생하는 차별이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모두 한 형제자매였고, 그들은 동일한 하나님의 권속으로 로마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엡 2:19). 바로 이것이 첫 번째 차이, 인종과 혈연의 차이를 극복한 로마 교회의 모습입니다.
2) 신분: 자유인과 노예
두 번째는 “종”과 “자유인”의 분류입니다. 로마서 16장에는 1세기 당시 노예들이 흔히 가진 이름이 등장합니다. 8절 암블리아, 9절 우르바노, 12절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그리고 버시, 9절 우르바노는 모두 노예에게 붙여졌던 이름들입니다. 예를 들어 8절의 “암블리아”의 경우 “섬세한”, “귀여운”이라는 이름 뜻인데, 아마도 섬세한 작업에 뛰어난 노예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로마서 16장에서는 노예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대략 6-10명 사이였으며, 나머지 18명 정도가 자유인의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로마 교회는 신분이 다른 자유인과 노예가 한 지체로서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나 1세기 당시만 해도 자유인과 노예가 함께 동등한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그야말로 혁명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신분제도는 크게 자유인과 노예로 구성되었습니다. 자유인에는 원로원, 기사, 일반 평민이 속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 시민의 권리를 얻습니다. 하지만 1세기 당시에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인 신분으로 태어나거나, 막대한 양의 돈을 가지고 신의 힘을 빌려서 이 계급의 사서 얻는 방법뿐이었습니다.
또한 1세기 당시 로마에서 노예의 법적 위상은 하나의 “물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를 일컬어 “살아 있는 재산”, “살아 있는 연장”이라고 정의했다(Politics Ⅰ.ⅱ.4-5.1253). 그때 당시 노예들은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었고, 오로지 주인의 절대적 권력에 복종하도록 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길을 지나가다가 누군가 ‘묻지 마 폭행’을 했다고 해도 노예에게는 정당하게 법에 호소 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길에서 맞으면 맞고, 죽으면 죽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예가 로마 제국에서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상숭배를 걸쳐야 했습니다. 노예들은 일평생 거금을 모아서 이교신전에 기금으로 대가를 지불한 후에야 그 신의 이름으로 해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신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해방 sacral manumission).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노예가 그 신분의 해방을 얻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배교를 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 노예가 자유인이 되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로마의 현실 가운데서 로마 교회에는 자유인과 노예가 함께 어울려 그리스도의 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신분적 차별이 극복된 것입니다. 일반 역사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된 일은 영국에서 18세기에 와서야 있었습니다. 그러나 1세기 로마 교회에는 이미 모든 신분적 차별이 없었습니다. 자유인이든 노예이든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자매였습니다. 오늘날처럼 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라도 지역에 따라, 학벌에 따라, 부모의 위치에 따라 천차만별로 등급이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음을 자랑하였습니다.
3) 성별: 남성와 여성
마지막 세 번째는 “남성”과 “여성”의 분류입니다. 로마서 16장에는 여성이 총 8명 등장하고, 남성이 20명 등장합니다. 로마서 16장에서 여성들은 1절 뵈뵈, 3절 브리스가, 6절 마리아, 7절 유니아, 12절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그리고 버시, 13절 루포의 어머니, 15절 율리아입니다. 이 여인들은 비록 수적으로 적어보일지라도 로마서 16장에서 남성들 못지않은 신앙의 사람들로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6장에서는 오직 여성들을 가리켜서 사용한 독특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고한”(κοπιάω)이라는 말입니다. 6절의 마리아에게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라고 말씀합니다. 12절에서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그리고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들이 어떠한 수고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성들에게는 붙어 있지 않는 이 말이 여성들에게 붙었다는 점에서 당시 로마 교회에 여성들의 섬김과 수고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로마 교회에서 남성과 여성 간에는 당시 로마나 유대인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놀라운 화합이 있었습니다. 지금 여성들께서 들으시면 매우 기분 나쁠 법한 그리스의 아폴로도루스(B.C. 4세기 중엽)라는 사람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쾌락을 위해 창녀를 가지고, 신체를 매일 관리하기 위해 하녀들을 가지고, 자녀들을 놓고 집안의 물질 안전을 위해 아내를 가진다.” 이 말에서처럼 1세기 그리스-헬라 문화권에서 여인들은 남성의 부속물처럼 여겨졌습니다. 유대 사회 속 여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 여인들은 어떠한 공식적인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유대 여인들이 법정이나 회당 등에 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 유대인들에게 여성으로서의 삶은 오로지 가정에서 요리하고, 빨래하고, 침상 정리하고, 양털 짜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놀랍게도 이러한 성별의 차이를 극복했습니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들도 모두 한 성찬 상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매주일 성찬에 남녀의 구별이 없이 함께 참여하지만,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남녀가 함께 한 성찬 상에 참여하는 것은 1세기 당시만 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모든 차이를 극복한 교회가 로마서 16장에는 나오는 로마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의 제목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권속 삼으신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설교 제목을 붙인 이유는 단순합니다. 로마서 16장 전후에 바로 평강의 하나님께서 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5:33과 로마서 16:20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로마서 16장에 있는 성도들을 감싸 안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말씀을 통해 살펴본 대로, 교회는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서로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교회는 서로 간에 놓여 있는 모든 차이를 극복하는 하늘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러한 교회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계속하여 그분께서 완성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서로 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를 이룩해 가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 이러한 소망을 품고 평강의 하나님과 함께 일주일 동안 동행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