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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걸림이나 위태로움도 없는 눈빛으로… 영동 반야사(般若寺)
경북매일 기사 등록일 : 2020.08.03. 19:50
경북매일 기사 게재일 : 2020.08.04. 지면 17면
글 : 조낭희 수필가
백화산 돌무더기 호랑이가 지켜주는 영동 반야사. 반야사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백화산로 652에 위치해 있다.
달이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을 지나 석천계곡을 따라 반야사로 향한다. 불어난 계곡물로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는데, 긴 장마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햇살을 업고 백화산 둘레길을 걷는다.
줄지어선 잣나무 그늘 끝으로 반야사가 보인다. 반야는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말한다. 접근성 좋은 천변에 자리 잡은 널찍한 경내로 들어서는데 계단 옆에서 봉숭아꽃이 무리지어 반긴다. 문턱이 높지 않은 개방적인 절임을 알 수 있다. 템플 스테이로 머무는 참가자들과 관광지에 들른 듯 반바지 차림에 뒷짐을 지고 둘러보는 방문객들로 절은 조금 어수선하다.
법주사의 말사인 반야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지만, 성덕왕 19년(720년) 의상의 십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더 지배적이다.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서 세조 10년(1464년)에 크게 중창하였지만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고졸미는 찾기 어렵다. 다만 맞은 편 지붕 위로 꼬리를 치켜들고 포효하는 돌무더기 호랑이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극락전과 오백 년 된 배롱나무, 절이 창건될 당시 세워졌다는 보물 제 1371호 삼층석탑이 섬처럼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배롱나무 꽃그늘에서 바라보는 극락전 주변은 사대부가의 후원처럼 아담하고 운치가 있다. 그 옆 돌계단 위에는 산신각이 홀로 꿈꾸듯 외롭다.
아득한 과거를 그리워하는 극락전과 무심하도록 개방적인 대웅전의 훤한 이마, 비밀스런 아픔 하나쯤 풀어놓고 싶은 앙증맞은 산신각,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엄숙한 수행 공간까지 다양한 매력이 숨어 있다. 하나가 아닌 듯 하나로 존재하는 절, 방문객들의 시선을 즐기며 성장하는 사찰 같다.
불자들이 많이 찾는 대웅전보다 극락전이 백팔 배를 하기에는 훨씬 아늑하고 편한 공간이란 걸 뒤늦게 알았다. 사람들은 주로 대웅전을 들른 후 약속이나 한 듯 문수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수전 가는 두 갈래의 길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담장을 끼고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 대신 대웅전 뒤편의 넓은 돌계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참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반야사의 뒷모습은 지극히 평범하고 편안하다.
길지 않은 산길을 따라 오르자 뜻밖에도 문수전은 시원스럽게 펼쳐진 허공을 안고 벼랑 끝에 돌아앉아 있다. 아슬아슬한 문수전 절벽 아래로는 장마로 불어난 물길이 울창한 숲을 뚫고 나와 도도하게 흐른다. 법당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도 중이고 물길은 너른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제 갈 길을 가느라 바쁘다.
문수전 법당은 아주 작다. 느긋하게 기도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서둘러 삼배만 하고 나왔다. 쉼 없이 발길을 재촉하는 물길을 바라보며 불심이 강했다던 세조를 생각한다.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 계곡을 찾은 세조와 등을 밀어주고 사라진 문수보살 이야기가 이곳에도 전해진다. “왕의 불심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문수보살은 복덕과 반야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문득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떠오른다. 세상의 본성을 나타내는 공(空)은 무한한 가능성이며 잠재적인 무엇이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실체는 공이다. 양자역학이 있기 수천 년 전에 이미 부처님은 이 모든 색의 실체는 공이라 말씀하셨다. 상식적일 만큼 흔하게 쓰는 철학 용어이지만 여전히 어렵고 먼 세계이다. 내게 공의 세계는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늘 지식적인 수준의 앎에서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머리로 아는 실존의 방식은 참으로 단순한데 내 삶은 늘 무언가에 목 말라하며 허기져 있다. 수많은 절을 찾아다니며 백팔 배를 하는 것조차 본질을 놓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어쩌랴. 마지막 문을 열 때까지 내 존재의 크기만큼 발버둥치다 가는 게 인생인 것을.
내려오는 길은 다른 길을 택했다. 좁고 가파른 돌계단이 바짝 긴장한 채 나를 이끄는데 나는 자꾸 생각이 많아진다. 격렬하게 굽이치는 계곡물의 힘찬 맥박소리에 숱한 사념들이 자맥질을 해댄다. 반야사로 이어지는 인적 없는 오솔길을 문수전의 자유로운 눈빛이 함께 걷는다. 어떠한 걸림이나 위태로움도 없는 하나의 말씀이 되어.
다시 만난 반야사는 더 새롭고 깊이가 느껴진다. 한낮에도 백화산 돌무더기 호랑이가 지켜주는 절, 그 신비로운 비경 속에 문수보살의 지혜와 영험함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이른 새벽이나 밤에 기도하러 오는 여성 불자들을 위해 특별히 문수전은 비구니 스님이 관리한다는, 절 앞 카페 여주인의 친절한 설명에도 자부심이 가득하다.
사람이 많지 않을 어느 호젓한 날에 백화산 둘레길을 걸어서 다시한번 반야사 일주문을 들어서고 싶다. 그리고 한 번도 온 적 없는 곳에 온 듯 두근거림을 안고 문수전으로 향하리라. 저 참나무 숲 언저리를 오를 때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면, 나는 그를 문수보살로 기억하며 흥분할지 모른다. 그가 평범한 불자여도 상관없다. 깨달음의 길은 멀고 험하지만 그 도상에서 만나는 신기루 같은 기쁨들이 있어 우리는 또 힘을 내지 않는가.
[아름다운 절집 풍경] ⑨ 영동 반야사
사진=손묵광 사진작가
글=여태동 기자
[불교신문3683호/2021년9월14일자]
삶이 힘드시면 반야사 배롱나무를 찾으시라!
문수보살 출현한 영험기도 도량
백화산에는 호랑이(사자) 모습
500년 수령의 쌍배롱나무 꽃
매해 여름 만개해 방문객 반겨
일찍이 노자는 물(水)을 그의 사상에서 소환해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물과 같이 순리대로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의미다. 물은 바람, 불, 땅과 함께 자연의 대명사다. 존재감을 보이지 않으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 그 존재로 인해 지구가 존재하고 유지된다. 물은 겸손함의 대명사다. 낮은 곳으로만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물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둥근 질그릇에 담으면 거기에 동화되고 네모난 컵에 담으면 네모난 모습으로 변한다.
자신의 고유한 성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대상과 융합해 조화를 이루는 물의 가르침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백화산로 652에 위치한 반야사에서 느낀다. 백두대간의 줄기인 백화산은 굽이굽이 물줄기를 만들어 반야사로 굽어가고 그 물줄기는 강을 이루어 마침내 바다로 흘러든다. ‘흐르는 물은 다투지 않는다(流水不爭先)’고 하지 않았던가. 그 순리의 물길을 머금은 영동 반야사는 그렇게 1300여 년을 서 있다.
조계종 제5교구본사 법주사의 말사인 반야사(般若寺)는 백화산에서 흘러내리는 큰 물줄기가 태극 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꽃모양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그 연꽃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반야(般若)는 불교에서 진리를 깨닫기 위한 근원적인 지혜를 의미한다. 그 지혜는 인간의 판단 능력인 지혜(分別智)와 다르다. 그 지혜는 집착에서 벗어난 텅빈 충만의 상태에서 존재를 바라보며 얻는 지혜(無分別智)다. 그 자리에 반야사가 반듯하게 서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720년(성덕왕 19) 의상(義湘)대사의 10대제자 중 한 사람인 상원(相源)스님이 창건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러 차례 중수(重修)를 거쳤고 1464년에 세조의 후원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그 인연은 세조가 반야사 중창을 명하여 회향하며 여러 보살님께 공양을 올리니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나 망경대(望景臺) 아래 영천(靈泉)으로 인도하여 목욕할 것을 권했다. 문수동자는 “왕의 불심(佛心)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는 말을 남기고 사자를 타고 사라졌다 한다. 반야사 대웅전 뒷편 깎아지른 절벽 망경대(문수바위)에 문수전이 자리하고 있다. 문수동자가 출현한 곳이라고 한다.
문수도량답게 반야사에는 그와 연관된 사자(獅子)가 출현해 눈길을 끈다. 일반인들은 사자의 형상을 호랑이라고 하는데 반야사 대웅전 마당에서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백화산 기슭에 그 모습이 당당하게 드러난다. 수천년 동안 흘러내린 돌무더기(파쇄석)가 주변에 있는 나무들과 경계를 이루어 만들어 낸 신기한 형상이다. 높이가 80여m에 이르고 길이는 300여m에 달한다. 문수신앙에는 문수보살이 출현할 때 사자를 타고 출현하기 때문에 반야사 주지 성제스님은 “원래는 사자상으로 해석해야 하지만 방문객들은 호랑이의 모습으로 보면서 ‘백화산에 호랑이가 산다’ 말씀을 많이들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스님은 “내년이 호랑이 해인 만큼 반야사에서 사자와 호랑이의 용맹성을 연관해 용맹정진해 불자들이 영험가피를 받을 수 있는 문수기도를 대대적으로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귀띔했다. 내년 새해는 반야사에서 사자와 호랑이의 용맹심으로 정진할 인연을 기대해 본다.
반야사의 또 다른 명물은 수령 500년이 넘은 배롱나무 두 그루다. 극락전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이 배롱나무는 반야사를 대표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3층석탑을 배경으로 서 있는 배롱나무(백일홍)는 조선을 건국할 당시 무학대사가 주장자를 꽃아 둔 것이 조깨져서 쌍 배롱나무가 생겨났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높이가 8m에 이르는 이 나무는 영동군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반야사 배롱나무
늙었어도 나무가지에 꽃 일만개 쯤
매달 힘은 아직은 있어.
누가 날 보고 늙었다고 하지
젊은 것들은 날보고 늙었다고
뒤담화를 몰래 수근 대지만
한 오백년 살면서도 바람한번 피우지 않고
꽃피고 질 때를 알지,
한번 꽃피면 백일동안은 거뜬하게 버티지.
젊은 것들은 꼭 사랑하다가 지치면
배롱나무 아래 찾아와서
세상 떠나가도록 울지만
그래도 나는 외면하지 않아.
더러는 부드러운 입술 같은
푸른 잎을 드리우고
포근하게 위로해 주기도 하지.
눈가에 눈물 대롱대롱 달고 가는
젊은 것들을 보드라운 바람으로
달래주기도 하지,
세상 늙지 않는 건 없어
나처럼 곱게 늙어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살다보면 알아.
이제부터 날 늙은이 취급하지 마.
정성욱 시인의 시 ‘반야사 배롱나무’의 전문이다. 여름철 반야사를 찾는 이들이라면 100여일 동안 핀다는 연붉은 배롱나무를 보고 사색에 잠기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배롱나무 꽃 선연한 극락전 아미타부처님께 기도하며 자신의 업장을 녹일 수도 있다. 다시 돌아보면 시인의 마음처럼 지난 시간이 순식간으로 느껴지겠지만 천년을 버티고 서 있는 절집과 절집나무를 보면서 의연함과 의젓함을 배울 수 있으리라. 피는 꽃은 아름답지만 질 때는 처연하다는 것은 알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삶이 힘들다고 느껴지는가. 반야사 배롱나무 아래로 가 보시라. 500년 동안 매년 100일 동안 피어 있는 꽃의 이야기를 상기하면 새로운 삶의 에너지가 충전되리라.
곱게 늙은, 고찰의 배롱나무 한 쌍
경향신문 기사 입력 : 2024.07.08 20:49 수정 : 2024.07.08 20:53
글 :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여름, 배롱나무의 계절이다. 따뜻한 기후를 좋아해서 주로 남부지방에서 볼 수 있었지만, 변화하는 기후 탓에 요즘은 중부지방에서도 너끈히 키우는 나무다. 여름의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 하여 ‘백일홍나무’라고 부르다가 변성된 ‘배롱나무’라는 우리말 이름도 살갑다.
주름투성이로 피어나는 꽃송이가 화려하지만, 갈색 바탕에 곱게 번진 얼룩무늬의 매끈한 줄기 또한 아름답다. 그리 높게 자라지 않고 나뭇가지를 수평으로 넓게 펼치는 나무여서 정원 조경수로 적당하다. 특히 꽃이나 줄기 표면에 드러나는 화려함은 한옥 건물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오래전부터 선비의 정원이나 절집 마당에서 많이 심어 키운 이유다.
‘영동 반야사 배롱나무’가 그런 나무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의 반야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의 제자인 상원이 창건한 고찰로, 이 절집의 극락전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배롱나무는 나무나이가 500년쯤 된다.
이즈음 반야사는 조선 세조의 허가를 받아 중창에 착수했다. 반야사의 불사는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가 이 절집을 찾은 데서 비롯됐다. 이때 한 아이가 세조를 샘으로 이끌어 목욕을 권한 뒤 사자를 타고 하늘로 사라졌다고 한다. 아이가 바로 문수보살이었다.
문수보살의 인도로 피부병을 완화할 수 있었던 세조는 자연스레 반야사를 각별히 배려해 중창불사를 허가했다. 1464년의 일이다. ‘영동 반야사 배롱나무’ 한 쌍은 이때의 중수 과정에서 극락전의 풍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심은 나무로 짐작된다.
나무 높이 8m쯤 되는 그리 큰 나무가 아니지만, 나뭇가지를 사방으로 제가끔 7~8m씩 펼친 수형이 여간 근사한 게 아니다. 훼손 부위 없이 건강한 배롱나무 바로 앞에는 2003년 국가보물로 지정된 ‘영동 반야사 삼층석탑’이 있다.
오래된 석탑과 곱게 늙은 전각 사이의 빈 공간을 한가득 채우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과 신비로울 만큼 기묘하게 펼친 나뭇가지가 지어내는 조형미는 이 여름에 찾아볼 몇 안 되는 장관이다.
충북 영동군 [반야사&문수전] 지도
충북 영동군 [반야사&문수전]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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