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의 한국 민감국 지정 배경이 여전히 불분명한 상황에서 여야 정쟁의 소재로 비화하는 등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피트 헤그세스 제2차 트럼프 행정부 초대 국방장관의 인도태평양 지역 순방에서 한국이 탈락하는 상황까지 겹치면서 '코리아 패싱' 현실화 우려도 커지고 있다.
16일(현지 시간) 워싱턴 현지 한미 외교당국과 정부 관계의 전현직 인사, 싱크탱크 관계자 등에 대한 한국 중앙일보의 취재를 종합하면 1월 초 내려진 민감국 지정 결정은 계엄 탄핵이라는 정치적 혼란 상황,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증폭된 독자 핵무장론, 미국의 권력 교체기와 한국의 권력 공백기라는 시기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겹친 가운데 나온 바이든 행정부의 앨버키(사재기의 일종, 대규모 개발 전에 작은 땅을 사놓고 훼방을 놓아 업자에게 많은 돈을 뜯는 행위)성 조치일 가능성이 크다.
◇ '에너지부는 핵 비확산 기술통제 담당 부처'
정부의 한 소식통은 "핵 비확산을 위한 기술통제 주무부처인 에너지부가 민감국으로 지정함에 따라 한국 내 핵무장론과 관련이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고 한국 중앙일보에 말했다.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도 "독자적인 핵무장론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급속히 확산되는 가운데 일부 정치 지도자와 윤석열(윤석열 대통령) 등의 관련 발언이 미국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 우려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고 분석했다.
윤석열 정권 들어 독자적인 핵무장 논의는 활발해졌고, 세계의 핵 도미노 확산을 우려한 바이든 행정부는 이를 예의주시하며 수차례 경고를 보냈다. 촉발의 포인트는 2023년 1월 11일 국방부·외교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나온 윤 대통령의 "우리도 독자적인 핵을 보유할 수 있다"는 발언이었다. "북한의 핵 위협이 심화되면"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현직 대통령의 핵 보유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은 파문을 일으켰다. 미 국무부는 다음 날 곧바로 비핵화가 한미동맹의 핵심이라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후 같은 해 4월 26일 윤 대통령의 방미 기간 발표된 워싱턴 선언에 따라 한미는 일체형 확장억제 강화에 합의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18일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정상회담 직후인 8월 21일 조태용 국가정보원장이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추진 의지를 보이면서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주요 대선주자들을 중심으로 핵무장론이 비등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이런 흐름에서 한국의 핵무장을 포함해 모든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놔야 한다는 발언이 국방부 정책차관으로 지명된 엘브리지 콜비에게서 나온 것이어서 바이든 행정부 임기 말 민감국 지정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 정상외교 부재…"미국 서두르지 않겠다"
관건은 4월 15일 발효 전에 민감국 지정 해제가 가능한지 여부다. 정상외교 컨트롤타워가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실질적이고 구속력 있는 협상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 입장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트럼프 행정부가 민감국 해제를 레버리지 극대화 카드로 활용해 관세 등 협상에서 한국에 큰 양보를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용한 외교력을 총동원해 미국 정부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고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정상급(top level) 의사소통은 어렵더라도 한미 실무진 간 접점을 유지해 소통 채널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 "핵무장 논의 중단이 문제 해결에 도움"
특히 정치권의 어정쩡한 핵무장론은 민감국 지정 해제라는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기 전까지는 자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브루스 베넷 미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한국의 양대 정당이 독자적인 핵무장 논의를 중단하는 것이 사태의 근원적 해결에 현실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략적인 목적의 핵무장 논의는 최대한 신중하게 다뤄야 하며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오해를 사지 않도록 대외 메시지를 면밀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번 일을 두고 지나친 확대해석이나 정치적 아전인수를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미 에너지부와 업무협력 경험이 있다는 정부 고위관계자 출신의 한 인사는 "에너지부의 민감국 지정 결정은 교류협력 단계의 사전검토 강화의 의미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며 "상황을 냉정하게 보고 대처하지 않으면 실수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다만 한미동맹의 근간에 균열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신속하게 사태 수습에 나설 것이 요구된다. 한미연합사 작전참모 출신인 데이비드 맥스웰 아태전략센터 부대표는 "한미동맹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지 않도록 트럼프 정부와 협력해 빠른 시일 내에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