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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규례
신 14:22-29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4:22-29 / [농부물의 십일조] 여러분은 해마다 농토에서 나오는 모든 곡식의 소산에서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다. 23)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의 십일조를 소와 양의 첫 새끼와 함께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지고 가서 그것을 주님 앞에서 나누어 먹고 언제나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24) 그러나 여호와의 성소가 여러분의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하셔서 십일조를 모두 성소에까지 가지고 가기가 어렵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여호와의 성소로 가서 26) 거기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소와 양과 포도주와 독주와 기타 사고 싶은 것을 사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여러분이 가족과 함께 먹으며 즐거워하십시오. 27) 여러분의 마을에서 온 레위 사람들도 그 잔치에서 함께 먹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받은 땅이 없습니다. 28) 그러나 3년에 한 번씩은 성소로 가지 말고 그해 수확의 모든 십일조를 모아서 마을의 창고에 쌓아 놓으십시오. 29)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 토지를 나누어 받지 못한 레위 사람과 여러분의 마을에 함께 사는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마음껏 가져다 먹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규정은 레위기 27장 30-33절에 자세히 말씀하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십일조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22-23) 믿는 자는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장소는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입니다(22). 즉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으로 가져와서 드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삶의 터전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이고, 농산물이 자라도록 하나님이 비를 주시고, 환경을 허락해 주셨기에 수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의 정신은 감사입니다. 이스라엘도 땀 흘리며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풍성한 수확을 거둔 이유가 이스라엘 스스로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24-26) 한편 십일조를 예배 처소로 가져가기에 너무 먼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십일조 들고 간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봉헌물을 십일조로 드리는 수확물의 가치만큼 돈을 가져와서 중앙 성소에서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사서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 성전 뜰에서 돈을 바꾸는 이들이 있었던 것에는 이런 배경도 일부 있었습니다(요 2:14-16). 그만큼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27-29) 레위 지파 사람들은 열두 지파가 거주하고 있는 48개의 성읍에 각각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레위인들은 땅을 기업으로 물려받지 못했기에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울 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가 드리는 다양한 예물과 희생제물 그리고 십일조를 통해서 삶을 이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저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27). 또한 삼 년에 한 번씩 십일조를 또 내서 성읍에 저축해야 했습니다. 레위인과 성읍에 거주하는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조치였습니다(29). 힘들게 수고한 십분의 일을 이미 구별하여 드렸는데, 여기에서 십분의 일을 더 드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9).
한편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십일조는 한 해 추수를 끝내고 소득의 1/10을 구별하여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에게 바칩니다(민18:21-24). 그러면 레위인들은 그 십일조를 다시 1/10을 구별하여 제사장에게 바쳤습니다. 이를 ‘첫째 십일조’라고 부르며, 이것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계유지에 사용되었습니다.
둘째 십일조는 ‘첫째 십일조’를 바친 나머지 9/10에서 다시 1/10을 구별한 것으로, 백성들은 가족 전체를 대통하고 성소에 가서 한 해 동안 풍성한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 축제를 벌였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된 것은 바로 이 ‘둘째 십일조’입니다.
셋째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3 년과 제6 년에는 ‘둘째 십일조’로 잔치를 벌이지 않고 이것을 각 성에 모아 가난한 자, 고아, 과부를 돕는 구제비로 사용하였습니다(26:12-15).
십일조의 정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주 만물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학 2:8).
2)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시 136:25,26).
3) 이웃 사랑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기복신앙, 즉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십일조를 어떠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까? 그리고 교회는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거룩한 삶은 영적인 거룩함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사회적 약한 자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중에서 물질의 사용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단입니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물질은 우리의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Learn to Revere the LORD
신명기 14:22-29 / 최정인 목사
도입 Introduction: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It is an everlasting covenant of salt before the LORD for both you and your offspring” (민수기 Numbers 18:19b).
세상의 거의 모든 종교의 예배에서는 음식물을 제물로 드립니다. 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든 인종 모든 문화가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곡식, 과일, 올리브 기름, 포도주, 채소, 우양 등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거의 다 음식물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근본적인 재산, 그래서 사람이 팔아먹을 수 없는 것을 기업(inheritance)이라고 합니다. 그 기업이 바로 사람과 토지입니다. 사람이 토지를 일구어 그것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으며 살므로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거래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팔려도 7년 만에, 토지는 49년 만에 다시 원주인에게 돌아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를 따로 떼어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에게는 이 두 기업 가운데 사람은 있지만, 땅으로서의 기업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사는 집과 그에 딸린 텃밭 정도는 있었습니다. 이제 민수기 18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1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레위 지파 중에서 아론의 자손을 제사장 가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모든 레위 지파는 제사장 가문을 돕도록 하셨습니다.
민수기 18:20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다른 지파에게는 땅을 주어 그 땅에서 얻은 소산으로 먹고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론 제사장 가문을 포함한 레위 지파에는 땅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요 기업이라 하십니다. 제가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 있다 했죠?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그들을 하나님께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제사장은 이러한 일을 하면서 백성이 하나님께 내는 십일조를 먹고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요 기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중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은 보통 불로 온전히 태워서 드립니다. 불로 태웠으니 사람이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중에서 불로 태우지 않는 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죠. 9절을 볼까요? “지성물 중에 불사르지 아니한 것은 네 것이라 그들이 네게 드리는 모든 헌물의 모든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물은 다 지극히 거룩한즉 너와 네 아들들에게 돌리리니” 결국 불태워서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닌 모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제사장과 그 가족의 음식입니다. 12절은 기름과 포도주에 대한 말씀입니다. 13절은 모든 열매에 관한 규정입니다. 15절에서 초태생 사람과 부정한 짐승은 돈으로 대속하라 하셨습니다. 17절에서 소, 양, 염소는 거룩한 짐승이므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때 피는 제단에 뿌려서 하나님께 드리고, 기름은 불살라서 하나님께 드린 후, 그 고기의 일부분 즉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 부분을 제사장이 받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 중의 한 가정이 초태생 송아지 한 마리를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린다고 합시다. 그들은 그 소를 끌고 성전으로 갑니다. 가족을 대표하는 예배자가 그 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송아지를 잡습니다. 먼저 피는 제사장에게 주어 제단에 뿌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각을 떠, 기름 덩어리 부분은 따로 떼어 제사장이 하나님께 불살라서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흔들어서 바친 송아지 가슴 부분과 오른쪽 넓적다리는 제사장 몫으로 드립니다. 나머지는 그 가족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먹는 거죠. 그러니까 송아지 한 마리로 하나님(피, 기름), 제사장(가슴, 넓적다리), 그리고 예배자의 가족(나머지 부분)이 함께 먹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요제는 흔들어 드리는 예물이고, 거제는 받들어 드리는 예물입니다. 예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 예물로 제사장 가문과 레위 지파를 살리는 이 언약을 하나님은 특별히 “영원한 소금 언약”(an everlasting covenant)이라 부르십니다. 왜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에 소금이라는 말이 들어갈까요?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무기화합물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이렇게 예배와 예물로 영원히 변치 않는 언약을 맺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14장 본문에서는 예배자가 십일조를 먹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미 민수기 18장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을 하나님, 제사장, 레위인, 예배자 등이 함께 먹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 예물을 모두 함께 먹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2021년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또한 함께 만찬을 나눕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건강하게 활동하여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함께 만찬을 나누는 것은 구약 모세오경부터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오늘은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는 제목으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1.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you may learn to revere the LORD your God always” (22-23).
이스라엘 12 지파의 48개 성읍에는 레위 지파와 아론 제사장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이들에게 주어,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십일조는 첫 번째 십일조라 불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즉 여호와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 일 년에 세 번의 축제로 모이게 되어있었습니다. 신명기 16장에 보면, 그 축제는 유월절(Passover), 칠칠절(Feast of Weeks), 그리고 초막절(Feast of Tabernacles)입니다.
(1)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어린 양의 대속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은 죽음의 신이 넘어가고 그 외의 모든 이집트의 사람과 짐승의 초태생이 다 죽임을 당한 것을 기억합니다. 유월절은 요즈음의 부활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킵니다. (2) 유월절 후 7주가 지난 후 지키는 절기가 칠칠절입니다. 7일이 일곱 번 있기에 칠칠절이라 하고, 49일이므로 50일로 계산하여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이때가 또 주로 보리와 같은 첫 곡식을 수확하는 때이므로 초실절이라고 합니다. (3) 세 번째 절기가 장막절입니다. 이때는 모든 추수가 다 끝나고 거두어들여 저장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모든 사람이 집에서 나와서 여호와의 성전 근처에 초막을 짓고 삽니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살았던 때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 합니다. 이 수장절은 오늘날의 추수감사절과 가장 의미가 가까운 절기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매년 최소한 세 번의 축제 기간에 여호와의 전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각 축제는 안식일부터 안식일까지 계속되므로 8일 동안 이어집니다. 신명기 16:16-17을 볼까요?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그러니까 신명기 16:16-17과 신명기 14:23을 함께 볼 때, 이 세 번의 축제 기간에 십일조로 하나님의 전에 가지고 가는 예물이 있습니다. 그 예물은 바로 곡식, 포도주, 올리브 기름, 우양입니다. 이 세 번의 축제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도 역시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이 십일조는 두 번째 십일조라 불립니다. 그 예물을 가지고 올라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받으신 후에, 제사장의 몫은 제사장에게 주고, 예배자가 가족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곧 십일조를 먹는 것이며, 이렇게 할 때 온 가족이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먹습니다. 교회에 오지 않아도 먹습니다. 교회에 와도 먹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전혀 오지 않는다면 교회에서 먹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함께 공동식사를 할 때, 우리는 사실 우리가 예물로 드리는 십일조를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식사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함을 고백하고, 그 일을 통하여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고 또 서로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나와서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며, 예물을 드리며, 말씀을 받으며 예배합니다. 그리고 함께 공동식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나누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웁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예배뿐만 아니라 함께 나누는 식사도 역시 거룩한 예배입니다.
2.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Then you and your household shall eat there in the presence of the LORD your God and rejoice” (24-27).
이제 24절에 보니 하나님께 받은 것에서 다시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 너무 많고, 성전까지의 거리는 너무 먼 경우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자기 동네에서 그 예물을 은으로 바꿉니다. 은은 당대의 화폐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을 가지고 성전이 있는 곳으로 가족과 함께 성전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성전에 와서 그 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으로 다시 성전 근처에서 우양, 포도주, 술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사서 하나님 앞에 예물로 드리고, 가족과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는 매우 합리적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화폐의 기능을 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예물의 가치를 매겨서 돈으로 바꾸고, 성전에 가는 여행 동안에 소지하고, 성전에 와서 다시 필요한 것으로 바꿉니다. 예를 들어, 송아지를 은으로 바꾸어 가지고 와서 다시 송아지를 사서 하나님께 드리고 그 음식을 먹는 거죠. 돈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요.
자, 그런데 27절에서는 조금 뜬금없는 말씀처럼 보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이스라엘 12지파의 48개 성읍에 레위인과 제사장 지파가 흩어져 산다고 했죠? 이들도 역시 이 세 번의 축제 동안에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업이 없기에 드릴 예물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 축제 기간에 각자 레위인으로 그리고 제사장으로 예배를 돕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함께 예배 후의 식사에 참여시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특히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성전으로 올라갈 때, 자기 동네 레위인과 함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성전에 가며 함께 교제하고, 성전에서 함께 예배하고, 예배 후에 함께 식사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충분히 그림이 그려지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레위인은 분깃도 기업도 없기에 그들의 생명이 일반 백성의 십일조에 달려있었습니다. 자칫하면 그들을 돌봄에 있어서 실수하거나 어떠한 이유로라도 저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거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이웃을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이렇게 하나님의 복을 받아 나누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를 바랍니다.
3. “매 삼 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 분의 일을 다 내어” “At the end of every three years, bring all the tithes of that year's produce” (28-29).
이제 28절을 봅시다. 22절의 십일조는 매년, 즉 해마다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이를 첫 번째 십일조라 합니다. 23절부터 나온 축제의 십일조는 두 번째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28절에서는 이에 더하여 매 삼 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 분의 일을 다 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3년째 되는 해는 십 분의 이를 내는 거죠. 이 십일조는 각자 자기 성읍에 저축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십일조가 바로 세 번째 십일조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십일조의 용도는 무엇일까요? 29절을 봅시다.
창고에 곡식, 기름, 포도주 등을 저장하고 있다가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우라는 것이 이 매 삼 년에 내는 십일조, 즉 세 번째 십일조의 용도입니다. 그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누구입니까? 레위인이 다시 나옵니다. 레위인은 어쨌든 취약 계층이었던 거죠. 그리고 이방인, 고아, 과부입니다. 그들을 먹여서 만족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주로 국가에서 걷은 세금으로 복지 정책을 폄으로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손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하나님께 더 드림으로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에게 도움이 되도록 구제헌금을 교회에서 쌓아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의 선순환이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내가 좀 부족하여도 나누면 하나님께서 나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셔서 더 베풀 수 있도록 하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많은 분이 이렇게 베푸는 일에 힘쓰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는 대로 열심히 일하세요. 그리고 얻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또 먹고 쓰세요. 교회는 그것을 잘 쌓아두었다가 도움이 필요한 지체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결론 Conclusion: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느헤미야 Nehemiah 8:10b).
느헤미야 8장에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인도를 따라 초막절 축제를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절부터 보면 에스라의 인도로 모세의 율법을 읽고 나눕니다. 이때는 벌써 유대인들이 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잃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으면 7절에 나오는 대로 13명 이상의 레위인들이 회중 가운데 서서 아람어로 통역하며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읽어 주고, 통역해 주고, 해석을 해주어 이제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첫 번째 반응이 무엇입니까? 9절을 보세요.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울어본 때가 언제였습니까? 아니, 단 한 번이라도 말씀의 은혜로 울어본 적이 있기는 할까요? 그러자 총독 느헤미야, 에스라, 레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10절을 봅시다.
느헤미야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네, 우리의 육체는 음식으로,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뻐함으로 힘을 얻습니다. 12절을 봅시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준 말을 밝히 앎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배의 모습입니까? 오늘 우리의 추수감사주일 예배가, 그리고 내년도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맞이할 때까지 모든 예배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또 형제자매와 함께 기쁨과 감사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경건한 사람의 4가지 의미
신 14:22~23, 행 10:1~8 )
에베소서 4:15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영성을 위하여 노력하는 자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성장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좋은 습관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자랍니다. 맥스 루카도는 "성장은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다. 성장은 의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좋은 습관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소망입니다.
1.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성경은 기도의 습관을 강조합니다.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지 않겠다고 했으며,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하였으며, 바울은 기도에 항 상 힘쓰라고 하였으며,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시작이 있지만 끝이 없는 것입니다. 루터는 너무 일이 많기 때문에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2. 공부하는 습관입니다.
예수님은 배우라고 권합니다. 바울도 모든 사람에게 배우게 하라고 하였 고, 배운 바를 행하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서 배 우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리처드 포스터의 말대로 학습해야 할 두 가지 교과서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말이 있는 교과서이고 다른 하나는 말이 없는 교과서입니다.
3. 헌금하는 습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헌금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며 약속한 대로 미리 준비하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환난이 있을 때에 극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습관이 되고 정성이 되어야 하나 님께서 원하시는 연보가 될 수 있습니다.
4. 친교하는 습관입니다.
히브리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 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 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였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 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습니다.
신약의 교제는 단순한 사귐 이상의 참여의 의미가 있습니다. 서로의 일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친교입니다. 이러 한 습관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빛나는 인생
신 14:22-29 행 20:22-28 / 김중석 목사
A Bright Life! (찬송74) 1절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노래한다. 2절은 인생의 유한함을 고백한다. 3절은 하나님께서 한 없는 사랑으로, 큰 자비로 인도하사 내 짧은 세월이 빛나게 됨을 찬미한다(다같이). [빛나는 인생]이 무엇인가?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천적으로 전하고자 한다. 그러면 2008년을 결산하는데 도움 되고, 2009년 계획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부자 됩시다! 지난 달에 장로간담회에서 이 말을 했다. 권사간담회에서도, 새가족 모임, 안수집사간담회에서도 이 말을 했다. 교회수첩에도 기재될 것이다. 지금까지 사랑교회의 멋진 표어가 있었는데 [신앙의 생활화,생활의 신앙화]였다. 그런데 구호에 그쳤을 뿐 거기에 따른 구체적인 것이 없었다. 그 구체화가 다섯 가지로 나오는데 그 첫째가 [빛나는 인생]이다. 그리고 빛나는 인생을 실현하는 방법이 두 가지로 제시되는데 하나는 [부자 됩시다] 둘째는 [사명]이다.
[부자 됩시다]가 어떻게 들리는가? 세속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백화점에서 매출을 올리기 위하여, 금융기관에서 고객을 끌기 위하여 ‘부자 되세요’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돈은 세속적인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다 가난하게 되기를 원하시는가 아니면 부자 되기를 원하시는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는데, 부자가 되면 천국에 다 못 들어가지 않겠는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셨는데. 이 문제를 신 구약을 관통하여 풀어보도록 하자.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경제적 부요’를 하나님의 강복(降福)으로 말씀한다. 신28:3-6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 복에는 바로 그 앞 절에 전제가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신약에서는 물질적 축복보다 영적인 복이 강조된다. 그러면서도 ‘힘써 일하라, 남에게 도울 것이 있게 하라’고 하신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한다. 물질보다 하나님 우선주의로! 마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신구약을 통틀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 그 복은 물질적인 복과 영원한 복을 아울러 포함한다.’가 된다.
물질적인 복은 어떻게 받나? 성경에 그것이 분명하게, 아예 약속으로 계시되어 있다.
신14: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십일조는 물질적 축복과 직결되어 있다. 십일조 방법은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 십일조는 교회에 드린다. 자기가 속한 교회에 드린다. 용도를 지정할 수 없다. 십일조의 소유권은 드림으로서 자신에게서 떠나 하나님께 속한다. 십일조를 쌓아 놓았다가 자기 보기에 선한 곳에, 선한 일에 쓴다? 아니다/ [처음 난 것]을 먼저 하나님께 드린다(23). 소와 양, 사람도 속전을 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명의 속전을 냈는데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이었으며 이는 인구 수를 조사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었다(출30:12). 지금도 첫 월급을 받고 그것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바치는 사람이 있다. 잘 하는 것이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첫 수익금을 몽땅 하나님께 바치는 경우도 이와 같다/ 그 후에 소득이 있을 때마다 곡식 포도주 기름(23), 박하 회향 근채(마23:23)의 십일조를 드린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인정하셨다.
십일조의 정신은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나타내는데 있다(23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그래서 자녀들까지 복되게 하려는데 있다(26).
하나님은 우리가 십일조 생활에서 받는 복 이상을 받도록 하고자 하신다. 신14: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렇게 되면 십일조가 넘는다. 그러나 더 복되다. 더 경제가 좋아지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또 있다.
신15:1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그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놀라운 법이 아닐 수 없다. 이 정신은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에 있다. 신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할렐루야! 이 세가지 경제법칙만 지키면 가난한 자가 없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렬한 약속이다. 내년부턴 우리 목장마다 만약에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한 식구가 있으면 목장에서 합력하여 살게 하도록!.
구체적 실천지침이 있다. 신15:7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주지 말고 반드시sp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쨰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꼐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1). 가난한 자가 있는 이유? 우리로 그에게 손을 펴게 하시려고.
이렇게 해서 내년부턴 여러분 모두가 부자 되기를 축원한다. [빛나는 인생] [부자 됩시다]
2. 사명. 릭 웨렌 목사 [목적이 있는 삶]처럼 [사명이 있는 삶]이 될 때 [빛나는 인생]된다.
사도 바울에게서 [사명의 삶]을 볼 수 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돌아오는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갇힐 것이 성령으로 알려진다.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행20: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
사도 바울에게는 주를 만난 이후에 평생을 두고 목숨 바쳐 추진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한편 장로들에게도 사명이 있었다. 행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장로로서 한 교회(에베소교회)를 보살피는 것, 사명이 될 수 있다. 성문교회 고 김영환 장로님이 계셨다. 교회를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하고 성전을 건축 중에 목사님이 미국으로 가셨다. 김영환 장로님은 젊은 전도사를 붙들고 남은 성도들을 보살피고면서 오늘의 성문교회가 있도록 자기 집안일 사업일 보다 더 헌신하였다. 절은 목회자가 부족해도 여러 사람 앞에서는 깍듯이 세워주고 할 말은 조용히 개인적으로 하고 교역자가 출타하면 대신 교회를 지켰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정말 잘 지킨 분은 예수님이셨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의 사명은 [사람 사랑]이었다. 죄악된 인간을 사랑하여 자기를 그들의 [속죄 제물]로 드리는 사명이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명에 투철했다. 그 사랑이 자기를 제자보다 낮추어 발을 씻겨주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우리의 사명도 여기서 발견된다.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명은 각자이다. [사명은 각자]
일산 통일로 나가는데 장어를 기르는 장로님이 있다. 이분은 장어 양식을 하는데 항생제를 안 쓰고 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사람이 미어진다. 그것으로 전도하려고 한다. 사명이다.
어떤 장로님은 가난했다. 대학갈 형편이 못되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세무공무원이 되었다. 야간대학도 하고 세무사도 되고 대전국세청장도 지내고, 그런 중에 사무실에 벙어리 저금통을 놓고 매일 만원씩 넣는다. 모으니 그것도 돈이 되어 장학사업을 한다. 내방객에게 소개를 하니 다들 얼마씩 넣고 간다. 장학사업이 커진다. 세무직업을 하면서 이것도 사명이다.
가수 션과 부인 탤런트 정혜영. 결혼 후 매일 1만원씩 모아 결혼 1주년이던 날 365만원을 노숙인들에게 기부하며 그날을 봉사로 섬겼다. 첫 동반 광고수입 전액 어려운 아이들 위해 내 놓았다. 현재 100명의 해외 빈곤 아동들에게 한 아이당 매월 3만5천원씩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재벌이라 돈이 많아서 그러겠지’’ 한단다. 정작 부부는 아직 자기 집도 없고 미래를 위한 적금 하나 없다고. ‘재벌은 재벌이되 마음의 재벌’이다.
[빛나는 인생]은 환경에서 나오지 않는다. 6.25 직후 우리의 국민소득은 70달러. 지금 2만달러로 300배. 그렇다고 300배 행복하고 300배 빛나는 인생 되었나? 오히려 자살증가율 세계 1위. 한해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자가 더 많다. 교통사망율이 OECD 1위인데. 술 제일 많이 마시는 나라. 담배 제일 많이 피우는 나라가 되었다. 이런 한국이기에 우리 크리스천은 [빛나는 인생]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서 [진짜 부자] 되자. 그리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좇아 살아보자. 그래서 다 [빛나는 인생]되기를!
네 이웃을 배부르게 하라
신명기 14:28-29, 사도행전 6:7
각 나라의 국민성을 꼬집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그 사람들을 물에 뛰어내리게 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독일 사람은 "뛰어 내리는 게 규칙이래" 그러면 두 말없이 뛰어내린답니다. 독일 사람들은 규칙은 무조건 지켜야 된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프랑스 사람입니다. 프랑스 사람에게는 독일 사람에게처럼 "규칙이니까 뛰어 내려야 돼" 그러면 아무도 뛰어내리지 않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유행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에게는 "뛰어내리는 게 유행이래" 그러면 서로 앞다투어 뛰어 내린답니다.
일본 사람에게는 "뛰어내리는 게 돈 버는거야" 그러면 바로 뛰어내린답니다. 일본 사람들은 돈버는 일이라고 하면 앞뒤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에게는 뭐라고 해야 뛰어내리겠습니까? 한국 사람에게는 "뛰어내리는 거 공짜래" 그러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내린답니다.
물론 꾸며낸 이야기이겠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옛말에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마만큼 우리의 심성에는 공짜를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공짜를 좋아하는 심성 한 구석에는 남을 위해서 베풀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보다도, 자신의 것으로 움켜쥐려는 욕심덩어리가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욕심덩어리는 우리를 위해서는 자꾸만 움켜쥐려고 하고 심지어는 남의 손에 있는 것까지 빼앗으려고 하지만, 내가 손해보는 일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베푸는 일에는 무관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신앙인들이 그런 욕심에 노예가 되어 이웃을 돌아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베푸는 삶이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손해보는 삶이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얼마나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삶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중심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고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사실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에게 쓰라고 주신 물질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 활용하도록 맡기신 것이고, 우리가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도록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내 것처럼 생각해버립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만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내 배를 불리는데는 아낌없이 쓰면서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겠다고 달라고 하시면 아까워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얻은 소득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늘 확인받아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종류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신명기 14:22절 이하에 보면 "매년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소득을 얻으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같은 내용의 십일조입니다.
이 십일조를 드리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소득과 물질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써야 하는 청지기임을 고백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두 번째 십일조는 구제의 십일조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라"고 말씀합니다. 매년 드리는 '소득의 십일조' 말고, 3년에 한번씩은 반드시 '구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그 구제의 십일조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쓰여집니다. 29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분깃이나 기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농지가 없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지을 땅이 없다는 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이 바로 그런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안됩니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난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을 형제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책임져 주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레위기 23:22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농사를 지었다고 내가 다 거두어 가면 안됩니다. 반드시 남겨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밭 모퉁이'와 '떨어진 이삭'입니다. 그건 내 것이 아닙니다. 그건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매 3년마다 드려야 하는 구제의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소득의 십일조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구제의 십일조도 내 것이 아닙니다. 구제의 십일조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분명히 말씀합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들은 평소에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농지가 있어서 농사를 지어 소득을 얻은 사람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런데 농지가 없는 가난한 이웃들은 평생을 가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굶어보지 않는 사람은 굶주린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흘 굶어 담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배고픔 앞에서는 견디기 쉽지 않습니다. 사흘만 굶겨 놓으면 사리분별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배고픔이라는 게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로 가난한 사람들, 배고픔에 굶주려야 할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외면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제의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것이고, 추수를 할 때에 밭 모퉁이나 떨어진 이삭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남겨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얼마나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욕심 때문에 가난한 이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위를 돌아보십시다. 우리가 도와야 하고, 내가 도와야 할 어려운 이웃이 보이십니까? 힘들게 살아가기에 내 작은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 보이지 않는다면, 분명 그건 우리의 눈에 '욕심'이라는 거적대기가 가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구제사업은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다른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단순한 그 목적만을 가지고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도와 준 이웃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일은 꼭 해야 합니다. 전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구제하는 것은 올바른 구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누어주는 것뿐입니다.
인도 켈커다의 성자 테레사 수녀는 87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참으로 많은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인도에서 기차 여행을 하던 도중 "너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살라"고 하신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여 평생을 가난의 거리 캘커다에서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처음 그분은 단 5루피를 가지고 섬김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5루피는 바나나 2개를 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으로 시작한 봉사가 조금씩 조금씩 커지면서, 그분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엄청나게 큰 일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서, 그것도 가장 가난하고 굶주림 때문에 죽음과 싸워야 하는 캘커다에서 평생을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섬김의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런 삶에 감동된 인도는 그분의 장례를 국가장(國家葬)으로 치루어 주었습니다.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서 테레사 수녀가 죽자 '국가 애도일'로 선포하였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왜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위대한 영적 감동을 주었습니까? 그가 단순히 복음만을 전하는 선교사였다면 그런 존경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순수하게 인도의 가난한 백성들을 사랑해서 그들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캘커다에서 50년 동안 살아온 그녀의 삶 - 가난한 자를 위한 삶이 구제 이외에 어떤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그녀는 그런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되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물질이 적다고 하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87세라는 고령의 나이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헌신의 삶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힌두교의 나라 인도라고 하는 종교의 차이나 민족의 차이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물질도, 나이도, 종교나 민족의 차이도 뛰어넘는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이웃을 돌보고 구제의 일을 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물질이 작아도 됩니다. 어린 아이의 보리떡 두 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가 5,000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물질이 없다는 게 장애가 아니라, 우리의 것을 주님께 드리려는 마음과 이웃을 향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는 게 장애일 뿐입니다.
연세가 많아도 괜찮습니다. 젊으면 젊은 대로, 연세가 많으면 많은 대로 우리가 해야할 일들은 분명 다 있게 마련입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일지라도 우리의 눈에 보였다면 우리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랬습니다.
많이 추수한 사람만 구제의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만 구제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와 주되 사람을 구별해서 도와 주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소득을 얻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구제의 십일조를 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모두를 도와 주어야 합니다. 내가 맘에 드는 사람만 도와주는 것은 올바른 구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말씀도 바로 그런 상황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토박이들과, 먼 이국 땅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객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객지에서 들어온 과부들이 구제하는 일에 자주 소외되었습니다. 그래서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들 사이에 불평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7명의 집사를 선출했습니다.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까지 일일이 챙길 수 없으니, 구제하는 일을 전담할 수 있도록 일꾼을 세운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초대교회에서 처음으로 집사로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업무가 분담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말씀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만 힘쓰게 되었고, 구제하는 일은 일곱 집사를 중심으로 일을 처리해 갔습니다. 그랬더니 교회가 평안해지고 더욱 부흥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사도행전 6:7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교회가 구제하는 일로 불평이 생겼다고 해서 그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전담할 수 있는 일꾼을 뽑아 그 일을 맡겨 구제를 효과적으로 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교회가 부흥되었고,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올해 목회자인 제가 여러분에게 참으로 죄송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각 사도회에 올해부터 매달 얼마 정도의 선교비를 내도록 했습니다. 사도회 운영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어떤 사도회는 선교비를 내고 나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비를 내도록 해서 사도회를 운영하는데 많은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힘들더라도 더 어려운 곳을 도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각 사도회에서 선교비로 내 주신 것으로, 작지만 어려운 교회를 돕고, 선교사님을 후원하고, 병원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도울 수 있는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힘닿는 대로 도와야 합니다. 작게는 우리 교회 안에 어려운 분들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지역에 어려운 이웃들, 우리나라에 어려운 이웃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세계 곳곳에 굶주림으로 고통 당하는 형제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힘써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부자이기 때문에 돕는 것이 아닙니다. 여유가 있기 때문에 돕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는 나라님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서, 포기할 일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지역의 어른들을 섬기기 위해서 경로대학을 하는데, 많은 분들이 이 일을 위해서 후원하고 있습니다. 또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고 '이웃사랑헌금'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참으로 어렵게 사셔서 -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분들도 기쁘게 이웃을 위해서 헌금하고 계신 것을 봅니다. 나라에서 얼마씩 경로연금을 받아 그것으로 살아가신 분들 가운데서도 경로대학 후원을 내시고, 이웃사랑헌금도 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 분들이 물질적으로 넉넉하기 때문에 그런 헌금을 하시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쓸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헌금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과부의 두 렙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대로 한다면, 우리는 소득의 1/30은 구제의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려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도록 해야 합니다. 한 달에 30만원을 버는 사람은 최소한 만원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한 달에 100만원을 버는 사람은 최소한 3만원 이상은 내 주위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이웃사랑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에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자비로운 마음,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마음만은 늘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까지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고장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도르테 뫉레'라는 여성신학자는 어려운 이웃을 보고도 도움을 손길을 내밀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서 '고장난 인간'이라고 정의합니다. 나를 위해서 늘 손을 안으로만 끌어당길 뿐, 이웃을 위해서 내밀지 못한 인간이 고장난 인간입니다.
오늘은 우리 총회가 지정한 '사회봉사주일'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까지도 우리에게는 어려운 이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까? 내 주위에 있는 어려운 이웃이 보인다면 아직 우리의 신앙은 잠들지 않았습니다. 그 어려운 이웃을 보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면, 우리의 신앙 양심은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우리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면, 우리는 '고장난 인간'이 아닌 정상적인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손을 내미는 것, 그건 우리에게 선행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고장난 인간이 아닌 이상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결론 맺고 있습니다. "네 이웃으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사업에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소망하십니까? 하나님은 복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고장난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구제의 십일조를 내서 배고픔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어려운 이웃을 배불리게 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여호와의 주인 되심을 기억하라
신명기 14:22-29 / 코너스톤 장로교회
우리가 이익으로 얻게 되는 재물이나 물질의 십 분의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십일조’라고 합니다. 시대가 갈수록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십일조 비율이 낮아진다고 합니다. 또한 기성 세대인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십일조를 하는 비율도 그 이전 세대와 비교해 보면 현저히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십일조는 선택적으로 드려도 되고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먼저 이 질문을 답하기 전에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이유부터 함께 살펴봅시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내가 가진 소득이 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신앙의 표현 입니다. 십일조는 나의 소유를 열 개의 조각으로 나누었을 때 그 중 한 조각은 하나님 것, 나머지 아홉 조각은 내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표현으로 드리는 것이 십일조 입니다. 우리는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의 표현을 통해 나머지 아홉도 주님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신앙의 표현 입니다. 즉 나의 소유가 내 손의 힘과 능력으로 얻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주어졌음을 감사함으로 표현하는 것이 십일조 입니다.
그런데 혹시 성경에 나타나는 십일조가 세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이 세가지를 구분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제 1 십일조’(민18:26-29), ‘제 2 십일조’(신14:22-27), ‘제 3 십일조’(신14:28-29)라 부르겠습니다. 제 1 십일조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십일조로서 내 모든 소득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수기 18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본래 이 제 1 십일조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 입니다. 성전에서 봉사하고 제사를 지내며 하나님을 섬겨야 했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물려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이 그들의 십일조를 통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생활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제 1 십일조 입니다.
그렇다면 제 2 십일조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축제의 십일조’ 입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14장 23-27절까지 나오는 말씀이 바로 제 2 십일조에 관한 말씀 입니다. 이것은 처음 제 1 십일조를 내고 나서 남는 90%의 소유 중 또 다시 1/10을 십일조로 드리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 드린 제 1 십일조가 제사장과 레위인을 위한 것이라면, 제 2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성소에 십일조로 드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즐거워하며 제물을 그의 가족들과 또한 그와 같은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들도 함께 먹는 것이었습니다. 왜 제 2 십일조는 ‘축제의 십일조’라고 불렸을까요? 이것은 십일조를 드리며 하나님께 백성들이 감사드리고 기뻐하며 제물을 먹는 것이었기 때문 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제 2 십일조를 봅시다. 22-23절 말씀 입니다. “(신 14: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신 14: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2절에 사용된 ‘드리라’는 말은 ‘너는 반드시 드려야 할 것이다’라는 표현 입니다. 십일조는 내 마음대로 드려도 되고, 안 드려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 입니다.
오늘 본문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제 1 십일조가 아니라, 성소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며, 하나님 앞에서 먹어야 하는 제 2 십일조라는 사실을 알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 곳에서부터 성소까지 와서 십일조를 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로부터 먼 곳에서 살고 있는 경우나, 성소까지 오는 길이 험한 경우에는 제물을 직접 들고 오지 말고, 돈으로 바꾸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으로 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24-26절 입니다. “(신 14: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신 14: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신 14:26)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자, 오늘 본문 말씀은 제 2 십일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온 가족과 함께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소에 가서 제물을 먹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주된 목적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제 2 십일조의 경우에도, 제 1 십일조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에서 아무런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을 기억하여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자, 앞서 제가 십일조가 세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죠? 28-29절이 바로 제 3 십일조 입니다.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신 14:28)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신 14: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제 3 십일조는 매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3년마다 드리는 것입니다. 28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앞서 드리던 제 2 십일조가 3년마다 제 3 십일조로 변경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 3 십일조의 목적은 ‘구제’ 입니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들, 이방인들,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먹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땅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굶주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십일조 입니다.
이와 같은 세가지 십일조의 목적과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십일조는 우리 삶의 주인과 공급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 입니다. 둘째, 십일조는 우리 삶과 가정을 돌보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신앙 고백 입니다. 셋째, 십일조는 어렵고 힘든 이웃들에게 나의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축복의 통로 입니다. 이와 같은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넘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일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앙의 초보 수준에서는 십일조는 안 내면 왠지 찜찜하고,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 같아 두려운 마음에 십일조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성숙함이 더해갈수록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신앙 고백이요, 이웃들을 향한 축복의 통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 입니다. “God owns it all”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을 다시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그리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일조
신 14:22-29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떠벌리는 것들을 보면 그 순서가 뒤바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욕심을 앞세우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실 리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자기 일에 끌어 모아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설령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한 자기 일이 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주님의 정신에 대한 순종을 배우기 위함인데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아무리 선한 일을 한들 그것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말썽을 부리고, 봉사를 많이 한 사람들이 그 헌신을 자기 공적처럼 내세우는 이유도 결국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가 이 도리를 가르치는데 게을리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들의 열심을 자극해서 헌신과 봉사를 하게 함으로서 교회를 빨리 부흥시켜야 한다는데만 관심을 기울여 왔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에게 행위만 강조했지 마음을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행위가 있으면 무조건 옳은 것으로 강조했고, 아무리 마음이 있다해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틀린 것이고 신앙이 아닌 것으로 질타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는 성장했지만 교인들의 심성은 참으로 심각할 정도로 강퍅해 졌습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이 본질을 뒤바꾸고 말았습니다. 마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신자를 부르신 것처럼 교회가 교인들을 일의 종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일을 많이 할수록 큰 일군으로 칭찬 받는 현실 속에서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배워 간다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버렸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교회의 일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누누이 강조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위한 신자로 나오는 것을 염려했고, 시켜서 하고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일이고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을 기르는데는 미흡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어서 하고 스스로 원해서 하고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견딜 수 없어서 하는 일들이 되어져야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위해서 일이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5:17절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내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독단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19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하는 일을 보고 일하셨습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예수님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일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곧 아버지의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일하신 것이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둘이면서 둘이 아닌,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 10:30)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날 교회는 이 순서를 무시해 버린 채 제멋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고, 또 해보겠다고 날뛰고 있는 실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일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했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로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님께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한번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끝까지 붙드시고 도우십니다. 성령께서 일하신다면 결국 우리도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일조'에 대한 규례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 드리기 앞서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먼저 언급한 것은 십일조, 즉 우리가 생각하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종교단체이든 그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돈'이 필요합니다. 돈없이 유지되는 단체는 없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어떤 명목으로든 돈을 거두게 되고, 그 돈으로 자기 단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은 돈많은 단체가 강하고 힘있는 단체로 인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종교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에는 '거룩'의 의미를 붙입니다. 신에게 돈을 바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헌신하는 거룩한 헌물이며 신은 그 헌물을 바치는 자를 기억하여 복을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은 신에 대한 헌신을 돈으로서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런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돈을 바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돈을 바치는 것이 헌신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경의 십일조는 돈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고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배우셔서 과연 나 자신이 십일조의 정신 안에서 살고 있었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성민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민이란 거룩한 백성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존재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구별이란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인데, 독특한 사고방식이란 예수님께서 오셔서 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주신 새로운 세계의 사고방식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서 애굽과 전혀 다른 세계인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 두 나라는 사고방식이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애굽적 방식은 버리고 새로운 나라의 방식으로 사는 삶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이 새로운 나라의 삶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가 '십일조'인 것입니다. 결국 십일조에는 새로운 세계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지 돈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느냐?'는 고민은 아직까지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에게 매어있는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히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럼 십일조를 하지 말란 말이냐?'라고 반박을 합니다. 이러한 반박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사들이나 또는 십일조를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목사들로서는 십일조에 대한 바른 이야기를 했을 때 두려운 것은 당연히 교회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돈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또한 신자는 십일조를 열심히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큰 신앙으로 여기고 하나님도 역시 그러한 자기를 어여삐 봐주신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기 때문에 반발을 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둘 다 하나님께는 관심 없고 자기에게만 관심 있었다는 것을 '십일조를 하지 말란 말이냐?'는 말로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란 없습니다'라는 말을 흐뭇하게 여기는 것도 그 속셈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평소에 돈이 아까워서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껄끄러웠는데 '십일조란 없다'라는 목사의 말이 마음의 부담을 해소시켜주는 것 때문에 그 말을 반가이 여기고 흐뭇해하는 것 역시 하나님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에게 매어있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오늘 우리는 '과연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란 무엇인가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태도입니다.
'십일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십일조를 요구하신 하나님은 과연 이스라엘이 어떤 백성 되기를 원하셨느냐는 질문이 됩니다. 십일조를 하라는 규례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도 '십일조란 무엇이냐?'를 배워가면서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함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고 인간을 위해서 일이 있듯이 인간을 위해서 십일조의 규례를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십일조란 무엇입니까? 우선 십일조는 내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2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십일조란 바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바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 하는 것에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우라고 하십니다. 결국 십일조의 규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일조를 바쳤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권속들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가운데 배워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쳤느냐? 얼마나 바쳤느냐? 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24-26절에 보면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너무 멀어서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서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그 돈으로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사서 권속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심은 십일조를 바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서로 모여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바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22절에 보면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우린 보통 십일조를 내면서 내 소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감사의 마음으로 바친다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십일조를 바친 것으로 신자로서 해야 할 감사와 의무는 다 한 것으로 간주하고 나머지 돈에 대한 권리를 자신이 차지합니다. 즉 십일조를 십분의 구에 대한 권리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세워놓으신 규례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토지 소산의 십분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셔서 너희들을 은혜의 땅으로 인도하셨음을 잊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이 소산물을 얻게 된 것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싸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들어와서 소산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다는 것을 서로 나누고 기뻐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즐거움은 단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지탱되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기뻐하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십일조를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서 내 소득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삼는 것은 삶과 소득을 구별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득이란 내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입니다. 그리고 일이란 곧 우리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 전체가 일이지 않습니까? 결국 소득이란 삶에서 주어진 자그마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삶속에 소득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 결코 삶과 소득을 구별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란 소득의 십분의 일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생겨난 삶입니다'라는 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의미로 말하자면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 전체가 주님의 희생 덕분에 생겨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믿음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삶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 다니고 학교 다니고 가정일 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동일합니다. 믿은 후에 신학교를 가고 선교사를 가고 교회 일에 열심을 내게 되는 그런 변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처음 교회를 다니게 된 자의 처음 열심이고 열성이지 믿음의 삶이란 그런 변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령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내 인생은 내 열심과 노력으로 개척하면서 살아가는 것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지금까지 내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오만함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자신을 주님의 세계로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든 못다니든, 돈이 많든 적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관계없이 그 모든 것은 은혜의 세계안에서 주어지는 조그만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직장을 못다녀도 은혜 안에 있는 것이고, 공부를 못해도 역시 은혜 안에 있으며, 돈이 없어도 은혜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새로운 세계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곧 십일조입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은혜 안에 있는 자로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모두가 같은 신세였습니다. 모두가 종이고 나그네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덕분으로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은혜 안에서는 처음 신분 그대로입니다. 강자 약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자 약자가 구분되어서 약자가 제외되고 따돌림당하는 것은 이미 은혜의 세계가 깨뜨려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27절에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없는 자라고 저버리지는 것은 십일조의 정신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내가 하나님의 복안에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즉 나같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복안에 살게 된 것을 감사할 때 그것이 십일조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됩니다. 신자는 이런 마음으로 자원해서 기쁨으로 교회에 헌금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내가 지금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에 헌금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예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이 믿음 없는 자기 수준을 보여 주는 솔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은혜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십일조라는 행위 하나 때문에 믿음 없음을 믿음 있음으로 착각해 버린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오히려 해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더불어 사는 인생이고 누군가가 살려주는 인생입니다. 이것을 확인하면서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곧 십일조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십일조의 정신이 확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함께 먹고 즐거워 할 수 있고, 우리 가운데 어렵고 힘든 자가 있을 때 그들과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것으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가 다시 이스라엘로 주어져서 그것으로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된 상태에서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산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리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것을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몸으로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내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은석교회는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주님의 몸과 피로 기뻐하며 모입니까? 주님의 몸과 피로 기뻐한다면 염려하고 불안하고 걱정하는 인생이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를 배우게 하는 규례입니다. 십일조는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현장이 되어야 하며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현장입니다. 이런 마음이 29절과 같이 기업이 없는 레위인, 객 고아 과부들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것으로 먹고사는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 덕분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내것이란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살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고 십일조 안에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
신 14:22-29
본문은 거룩한 의무와 절기에 관한 율법입니다. 농작물과 양과 소의 처 음 난 것 중의 십일조(혹은 그의 상당한 돈으로 대처할 수 있음)는 3년 중 2년은 중앙 성전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거기서 그 십일조(혹은 그곳 에서 바꾼 그에 상당한 물건)는 거룩한 축제일에 하나님 앞에 드려셨습니다. 이 축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땅은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선한 것이 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3년째에는 밭에다 열매의 10분의 1을 남겨 두어 땅이 없거나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먹게 하였습니다. 중앙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는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분깃에 대해서는 여기에 언급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18:3-4에는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일부분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처음 깎은 양털들은 제사장들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민 18 ; 21-24절에서 십일조는 모두 제사장 족인 레위인에게 속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십일조 사용에 관한 신명기와 민수기의 차이점은 신명기는 북 이스라엘 풍속을 반영하는 것이고, 민수기는 예루살렘의 풍속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십일조에 대한 신명기 견해는, 십일조 제도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들 에게 만물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빚진 자임을 인식시키자는 것이요, 또한 토지가 없는 불쌍한 자에게 자선을 베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관례 에다 순수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줍니다. 그러나 만약 십일조를 종교적인 기관을 유지하는 일종의 세금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거 나,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바치는 자에게 물질적 축복이 주어진다고 생각 하면 그 관례의 종교적 의미는 곧 사라지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토지소산의 십일조와 짐승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땅의 주인이며 풍요의 신이기 때문에 행해지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와께 바치는 십일조의 헌물을 여호와께서 정 하신 중앙 성소에서 행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신 명기 이전에 이미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종교적인 의식이지만 신명기에 서는 중앙 성소에 바친다는 새로운 규정을 정한 것입니다. 신명기는 다만 매 3년에는 십일조를 중앙 성소에 보내지 않고 지역 내 에 있는 레위인, 고아, 과부, 나그네 등을 위해 자선사업으로 쓸 수 있다 고 말합니다. 민수기에서는 3년째 십일조를 자선사업으로 쓰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명기의 의도는 29절에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 십일조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선한 지식을 전해 주고 거룩한 직무를 통해 그들을 돌봐주는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정 당한 몫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인데 율법에 의하여 레위인들에게 기업으로 상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됨은 두 번째 십일조 입니다. 이것은 레위인들이 자기들의 몫을 가져간 나머지에서 취해져야 하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분리하여 하나님을 위해 따로 떼어 놓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2절에 “너는 마땅히 토지소산을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를 분리하는 일은 그 소산의 주인에게 맡기고, 레위인들은 자기들의 몫을 돌보았습니다. 곧 토지 주인들을 신용함으로써 그들이 정직 하게 되도록 율법으로 돌보았고, 또한 그러므로써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을 연단시켰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십입조를 드리도록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즉 그 일을 꼭 행해야 하며 성실히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하여 하나님의 몫이 고의로나 과실로 인하여 삭제되지 않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23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 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란 곧 예루살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 때까지 언약궤는 일정한 장소가 없이 일시적인 장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께서도 란 특정한 장소가 존귀하게 여겨져서 그곳을 자신의 이름이 거할 영원한 안식처로 선택하실 경우 그곳으로 예물을 가져와야 한다는 점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한 곳을 선택함은 그 어떤 타락이 잠입해서 신앙의 통일성을 파괴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 였습니다. 그 외 모든 생소한 고안은 하나님의 예배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본문은 사실 십일조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서원물과 낙헌 예물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다 알고 있듯이 흩어져 있는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해서 내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한 곳에 제 물을 드리도록 함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는 레위인의 생계가 박탈당할 수 있기에 생계가 박탈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가져갈 십일조를 반은 레위인에게 주고, 반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서 제물을 드리고 거기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은 또 분배되는 뮬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즉 먼저 십일조는 레위인의 생계를 위함이요, 다음 십일조는 성스러운 물건으로써 성소에서 하나님께 바쳤던 것입니다. 두 번째 십일조는 다음과 같이 처분되었습니다. 안식년 이후 첫 2년 동안 경건한 사업을 위해서 그들은 그것을 헌물이나 거기에 해당하는 금액을 성소로 가지고 와서 여호와 앞의 거룩한 잔치에서 그것이 쓰여 져야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편리한 방법으로 할 수만 있다면 헌물로 가져와야 했고(23절),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가져와도 괜찮으며(24-25절) 그 돈은 반드시 여호와 앞에서 행사되는 잔치에 쓰여 져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진지하고 만족하며 거룩하고 즐겁게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경건한 잔치가 되게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성막에서 직접 수행하는 것은 그들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의 관습에 빠질 유혹에서 보호해 주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친교의 위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27절에 “너희는 레위인을 져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너희 식탁의 나그네가 되게 하지 말라 특히 너희가 여호와 앞에서 먹을 때 는 더욱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28-29절에 매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성읍 중에서 자선을 베푸는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네 성읍에 저축하라 그리하던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마련해 둔 비축금을 알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을 얻으려고 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라 그리하여 그들을 성중으로 영접하여 친하고 멸시하지 말고 와서 배부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두 번째 십일조의 분배에서 가난한 사역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확 대함으로써 용기를 주어야 하고 그 다음 가난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 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들을 후원해 줘야하고 이런 잔치에 초대함으로써 그들이 즐겁게 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고아와 과부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시고 그리고 우리도 그와 같이 해야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힘없는 사람을 돕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우리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가 가진 것으로 선율 행한다면 여기에서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너희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외부적인 번영의 전부요, 그 축복 없이는 우리가 경영하는 것, 즉 우리 손으로 하는 범사는 잘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축복받는 길은 근면하고 인정을 베푸는 것입니다. 축복은 일하는 손 위 에 내립니다. 그리고 축복은 주는 손에 내립니다. 나누어 주는 자는 틀림없이 점점 증가할 것이요 관대한 영혼은 살지게 될 것입니다. 비록 믿음이 적은 자라도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신앙을 지키는 일과 선한사업 에 넉넉하고 판대한 사람은 가장 확실하고. 가장 안전한 번영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진리입니다. 겔 44:30에 “여호와께 꾸어 주는 자는 넉넉한 이익으로 보상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十一條
신 14:22-29 / 한원식 목사
1,십일조의 기원과 의미
2,십일조의 성경의 증거들
3,십일조를 통한 하나님의 복
오늘의 말씀은 十一條에 관한 말씀이다. 十一條 : rce[}m(마아세르)
十一條 : rce[}m(마아세르)의 말씀은 많이 할수록 좋은 것인데 이 좋은 十一條 : rce[}m(마아세르)의 이야기를 하기 힘든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 十一條 : rce[}m(마아세르)에 대하여 큰 부담을 안고 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十一條 : rce[}m(마아세르)를 말할 때 은혜가 되어야 정상이다.
十一條 : rce[}m(마아세르)를 말하는데 은혜가 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분이다.
오늘 함께 十一條 : rce[}m(마아세르)를 살펴 보면서 은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1, 십일조의 기원과 의미
그 분할 소산(fraction), 즉 十一條가 언제 그리고 왜 종교 "세"로 채택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시기에 관한 한, 우리는 그 관습이 아주 오래 전에 널리 유포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아마도 그 관습은 이스라엘 역사 이전부터 시행되었을 것이며 셈족 사람들만이 이 관습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인도 - 게르만 사람들까지도 이 관습을 좇았던 것 같다.
십분의 일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분명히 고대 사람들의 수를 분류하는 방식이 십진법에 기초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분류법은 보통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10개씩의 손가락과 발가락에 의거하여 쉽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十一條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수에 대한 관념에 의거하여 선택되었던 것 같다.
상황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를 포괄하는 '십'이라는 숫자는 고대 사람들이 좋아하던 숫자들 중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창 31:7) 특히 성별 된 다른 두개의 숫자들, 즉 3 및 7과 함께 거룩한 숫자로 간주되기도 했던 것 같다.
구약성경에서 십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자주 거룩한 사건들 속에 나타나는지에 대해 주목하라. 즉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라는 성구들이 서로 거의 일치되지 않고 각각 10회, 7회, 3회씩 나타난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살았던 열 명의 족장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고(창 5장),
홍수 이후의 열 명의 족장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창 11:10-30).
'10' 이라는 숫자는 노아의 방주 제도에서 사용되었으며(창 6:15)
자주 천막의 제도와 설비에서 사용되곤 하였다(출 26장; → 장막 Tent).
'10' 이라는 숫자는 또한 묵시 문학의 상징적 표현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며(단; 계),
마태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권능이 열 가지의 기적에 의해 입증되었다고 본다(마 8-9장).
일반 세속 문헌에 나타나 있는 十一條
비록 十一條 제도가 이스라엘 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발전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성경 외의 문헌들은 여러 곳에서 十一條 제도가 시행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때로 十一條 제도는 순전히 정치적인 양상을 띠기도 하였다.
즉 백성들이 왕에게 바친 세금이나 정복자가 피정복 국가에 부과한 조세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Diod. Sie, 20, 14).
그러나 고대 사람들이 十一條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거룩한 의미와 세속적 의미를 동시에 지칭할 때가 더욱 많았다.
느부갓네살 2세가 다스리는 동안, 바벨론에서는 왕을 포함한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신전에 十一條를 바쳤으며, 한편으로 바벨론의 왕들은 또한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거둬들였다(C. H. W. Johns, Babylonian and Assyrian Laws, Contracts and Letters, 1904, Xi, 205-206).
페르샤의 총독들도 수입의 십분의 일을 요구하였다(Aristot., Oecon. 134b.; 135b).
더구나 페르샤의 고레스 왕은 휘하 장병들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제우스신에게 바치도록 명령하였다(Hdt., I, 89).
파우사니이스(Pausanias, A. D. 2C)는 헬라나 로마에서 신들에게 간혹 바쳤던 조세로서의 十一條세에 관한 많은 실례를 제공해 준다.
또한 일반 세속 문헌들에는 오직 거룩한 의미로만, 즉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 할 희생제물이라는 의미로만 사용된 十一條 제도의 실례가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아가멤논은 미케네를 점령하고 나서 신들에게 십일조를 바쳤다(Diod. Sic., 11, 65).
에트루리아 사람들을 정복하고 나서 리파리아 사람들은 델피 신전에 전리품의 十一條를 바쳤다고 한다(ibid. 5, 9; Hdt., 7, 132; 헬라인들 사이에 유포된 더욱 풍부한 십일조 제도의 증거에 관하여 W. H. D. Rouse, "Tithes 십일조[헬라]", ERE XII 350-51을 참조).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十一條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十一條에 대한 개념은 시대가 흐르고 이스라엘 사회가 더욱 복잡화 되어감에 따라 발전된 것 같다.
매우 초기의 기록에는 아브람이→멜기세덱 Melchizedek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4:20).
그러나 아브람이 바친 십분의 일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중에서 바친 것이지 땅의 소산 가운데서 바친 것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아브람에게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명한 법에 관한 언급도 없고 그가 그것을 준 이유에 관한 설명도 없다.
아브람의 예를 보아서 언제부터인가는 불분명하나 그 전에도 十一條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야곱도 하나님께 十一條를 바치겠다고 서원하였다(창 28:22).
게다가 야곱은 자발적으로 十一條를 드렸던 것 같다.
즉 야곱은 자신을 성공시키시고 다시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도록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하는 약속으로 十一條를 드렸다.
그러나 그가 왜 십분의 일을 드렸는지 혹은 이 十一條가 어떻게 드려졌는지, 혹은 하나님을 위해 누가 이것을 받았는지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는 대 법전에 十一條 대한 언급은 없으면서, 땅의 첫 소산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법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상하다(출23:16, 23:19, 34:22-26).
농작물 등의 첫 번째 소산이자 가장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소산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쳤던 것 같다.
이것은 모든 것이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고 생각하는 관념에 기인하는 것 같다(신 26:10). 게다가 아마도 첫 소산을 바치는 행위가 십일조 제도로 발전하였으며 바쳐야 할 첫 소산의 분량을 엄밀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十一條'라는 명칭이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러나 첫 소산과 十一條의 관련성에 관한 이 문제는 성경의 본문에 이것들이 동일하게도 나타나고(신 26:1-15) 그것들이 구별되기도 하기(느 12:44) 때문에 명료하게 해결될 수 없다.
또한 十一條라는 명칭을 둘러싸고 있는 역사를 정확하게 재구성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땅의 소산
열매, 과수 등의 십분의 일은 어찌 되었든 주님께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여호와께 성물'이었다(레 27:30-32).
처음에는 사람이 직접 곡식, 포도주, 기름 등과 같은 소산의 십분의 일을 제물로 바쳤다.
해마다 사람들은 십분의 일을 지정된 어떤 장소로 가져가서 거기에서 아들, 딸, 노비와 마침 한 자리에 있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게 되어 있었다(신12:6, 12:11, 12:17).
만일 이 정해진 장소가 너무 먼 곳에 있다면 십일조를 돈으로 바꿔서 그곳에서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 돈으로 사 먹을 수 있었다.
거기에서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가족, → 레위인 Levite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먹고 즐거워하였다(신14:22-29, 15:19-23).
레위인들이 매년 이 십일조 축제에 참여했지만 이 十一條 제도가 오직 그들만을 위해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시사해주는 내용을 이 본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하라.
오히려 본래 十一條 축제는 땅의 주인과 그의 가족들이 기쁨을 나누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존재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성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스라엘의 사회는 발전하였으며, 사회적 문제도 점차 증가해 갔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十一條에 적용되는 법률이 수정되었다.
이제 땅의 소산 중에서 십분의 일은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께 바쳐졌다.
집을 떠나 먼 곳에 가서 봉헌자 자신이 소비해버리는 대신에 삼년에 한번씩 十一條 예물을 각 지방의 성읍에 저장해 두었다가 그 성읍 안과 주변에 살고 있는, 물질적으로 어려운 레위인들, 우거하는 객들, 고아와 과부들을 만나면 그들을 위해 그것을 사용했다(신 14:28, 신 26:12).
점차 이스라엘의 예배가 성장해 갔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수효도 증가하였다.
이 사람들에게는 양식을 공급해 줄 땅이 배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비와 성소의 유지비는 백성들의 헌납물로 충당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성소의 설비물이 점차 많아지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수효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3년에 한 번씩 바치는 十一條만 가지고는 레위인들 및 제사장들의 생활비와 성소의 유지비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十一條의 법률이 출현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十一條를 레위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셨다(민 18:21).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격히 말해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하나님의 집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十一條를 바쳤던 것 같다.
레위인들은 각 지방에서 거둬들인 十一條 예물을 조사하였고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의 순회 때에 레위인들을 동반하였다.
레위인들은 거둬들인 十一條예물 중에서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주었으며(민18:28, 느10:32-39) 그에 대한 보답으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十一條 의무를 게을리 한 것은 단 한번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레위인들은 밭을 경작하여 자신들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성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리하여 성소는 페허가 되고 말았다.
히스기야(왕하31:5 이하)와 느헤미야(느13:12)와 말라기(말3:8, 3:10) 시기에 개혁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다시 그들이 바쳐야 할 十一條를 바쳤으며 성소는 복구되었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또 다시 하나님의 율법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다.
헬라화된 후기 유대교에서의 十一條
비록 구약성경에서처럼 十一條에 대한 관념이 납세자의 의식에만 남아있을 뿐, 실제로는 十一條 예물이 거의 징수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유대교가 헬라화된 시기에도 여전히 十一條 예물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 욕심 많은 대제사장들은 악당들을 탈곡 마당에 보내어 반드시 十一條를 받아와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소농들은 이 중요한 종교적인 의무 이행을 의심스럽게 생각하였다(Josephus, Ant.20,181:20,206).
기독교 형성 직전과 초대 기독교시기에 성직자들은 성전이 유지비와 자신들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十一條라는 명목으로 일종의 인두세를 거둬들였다.
매년 반 세겔씩(마17:24, Josephus, Ant. 18, 9, 1; 미쉬나 소책자 Shekalin; 참조: 출 30:11-16)
그들은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서조차 이 세금을 거둬들였다(이처럼 세금 징수의 대상을 팔레스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킨 것은 랍비들이 새롭게 고안해 낸 제도였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난 후에도 여전히 랍비들은 十一條조 과세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세상을 창조하는데 공헌한 세가지 요소들 중의 하나라고 간주하였으며(창R.1,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많은 사악한 것들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으로 보았다(Jewish Encyclopedia, XII, 151b).
十一條의 의미
十一條를 드리는 행위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라는 기본적인 관념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十一條를 드린다는 것은 땅과 그 소산이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하게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 일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물질 자체를 훔치는 것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은 이미 하나님께 속해 있다(시 50:10)
이 물질이 하나님께 속하며 오직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말3:8, 3:10).
인간의 재물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선물로 간주되었으며, 이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은 적당히 사의를 표했다.
게다가 十一條는 관용을 베풀어주심에 대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참조: 28:20-22).
마지막으로 十一條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활비를 지원해주고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을 공급해준다는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十一條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구속 활동에 동참케 하시는, 즉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 가난한 자와 빈궁한 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간주되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자신의 축복을 나눠주신 것처럼 그 축복을 받은 사람들도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눠주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종교 지도자들은 되풀이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十一條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즉, 십일조를 바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지만 그것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겔 44:30 이하, 말 3:8, 말 3:10).(참조: G. F. HOWTHRNE).
2, 십일조의 성경적 증거
(신14: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十一條를 드릴 것이며
(신14: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十一條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신14: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레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대하31:4-10) 또 예루살렘에 거한 백성을 명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응식을 주어 저희로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한지라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十一條를 많이 가져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十一條를 가져왔고 또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十一條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더미를 이루었는데 삼월에 쌓기를 시작하여 칠월에 마친지라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와서 더미를 보고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복하니라 히스기야가 그 더미에 대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대답하여 가로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4:23 본절은 소위 '제2의 十一條'의 용도(用途)를 밝히는 부분이다.
그것은 곧 백성들이 직접 중앙 성소로 가지고 올라가서, 한 해 동안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 축제를 드리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12:11,12,17-19).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이스라엘의 유일 중앙 성소로 택정 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十一條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팔레스틴의 3대 소산물로서 곧 모든 농작물을 대표한다.
따라서 이는 곧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수확한 모든 농작물의 十一條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7:13>.
네 우양의 처음난 것
十一條와 더불어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한 모든 초태생들의 대표물이다<12:6>.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제 2의 十一條'를 시행하는 목적이다.
즉 그것은 백성들이 한 해 동안의 풍성한 소출을 거둔 데 대하여 온 가족과 더불어 즐거워하며,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케 함으로써, 온전히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게 교훈하기 위함이었다.
14:24,25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각 지파별로 흩어져 정착하였을 때, 만일 자신의거처가 중앙 성소로부터 너무 멀면 농작물의 十一條와 우양의 처음 난 것들을 직접 갖고 가는 대신, 그것을 일단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가다가 성소 근처에서 다시 감사축제에 필요한 예물들을 구입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제도는 인간의 편의를 도보하기 위해 주어진 규례인데, 하나님의 자상하신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이러한 제도가 타락하여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돈을 바꾸고 예물을 팔며 이를 통해 매매인이 무수한 폭리를 취하는 불의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막11:15-18).
그 결과 예수께로부터 엄한 책망을 당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께 十一條와 각종 헌금을 바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드리는 자의 내면적 신앙과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임을 단적으로 증명해 보여 주는 한 예이다(민18:21-32 강해, 十一條드리는자의 올바른 자세>.택하신 곳 - 12:5 주석 참조.)
14:26 포도주 - 원어 '야인'은 대개 포도주를 으깬 후 달여 만든 '포도즙'을가리킨다(창 9:21; 삼상 1:14; 전 10:19).
독주
원어 '쉐카르'는 과일이나 곡식, 꿀 따위를 발효하여 증류시킨 것을 가리키는데, 포도주와 달리아주 독한 음료이다(Jerome).
한편 랑게(Lange)는 포도로 만들 술이 곧 '포도주'이고, 포도가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든 것이 곧 '독주'라고해석하셨다.
네 권속
자신의 일가 친척 뿐 아니라, 수하에 있는 종들까지 함께 지칭하는 말이다(12:12).
14:27 레위인은...저버리지 말지니라
레위인은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종교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므로, 생업에 종사할 겨를이 없었고, 따라서 생업을 위한 어떤 기업이나 분깃이 주어지지 아니하였다(12:12; 민18:24).
그러므로 모세 율법은 그 지방 사람들이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규정하였다<12:17-19>.
3, 십일조를 통한 하나님의 복
14:28 매 삼 년 끝에...십분 일
안식년(레25:8)을 기준으로 세 번째 해가 되는 때, 곧 제3년과 제 6년째에 시행하던 소위 '제 3의 十一條'를 가리킨다<창28:10-22> 강해, 구약의 십일조>.
이 '제 3의 十一條'란
'제 2의 十一條'<22,23절>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동일한 것인데 다만 용도가 다를 뿐이다.
즉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 3년과6년에는,
'제 2의 十一條'로 감사 축제를 베푸는 대신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 나그네,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등을 위한 구제비로 사용하였는데(29절; 26:12), 이를 가리켜 소위 '제 3의 십일조'라 칭하였던 것이다.
15 ; 매 칠 년 끝
매 칠 년 되는 해의 연말이 아니라,
7년을 주기로 하여 그 주기의 마지막, 즉 '제 7년째'를 의미한다.
이를 가리켜 일명 '안식년'(安息年, theSabbatical year)이라고 하는데<레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이 때에는 땅을 경작하지 아니하고 묵혀 두도록 규정되어 있다(레 25:4,5).
면제하라 : 즉 안식년 채무 면제에 관한 규례이다.
그런데 여기 규정된 채무 면제(債務免除)의 정의에 대하여서는 상반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부채의 완전 탕감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Lange, Matthew Henry).
둘째, 안식년에만 국한된 빚 독촉의 면제를 의미한다는 견해이다(Philo, Calvin, Keil, Pulpit Commentary).
그런데(1) 매 안식년마다 모든 채무가 완전 탕감되어 버린다면, 사실상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금품 대여 행위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2) 또한 여기서 '면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어근 '솨마트'는 '쉬게 한다', '묵여두다'(출23:11)는 뜻으로 일시적인 일의 중단을 강하게 나타낸다.
(3) 그 뿐 아니라 '그것을 면제하고...독촉하지 말지니'(2절)라는 말도 빚 탕감보다는 오히려 빚 독촉의 면제를 강하게 나타내준다. 따라서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본문과 부합되는 타당한 견해임을 알 수 있다."
말3:8의 의 十一條 강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더러 그 소산의 十一條를 바치라고 하신 것은, 실상 은혜이다.
그 소산을 주신 이가 여호와시니 그것을 그가 전부 요구 하셔도 합당하다.
그러나 그리하시지 않고 다만 십분지 일을 드리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레위 족속의 사용할 것을 공급하시기 위하여 요구하셨으니 곧, 곡식, 술, 기름 양떼와 소 떼의 처음 난것 등에 대한 十一條이다(레27:30; 민18:20-24; 신14:22).
十一條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그것을 바치지 않는 자는, 특별히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과 같은 죄이다."
十一條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증거이다.
(말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오래 전 박용묵 목사님께서 대구 문화촌교회를 담임하실 때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박 목사님께서 대문을 나서려는데 그 때 한 문둥이가 가마니 한 장과 깡통을 들고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문둥이가 목사님을 보면서 말을 건넸다.
"목사님이 계시는지요?"
"예 제가 이 교회의 목사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문둥이는 그가 들고 있던 깡통에서 35원을 꺼내 들었다.
"목사님 이 것은 저의 십의 十一條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하면서 동전을 건네려 했다.
그 때 목사님께서 이렇게 만류했다.
"예 제가 받은 것으로 하고 그 존은 도로 가지십시오. 주일에 제가 그 돈만큼 예물을 드리겠습니다"
"아니오 저는 단 일원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그여히 거절을 했다고 한다.
(말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十一條와 헌물이라
十一條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十一條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8) "3:8,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十一條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十一條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임을 말씀드렸다.
十一條 바칠 것이 많은 것이 좋은가?
十一條 바칠 것이 적은 것이 좋은가?
신명기 14:22-29
이집트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영광의 탈출을 하고 홍해를 건너 드디어 가나안 바로 앞까지 왔지만 순종하지 않았다가 광야에서 40년 간 방황했습니다. 이제 방황도 다 끝이 나고 다시 가나안 바로 앞까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시 설교를 하시는데 그 설교를 말씀하시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오늘 신명기 14장에서는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22절) 라고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십일조의 의미는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번 모든 것,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바친다고 고백하면서 나의 소유 전부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친 그것을 받으시고 그 중에서 1/10만 나에게 주고 나머지는 가지고 가서 다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중간 과정을 다 생략하고 1/10만 바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의 용도는 레위인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한 자금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워낙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은 이것저것 돈 번다고 거룩함을 훼손하고 오염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그것에만 전념하기 위해 그들이 쓰는 비용은 따로 마련되어져야합니다.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27절)..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인들은 십일조를 받아서 그것으로 생활하게 되면 먹고 살기 위해서 또 자식 공부시키기 위해서 이것 저것 신경 쓰지 않고 그 일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받은 십일조를 자기네들이 다 챙기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다시 1/10을 떼서 제사장들에게 다시 바칩니다. 제사장도 레위인이지만 일반 레위인들이 받아서 그것의 1/10을 제사장들에게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장도 레위인도 하나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제도적으로 마련해준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십일조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 1/10을 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소득의 1/10을 내고 남은 나머지 소득에서 다시 한 번 더 1/10을 뗐습니다. 이것을 제 2의 십일조라고 부릅니다. 제2의 십일조는 그냥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감사 식사의 경비로 사용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 2의 십일조를 축제의 십일조라는 말로 부르기도 합니다. 본문의 십일조는 제 2의 십일조, 축제의 십일조를 말씀합니다.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26절에서도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먹으라’(23절) 라는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장소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일정부분의 소득을 떼서 먹을 때 내 마음대로 아무 곳에서나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 즉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23절) 이라는 장소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 식사는 인간들만 모여서 먹고 마시는 즐거운 식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실제 하나님께서 음식을 잡수시는 것은 아니지만 감사의 식사를 할 때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식사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먹을 때마다 하나님이 같이 잡수시는 것으로 알고 그 하나님과 함께 식사잔치를 하라는 말씀이고,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 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고백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먹고 마십니다. 옛날에는 종이 되어서 제대로 앉아서 먹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못 먹었는데 이렇게 편안하게 먹습니다. 이것이 전부다 하나님의 은헤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23절 마지막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들, 큰 자녀들, 이미 출가한 자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식당에서 하는 식사에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같이 모여 ‘이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또 먹을 수 있는 건강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먹을 것이 있어도 먹을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셔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조금 여유가 있어서 좋은 식당에서 식사할 수도 있겠지만 교회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에는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면서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똑같이 먹는 의미가 있습니다. 장소의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감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 2의 십일조는 감사의 식사에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 용도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 3년 그리고 제 6년에는 감사 식사로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구제에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28-29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한 달에 한 번씩 구제헌금 하는 것에는 이런 의미가 많습니다. 십일조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일 헌금을 하고 또 식사 봉사나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 등 이런 것이 십일조, 헌금의 의미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면 걱정이 생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 바치고 나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내 자식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내 노후를 어떻게 준비할지 걱정과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번 소득을 전부 다 써도 모자랄 판인데 십일조를 떼고 나면 더 모자랄 것이 아닌가? 더구나 제 2의 십일조, 이런 저런 헌금을 바치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살려고 하는가?’ 라는 걱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두 개의 십일조만 한다고 하더라도 소득의 19%가 되므로 나머지는 81%밖에 안 됩니다. 소득의 8할만으로 어떻게 살라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법을 정해서 우리들에게 하라고 하시는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제대로 하면 살기가 참 어려울 것이다, 십일조를 제대로 바치는 사람은 안 바치는 사람보다, 대강 대강 바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사람이고 속된 말로 한다면 제대로 바치는 사람들만 손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런 걱정을 모르실 것 같습니까? 이런 것을 모르시고 십일조 내라, 헌금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일까요?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26절까지는 오늘 본문의 내용과는 좀 다르게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자상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그에 대한 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장소는 단 한 곳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입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도 그곳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따라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십일조로 바칠 가축 그리고 곡식을 가지고 갈 때 운반의 어려움이 아주 많았습니다. 곡식은 너무 무겁고 가축은 데리고 가기 참 어렵습니다. 가다가 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까지 다 생각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라, 이렇게 감사식사를 하라고 말씀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다 생각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길 수 있는 일들을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뛰어넘어서 생길 수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시고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정도로 섬세하시고 자상하시다는 것을 본문 24절에서 26절까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다. 이런 자상함, 이런 섬세하신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바치고 나면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상대적으로 또 절대적으로 어려울지 모르실까? 그것도 모르시고 바치라고 하실까?’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 하나님은 십일조 때문에 살기 어렵게 되는 일을 그냥 내버려두시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제대로 바치는 사람이 바치지 않는 사람보다, 대강대강 바치는 사람보다 더 불리하게 손해가 되는 일은 없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아시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확실하게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 정도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라는 29절 말씀입니다. 제 1의 십일조, 제 2의 십일조를 다 드리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하나님이시라면 오죽 잘 챙겨주시겠습니까?
이 말씀을 하실 때 하신 말씀이 신명기 12장 첫머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대한 법을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신12:1)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광야에서 아무것도 없을 때, 바칠 것도 없고 버는 것도 없을 때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나중 가나안에 들어가서 바칠 것이 있을 때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쉽게 풀이해서 오늘날로 말씀하면 바칠 것이 없을 때는 바치지 않아도 된다, 나중에 내가 주겠으니 그때에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주시지도 않고 바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시고 난 후 그 중에서 일부를 떼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24절 마지막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때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신명기 15장 전체의 말씀입니다. 지금은 하나도 없지만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에 가게 되면 이웃에게 빌려줄 정도로 넉넉하게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가면 이웃에게 빌려줄 정도가 되겠으니 그때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신15:1-3) 라고 말씀하십니다. 꾸어준 것을 면제하라는 것은 꾸어준 것이 있었다는 것이고, 꾸어줄 것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충분히 쓰고도 남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입니다. 또 종을 부릴 수 있는 여유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라는 신명기 15장 12절의 말씀을 보면 하인까지 누릴 수 있는 여유를 내가 주겠으니 그때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입니다. 또 가축도 넉넉하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5장 19절의 말씀입니다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수컷을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수컷도 주고 암컷도 주고, 첫 번째 것도 주고 두 번째 것도 주고, 소도 주고 양도 주고 염소도 주겠다는 것으로 많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본래 아무것도 없던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주시고 난 뒤 그 중에서 일부를 떼어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저에게 10억만 주시면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 바치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사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계산을 잘합니까? 아무것도 없던 사람인데 그렇게 넉넉하게 주시면 반을 떼어도 반이 남으니 얼마나 많은 돈들이 남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이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예 하나를 떼고 열 개가 아니라 아홉 개만 주시면 되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열 개를 주시고 난 뒤 하나를 떼어 달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알고 싶으시고 여러분들에게 가르치고 싶으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내 것, 하나님의 것인지 알고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본래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던 사람이고 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오늘 이렇게 넉넉하게 살 수 있는 것이 모두 다 내 하나님 은예이고 하나님의 득인 것을 알고나 있는지 하나님도 알고 싶고 여러분들에게 가르치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신15:15)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계속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확인하고 싶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싶습니다. 복은 누릴만한 사람만 누린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말라기에서 ‘만군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3:7-9)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야, 이 도둑들아”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무엇을 도둑질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던 너희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고 그 중에서 1/10만 달라고 했더니 너희들은 우리가 그 1/10을 바칠 이유가 어디 있느냐? 라고 말하니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제대로 한 번 바쳐보아라,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내 것, 하나님의 것을 제대로 한 번 돌려줘봐라. 내가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말라기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나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 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3:10-12) 라고 말씀하십니다. 알라는 말씀입니다.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까짓 머리로 계산해서 바치지 않으면 득이고 손해를 덜 보는 것이니 저 사람보다 손해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오른쪽에 갈 사람, 왼쪽으로 갈 사람으로 분류하십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에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라고 말씀하십니다. 양과 염소는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확실하게 압니다. 어떤 것이 양이고 어떤 것이 염소인지 너무나 분명하게 압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엄정하고 엄숙한 선언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왼쪽으로 어떤 사람은 오른쪽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이쪽으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저쪽으로 또 복을 받을 사람은 이쪽으로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저쪽으로 분명하게 분류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틈틈이 여러분들을 ‘저 사람은 받을 만한 사람인가? 계속 주어야할 사람인가? 더 이상 주지 못할 사람인가?’ 테스트하십니다. 더 이상 주어서는 안 될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왕 주신 것을 다 회수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받은 것을 줄만한 사람에게 다 주십니다. 게으름 부리고 순종하지 않은 사람의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맛보기 정도가 아니라 진짜 좋은 것을 받을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계속해서 보고 계십니다. 이것을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신15:4-6)라고 성경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경제적인 것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라는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9-11) 라고 말씀하시고 18절에서도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제, 자녀문제, 건강문제 이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복에 포함됩니다.
록펠러가 세계적인 대부호로 성공하고 난 후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 자서전에서 자신의 성공비결을 밝힙니다.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 어머니와 세 가지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평생 지킨 것 때문에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하나는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늘 목사님의 말씀을 따르고 무슨 일이든지 교회에서 정한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고 항상 순종하라는 것이며 세 번째는 철저한 십일조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어머니 말씀에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3장에서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고 긍휼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은혜 베풀만한 사람이 되는 사람, 긍휼히 여길만한 사람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와 긍휼을 받는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
소산의 십일조
신14:22-29
유태인들에게 '당신이 어째서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그 증거를 대보십시요?' 라고 물어보면, 두 가지를 대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천명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가, '안식일을 지킵니다' 라고 말하고, 두번째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습니까?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 한국에서 공부할 때, '국민의 4대의 의무' 하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국방의 의무, 근로의 의무 이렇게 배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Tax 를 제대로 내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 있습니다. 군대를 가지 않으면 반드시 감옥에 갑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반드시 안식일을 지키며,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분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지, 지금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까?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구약시대나 있는 거 아닙니까? 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인색한 사람들이 그런 말하죠. 분명히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께서 언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23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이냐면, '너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은 버리고, 억지로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어찌되는지, 십일조만 드리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물론, 마음까지 드려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더 강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도,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지금 유태인들이, 안식일과 십일조를 반드시 지키는 것 처럼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십일조를 드린다고 손해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먼저는 영적인 복이 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물질의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물질의 복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으셨지만, 이 십일조 만큼은, 구약에서 약속한 복과 그대로 연결이 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를 드리면, 여전히 물질적 복에 대한 약속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하나 덧붙이면, 그것도 인색함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즐겨내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십일조를 하는데, 명심해야 할 것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내가 쓸 용돈에서 십의 하나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22절은, '소산의 십일조' 라고 말씀합니다. 지금으로 하면, 수입의 십일조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은, 한달에 1000불을 벌어요. 그런데 빚으로 나가는 돈이, 1000불이 넘어서, 마이너스라 드릴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럼 수입이 없습니까? 분명 있습니다. 있으니까, 빚을 갚아나가는 거죠? 이렇게 하나님을 속이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다 아시죠. 절대 사람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온전한 십일조. 그렇게 할 때, 오늘 본문 마지막 절 하반절에,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손으로 하는 범사' 는 분명히 물질의 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라고 하실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십일조를 드린 것을 꾸짖으셨다고 말씀드렸죠. 마찬가지로, 구약의 십일조도, 하나님의 사업에 쓰였고, 불쌍한 이웃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29절을 보시면,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 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고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말씀하죠.
여기서 분깃이 없는 레위인은, 지금의 교회의 전임 사역자를 말합니다. 당시에 레위인들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분깃은 재산을 말하는데, 재산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오직 성막에서만 일하게 되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객과 고아와 과부로 와서 배부르게 하는 것, 이것이 십일조를 하는 이유 입니다.
그러니 이 십일조를 통하여 하나님 얼마나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새벽에 ,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십일조는 하나님 백성의 의무이며, 온전히 드려야 하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사역과 이웃을 위해 쓰여지며, 그렇게 할 때, 물질의 복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십일조 정신
신 14:22-29
원래 십일조 의무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신 그리스도로 인해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중세 유럽의 타락한 카톨릭에서 교회세 처럼 징수하다가 근대에 와서 미국 기독교에서 십일조가 다시 실행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 교회 역시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 성경에 기록된 십일조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말 십일조의 '조'는 '세금, 쌀' 등을 의미하는데, 과거 이스라엘 상황에서는 한 국가 그것도 신정 국가를 운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성격이 있었지만, 이제 신약 시대에서도 마치 반드시 내야 하는 세금처럼 교인들의 의무로 볼 수는 없다. 오늘 말씀을 잘 보면 원래 '나눔'의 의미가 우선인데, 현재 기독교의 십일조 정신 역시 기본적으로는 나눔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그 쓰여지는 내용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선 22절은 '매년 토지 소산'이라 기록하는데, 십일조는 '토지 소산'이 기본이다. 이와 더불어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릴 때 마다 가축의 처음 난 것으로 드렸는데, 레위기 27:32에는 가축의 십분의 일 역시 드렸다. 제사 후에는 제사장 몫도 있고 레위인들을 위한 것도 있지만 본래는 26절 말씀 처럼 '너와 네 권속' 즉 십일조를 내는 사람과 그 가족 그리고 각 성읍에 배정된 레위인들과 함께 즐기는 것 즉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하는 축제와 잔치가 그 목적이다. 여기에는 죄사함의 기쁨과 복주심에 대한 감사와 함께 나누는 즐거움이 포함되는데, 신 26:11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고 기록된다.
28절은 '매 삼년 끝'이라고 하는데 매년 소산의 십분의 일을 모아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 오지만, 삼년 마다 한 해의 끝 즉 니산월 정월 전 지금으로는 3월 정도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내어 저장한 후 레위인을 시작으로 객들과 고아들과 과부들에게 베푸라 명하신다. 따라서 이렇게 삼 년 째에는 그 해의 소산에 대한 십분의 일을 그들과 나누라 명하신다. 신 26:12에는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기록해서 이 셋째 해에 드리는 십일조가 '매년' 드리는 십일조를 대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년마다 하나님께 드리지만, 삼년 째에는 서로들간에 나누는 것인데, 물론 이것도 여호와 앞에서 하는 것이다.
이제 신약에 와서는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는데, 더이상 물질적인 성전이나 거기에 종사하는 이들도 없고 따라서 그에 필요한 자원 역시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 십일조가 제대로 시행될 때는 이것으로 레위 지파를 부양하는 것은 물론 구제 그리고 성전 운영 보수 수리까지 모두 해결이 가능했다. 십일조를 내고 싶었지만 낼 수 없었던 때도 있었는데, 성전이 파괴되었을 경우이다. 그래서 바벨론에게 함락당한 후 성전이 파괴되고 난 뒤에는 십일조가 끊어진다. 에스라가 성전을 재건하고 그 후 느헤미야가 성벽을 세운 후에야 비로소 십일조도 재개되었다 (느 12:44, 13:12). 이제 더 이상 물질적 성전이 없는 현재에는 유대인들 조차 십일조를 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현재에도 십일조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면 목회자들도 10 가정의 십일조로 생활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물질적으로 너무 큰 부담을 주지 않으신다. 수입이 많으면 십일조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십일조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십일조를 내야한다는 전제 아래). 이제 물질적 성전에서 모이지 않고 영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에서는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는 말씀을 따르면 된다.
주님, 과거 거룩한 십일조가 현재 교회의 타락과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이 시대 목회자들을 포함해서 교인들이 물질을 탐하고 추구하지 않도록 인도하소서. 헌금이나 십일조를 내기 전에 먼저 주님을 사랑하며 기뻐하는 것이 우선되도록 우리의 목적을 새롭게 하소서.
신명기 14:22-29
찬송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매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22~26)
모세는 신명기 12장에서도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재차 십일조를 드려야 함을 힘주어 강조하며,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전체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행위는 고대 근동의 보편화된 풍습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롯을 구출하고 나서 만난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자기 몫의 십분의 일을 드린 바 있고, 야곱 또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22-23)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십일조는 마땅히 드려야 할 것입니다. 타협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되 구체적 장소는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입니다. 곧 성막이 있는 중앙 성소입니다. 실로에 있었고, 뒤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며, 성전이 건축되고 난 이후는 성전이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으로 가져와서 드립니다. 드릴 것은 그 해에 얻은 토지 소산입니다. 땅을 매개로 열심히 일하여 얻게 된 모든 수확물의 십분의 일입니다. 농사 지어 얻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며, 또 키워낸 가축의 초태생을 드렸습니다.
한 해 동안 힘써 수고한 결과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까닭은, 그들이 발 디디고 살아가는 삶의 터전, 가나안이 하나님이 주인되시셔서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신 기업이기도 하거니와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셔서, 농사가 가능하도록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맞게 허락하시고 모든 환경을 주관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고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 열심히 수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풍성한 수확을 거둔 원인이 자기 스스로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단순히 신앙인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신앙고백의 차원, 곧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시며,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주님 앞에 감사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의 고백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시65:9-13)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매년 중앙성소에서 함께 십일조를 드림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 십분의 일도 하나님께 내놓지 못한다면 그 말과 고백은 한 푼 값어치도 되지 않는 빈말일 뿐입니다. 말이 아닌 실제 삶에서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의 내용을 담는 형식으로써 십일조를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전히 90%가 내 손에 있기는 하지만 십분의 일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에,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사람들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신실한 이들은 한결같이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시간과 날들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구별하여 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늘도 베푸시는 은총으로 살아간다고 감사합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도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게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십일조의 근본 정신은 의무가 아닌 감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꼭 십분의 일이어야 하냐, 십일조가 구약에 매인 규정이냐의 논쟁은 무의미합니다.
그동안 자신의 삶 가운데 함께하시고, 은혜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고백 없이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에 체면으로 헌금을 드리는 사람이라면, 그건 주님의 말씀대로 외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그 금액이 아무리 적을지라도 드리는 이의 감사한 마음을 담긴 헌금이라면 주님께서 기꺼이 받으십니다. 이 십일조 규정에는 먼 곳에 사는 이들을 배려하는 규정이 존재했습니다.
(24-26)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만약 중앙 성소에서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 모든 바칠 물건들을 가지고 거기까지 간다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러니 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에 맞춰 예외 규정을 둡니다. 일단 돈으로 바꿔서 중앙 성소에 온 다음, 주변에서 돈으로 제물을 사서 바치도록 허용한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것이 중요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까지도 통용되던 규례로,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셨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예외규정을 두면서까지 소산의 십일조를 바치는 일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것, 중앙 성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제사장들과 가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먹고 마시는 가운데 감사를 표현하는 일이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함께 모여 십일조를 드리며 함께 먹고 마시는 가운데 배워야 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수확의 기쁨 누리며, 여흥을 즐기기 위해서 모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삶의 흔적들을 돌아보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맞게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참여하는 가족 모두는 가장이 집전하는 제사에 관찰자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과 함께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언약의 당사자로 설 수 있었고, 자신 또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동일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자녀에게 내가 믿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나와 같은 믿음을 갖게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문 속에서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살아갈 터전을 주시고, 살아갈 힘과 용기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감사로 고백하며 그 감사를 실천적으로 표현할 때, 자녀도 참여시켜 같은 고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직접 농사를 짓지 않지만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 있음을 감사로 표현하며, 이를 담는 가정 나름의 전례(litergy)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동일하게 고백하는 가정이 되고, 대를 이어서도 같은 고백이 이어지게 됩니다. 부모가 먼저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를 감사로 표현하는 삶을 살아갈 때, 자녀들이 보고, 내면화하여 스스로도 능동적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27-29)
모세는 매년 하나님께 드리며, 잔치를 여는 정규적인 십일조 외에 3년마다 한 번씩 십일조를 더 드리도록 말합니다. 이렇게 드린 십일조는 중앙성소까지 가지고 갈 것이 아니고, 거주지에서 드리는 것으로, 기업을 받지 못했던 레위인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여 도우라고 말씀하셨던 나그네와 고아, 과부와 같은 이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흩어져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재산도 없었고, 세속적 직업도 갖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이 레위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것을 나눠주어야 했습니다. 민수기 18장 21절부터 24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매년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들의 몫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중앙성소로 가져온 십일조 모두를 먹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을 레위인들이 받았고, 레위인은 이중 십분의 일을 다시 하나님께 바쳐 제사장들이 받도록 했습니다.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힘들게 수고하여 얻은 소산의 십분의 일을 이미 구별했는데, 여기에서 십분의 일을 더 드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잠언 11장 24절,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자신의 것을 과감하게 나눠도 하나님께서 채우신다는 믿음이 있는 이들이 행할 수 있는 신앙 행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십일조에 담아야 하는 우리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렇게 드린 헌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 말씀해줍니다. 이 정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손발 노릇하는 교회를 통해 우리 주변을 맑히고 밝히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답할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 것이라 여기고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혹 내가 아닌지, 하나님께서 주변에 두신 어려운 이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는 데 지나치게 무관심한 사람이 내가 아닌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물질을 바라보는 눈을 점검하고, 무엇보다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돌보라고 두신 어려운 이들을 위해 내 것을 구별하는 결단도 함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다라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인생을 산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삶, 내 것을 나누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내 필요를 채우시고, 범사에 하는 모든 일들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긍휼히 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감사로 주어진 시간을 채워가며, 내 것을 드려 기쁨 누리는 복된 인생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두 발 디디고 살아갈 터전을 주시고, 살아갈 힘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늘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에 감사하는 일상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와 하나님께 돌려야 할 물질을 기꺼이 드리는 인생 살게 하시고, 우리가 돌보아야 할 이웃에 대한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늘 주변을 살펴 우리가 가진 것을 신실하게 흘려보내는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구원의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먼저 이 땅 가운데 오셨고,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를 품으셨음을 기억하여, 우리 또한 주님 따르는 인생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드리며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23)
2. 중앙성소에서 먼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허용되었던 십일조의 예외규정은 무엇이었습니까? (25-26) 이것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3.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근본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 3년마다 따로 모은 십일조의 용도는 무엇이었습니까? (29) 이를 나에게 적용하면 나는 내가 가진 물질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헌법 제 2조-십일조
신 14:22-29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마땅히(반드시)'십일조를 하라고 명령하셨다. 예배가 하나님의 주재권과 통치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라면, 그 '믿음의 실천과 표현'은 물질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비유를 통해, 돈이나 소유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다. 재물과 소유에 대한 태도가 곧 나의 '신앙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모든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우리는 이것을 잠시 맡은 청지기에 불과하고,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결산한다.(신명기 10:14, 대상 29:11) 예배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과 통치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인 것처럼, 십일조는 만물과 내 인생과 내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신앙 표현'이다. 십일조에 대한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1. 십일조는 (물질)이 아니라 (관계)이다.(23절)
십일조는 결코 돈이나 물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와 영적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명하시면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십일조를 명하시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거다. 성경은 '물질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사탄은 성도들이 '물질 그 자체만 바라보게' 만든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유지를 위한 영적 안전 벨트'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영적 사인'과 같다. 십일조는 모든 걸 주시는 하나님만 섬기고 예배하는 삶을 살 때만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영적 신호등'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복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묶여 있으면 계산이 복잡해지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걸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접근하면 십일조는 감사가 되고 감동이 된다. 십일조는 복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 관계다. 십일조는 종교적인 '신앙 행위'가 아니다. 나를 자녀삼아주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때문에 감사하는 '신앙 표현'이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빼앗기는 것이거나, 짜증나는 종교 세금 같은 것이 아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베풀어주신 넘치는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일조를 억지로 인색하게 드리면 안 되는 거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풍성하게 드려야 한다.(고후 9:7) 십일조를 단지 내 소득의 일부를 드리는 물질로 생각하지 말라. 십일조는 나를 책임지시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임을 증명하는 '영적 증명서'다. 하나님과 관계를 더 깊게 하라.
2.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다.(23, 28절)
하나님은 왜 십분의 일을 "계산해"드리라고 했을까? '계산'이 바로 핵심이다. 십일조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금액을 구체적으로 계산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다. 십일조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 사랑이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 표현이다.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는 찬양처럼, 하나님이 주신 복을 계산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졌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십일조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받아 챙기는 분이 아니다. 드린 이를 위한 거다. 십일조는 우리 것을 착취하고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29절) 십일조는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눅 11:42)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신다.(말 3:8-10) 십일조는 두 가지 사용처로 구분된다. 하나는 본문에서 말한 대로 '감사 축제와 구제용'이다. 그리고 중요한 다른 용도는 '성전 유지용'이다.(민 18:21)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주라고 한 이유는 회막, 즉 성전유지를 위한 것이다. 신약 시대로 말하면 십일조는 교회 공동체를 섬기고 운영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도다. 그래야 교회 공동체가 유지되고 성도를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십일조는 '드림'에 대한 게 아니라 우리가 '받음과 누림'에 대한 말씀이다. 혹 오늘 말씀 듣고 불편한 마음이 든다면 십자가를 생각하라. 하나님은 나를 위해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주셨다. 이런 하나님의 큰 은혜와 위대한 사랑을 생각하라.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져 십일조를 통한 새로운 축복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라.
십일조 규례
신 14:22-29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십일조와 관련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장단점과 방법론은 다양해서 굳이 다룰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정직한 신앙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애매모호합니다. 누군가가 이 기준을 정해준다고 해서 그대로 지킬 것도 아니지만, 기준이 없으니 뭔가 양심에 걸리는 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습니다. 각 교단의 헌장은 십일조를 의무로 규정하고 있고, 서점에 있는 책들은 부자가 되는 비결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말고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 정신은 무엇일까요?
십일조 제도는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주전 14세기에 십일조를 했던 기록이 있는데, 신에게 바치는 십일조와 국가에 내는 세금의 형태로서의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십일조가 중요한 이유는 크게 3가지입니다. 레위인의 생활 유지, 가난한 자의 구제, 성전의 유지 보수입니다.
창세기에는 십일조 이야기가 2번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창 14:20). 이것은 전리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 다른 본문은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 만약 다시 돌아오게 되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한 부분(창 28:22)입니다. 창세기의 십일조 이야기는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가 한데 어우러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다음 십일조가 나오는 곳이 레위기와 민수기입니다. 레위기는 땅과 가축의 소산 중에서 십일조를 바치라고 말씀합니다(레 27:30~34).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로서 제사장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또 민수기 18장 21~24절에는 십일조를 성막의 직무를 담당하는 레위인들에게 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레위인들이 얻는 십일조에서 다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이 십일조는 제사장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레위기와 민수기의 십일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기업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 수단이 되었습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십일조는 어떤 기능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신명기는 모든 소산물의 십일조를 “중앙 성소”로 가져갈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의 십일조는 창세기, 레위기, 민수기의 십일조와 성격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중앙 성소(성전)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십일조가 일종의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행위로 나타납니다.
종합하면, 십일조는 나의 삶이 주님 것이라는 신앙고백이자, 감사의 표시이자, 교회(성전)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것이자, 예배 행위로 요약됩니다. 조금 더 넓게 표현하면, 십일조 정신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고, 어려운 이웃과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든든히 서기 위함이며, 주의 사역에 전념하는 사람들(사역자)의 생계를 유지하게 해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는 복된 일임을 알게 됩니다.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남들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내가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같은 헌금을 드릴 때마다 고민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의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은 적어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십일조를 어떤 방법으로 혹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부끄럼 없는 모습으로 하십시오. 주께서 더 큰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십일조가 폐지된 헌금이냐?
신 14:22-29
부제:십일조는 복받기 위해 드리는 헌금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돈' 문제입니다.
물론 '돈' 문제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가정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유독 교회에서의 '돈' 문제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함께 입에 오르내리는 소재가 됩니다. 자료가 조금 길어서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이글을 접하신 분들은 바른신앙을 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이해가 안되시면 두번 보셔도 됩니다.
성도들이 헌금(金)과 헌물(物)과 헌시(時)등 진정한 의미를 모르니 돈 이야기로 보게됩니다. 우리 '예수가좋다오' 카페에 어떤분이 "일맥님은 복음은 신약인데 십일조는 구약시대"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성도들이 인터넷에서 잘못된 헌금사상을 받아 드리면서 '신약에는 십일조를 하지말아야 되느니' 하면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바로잡기를 원하고 또한 하나님 섬기는 귀한 일을 버리게 되는 것이 안타까운 나머지 글을 쓰기에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가 '돈'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비방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헌금이 아니라 교회의 부(富)를 축적하고, 비정상적으로 교회건축을 강행하며, 목사를 분에 넘치게 대우하고, 기도원이나 수양관, 묘지 조성 등을 포함한 육신적인 사업의 확장 등을 위해 헌금을 사용하려고 강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헌금에 대해서 분명한 원칙을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드려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드리고 사용되어야 하는가까지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고전 16:1, 고후 8:8, 9:7).
그럼에도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한 채 나눔을 베풀지 않고서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에게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돈'을 모으기에 급급한 것으로 비치게 됩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려서 십일조는 복음 전파를 위해 일하는 분들의 인건비와 생활비로 사용되는 물질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렇지는 않지만 영양력을 끼치는 몇몇 교회들이 물질을 잘못 사용해서 사회가 바라보기에 좋지않게 보인다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정착이 안되는 이유와 교회 다니기 싫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중에 제일 많은 답변이 돈이었습니다.
① 교회가면 돈 이야기를 많이 해서 싫다. ② 교회가면 돈 내라고 해서 싫다. ③ 교회 가면 헌금바구니 돌려서 싫다. ④ 교회가면 돈을 강제로 거두는 것 같다. ⑤ 교회 가면 돈 많이 버는 것이 복이라고 해서 싫다. ⑥ 교회 가면 목사가 돈만 밝혀서 싫다. ⑥ 교회 가면 돈 없는 사람은 사람 취급하지 않아서 싫다. ⑦ 교회 가면서 좋은 옷과 치장을 안하면 사람 취급도 안한다.
교회 가기 싫은 이유중 80%가 "돈 때문에 교회가는 것이 싫다"라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왜 헌금을 돈과 연관을 지을까요? 어느 때 부터인가 교회와 돈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고 세상에서 교회를 보는 눈이 날카로워져서인지 아니면 교회가 돈에 대해서 자유하지 못해서인지 혹자는 광란적 종교집단으로 교회가 전락했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급부적으로 한쪽에서는 "우리 교회는 돈 이야기 하지 않는다. 헌금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세상이 좋게 이해할 것이다'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돈 이야기를 하는 것도 문제고, 돈 이야기를 안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만약에 "돈 이야기를 하는 것과 안 하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성경적이냐?" 하고 이야기한다면 '둘 다 성경적입니다.' 돈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한편으로는 성경때문에 돈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이 없고 연약한 자 때문에 이럴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 이야기를 하라'고 합니다. 상당 부분이 돈 이야기와 물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자기의 가진것 중에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이야기 하는 것은 결코 돈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은 다르다'고 우리가 오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히 폐하시고 새로운 법을 만드셨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명한 십일조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약속한 법입니다. 말씀을 지키면 복을 주고 어기면 징계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면 땅에 복을 받고 말씀을 믿으면 현세와 내세에 구원을 받습니다. 구약에는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믿고 구원받았고 신약에는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마23:23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형식적 신앙을 질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여야 하리라"고 하신 것은 십일조 속에 '의와 신'이라고 하는 진정한 신앙의 본질이 담겨야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십일조에 대한 규정 3가지를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 십일조를 드리라고 했을까? 민수기18장21절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먼저 구약의 십일조를 알아보면 좋겠지요. 구약의 십일조는 율법에 묶여 있어서 어기면 죽음입니다.
1.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를 드리라.
레위인은 제사가 전업인 지파입니다.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습니다. 제사에 집중하기 위해서 나머지 지파가 그 레위인들의 생활을 책임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레위인들의 생활비가 되고 생업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십일조는 목사나 교회에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들의 몫입니다. 복음을 위해 훈련받고 예배와 설교와 복음 전파에 전념하는 자들을 위해 '십일조를 하라' 는 것입니다.
2.경배와 축제를 위한 축제 헌금
<신14:22절-23절>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6절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예배를 위해서 십일조가 필요합니다. 예배를 위해서 물질이 필요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십일조와 예물을 가지고서 가족과 동료와 함께 먹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동체의 경배와 축제를 위해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3. 나눔을 위한 십일조
<신14:28-29 >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드리고 그 십일조가 없는 사람을 위해 쓰여지게 만들어라.하십니다.
그러면 십일조는 의무입니까? 아니면 선택사항입니까? 당연히 성도의 의무입니다. 십일조를 드렸다고 해서 복 받고 안 드렸다고 해서 저주 받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금을 냈다고 복 받습니까?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한 나라가 유지가 되며 바로 설 수가 있습니까? 아마도 나라 자체에 부도가 날 것입니다.그러므로 세금은 국민의 3대 의무중 하나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십일조는 당연한 성도의 의무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라면 십일조는 반드시 드리는것이 마땅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십일조가 오해받는 이유는 '십일조를 내면 복 받는다' 이렇게만 연결시켜서 그렇습니다. 십일조는 복 받기 위해서 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나누는 자를 위해서, 경배와 축제를 위해서, 나눔을 위해서 십일조를 내라는 것입니다.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품위 유지비 입니다. 아직 성도도 아니고 물질이 아까운 사람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내는 것을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하셨기때문입니다.
십일조는 여호와 신앙공동체를 지키는 최소한의 비용이었습니다. 십일조는 복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것의 十/1을 드리고 十/9로 생활해도 넉넉할만큼 복을 받은 사람들이 내는 것입니다. 가난하여 먹을 것도 없는데 십일조를 내라면 강탈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물론 가난한 중에서도 믿음으로 작은 것을 나누면 더 하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복 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못 나눈다면 지극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이들에게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 위해 드리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그리스도인 다운 삶의 품위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비용입니다. 예배를 위해 모일 때 사용하는 품위, 나보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나눔'이라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드리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신14: 29절 하반 절> 에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고 말씀합니다. 십일조는 의무금이기에 복과 관련된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은 그 의무를 행하는 자에게 "하늘의 복을 너에게 줄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경험의 법칙에 의하면 '십일조를 내서 손해 본 사람은 없더라'하는 것입니다. 경험의 법칙입니다.
부자의 기준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10년 전에는 현금 10억 이상 갖고 있으면 부자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현금 30억 이상을 가지고 있어야 부자입니다. 부자는 상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말하는 현세의 복은 두가지인데 ①만족이고 ②풀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면 첫번째 나타나는 귀한 은혜가 만족입니다. 정신병중에 하나가 폭식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식증도 정신병이고 폭식증도 정신병입니다. 폭식증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인 정신병자가 참 많이 있습니다. 벌어도 벌어도 만족을 모르는 상태를 정신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배부름을 모르는 상태도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면에서 록펠러는 정신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기독교이고 십일조를 낸 사람이지만 그가 뭐라고 했나요. "지금의 재산에 만족하십니까?" 라고 기자가 물어보자 "조금 더" 라고 말했습니다. 만족을 모르면 사실은 정신병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림으로 내 삶에 부족을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져서 부족을 못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부족함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꼭 많이 가져야만 부족함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그 하고 싶은 것이 내 손에 '척''척' 잡히는 것이 있어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십일조를 드림으로 모자란 적이 없는 만족함의 경험을 하시길 바랍니다. "네가 지금 필요한 게 있니?" 하고 물으시며 "필요한 것 그때 그때 공급해줄께" 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그런 체험들이야말로 십일조 드리는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두번째는 풀림의 복입니다. 29 하반절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의 특징은 잘 풀립니다. 성적이 안 나오는 아이들의 특징이 공부를 했는데도 안 풀립니다. 그게 비극입니다. 양쪽이 다 똑같이 공부를 합니다. 영어공부도 하고,수학공부도 하고 기타 공부도 합니다. 그런데 시험시간만 되면 한 아이는 무언가에 막혀서 안 풀리고, 한 아이는 무슨 문제든 술술 풀려서 전교 1등을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삶의 현장에 들어가 있는데 어떤 인생은 꼬이기만 합니다. 예를들어 10억 장사하는 사람은 10억으로 꼬이고 100억 장사하는 사람은 100억대로 꼬입니다. 그래서 재벌들도 힘들어합니다. 세계경제가 위기라고 하니까 한 해 수출무역량이 3조-4조가 왔다 갔다 하는 회사들조차 힘들다고 합니다. 말이 됩니까? 수 조를 가지고 있는 기업들이 힘들다고 하니 말입니다.
반면에 100만원 밖에는 무역이 안되는데도 어떤 분들은 아쉬울 게 없다고 합니다. 절대적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계획과 우리 인생의 앞길이 물량적으로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라 ' 인생의 계획이 있느냐, 목표가 있느냐, 자기 앞길에 미래가 있느냐. 또한 그것이 생각과 계획대로 풀리느냐 안 풀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범사가 잘 될 것이다" 하시는 이 말씀이 복 중의 복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 그대로 주시는 만족의 법칙이 있습니다.
4. 십일조의 제정과 종류
십일조의 제정을 보면 레위기19장에서 율법이 제정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하에서 십일조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율법 하의 십일조를 살펴보면, 십일조의 종류가 단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드리는 시기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신명기14장 22절에는 "해마다 드리는 십일조"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삼년 끝에 드리는 십일조도 있는데(신 14:28; 26:12), 이 시기를 어기는 것은 죄로 여겨졌습니다.(암 4:4-5). 이외에도 성경은 "십일조들"이라고 기록함으로써(대하 13:12, 느 12:44) 다양한 형태의 십일조가 드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십일조로 드리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됩니다. 곡식, 포도주, 기름, 소떼와 양떼의 첫태생들, 거룩한 물건(신 14:23, 대하 3:16)과 경작하는 모든 성읍들의 십일조(느 10:37), 소산의 모든 것의 십일조(신 26:12, 대하 31:5), 자기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눅 18:12) 등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복 받는 비결이 자세히 나와있는데 그것은 첫째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다음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5장16절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하나님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 그를 인정하는 십일조 입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강제 조항이었지만, 신약의 십일조는 믿음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의무를 감당하였는데 감당한 만큼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상급으로 넘치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를 들라하면 우상숭배와 십의 일의 헌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서 고르반 하면 부모를 섬기지 않아도 된다는 법도 있었습니다. 마가복음7장11절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드려야 했던 십일조를 우상에게 바치게 하였습니다. 누구나 십의 일조는 다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든지 마귀에게 빼앗기든지 병원비로 쓰든지 등등 전대(錢帶)가 구멍이 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왕 때에 잠깐 회복되긴 했어도(대하 31:5,6,12),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십일조의 축복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모두 망하고 난 후, 그들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전혀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지에서 귀향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를 보면 포로에서 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드리는 것을 보게됩니다.(느 10:37,38, 12:44, 13:5,12). 그러나 이 역시 잠시 동안의 회복이었을 뿐입니다. 십일조는 물질만 십일조가 아니고 시간과 정성과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5. 어떻게 써야 물질을 잘 쓰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써야 합니다.
잠언3 :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여호와를 공경하기 위해 드린 처음 익은 열매가 십일조입니다. 공경하기 위해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2)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에 써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3) 나라에 정당한 세금을 내는 일에 써야 합니다.
로마서13:7절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4) 정당한 품삯을 주는 일에 써야 합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 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5) 사랑의 빚을 갚는 일에 써야 합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잠언 22:7)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6) 궁핍한 자를 위해 구제하는 일에 써야 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 25)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7) 가족을 돌보는 일에 써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5:8)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라기의 말씀을 상기하여야 합니다.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혼을 선포하는 포고문입니다.
말라기 3:8,10 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의 언약을 상기 시키시고,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말씀하시는지 정확히 알아야 힙니다.
그 이유는 말라기 1:12-13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주께로부터 모든 것이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복이 십일조와 연관 있음을 다시 한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려면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을 지켜서 땅은 원주인에게 돌리고, 노비는 자유를 주고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물질을 내야하는 것이 진정한 십일조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강단에서 그릇된 목적을 가지고 말라기를 인용하면서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강조하는 목회자들을 보게됩니다.
또한 교인들도 목회자의 말에 "아멘"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열심히 십일조를 바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십일조를 교회의 비성경적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잘못 강요하는 배부른 교회와 목회자들이 문제이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며 바르게 배워서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부족하면 목회자는 하나님께 간청하셔서 성도들을 복주셔서 채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남으면 다른 곳에 사용하지 말고 십일조가 부족하여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목회자에게 보내야 합니다.
신약 시대에는 "십일조가 없다" 하는 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교회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공격입니다.
신약 성경(사복음서)에서는 십일조는 당연히 하던 것이기에 굳이 강조를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밥먹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밥먹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미 종교화되어 버린 이스라엘의 가치없는 십일조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극심하게 비판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마 23:23, 눅 11:42).
또한 바리새인의 기도(눅 18:12)에서 보았듯이 이미 이때에는 십일조가 종교화, 형식화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곳은 주 너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정하실 곳 (신 14:23, 24-26)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고 제사장들의 예물들을 두던 곳에 두고 관리했기에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느 13:5, 말 3:10). 십일조의 용도와 목적은 레위인들의 몫이요 유업이었으며(신 14:27, 느 12:14), 성문 안에 있는 타국인과 아비 없는 자와 과부들의 양식이었습니다.(신 14:29).
성경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는 십일조를 드렸으며(느 10:39, 신 12:6,11), 여기에는 레위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레위인들은 자신들의 몫이나 유업이 없었으나(신 14:29) 그들이 받은 이스라엘의 십일조들 가운데서, 즉 십일조 중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느 10:38, 민 18:24,26,28). 이것은 오늘날 목사님들이나 교회에서 일하는 자들과 복음전하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야 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목사님들이 잘못된 권위를 주장하면서도 정작 헌금과 십일조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 일 것입니다.
6. 과연 십일조는 율법시대에만 드리는 것인가?
십일조는 율법 이전과 율법 아래에서, 그리고 율법 이후에도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율법 이전에 믿음으로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렸으며(창 14:20),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레위인들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와서 율법에 따라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들도 아브라함 안에서 십일조를 바친 것이라도 말씀합니다.(레 27:30-34, 히 7:5-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레위는 아직 조상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 7:5-10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십일조는 분명히 율법 이전과 율법 이후가 다릅니다.
율법 하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복받기 위해서 반드시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에 재앙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율법 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드린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 전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십일조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원함과 번성케 하심의 결과로 드려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온전히 주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물론 교회 재정과 교회의 운영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운영하는 것이지 단지 돈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드리고 성경대로 사용하며 그리스도인이 믿음이 있다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믿는다면 아브라함처럼 행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먼저 점검해 봐야 하는 것은, 십일조를 드린다 안 드린다의 문제에 앞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렸는가를 분명히 점검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헌신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많은 돈을 헌금하고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면 무엇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돈을 원하시거나, 우리의 십일조 자체만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또한 무슨 필요한 것이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 되는 것도 아니시니, 이는 그분이 친히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심이라.(행 17:25). 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헌신한 후에, 그 헌신의 첫 출발로써 재물에 대한 주권 행사를 모두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활을 위해서 다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번성케 하신 대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의 원칙은 '번성케 하신 대로 자원하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고전 16:2, 고후 9:7).
그리고 신약 성경의 원칙에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원칙(고후 9:6, 갈 6:7)이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믿지 않고 무지한 사람들이 "십일조의 근거가 무엇이며, 왜 십분의 일을 꼭 드려야 하느냐"는 등 뒷말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대로 드려야 합니다.
그 출발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십일조"인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단지 돈으로만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시간, 노력, 돈, 생활 등등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십일조와의 차이입니다.
말씀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현세와 내세에 구원을 받고 말씀을 지키면 현세에서 복을 받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나 헌금이 부담되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십일조 안했다고 구원과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만 生과 死는 관계가 없고 禍福만 관계됩니다.
위에도 말했지만 이세상 사람은 누구나 십일조를 합니다.
하나님께 하셔서 현세와 내세의 상을 받든지 아니면 마귀에게 빼앗기든지 그것을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대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시니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끝맺습니다.
아무쪼록 성경을 바로 배우고 성경대로 믿으시고 믿음대로 행하셔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범사의 복을 누리실 수 있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일조와 개인신앙의 관계
신 14:22-29 / 차용철 목사
십일조는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드리는 헌물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규례를 내셨던 이유는 신앙공동체의 성전제도와 제사제도를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신14:22-29). 그렇지만 십일조를 드리는 개인에 대해서는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곧 십일조 제도를 주신 것은 신앙인들에게 무엇을 빼앗거나 얽어매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함이다.
첫째,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기 위함이다.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에덴동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담에게 각종 나무 실과는 임의로 먹을 수 있게 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 나무 실과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못하게 하셨다 (창2:16-17).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동산 어디에 있든지 동산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알게 하고 동산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허락한 모든 실과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으니 온 세계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시편24:1에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고 했다. 십일조는 '10'이라는 소득이 모두 하나님 것이고 하나님이 주셨음을 인정하고 그 예표로 '1'을 드리는 것이다. 십일조는 현재에 얻은 모든 소득을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정하고 소득을 얻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이다.
둘째,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십일조 제도를 주신 것은 모든 소득을 하나님이 주셨음을 감사하는 동시에 미래에도 주실 것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미래에 복 주실 것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그래서 십일조 제도와 관련하여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 자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말라기3:10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다.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주신다'는 말은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을 정도로 주신다는 의미이다. 이어지는 11~12절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주신다는 의미이다 (신28:1-13, 고후9:7-9). 야곱이 어렸을 때 아버지와 형의 낯을 피해 아버지집을 떠날 때 하나님이 꿈에서 계시를 주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야곱은 잠에서 깬 다음 하나님이 정말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이 곳에 제단을 쌓아 성전이 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창28:21-22). 하나님은 야곱을 외삼촌 댁에 무사히 도착하게 하고 그 곳에서 사는 동안에 거부가 되게 하여 다시 돌아오게 했다.
셋째, 사역에 관심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신명기14:22-29에 보면 십일조 규례가 설명되어 있다. 당시 십일조의 실제적 목적과 관련된 종류는 3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였고 (22절), 둘째는 감사제를 위한 십일조였고 (23-27절), 셋째는 구제를 위한 십일조였다 (28-29절). 매년 소득의 십분의 일을 떼어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로 드렸고 또 십분의 일을 떼어 3년을 주기로 해서 1-2년째의 것은 감사제를 위한 십일조를 드렸고 3년째의 것은 구제를 위한 십일조로 드렸던 것이다.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활비를 위해 사용되었다. 감사제를 위한 십일조는 하나님께 감사제로 드리고 음식으로 가족과 레위인과 함께 먹는데 사용하게 했다. 구제를 위한 십일조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과 레위인과 함께 배부르게 먹는데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 외에도 감사제를 위한 십일조와 구제를 위한 십일조에서도 레위인과 함께 먹도록 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성전제사가 중요하고 그 사역을 위해 레위인들을 봉사하게 했으니 그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이는 성전제사 사역이 레위인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고 그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공유하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십일조도 교회 유지와 사역자 생활비와 예배와 구제와 전도와 선교 등의 사역을 위해 사용된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것이다.
넷째,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신명기14:22-29에서 세 종류의 십일조를 말하면서 구제를 위한 십일조가 있다 (28-29절). 그것은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 외에 또 십일조를 드려 1-2년째 것은 감사제를 위해 사용하고 3년 째의 것은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극빈자나 고아나 과부나 객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긍휼을 베풀게 한 것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라는 의미가 있다. 신약의 초대교회에서는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헌납하여 그것으로 과부나 고아나 객을 구제하였다 (행2:45, 4:34-35). 오늘날도 십일조는 구제 사역에 사용된다. 십일조를 하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가지고 공동체의 일원들이 균등한 은혜를 받게 하는 심정으로 드리는 것이다.
십일조를 하는 사람은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감사하는 동시에 미래를 의탁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역을 생각하여 사역자의 노고에 동참하는 것이다. 또한 신앙 공동체의 일원을 지체로 여기고 물질적으로 당하는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물질을 드리느냐 마느냐 하는 규례 문제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고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받는 비결이다. 결국 십일조는 십일조를 드리는 자신의 신앙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헌신이다.
풍요한 삶과 십일조
신 14:22-29; 마태 6:19-20
오늘은 우리교회 올해 목회중점 중의 하나인 '올바른 십일조 생활'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유학을 하면서 한인 연합감리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을 때 교인들의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니까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할머니는 "한국에 가보니 교인들이 십일조라는 걸 하더라. 십일조는 광신도(狂信徒)들이나 하는 것이지. 어떻게 자기가 번 돈에서 십분의 일이나 내는가"라고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한국교인들은 십일조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또 온전하게 십일조를 못 드리면 마음이 찜찜해 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데, 거기 교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뭐가 뭔지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무 얘기를 하지 않고, 온전히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물론, 절기헌금도 최선을 다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보고 따라주는 교인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차츰 교인들이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교회가 점점 든든해지게 되었습니다.
1. 십일조란 무엇입니까?
십일조란 신자들이 자신의 수입의 1/10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하나님)의 것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겐 이 청지기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삶의 모습도 다르고, 그 결과는 너무나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청지기로서의 자세가 확립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시라도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겸손히 살 수 있고, 또 이렇게 돼야 복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에 빠져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는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이 온전히 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책을 여러 권 사 보았습니다. 그 중에 조용기 목사님이 쓴『목사님, 십일조는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라는 책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십일조의 의미를 두 가지로 요약해 보면 이런 것입니다.
첫째,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7장 30절에서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聖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수고의 대가로 어떤 소유(물질)를 얻었다고 할 때 그 중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이 중에서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니 우리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정신을 가질 때 우리는 십일조를 온전히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믿음과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금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인간이 구별됨을 보여주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고 범죄 하여 인류는 사망과 저주의 사슬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가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것처럼, 십일조도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 신자가 전체 인구의 1/4이라고 하지만 그 중 절반 이상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일인 줄도 모른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 자신은 주님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존재이기에 나의 몸과 마음과 가진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하루를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고, 하루 24시간 중에서도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고, 또 기도하는데 바쳐야 합니다. 우리 생활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2. 십일조를 어떤 자세로 드려야 합니까?
① 소득 중에서 맨 먼저 정성스럽게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옛날 임금님께 드리는 진상품은 각 지방에서 제일 좋은 것을 우선적으로 바쳤습니다. 어른에게 드리는 것도 가장 좋은 것을 구별해 놓았다가 드리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 십일조를 정성스럽게 드리는 게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월급 생활자는 매달 월급을 받는 즉시 한 달 동안 직장 생활을 잘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맨 먼저 떼어두었다가 드려야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매월 수익금(收益金)에서 구별하여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자기가 다 쓰고 남은 것을 드리려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수 없습니다.
② 감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지난 번, 크리스마스와 신년 카드를 저는 꽤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글씨를 쓰지 않고 그냥 인쇄해서 보낸 카드에는 답장을 하지 않고, 친필로 써서 보낸 사람에게는 답장을 다 하려고 애썼습니다. 감사와 정성이 들어있지 않은 선물은 선물 받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받으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받으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마음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이런 마음이 담겨있는 십일조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③ 하늘에 보물을 쌓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19장부터 20절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동록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19절 말씀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는 말씀입니다. 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1:21). 바울도 욥처럼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딤전 6:7-8)라고 했습니다.
20절에 보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선을 행하기 위해 자신들의 재물을 사용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신자의 하늘 구좌에 기록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개척교회를 세우기 위해, 선교사를 후원하기 위해,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돕기 위해, 방송 선교를 위해,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물질을 투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④ 함께 나누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에 관한 구약성경의 전승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 법전의 십일조인데 그것은 세금으로서 규정된 것입니다. 땅에서 나는 곡식이든,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든, 땅에서 난 것에서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즉 십분의 일 세를 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신명기 법전의 십일조입니다. 이것은 세금의 성격보다는 함께 나누는 '잔치'의 성격이 강하게 반영되어있습니다. 본문 신명기 14:28-29에 보면,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성도들의 십일조를 교회 운영에만 사용할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지(福祉)를 향상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나누는 수단으로 사용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십일조는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를 가난한 성도들의 생계를 보조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샬롬 센타를 운영하고, 병원선교를 하고, 양로원과 모자원을 운영하고, 학자금이 없는 학생들에게 학비를 보조하는 일 등에 널리 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00주년 기념교회를 이번에 양양에 개척·설립하고, 많은 교회와 교역자를 돕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협력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일 등에 쓰고 있습니다. 즉 십일조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며, 죄로 오염된 문화를 변혁시키는 일에,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높이 드러나는 일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십일조를 드릴 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간다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러나온 나눔의 잔치를 위해서 여러분은 십일조를 온전히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눔의 정신으로 드리는 사람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3. 십일조를 온전히 드릴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① 쌓을 곳이 없게 복을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오래 전에 이 말라기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들이 이 본문을 십일조를 하라는 말을 할 때 인용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는데, 신학적으로 잘못된 해석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성경과 신학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람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요, 약속의 말씀이기에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저에게 그런 소리를 했던 그분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가 보았더니 분위기가 썰렁해 보였습니다. 무언가 풍요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풍요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온전한 십일조를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십시오. 풍요한 생활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주님의 집 창고에 드려 양식이 있게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쌓을 곳이 없도록 하나님이 부어주신다는 순수한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에게 영적으로·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이 보호하신다고 했습니다.
말라기 3장 11-12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해로운 벌레)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청지기들에게 그들의 농작물을 해치고자하는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황충'이란 들이나 밭이나, 숲에서 곡식을 먹어 치우는 메뚜기나, 농작물을 부패시키는 곰팡이에 대한 총괄적인 용어입니다. 좀 더 확장시켜 보면, 황충은 사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메뚜기는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귀신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임금은 히브리 음으로 아바돈(Abbadon)이요, 헬라 음으로는 아볼루온(Apollyon)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파괴자'입니다(계 9:1-11).
12절 뒷부분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서 이 약속의 말씀―하나님께서 모든 파괴자(악한 세력)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신다―을 믿으십시오.
미국의 존 필립스라는 사람이 지난 200년 동안 십일조 생활을 잘하며 하나님을 잘 섬긴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을 무작위로 골라 통계를 내서 그 중 대표적인 예를 발표하였습니다. 그의 발표에 의하면, 교회를 망치고 주의 종을 괴롭히고 자신도 교회를 떠났던 일본계 미국인인 마스시꼬의 가문에서는 거지가 306명, 강도가 63명, 살인자가 7명, 매음자가 26명, 저능아가 203명, 하급관리가 73명 나왔으며 그 외에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의 가문에서는 목사가 203명, 대학 총장이 13명, 교수가 108명, 부통령이 1명, 전권대사가 1명, 국회의원이 21명, 기자가 81명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4. 물질의 십일조와 함께 우리는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마태 23:23을 새번역으로 읽어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했습니다. 물질의 십일조는 드릴 줄 알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 또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실함을 가지고 사는 일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힐책을 듣습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하나님의 깊고 넓으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위해 사십시오. 더욱 굳센 믿음을 가지고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