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한 글>
대추나무 가시
김홍은
비안개 낀 산기슭 새벽길은 여느 때 보다 상쾌하다. 좌구산자락 모롱이를 지나면 삼기저수지의 잔잔한 푸른 물결위로, 간간이 날아드는 백로의 날개짓은 바라보는 마음마저 평화롭다.
좌구산(座龜山)은 거북이가 앉아있는 형상이다. 풍수적으로 장수를 상징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나는 아늑한 이 골짜기에 있는 대추나무 밭을 찾아가는 날은 마냥 즐겁다.
비가 온 끝이라 짙은 안개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은 녹색치마자락을 여미며 살포시 방문을 열고 나오는 여인처럼 아름답다. 대추나무 밭에 들어서자 인기척에 놀라 선잠을 자던 고란이가 쏜살 같이 뛰어 달아난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옷을 갈아입고, 맥고자를 눌러쓰고 밭고랑에 엎드려 풀을 벤다. 사각사각 풀이 베어지는 소리와 쑥 냄새가 상큼하다. 서투른 낫질이지만 신이난다. 풀에 묻혔던 대추나무들이 차츰 들어났다. 물기 젖은 대추나무 잎 사이사이로 다독다독 피어있는 꽃들한테 얄밉게 정이간다. 가을이면 붉게 주렁주렁 익어갈 열매를 생각하니 마냥 즐겁다. 아직은 어린나무이나 가시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추를 따먹기만 해봐라 하는 듯 무섭게 보인다. 그러나 그루그루마다 사랑스럽다. 해가 돋기 전에 일을 하려고 서두르지만 벌써 동쪽 하늘은 밝아오고 있다.
대추나무 주변이 말끔해진 모습을 보며 노력의 기쁨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가치, 보상의 의미와 경제적 논리가 스스로 터득이 간다.
한 개의 대추가 붉게 익기까지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수 없는 아픔의 인내와, 주인의 정성이 더해져야 달고 맛있는 열매가 달릴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어찌 나무를 가꾸는 일만이던가. 모든 인생사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보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뉜들 모르랴. 그러나 누구나 몸도 마음도 편한 쪽을 택하며 살고 싶어 한다.
풀을 베다가 아픈 허리를 펴면서 대추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한쪽 잎 겨드랑이에서는 꽃이 피어나고 한쪽 잎 사이에서는 어느새 앙증맞게 대추가 처녀젖꼭지 만하게 맺어있다. 지난 겨울은 추위가 길어서 양봉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더니 올해는 날아드는 벌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도 언제 수정이 되었는지 다행이다. 열매를 보면 볼수록 귀엽다. 어서 무병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무에게 전해졌으면 싶다.
금년은 농약을 한 번도 뿌리지를 않아서 그런지 거미집이 많다. 그바람에 엉뚱하게 청개구리가 대추나무가시 끝에 죽었다. 처음에는 궁금했다. 가만히 생각하니 벌레를 잡아 먹으려고 팔딱 뛰다가 가시에 푹 찔려 목숨을 잃은 것 같다. 열매를 지킬 가시는 엉뚱하게 청개구리만 생명을 잃게 했다. 대추나무도 안타가워 하였겠지. 거미줄을 걷어내자니 모두가 살자고 하는 일인데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가 없다.
간혹 새로 자란 가지에는 침식충이 파먹고 들어간 구멍에 배설물을 쏟아내 놓았다. 겉은 멀쩡한 가지라 아깝지만 전정가위로 잘라내어 줄기를 반으로 쪼개보니 작은 벌레가 연한 목질부를 파먹어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살려둘 수가 없다. 인정사정없이 죽이고 나니 분이 조금은 풀린다. 하지만 하나의 생명을 죽임에 마음 한쪽이 어딘가 모르게 편하지가 않다. 일찍 살충제를 뿌렸더라면 나무의 손실을 막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되었다.
농사도 순서가 있다. 농약을 뿌릴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병충해를 방지할 수 있게 마련이다. 농약은 커녕 풀도 제때 뽑아주지 못하는 게으른 농사꾼이다 보니 ‘게으른 일꾼 밭고랑만 센다.’고 내가 그 짝이다.
이른 봄에 전지한 가지를 아무데나 버린 바람에 풀을 베다도 손에 가시를 찔리는 게 예사다. 일이란 매사가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정리를 했어야 하는데, 훗날을 생각하지 않았음이 이제서 반성이 된다.
대추나무가시는 단단해서 오래 되어도 잘 썩지를 않고 그대로다. 그래서 대추나무 가시는 무섭다. 극자모후(棘刺母猴)가 떠올랐다.
예전에 중국의 연(燕)나라 왕은 조그만 노리개들을 좋아한다 함에, 위(衛)나라 사람이 찾아가 대추나무 가시 끝에 원숭이 한 마리를 새겨 주겠노라고 제의를 했단다. 왕은 기뻐하며 그에게 많은 봉록을 주고 여삼추의 심정으로 기다렸다. 왕은 참다못해 하루는
"대추나무 가시 끝에 새긴 원숭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하루빨리 보고 싶구려."
"보고 싶으시면 반년 동안 여자를 멀리하고, 술을 마시지 말고, 고기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비가 갠 날 해가 떠오를 무렵 그늘진 곳에서 대추나무 가시 끝에 새긴 어미 원숭이를 볼 수 있습니다."
왕은 이를 지킬 수가 없어 어느 날, 정(鄭)나라의 대장장이에게 물어보았다. 대장장이는 이렇게 답하였다.
"저는 모두 칼로 작업을 함에 만든 조각은 칼날보다 큽니다. 대추나무 가시 끝에는 칼날 끝을 댈만한 자리가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가 사용하는 조각도를 보시면 원숭이를 대추나무 가시 끝에 새겨 낼 수 있을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이에 왕은 위나라 사람을 불러, "대추나무 가시 끝에 원숭이를 새겨 넣을 그 칼을 한 번 보고 싶구려." 그는 집에 가서 칼을 가져오겠다 하고는 그길로 달아나 버렸다 한다. 예나 지금이나 남을 속이고 속고 살아가는 게 인간사인가 보다.
일을 하다 쉴 참에 밭가의 도랑에서 잡은 다슬기로 국을 끓였다. 대추나무 가시 끝으로 다슬기 속을 빼내며 여름밤의 추억도 스쳐갔다. 가시는 주렁주렁 붉게 익은 대추알을 알게 모르게 지키고 있을 사나운 침이다. 대추나무 가시를 살며시 들여다 보았다.
날카롭게 느끼던 대추나무가시는 자신을 지키는 방편임에 오늘 따라 정답게 보인다. 밉고 곱고, 속이고 속고, 사납고 다정함도 모두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음도, 작은 대추나무 가시를 통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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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회원. 충북문협회장 역임
푸른솔문학 발행인
저서. 나무가 부르는 노래. 나무이야기. 꽃 이야기 등.
첫댓글 "안개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은 녹색치마자락을 여미며 살포시 방문을 열고 나오는 여인처럼 아름답다. 대추나무 밭에 들어서자 인기척에 놀라 선잠을 자던 고란이가 쏜살 같이 뛰어 달아난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에 선한 경관입니다. 풍경화를 감상하 듯 맑아지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대추나무 가시 하나로 이렇게 긴글을 실감나게 써주신데 놀라고 그 세심한 관찰력에 또한번 놀랍니다 .많은것을 배우고갑니다 감사합니다.
"한 개의 대추가 붉게 익기까지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수 없는 아픔의 인내와, 주인의 정성이 더해져야 달고 맛있는 열매가 달릴 수 있음을...
밉고 곱고, 속이고 속고, 사납고 다정함도 모두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음도,.."
소중한 교수님글을 읽으면서 다양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대추나무 가시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으면서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밉고 곱고, 속이고 속고, 사납고 다정함도 모두가 사람 마음에 달려있지요. 작은 대추나무 가시 하나를 통해서도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추론하시는 김교수님 상상력 놀랍습니다.
"밉고 곱고, 속이고 속고, 사납고 다정함도 모두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음도, 작은 대추나무 가시를 통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알았다. "
소중하고 좋은 글, 잘 배우고 갑니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