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해전 콤플렉스'-"그때 나는 참으로 안일했다"
어? 오늘이 6월 29일? 바로 그날? . 나는 영화를 관람하면서도, 영화관을 나와 귀가 길에 오른 순간까지도 6월 29일이라는 날자를 특별히 떠올리지 않았다.(아직 치매는 아닐 터인데...^^). 영화관을 나와 석간신문을 사들고 지하철 안에서 읽어가는 동안 ‘국방장관의 연평해전 희생장병 추모사’ 기사를 보면서 그 때 비로서 아차! 그 날이 오늘이구라는 걸 깨달았다.그리고 순간적으로 심한 부끄럼을 느꼈다. 어제(6월 29일) 오후의 일이다.
물론 나도 영화를 보는 내내 주책없이 여러 번 울었다. 갑작스런 적의 피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함정에서 피범벅이 된 채 의무병 박동혁 상병에게 “배는 내가 살릴 테니 너는 가서 사람 살려‘라고 하던 한상국 하사의 마지막 모습에, 적의 무차별 포격이 이어지는데도 상사의 지시대로 선후배 동료 장병들을 살리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달리다가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 받던 중 끝내 숨을 거둔 그 의무병 박동혁 어머니의 ’말 못하는‘ 절규에, 아들의 제복을 껴안고 오열하는 艇長 윤영하 대위 아버지의 모습 등 여러 장면에...
영화관람 후 하루가 지난 지금 새삼 생각해 본다. 나에게 연평해전은 과연 무엇인가. 어제 지하철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평해전을 떠올리면 우선 심히 부끄러워 진다. 오랫동안 세상만사에 대해 논평-논술하는 글을 ‘남발’해 왔으면서도 연평해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글로 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부끄러움은 거기서 연유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연평해전 콤플렉스’라고나 할까.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해에 나는 뉴질랜드의 어느 한적한 해변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언젠 어딘가에도 쓴 적이 있지만) 나는 그 한해 전, 소속 회사에 사표를 내던지고 스스로 ‘백수’가 됐다. 이념적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확실하게 '변질'해 가는 내 나라에서 언론사 논설 책임자 자리를, 다만 밥벌이 때문에 계속 차고 앉아 있기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좀 엄숙하게^^ 말하면 나는 오만하게도 시대조류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나름대로 홀로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선택적 실업자'가 된 셈이었다.
2002년 6월은 내 가족이 뉴질랜드에 온지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환갑을 두 달 앞둔 백수는, 한국에서 일부러 가지고 간 50여권의 책을 1주일에 한권씩 읽어치우기로하고 매일 책장을 넘기거나 경관 좋은 주변을 산책하는 일로 하루하루 시간을 메꿨다. 반드시 허송세월이라고 비하하기는 싫지만 사실상 안일한 생활이었다(생활비? 뉴질랜드의 작은 도시에서는, 적어도그 때는 한국에서 보다 오히려 생활비가 저렴했다. 약간의 퇴직금과 쥐꼬리 국민연금, 그리고 극히 소액의 정기 수익이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뉴질랜드는 참으로 심심한 '천국'이었다. TV 도 백수의 시간 때우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어로 쏟아내는 말들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데다 연예프로 조차도 한국 TV에 비해 아주 단조로웠다. 뉴스의 경우 가끔 아내의 서툰 ‘통역’과 화면의 '그림'을 통해 내용을 짐작하긴 했지만 그것도 세상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인터넷 한국언론 매체의 보도를 통해 세상과 한국 소식을 접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때 인터넷 상에서 연평해전은 그다지 중요 뉴스가 아니 었다. 그러니 외국에 있는 입장으로서는 연평해전은 그저 단순한 또한번의 북한 도발쯤으로 넘겼던 것 같다.적어도 지금 기억으로는 그렇다. 더구나 대통령이 희생장병들의 영결식에도 불참하고 월드컵 구경을 위해 일본에 갈 정도의 여유롭고 한가한 처신을 했으니.... 변명하자면, 나는 연평해전의 비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저들의 만행에 크게 분노하지도, 우리 장병들의 희생을 가슴으로 깊이 아파하지도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 그 때 내 생각은 짧았고 생활은 어쨌든 평온했다. 더구나 언론사를 떠난지 1년여가 지난 나에게 글을 써 게재할 수 있는 매체도 없었다. 잡문이나마 청탁받지 않은 글을 써 어디에 기고할 마음도 없었다. 나는 그 때 내 개인적 삶에 대한 감상적 회고의 글만을 일기처럼 써 컴퓨터에 저장했을 뿐이다. 글 쓰기의 전부였다. 실제로 내 컴퓨터 보관 창고에는 2002~3년에 쓴 '시사논평' 따위의 글이 한 편도 없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실상 연평해전을 잊어갔다.그 때로 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역대 정부가 그러했던 것 처럼...
그 참담했던 서해상 전투의 날로부터 벌써 13년이 흘렀는가. 영화 연평해전이 '흥행대박'을 예고하고 있고 정치권도, 비록 정략적이라고 해도 연평해전을 제대로 평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그러니 지금 영화에 대해 새삼스럽게 평가- 평론하는 것은 뒷북일 뿐이고 연평해전의 역사적 의미를 논평- 논술하는 것은 더 더구나 부질없는 贅辭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글 쓰는 자로서 확인하고 싶은 한가지 사실은 있다. 역사는, 역사 학자의 연구논문이나 정치인의 연설로서 보다도 뛰어난 작가가 창조해낸 예술 작품에 의해 그 진실이 훨씬 확연해 진다는 사실이다. 영화 연평해전이 이를 또렸하게 확인시켜 준다
때마침 박근혜 정부는 연평해전 13주년을 맞아 희생 장병들을 순직자에서 전사자로 명예회복시키기로 했고 여야 정치권도 관련법률을 입법하겠다고 합의했다는 소식이다..참으로 한심한 晩覺이긴 하지만,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글 쓰는 자로서 이제 겨우 '연평해전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지금은 우리 국민 모두가 한 순간이나마 성찰의 눈물을 공유해야 할 때가 아닌가. 영화 '연평해전'이 사상 최초로 2000만 관객몰이에 성공하면 정말 좋겠다..(저녁 식사후 낑낑대며 타자하다보니 또 하루가 끝나는군요!^^- 6월 30일 밤 11시 15분, 뒷메 謹上)
첫댓글 . . . 심심한 천국에 게시던 그날 일어 났던 일 - 잘 읽었습니다. 연평해전 순직자들이 이젠 전사자들로 명예 회복이 된다니 - 다행입니다.
'연평해전' 캐나당에서도 몰수 일를려나 ? '국제시장'은 캐나다 극장에서도 여러곳에서 상영되었었는데 . . .
언론인으로서보다도 인간 뒷메의 진솔하고 겸허한 (뭐랄까) 자기반성의 글에 공감하고
그간 연평해전에 대하여 일언반구 자기반성이 없었던 유수한 언론매체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하며 온 나라가 들떠있던 시간이라
제2 연평해전 사건을 국가와 국민은 물론 언론도 크게 회자되지 않았죠.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가 "대통령이 우리를 버렸다"라는 통한의 한마디가
그 시대의 정치상황을 짐작케 합니다.
이제 와서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처우개선도 하려는 움직임이 1회성으로 그치지 말기를...
뒷메의 마음을 모든 국민이 동감하는 반성의 글이라 생각됩니다.
됫메는 뉴질랜드에 있어서 알리바이가 중명되지만 한국에 있는 우리들은 데모한번 못하고 가슴만 치다 말았다오. 1차 연평해전 때는 북한아이들이 대중이 보고 우리의 사랑관(완증을 거둔)을 없애라고 하여 목을 짜르고 한직으로 돌리다 예편하고 얼마 있다 암으로 별세하였다는군요. 세상에 장병 합동 장례식들 일본가서 축국구경항 인물 이 친구야 말로 세작인 것만 같소이다.
우리가 할수있는 일이라야 뒤통수에대고 종주먹 내지르는 방법밖에 없으니...... 그나마 눈 마주치면 아래로 깔고 꽁무니빼는 재주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