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의 담론
최 병 창
길 없는 길은 이미 길이 아니다
아니다 길 없는 길도
지나다 보면 새로운 길이 된다
보이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다
아니다
간극이 없다고 어찌 길이 아니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차이란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의 차이일 뿐
시야의 공식은 똑같은 것이다
살다 보면 없는 길들이 자꾸만 열린다
길은 누구에게도 평등하지만
부유하게 치장한 길이나
허름하게 차려입은 길에서도
매무새를 바로 하지 않고는
함부로 길을 건널 수가 없다
길 없는 길에
하얀 눈이 푹푹 내려 쌓인다
원고지에 하나의
빈틈도 없이 가득가득 채워지도록
그때서야
비어있던 원고지가
보이지 않던 길을 열었다
맨바닥에서 맨바닥으로
길을 내는 무수한 길들에게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도 있다며
하얗게
내려 쌓인 눈길을 가리켜준다
아직도
그 길을 가기엔
마냥 서툴기만 한 걸음걸이라며.
< 2023.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