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지맥 3구간 졸업구간은 도상거리 15km로 짧기도 하지만 등산로도 좋고 약산 오름 외 큰 굴곡도 없어서 출발 시간이 늦었음에도 느긋한 산행 후 15시20분 경 일찌감치 산행을 마친다
마루금 산행이 아닌 그 어떤 산행을 하고도 이런 시간에 하산해본적이 있었던지조차 기억이 없다
산행 내내 진눈개비가 내리거나 전국적인 강풍으로 조망은 없었지만 하산 후 햇볕도 나기 시작하고 저녁식사시간도 멀었으니 인근의 볼 거리를 보러 유람(?)을 떠난다
안동 사는 서화수님이 안내인 역할이니 느긋한 유람을 떠나며 제일 먼저 갈 곳은 산행 내내 안내판을 보았던 보호수로 지정된 용계리 은행나무를 보러간다

천연기념물 175호에 수령은 700년이고 본래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는 것 때문에 그 자리에서 15m를 들어 올려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는데 그 공사기간이 3년에 걸쳐 진행되었단다
하기야 그림에서 보이듯 엄청난 나무를 미세하게 들어올리고 흙을 채우며 하는 작업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끈기있는 공사였을까! 상상이 간다
선조 때 훈련대장이었던 탁순창(卓順昌)이 이곳에 낙향한 다음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과 행계(杏契)를 조직하여 매년 7월에 이 나무 밑에 모여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탁씨의 후손들은 아직도 이 나무를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한 번씩 간단한 제를 드린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밑부분의 속이 썩고, 윗부분에서도 썩은 가지를 통하여 빗물이 들어가 나무가 상하기 시작하였으므로 1982년에 외과수술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임하(臨下)댐 건설로 이 나무의 9m 정도가 수몰될 처지가 되자 1990년부터 2년 9개월간에 걸려 높이 15m에 이르는 가산(假山)을 조성한 후 올려 심어 보호하고 있다.(펌)



다시 떠난 곳은 2014년 영등지맥을 종주하면서 몇 차례 안내판을 보았던 지례 예술촌이다
영등지맥 때 아기산을 오르기 전 몇 차례 안내판을 본 기억이 있는 곳이지만 오늘 같이 시간 여유가 있고 차량이 지원되지 않으면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구불거리는 오지 길을 따라 임하호변으로 접근하는 곳이었다




지례마을은 조선 숙종임금때 대사성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과 그의 중형(仲兄)
방형(邦衡)의 자손이 340여년간 동족 마을을 이루어 주경야독하며 살아온 전형적 사림(士林)의 마을이었다. 지촌은 의성 김씨 내앞파의
대조(大祖) 청계 김진(金璡)의 현손(玄孫)이며 학봉 김성일의 백씨인 약봉 김극일의 증손자이며 표은(瓢隱) 김시온(金是)의 넷째 아들이었다.
38세에 문과 급제하여 40세에 제원(堤原)찰방(察訪)이었을 무렵 지례(芝澧)로 분가(分家)하여 호를 지촌이라 하였으니 지례의 입향조가
된다. 지촌이 지례마을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병자호란 때 도연에 은거한 아버지 표은 김시온의 정신적 영향이었다. 김시온은 나라가 망하자
청에 항거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도연명(陶淵明)의 이름을 딴 도연(지명,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에 하나 뿐인 도연폭포가 있는 곳으로 산수가
빼어남)에 은거하여 스스로를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자호(自號)하고 평생 독서하고 제자를 길렀던 것이다. 그러한 아버지의 아들 지촌은 조선
현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지만 은둔(隱遁)생활을 좋아하여 그의 집을 도연에서 10리나 더 상류인 지례에 지었다. 그는 청렴하여
한때 영암군수를 지내고 돌아올 땐 수레에 국화꽃 화분 하나 뿐이었다고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는 전한다. 그가 58세 되던 해 남인세력이
물러나던 경신출척(庚申黜陟)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고 지례에 돌아와 9년을 지냈는데 그때 지은 유명한 시 ‘무언(無言)’에는 은둔하여
한적(閑寂)을 즐기는 자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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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臥滄江歲月深 |
고향에 돌아온 지 참 오래 되었구나. |
| 幽居不受點塵侵 |
숨어사니 한점 티끌 묻어오지 않네. |
| 已知漁釣還多事 |
고기잡이 낙시질도 귀찮은 것 알겠고 |
| 更覺琴朞亦攪心 |
거문고니 바둑도 심란하구나. |
| 石榻任他風過掃 |
공들여 쌓은 돌탑 바람이 쓸게 하고 |
| 梅壇輸與鳥來吟 |
가꾸던 매화단도 새가 와서 울게 두자. |
| 如今全省經營力 |
이제껏 하던 일 모두 접고서 |
| 終日無言對碧岑 |
종일토록 말없이 푸른 산 보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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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우암(尤庵) 송시열이 주도하던 노론세력에 의해 왕권이 위협받고 영남인이 핍박 받던 때라 그가 기사년(己巳年)에
올린 우암타도의 상소는 임금으로 하여금 우암을 사사케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고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갔다. 벼슬살이의 무상함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벼슬을 사양한 것만 열 일곱 번이나 되었지만 당시로선 영남인을 대표하고 있었기에 임금의 부름을 받았을 때는 70노구를 이끌고
왕명을 받들어야만 했다. 임금의 변덕으로 남인들이 다시 실권(失權)하여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전라도 동복(同福)에 유배되어 73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후 지례마을에서는 아무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정와 김대진, 난곡 김강한, 장암 김시락, 수산 김병종 같은 학자를 비롯
문집을 낸 이가 10여명에 이르고 지촌의 출계손(出系孫) 중에는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라 일컫는 중재(重齋) 김황(金榥)과 독립운동가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같은 이가 있다. 지촌이 지례에 터를 잡음으로서 그 의 후손들은 340여년간 교통불편과 가난을 겪으면서도 선조가 남긴 땅에서
가난하면서도 면학하는 전통을 이어 갔다. 이들은 지촌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당과 제청을 지어 학문과 숭조정신을 강조했고 근대에 와서도 마을안에
초등학교를 짓고 문맹퇴치를 비롯 후세교육에 힘써서 이 마을 출신으로 세상에 알려진 이가 수십명에 이른다. 1975년에야 처음 전기가
들어오고 버스가 다녔다. 정부의 임하댐 계획이 발표되자 1985년 지촌문중 소유의 종택과 제청, 서당 등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받아
1986~1989동안 마을 뒷산 중턱에 옮겨 지어 한국최초의 예술창작마을 ‘지례예술촌’을 열었다. 다른 집들이 모두 도회지나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이주했지만 지촌가의 사람들은 고향을 내려다보며 현대의 은둔지를 만들어 내외국인들로 하여금 가장 한국적 리조트를 체험하게하고 있다. (사이트에서 퍼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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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영등지맥이나 덕산지맥을 종주하면서 자주 지나다녔던 임하댐이다


안동시 중심시가지 동쪽 18㎞ 지점인 낙동강수계의 반변천에 건설되었다. 낙동강 유역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 유역이 보유하고 있는 수자원을 개발하여 낙동강 본류 중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북부지역, 즉 대구·구미 등의 내륙공업도시와 지방 중소도시 및 농촌지역에 전력과 용수를 공급하고, 홍수조절 및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한국수자원개발공사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1985년 12월 댐과 발전소 건설을 위한 가설공사에 착수하여 1990년 6월 댐 축조를 완료하고, 1991년 8월 발전기를 설치하여 1992년 5월 완공했다. 중앙차수벽형 사력 댐으로 높이 73m, 길이 515m이며, 댐으로 조성된 저수지는 유역면적 1,361㎢, 총저수량 5억 9,500만t이다. 여수로문비 4문과 발전소 내에 시설용량 2만 5,000kW급 발전설비 2기를 설치했다
▽ 멀리 보이는 산이 영등지맥의 아기산(589.3m)이다 건너편 하얀 표시가 있는 곳이 영등지맥의 끝자락이다

▽ 비죽하게 솟은 산이 오늘 산행을 했던 약산(582.5m)이다


첫댓글 ㅎㅎ 고향땅인데 저는 못가봤네요 ㅠㅠ
안동 예천 영주 문경 일대는 고택도 많고 재실도 많고 유학의 고장이라 산행의 빠듯함이 아니라면 볼 것이 많은 곳이죠
수객님 탯줄 묻은 곳이 안동인 것은 처음 알았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