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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면제 규례
신 15:1-11
1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3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4-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 15:1-11 / [칠 년마다 빚을 면제해 주어라] 여러분은 7년이 지날 때마다 모든 빚을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2) 면죄 규정은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에게 빌려 준 것은 무조건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동족에게서 빚을 받으려고 더 이상 독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일찍이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면제해 주는 해를 선포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이 외국인에게는 빚을 독촉할 수가 있으나 여러분의 동족에게는 빚을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4) 물론 여러분 가운데에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셔서 차지하게 하실 땅에서는 여호와께서 틀림없이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철두철미하게 순종하고 내가 오늘 명한 이 모든 규정을 지켜 행하면 그렇게 됩니다. 6)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대로 복을 내려 주셔서 여러분이 많은 민족들에게 꾸어 줄 수는 있어도 꾸어 올 필요는 없고 많은 민족들을 지배는 하게 되면서도 어느 다른 민족에게도 지배는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7) 그런데도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실 땅의 어느 성읍에서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가난해서 고난을 당하면 여러분은 그에게 마음을 모질게 먹지 마십시오. 그 가난한 형제 앞에서 손을 움켜 쥐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8) 오직 여러분은 가난한 형제에게 언제든지 손을 펴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빌려 주되 담보는 받아놓으십시오. 9) `빚을 면제해 주어야 하는 7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못된 생각을 품고 가난한 동족에게 함부로 눈을 치뜨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아서 그가 여러분을 원망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면 여러분에게로 무거운 죄가 돌아올 것입니다. 10)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무조건 빌려주고 빌려 줄 때에도 마지못해서라는 생각을 품지 마십시오. 바로 이런 일 때문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11) 여러분이 그 땅에서 살다보면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가난한 겨레와 고통당하는 형제를 도와주도록 명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빚을 면제해 주는 규례를 제정하셨습니다.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궁핍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읽을 수 있습니다. 채무자(1-6), 가난한 자(7-11), 종(12-18)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1-2)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있는 불우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매 칠 년에 있는 면제년에 유익을 얻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무책임한 소비 때문에 빚을 지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열심히 일하던 남편이 갑자기 죽거나 가족 중에 누군가가 중병을 앓게 되면 부유한 가정이라도 금세 재정적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채권자는 면제년이 오면 채무자의 빚을 면제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 규례는 빚을 진 때로부터 계수하여 7년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안식년에 행해졌습니다(레 25:4-7).
이방인에게는 독촉하려니와(3) 채무를 면제받는 특혜는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며 이방인들의 빚은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이런 규정은 차별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율법은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할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개념을 기초로 선포되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은 먹지 말 것이나 그것을 성중에 거류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파는 것은 가하니라”의 말씀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신 14:21). 이방인에 대한 독촉 규례는 차별이 아니라 이스라엘 내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가야 할 삶의 기준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4-11) 하나님께서는 면제의 규례를 충실한 행한 채권자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약속해 주십니다(4-6). 또한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악한 생각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돕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그에게 주되 줄 때도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돕되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도움의 손을 펼치신 것처럼 그들을 향해 마음과 지갑을 여는 것이 하나님의 구별된 사람이 사는 모습입니다.
적용: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기꺼이 자신의 우선순위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궁핍한 자들을 돌보신다면 하나님의 백성도 약한 자를 돌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인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사랑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 사랑해야 할 이웃이 보이지 않는 것이며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곧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시선, 주님의 사랑으로 주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움켜 쥔 손을 펴라
신 15:7-11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다"고 했습니다. 지상에서의 인간사회의 현실을 적시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부유한 나라에도 가난한 사람은 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보다 조금 앞에 있는 5절 끝에 보면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가난한 이가 없어지게 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이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움켜쥔 손을 펴는 것입니다. 본문 7절 끝과 8절 머리부분에 보면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라" 했으며, 오늘 본문 제일 끝에서도 "네 손을 펼지니라" 했습니다.
손을 움켜쥐지 말고 펴라는 것은 펴서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본문 7-8절을 다시 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11절 하반절에서도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했습니다. 즉 가난하고 어려운 형제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넉넉히 꾸어주기 위하여 손을 움켜쥐고 있지 말고 펴라는 것입니다.
손을 움켜쥐고 펴지 않는 것은 사실은 손이 아니라 마음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펴라" 하기 전에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7절) 한 것입니다. 9절에서는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했고, 10절에서는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했습니다.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어렵고 궁핍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펴는 것이 이 땅에서 가난한 이들이 사라지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어렵고 궁핍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펴는 것은 하면 좋고 안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11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따라서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9절을 봅니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모든 빚을 면제해주어야 하는 일곱째 해가 가까이 오면 채권자마다 마음 속으로 "지난 빚도 이제 곧 못 받게 될 터인데 새 돈을 뭣 하려 빌려 주겠는가" 하며 채무자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되기 쉬운데 그것은 악한 마음을 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이므로 그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대신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0절을 봅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어렵고 궁핍한 이들에게 인색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만사가 형통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일조에 관한 규례로부터 시작된 말씀의 결론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의미를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신14:22로부터 시작되는 말씀들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14:22-23에 보면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라" 한 것은 아무데서나 제사 드리고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거짓 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은 산당 같은 곳에 가서 절하며 빌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곳에서 제사 드리며 거기서 음식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온 땅의 주인이요 모든 수확을 걷게 해주시는 이로 알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만유의 주인이시고 우리가 얻은 모든 소득과 재물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믿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라" 한 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일차적으로는 예배행위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그 후에 식사를 나누는 일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기본적인 종교의식이었습니다. 이 종교의식이 제대로 원만히 이루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물질적 책임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각각 소득의 십분의 일로 분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행해져야 하는 모든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필요한 재정을 온 교인들이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으로 충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수확의 맏물과 십분의 일을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집에서 그를 향하여 그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신앙의식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훈련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한 말이 그 뜻입니다. 십일조를 비롯하여 각종 헌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일이며 항상 행해야 할 우리의 본분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십일조와 헌물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행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바쳐진 물질을 또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기를 원하셨습니다. 특히 스스로 물질의 소득원이 없는 이들을 책임지는 일에 그 용도를 지정하셨습니다. 신14:28-29을 봅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했는데 이것은 성직자와 나그네나 고아나 과부로 대표되는 소외 및 빈곤계층의 삶에 대한 책임이 온 회중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신앙이라는 것이 단지 예배하는 것만이 아니고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어려운 이들 구제하기를 힘쓰는 일을 포함하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로부터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하나님께 예배할 뿐 아니라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힘쓰는 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14:29) 하신 것입니다.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과 교회가 하는 일마다 복 받는 비결은 바로 외국근로자, 소년소녀가장, 장애인, 독거노인 등 소외계층 및 빈곤계층의 사람들을 잘 돌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정신의 연장선상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바로 앞서는 1-6절에서는 빚의 면제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매 칠년 끝에 가서는 채권자들은 채무자들에게 모든 빚을 면제해 주라는 것입니다. 먼저 신15:1-2의 말씀입니다: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이것은 소외되고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땅은 7년마다 휴경하게 되어 있는 법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어떤 빚을 6년 안에 못 갚으면 농사일을 쉬어야 하는 7년째에는 더 갚을 길이 없을 터이므로 따라서 그 때는 아예 빚을 면제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백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빚을 면제해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나그네처럼 지내던 애굽에서의 소외와 빈곤으로부터 거저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으로서의 도리를 상기시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큰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신15:4-6의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질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려 교회를 섬기고, 가난한 이들을 부족함이 없도록 돌보며, 그들이 도저히 빚을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면제해주라는 이 명령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복을 주실 것인가 하면, 첫째는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즉 우리 가운데 가난한 백성이 없어지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돈도 꾸어주며 경제적인 원조를 많이 하게 되면 됐지 빚지고 사는 나라는 결코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셋째는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즉 다른 나라의 지배나 간섭을 받지 않고 진정한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진정한 자주독립국으로 튼튼히 서는 길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의 믿음과 서로를 위하고 돌보는 우리의 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총선이 끝났습니다. 여야가 국회에서 차지할 의석비중이 뒤바뀌었습니다. 회생한 당도 있고 몰락한 당들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총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려되는 점도 없지 않습니다. 그 중 하나가 소위 보 혁 간의 이념적 대립이 더 예리해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그런데 어디에나 그렇지만 보 혁 간의 대립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소유와 분배의 불평등이며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선의의 관심과 배려의 결핍 또는 부족이라고 생각됩니다. 움켜쥔 손을 펴지 않으려는 완악한 마음이 있는 곳에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며 이념적 투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그러므로 모두가 움켜쥔 손을 펴는 것입니다. 재물을 움켜쥔 손도 펴야 하며 권력을 움켜쥔 손도 펴야 하고 원한을 움켜쥔 손도 펴야 합니다. 계층간의 대립과 세대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모든 구호나 운동을 내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모두가 손을 펴고 편 손을 함께 잡아야 합니다. 20대나 6~70대나 모두 손을 잡고 다 함께 행복해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교회는 특별히 더 손을 펴야 합니다. 외국근로자, 소년소녀가장, 장애인, 독거노인 등 소외계층 및 빈곤계층의 사람들을 살피고 돌보는 일을 위해 움켜쥐었던 손을 활짝 펴야 합니다. 교회가 그 일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하여 손을 활짝 펼 수 있도록 성도들은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의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을 움켜쥐고 있는 손을 펴야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교회가 앞장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우리가 움켜쥔 손을 펴면 하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없어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없어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움켜쥔 손을 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작은 손을 펴고 그 손에 움켜쥐었던 것을 놓으면 하나님의 무한하게 큰 손으로부터 형언할 수 없이 큰 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움켜쥔 모든 손을 활짝 펴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이루어주실 다같이 행복한 사회를 향해 나아갑시다.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4-5 / 피종진 목사
신명기 15:4~5에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한평생 사는 동안 가난 때문에 사람 구실도 못하고, 가난 때문에 기가 죽고, 가난 때문에 소외되어 살아가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절대로 가난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복되게 지으셨고, 부유한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가난한 자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켜 행할 때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으며, 그들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없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가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보면 ‘모자라다, 연약하다, 궁핍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하면 돈 없고 굶주리는 것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가난 중에 가장 큰 가난은 영적인 가난입니다.
첫째, 영적인 가난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여기에서 ‘주린 영혼’이란 바로 영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빈약하면 모든 것이 다 빈약합니다. 영적으로 만족함이 있을 때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역사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부유해지면 모든 것이 다 자동으로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삼서 1:2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영혼이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사업이 안된다, 부도가 났다, 직장을 잃었다, 일이 손에 잘 안잡힌다’ 등등 이런 저런 시련과 환난 풍파가 끊임없이 계속된다 할지라도 염려하면 안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영적인 빈곤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에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물질적으로는 부요했으나, 영적으로 가난한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라오디게아교회는 하나님이 보실 때 영적으로 너무나 빈곤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다고 교만하여 영적으로 빈곤하니까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그런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둘째, 마음의 빈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시 38:8) 마음이 빈곤하면 피곤하고 속이 상하고 불안하며 신음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건강하면 생활도 건강해지고, 말도 건강해집니다. 마음이 병들면 모든 것이 다 병듭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19절)라고 말씀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22절)고 말씀했습니다. 평강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마음의 평강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고, 주님이 내 안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내 안의 근심 걱정을 다 주님께 맡기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불안하면 일손이 안잡힙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을 환영하는 마음 문이 열려 있어야 됩니다. 또 언제든지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어서 주님의 평강이 넘침으로 성령의 불이 가슴에 지펴져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에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생각도 성경에 보면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 두 가지가 있습니다. 로마서 8:6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건강의 빈곤
건강을 잃으면 건강의 빈곤입니다. 우리 몸은 병에 감염되기 쉬운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려면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하며,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6:13에 보면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했고, 로마서 12:1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6:19,20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받게 하시고, 모든 질병을 치료하여 건강하게 해주시며, 귀신들을 내쫓아 어두움의 영에서 해방시켜주신 일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 4:23,24)
넷째, 경제적인 가난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시 113:7) 여기에서 ‘진토’란 땅의 밑바닥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일으켜주시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4:18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가난한 자가 복음과 함께 부요하게 되고, 복음과 함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무엘상 2:7에 보면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난한 자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부요하게 해주십니다. 또한 부요한 자라도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면 한순간에 가난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겸손하게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①구제하는 자에게 부요함을 주십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 ②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자에게 부요함을 주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③성전을 위하는 자에게 부요함을 주십니다.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가난, 마음의 빈곤, 건강의 빈곤, 경제적인 가난에서 벗어나 부요한 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힘으로 물리칠 수 없는 수많은 가난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다 물리치시고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난에서 탈출하자
신 15:4-8 / 피종진 목사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본문은 안식년(7년을 주기로 7년째 되는 해에 1년씩 쉬는 해. 종에게 자유를 주고 빚을 탕감해 줌)과 관련하여 안식년에는 채무자에게 빚 독촉을 하지 말고, 또 안식년이 가까웠다고 하여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며, 구제하는 일에 힘쓰라는 명령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약한 자들을 배려하시는 분임을 알게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약한 자들에 대해 항상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친히 돌보시며 그들의 눈물을 신원하여 주시는 분입니다(사 1:17).
가난이란 돈이 없어서 빈곤한 것만 가난이 아니라, ‘건강의 가난, 마음의 가난, 믿음의 가난도 가난’입니다. 그러면 가난이 오는 이유와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가난이 오는 이유
①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게으름에서 가난이 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란 일을 하지 않는 자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일 자체를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열심과 성실로 부지런히 일하는 자를 부유하게 해주십니다.
②술 취하고 탐식하기 때문입니다.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잠 23:21)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란 방탕한 삶을 사는 자를 의미합니다.
③잠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잠 20:13)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는 가난해집니다.
④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 11:24) 자신의 소유를 흩어 구제하지 않고,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됩니다.
⑤악한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잠 28:22) ‘악한 눈이 있는 자’란 나누어주는데 인색하고 탐욕으로 재물을 쌓기만 하는 자로 가난하게 됩니다. 성도는 성실히 일하여 얻은 재물을 자기를 위해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2.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첫째, 여호와의 말씀과 명령을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 15:4,5)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면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자는 가변적인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오직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소망을 두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켜 행할 때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 중에서 없게 되고, 여러 나라에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고, 여러 나라를 다스릴지라도 다스림을 받지 않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둘째, 손을 펴서 나눠주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자들이 함께 거할 때에 손을 움켜쥐지 말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넉넉하게 꾸어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성도는 가난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도움을 청할 때에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심과 나의 소유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펴서 나눠주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셋째, 주님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6,17) 주님께 제물을 드릴 때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고 했을 때, 그는 기꺼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의 후손이 헤아릴 수 없이 번성하고 대적의 성 전체를 차지하게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며, 술 취하고 탐식하지 말며,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고, 과도히 아끼지 말며, 악한 눈을 가지지 말고 선한 눈을 가져 여호와의 말씀과 명령을 지켜 행하고, 손을 펴서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주님께 제물을 드려 가난에서 탈출하여 부유한 삶을 살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면제의 규례
신 15:1-3
성경에 나오는 숫자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7은 우리가 흔히 완전수로 알고 있는 숫자이지만, 저는 성경을 볼 때에 7이라고 하는 숫자는 ‘회복의 숫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제 7일에 안식하면서 예배드리고, 영혼과 피곤한 육신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곱째 달에는 나팔절이나 속죄일, 장막절과 같은 절기를 두어서 일 년간 지은 죄를 속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고 하셨으므로 일곱 번째 달도 회복의 달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15장은 특별히 제 7년의 규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제 7년은 ‘안식년’, 혹은 ‘여호와의 면제년’이라고 부릅니다. 안식년은 보통 토지에 적용되는 말입니다. 6년 동안은 농사를 짓되 7년째에는 파종이나 추수를 하지 말고 토지를 그냥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토지의 산성화도 막고 토지도 쉬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또한 안식년은 토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는 ‘여호와의 면제년(The Lord's Release)’고 부릅니다. ‘Release’란 말은 ‘놓아주다, 풀어놓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7년째인 여호와의 면제년에는 빚에 눌려 고통당하는 사람이 빚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됩니다. 또한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도 노예의 신분을 벗고 자유인이 됩니다. 경제적인 부채로부터의 회
복, 신분적인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면제년인 제 7년 회복의 해의 의미입니다.
물론 그 대상자는 이방인이 아니라 같은 동족인 히브리인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게 빌려줬던 돈을 제 7년에 갚지 말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국부가 모두 유출되어 이스라엘이 가난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끼리 서로 면제할 것은 면제하고, 회복시킬 것은 회복시키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해방시킬 것은 해방시키라는 교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될 하나님의 규례입니다.
1. 세상법과 하나님의 법의 차이
모세의 율법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법은 세상법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존재하던 주전 1,800년경에 바벨론에도 이미 함무라비 법전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 왕이 만든 바벨론의 국법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바벨론 사회는 귀족과 시민과 노예라는 3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노예도 보호를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노예는 시민과 동일한 차원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시민보다는 한 차원 낮은 단계에서, 귀족보다는 두차원 낮은 단계에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가난한 자나 약한 자나 노예들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사람들을 더 높은 차원에서 보호해주셨고, 또 그들의 탄원에 더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한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명기 15장은 세 가지 내용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규정은 이웃에게 돈을 꾸어준 채주는 매 7년마다 빚을 면제해주고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규정은 빚으로 인해 노예 된 동족이 6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다면 제 7년째에는 노예 신분에서 해방을 시켜주고, 해방 후 독립해서도 먹고 살 수 있도록 양과 포도주와 곡식을 주어서 보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규정은 우양의 처음 난 수컷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법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법에도 매 7년마다 부채를 탕감해주거나, 노예를 6년 동안 부려먹은 뒤에 제 7년째는 해방시켜주라는 법은 없습니다. 또 첫 월급봉투를 받으면 여호와께 바치라는 법도 세상에는 없습니다.
우리 한국 침례교회가 속해 있는 미국의 교단은 SBC라고 칭하는 남침례교단(Southern Baptist Convention)입니다. 왜 이 교단의 이름 앞에 Southern(남부의)이라는 말이 붙었을까요? 그 이유는 19세기 중반인 1840년대에 노예로 말미암아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1860년대에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게 됐는데, 이 남북전쟁이 일어난 원인이 노예제도입니다.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플렌테이션이라고 부르는 큰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노예를 해방시키되 경제의 발전을 지켜보고 서서히 해방시키자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북부의 산업은 공업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에 비해 노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북부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노예를 둘 수 있는가? 노예를 두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형제도 아니다. 그러므로 노예를 두는 사람과는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남북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북부의 승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노예는 해방되고 링컨은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노예를 부리더라도 제 7년째에는 반드시 해방시키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미국이 성경의 원리대로 6년 동안은 노예를 부렸더라도 제 7년째에 해방을 시켰다면 아마 노예로 인해서 남북전쟁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법은 이런 하나님의 법을 향해 불합리하고 이상한 법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이 법은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상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런 이상한 법을 실천하여 사는 것을 도리어 이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매 페이지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명기 15장에 나타난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약한 자, 가난한 자, 노예가 있다면 손해가 될지라도 제 7년에 면제해주고 해방시켜 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어서 세상에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만 불신자들은 우리의 언행심사를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 자체가 불신자들에게는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 그것을 실현하고, 그 성품을 세상에 나타내서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저런 분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신명기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신명기 15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손해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면제년에 대한 해석
신명기 15장에는 면제년에 대한 다섯 가지 특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7년이 되면 이웃에게 돈을 꾸어준 채주는 빚을 탕감해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비상식적이고 이상한 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의 사회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토지는 여호와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공평하게 분배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받은 땅을 이용하여 농업도 하고 목축도 하면서 생업을 이어갑니다.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상업국가나 공업국가, 혹은 무역국가가 아닙니다. 솔로몬 시대에 남들이 무역을 하면 중간에서 세금을 떼는 수입으로 부자가 된 적은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무역국가가 아닙니다.
농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농업이 떼돈 버는 일은 아닙니다. 물론 큰 땅을 가지고 농업을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스라엘처럼 할당된 땅에서는 짓는 농사로 많은 돈을 벌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에 농사짓는 사람이 빚이라도 지게 된다면 갚을 길조차 막막하게 됩니다. 그렇게 빚이 점점 커지게 되면 결국 이 사람은 자기 몸을 팔아서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 7년째에 노예의 빚을 탕감해 주고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시켜서 이스라엘 사회에 신분적인 차별이나 계급적인 차별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예표입니다. 천국에는 영원한 안식년만이 존재하며, 상급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신분과 계급적인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다른 사회에는 계급적인 차별이 늘 존재했습니다. 바벨론 사회에는 귀족과 평민과 노예가 있었고, 봉건사회에는 영주와 기사와 시민과 농노가 있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도 양반과 중인과 천민이 존재하는 시대가 있었지 않습니까? 한국이 양반과 천민의 계급차이를 두어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에 양천의 계급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나는 양반이다”라고 가슴 내밀고 다니시는 분은 꿈 깨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계급사회의 구별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6년 동안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을지라도 7년이 되면 회복하시는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 본문을 제 7년 한 해 동안만 빚을 독촉하지 말고 제 8년째에는 다시 빚을 받아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안식년에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소득이 없게 될 것이고, 따라서 빚 독촉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1년 동안 빚을 유보해 줄 수밖에 없다는 논리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분명히 ‘빚을 면제하라’고 말씀합니다. 아예 빚이 없는 것처럼 탕감해주고, 해방시켜 주며(Release), 취소(Cancelation)해주는 것이 공평을 원하시고 재출발의 기회를 다시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재출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허랑방탕하게 허비하고 망해버린 탕자에게도 재출발을 주시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재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인생이 절망스럽고, 끝장이라고 생각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고, 재출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은 면제년이 가까웠다고 해서 빚을 독촉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면제년이 한 달 남았다고 해서 빚을 받지 못할까봐 계속 빚을 독촉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면제년이 가까웠다고 해서 가난한 형제가 도움을 요청할 때에 악한 눈을 들고 아무 것도 주지 않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마음을 ‘악념(惡念)’이라고 말합니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9절)고 기록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먹고 살 게 없어서 부자에게 돈을 꿔달라고 요청했는데, 면제년이 한달 밖에 안 남았다고 해서 돈을 꿔주지 않겠다고 하는 행동은 악념이며 여호와께 죄를 얻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넉넉히 꾸어주어야 합니다. 손을 움켜쥐지 말고 펴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돌 때부터 움켜쥐게 만드는 풍습이 있습니다. 돌잔치 상에 만 원짜리 한 장, 연필 하나, 실 뭉치 등을 놓고 아이에게 집어 들게 만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한 번 쥐면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움켜쥐지 말고 네 손을 펴서 요구하는 대로 넉넉히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넉넉하고 풍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성도들도 그와 같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여호와의 면제년’에는 하나님을 위하려는 동기로 빚을 면제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 7년에 노예 된 형제를 해방하는 동시에 빚을 탕감해 줘야하는 동기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과거에 애굽에서 종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받았으니, 은혜주신 하나님을 위하여 약한 자, 노예 된 자를 돕고 해방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른 정신과 바른 동기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더라도 ‘내가 저사람에게 무엇을 보답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베푸는 선행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선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왜 빚진 것을 채주에게 모두 부담시키십니까? 빚을 모두 탕감해서 채주가 그 빚을 모두 떠안는다면 채주에게 막대한 손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치리할지라도 너는 치리함을 받지 아니하리라”(4-6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와 같이 너그러운 마음과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치리할지언정 치리 받지 않으며, 꾸어줄지언정 꾸지 않으며, 그 중에 가난한 자가 없게 하시는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손해 보고자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큰 이익으로 되갚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망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크게 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죽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영영토록 보존하십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언젠가 대구 대명교회에 교회에 불이 난적이 있습니다. 불이 난 후 예배당을 새로 짓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느 권사님이 천만원을 헌금하였습니다. 이 분은 시장 모퉁이에서 사과상자를 놓고 깻잎이나, 오이를 파시는 모판장수였습니다. 목사님이 그분의 형편을 모두 아시는지라 그 헌금을 받은 셈칠테니 도로 가져가시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권사님이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 1월에 주를 위해서 망하려면 흥한다고 설교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10년 전에도 모판장수요, 지금도 모판장수입니다. 제가 이 헌금을 드린다고 해도 모판장수요, 드리지 않는다고 해도 모판장수인데 내가 노력해 봐도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차라리 제가 주를 위해서 망해보렵니다. 제가 가진 것이 천만원이 전부이지만, 사과상자야 밖에 나가서 다시 구해오면 되고 문제없으니 이 헌금을 받아 주십시오.”
하나님의 존재를 빼버리고 신명기 15장을 생각한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계산한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약한 형제를 위해 거룩한 손해를 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크게 갚으십니다. 이것이 면제년의 정신입니다.
3. 거룩한 손해에 대한 보상의 예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손해를 보면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신다는 예는 성경 속에도, 역사 속에도 수없이 많이 존재합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엘가나의 아내인 한나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한나는 아이를 갖지못했기 때문에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인 브닌나를 통해 늘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원통한 마음을 품고 기도하여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이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을 젖 뗄 때까지만 기르고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허전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사무엘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받으시고 한나에게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주셨습니다.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한나의 태의 문을 계속 여셔서 무려 다섯 배로 갚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손해를 보면 최소한 다섯배, 혹은 만 배로 되돌려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집에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오늘날로 치면 백만원도 넘는 순전한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리더니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비싼 나드 향유를 허비하느냐?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얼마나 좋겠느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을 기념 성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영원히 기념하는 기념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세기에 프랑스에 왈도라고 하는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너는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에 감명을 받고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다 나눠주고 예수님의 말씀만 읽고 따르며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성경에는 면죄부나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연옥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설교하다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으로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여 왈도파(Waldenses)라고 하는 한 분파를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이 왈도파는 16세기의 루터, 칼빈의 종교개혁의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19세기 스코틀랜드 사람으로서 유명한 의사이자 아프리카의 선교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아프리카 대륙을 최초로 횡단한 사람인데, 풍토병으로 죽을 위기도 겪고, 짐승의 위험도 많이 당했으며, 아내와 헤어지는 고독감을 경험하는 등 수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후에 캠브리지 대학 학생들에게 강연을 할 때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희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하나님께 빚진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희생이 아니라 도리어 특권입니다. 내 마음에 평안과 천국 상급에 대한 밝은 소망과 그리고 내 일에 대한 만족감, 이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이것을 희생이라 하겠습니까? 이것은 특권입니다.”
결 론
서로마는 476년에 게르만 족의 대 이동을 통해 망했습니다. 그러자 로마의 사람들은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이라는 곳에 정착해서 동로마 제국을 존속시켰습니다. 이 동로마제국은 1453년에 멸망했는데, 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을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나라가 바로 오토만 터키입니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돌궐족이라고 배웠던 사람들이 바로 터키 족입니다. 이 오토만 제국의 국교는 회교였습니다. 따라서 회교 국가가 기독교 국가에 쳐들어와서 기독교 국가를 멸망시키고 지배를 한 것입니다.
이 오스만 제국의 16세기 술탄왕 가운데 슐레이만 대제라고 불리는 왕이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기독교 국가의 기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왜 기독교를 포기하고 회교로 개종합니까? 한 번 믿은 신앙을 왜 포기합니까?” 그러자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회교인이 되어야 세금을 덜 내기 때문입니다.” 세금을 덜 내기 위해서 믿음을 팔았던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자기중심적 신앙이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신앙이요, 말씀을 멸시하는 신앙이요, 내세에 대한 소망이 부재한 신앙이요, 더 이상 표현하기 힘들만큼 엉터리 신앙입니다. 이들의 신앙이이만큼 엉터리였기 때문에 회교족들에게 점령을 당하고 회교 국가의 최하류층으로 살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물질의 유익을 위해서 신앙을 팔아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작은 물질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이 되었다가, 부처를 섬기는 불자가 되기도 하는 이중 신앙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 같은 사람의 기도와 성경 지식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거저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하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형제에게 거룩한 손해를 본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손해, 거룩한 희생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시고 거룩한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신15:1-23 / 양인국 목사
1.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면제의규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내용들이다. 면제의 규례는 매 칠년 끝에 빚진 자들의 빚을 면제해 주고, 종된 자들을 자유하게 하고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라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면제규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할 합당한 삶은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면제의 규례를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15:1-6). 여기 면제의 규례란 이스라엘이 매 칠년 끝에 행해야 할 규례로서 채권자는 채무자의 빚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 채권자가 이와 같은 의무를 피하기 위하여 채무자로부터 미리 빚을 받아 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면제의 규례는 빚을 갚도록 독촉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면제의 규례를 주신 것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 즉 그들에게 回生(회생)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므로 이와 같은 정신을 버리고 단순히 형식적으로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反(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권고는 면제의 규례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진정성을 가지고 지키라는 의미이다. 물론 면제의 대상은 형제 즉 자국민이고 이방인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면제의 규례를 지킬 때, 그들 가운데 가난한 자가 없도록 해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고 또한 그들에게 복을 주심으로 여러 나라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이지는 않을 것이고 여러 나라를 치리할지라도 치리를 받지 않도록 해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15:5,6).
이스라엘이 면제의 규례를 지키기 위히여 해야할 일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었다(15:7-11).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이 말씀은 궁핍한 자들을 위하여 손을 펴라는 것이다. 여기 “손을 펴라”는 말과 “움켜 쥐지 말라”라는 말은 서로 대조되는 말로서 궁핍한 자들에게 인색하지 말하는 의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15:10)”
이스라엘이 면제의 규례를 지키기 위하여 해야할 일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동족 중에서 종들로 팔린 사람들을 자유하게 해 주는 일이었다(15:12-18). 동족 중에 종으로 팔린 사람이 종으로 머무를 수 있는 최대 기간은 육년이다. 하나님은 칠 년째 되는 해는 그들 모두를 자유하게 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영구히 종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었고, 또한 이스라엘은 이미 애굽에서 종으로 산 경험이 있으므로 형제를 영구히 종으로 삼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본문의 내용들을 통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교훈 받는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복의 원천”이시라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께서 복의 원천이라는 말은 모든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의미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1,12)” 실제로 본문은 복된 삶이 우리의 수고로 의하여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로부터 오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만일 복된 삶이 우리의 수고로 인하여 오는 것이라면 수고를 많이 할수록 그리고 우리의 소유를 많게 할수록 더욱 복된 살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나 소유와 관계없이 말씀에 따라 행할 때 복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복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본문의 내용들을 통해 주신 교훈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풍요함에 이르는 길은 나눔이라는 것이다. 언급한 것처럼 4,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한다면 반드시 복을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듣고 행하도록 주신 말씀은 면제의 규례로서 이웃의 빚을 면제해 주라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손을 펴라는 것이고 종된 자들을 해방 시켜 주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형통한 삶에 이르는 길과 완전히 다르다.
세상이 말하는 형통한 삶에 이르는 길이란 소유를 더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유를 더하기 위하여 더 큰 힘과 더 많은 지식과 그리고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은 언제나 다툼이 그치지 않고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형통함에 이르는 길은 이처럼 소유를 더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에 있음을 말씀해 주셨다.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말씀은 본문을 통해서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신구약 전체를 통해 주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복음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해 주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본문의 내용들을 통해 주신 교훈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면제의 대상에서 제외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면제의 규례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이방인이다.
하나님께서 면제의 규례를 주신 목적은 믿음의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더불어 사는 삶을 살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이방인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더불어 살고자 할 때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함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삶의 기반이 되는 신앙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도 더불어 살기를 원할지라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여기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 언급한 것처럼 삶이 기반인 신앙이 다른 사람들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말한다면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개인보다는 공동의 선을 우선해야 하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언제나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자신의 탐욕만 채우려고 한다면 어떻게 그런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더불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무엇보다도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면제의 규례들을 주심으로 더불어 살도록 하셨다.하나님은 우리가 더불어 살 때 우리 가운데 가난한 자가 없도록 해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고 또한 우리에게 복을 주심으로 여러 나라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이지는 않을 것이고 여러 나라를 치리할지라도 치리를 받지 않도록 해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다(15:5,6).
이와 같은 사실들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만일 우리 가운데 가난이 있고 꾸이는 일이 있고 통치 당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이 말하는 것에 따라 자기중심적인 삶과 탐욕이 이끄는 대로 살아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삶으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복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자.
지금까지 우리가 이웃이 넘어지는 것이 내가 설 수 있는 길이고 이웃이 잃을 때 내가 얻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이웃이 잘되는 길이 내가 잘되는 길이고 이웃이 샬롬을 누릴 때 내게도 샬롬이 있고 이웃이 복된 삶을 살 때 나도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알고 이웃을 세워주고 이웃에 대하여 배려함을 가지고 살자. 이것이 면제의 규례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다음으로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고 훈련하여 생활화는 일에 힘쓰자. 놀라운 사실은 더불어 사는 삶은 언제나 나눔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눔에 기초한 삶을 통해 맺은 열매가 바로 더불어 사는 삶일 것이다. 그래서 면제 규례들의 중심 사상도 나눔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결국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고 훈련하여 생활화 한다는 것은 나눔의 삶을 배우고 훈련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면제의 규례 즉 더불어 사는 삶을 산다면 반드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약속을 믿고 더불어 사는 삶을 산다면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 시키는 변화의 주체가 될 것이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면제의 규례를 지킴으로 더불어 사는 삶을 살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약속된 복을 누리며 살게 해 주옵소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신명기 15:1~11 / 김광진 목사(제자교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다.어떤 사유로 가난하게 되었든지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아 주시며 믿는 우리들에게도 그런 자를 도와주라고 명령하시고 계신다.그래서 믿는 우리는 가난한 자를 구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이 명령은 내가 여유가 있으면 돕고 없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명령이 아니라,꼭 해야하는 명령이시다.
하나님은 바로 앞에서 우리에게 소산의 십일조를 하라 하시면서 그 십일조를 어려운 이웃과 나누라고 명하신다.'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14:28~29) 또한 절기를 지키면서도 그 경축 행사를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명하신다.'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신16:14) 두 명령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면제년 제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제를 명하고 계신다(1~3)'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인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1~3)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안식일 즉 7일에 하루는 쉬라고 명하시고,안식년 즉 6년을 열심히 일했다면 7년째는 일년 쉬라는 것이다.이때 하나님은 쉬는 동안에도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주시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군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찌니라'(레25:6~7)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시다.그래서 이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의미로 너도 혹시 어려운 이웃에게 꾸어준 것이 있다면 7년째는 부채를 상대에게 면제하여 주라고 명하신다.
모든 가정은 예외없이 예상치않는 큰 경비가 들어갈 때가 발생할 수 있다.그럴때 빚을 지게된다.한번 진 큰 빚은 감당하기가 어렵고 그결과 가정이 파탄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이를 방지하기 위해 공동체는 그런 자에게 꾸어주라는 것이다.이런경우 물론 이자는 받을 수 없다.빚을 주는 것은 이식행위가 아니라,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도와주는 구제행위다.'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출22:25) 또한 꾼 자가 갚지 못한다면 채주는 '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1)'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2)이와같이 이자는 물론이요,원금까지도 포기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올해 들어오면서 계속 복받는 것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지만 모든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지만 그중에는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다.대부분이 불 순종한 무리들이다.이 무리들이 하나님의 염려 대상이다.그냥 방치하셔도 되는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지시고 염려하시면서 복을 받은 너희가 그런 자들을 돌보아주라 고 명하시는 것이다.('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8)
본문에서도 다시 한 번 순종하면 복 받는다 는 사실을 강하게 말씀하시면서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라 명하신다.
본문 말씀에 의거해 복 받은 자가 구제할 때 가져야할 마음 자세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자.
1. 하나님의 경제원칙(4~6)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치리할지라도 너는 치리함을 받지 아니하리라'(4~6)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그래서 넉넉한 삶을 영위하게 하여 주신다 고 말씀하신다.(이 말씀은 앞에서도 몆번 강조했지만 반듯이 물질적인 것에 한정하는 것도 아니며,물질이 넉넉하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은 증거라는 사실도 아님을 말했다.)그러나 예외의 경우도 발생할 수 가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마음에 든 자라고 해도 물질적으로 풍성한 삶을 보장해주신다 고 말씀하지는 않으신다.우리가 생각해도 엄청난 복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경의 인물 중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산 사람들을 우리는 잘 알고있다.그래서'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11상) 하시면서 그런 자들을 구제하라 명하신다.
2.구제 시의 마음 가짐(7~11)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시므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구제를 하여야한다.본문은 이 사실을 몆 번에 걸쳐 강조한다.
명령을 받은 자들은 먼저 자기들이 풍요를 누리는 원천인 토지가 자기들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인식하는 것이 구제에 앞서 가져야할 마음이다.그럴때 구제를 관대한 마음으로할 수 있다.또한 이웃을 자기 몸을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할 수 있다.
1)내가 구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선물이 없었다면 현재의 나는 없다.오히려 비참한 삶을 살고있을 나만이 있다.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현재의 재산을 가지고있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4).또한 구제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도 주셨다.현재의 나의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이런 마음이 있어야 구제가 진정한 구제가 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
요한은 구제를 한 단계 상승된 사랑으로 말하면서 그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목숨을 주는 희생이라고 말한다.'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16~17)
2)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1)
이 명령에 순종하려면은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
①못 본체('네 마음을 강퍅히')하지 말라(7)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려면 나의 잣대로 그 어려운 이웃을 평가해서 도와주려는 마음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나의 평가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이시니 그저 따지지 말고 도와야 한다 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②인색한 마음('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을 버리라(7하~8)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7하~8)
자기의 것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한푼이라도 나의 정성이 들지않고 번돈이 있는가?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먹지 못하고,입지 못하고,자지 못하고, 쓰지 못한 것이 얼만가?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버리라 명하신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7~18)
③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9)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9)면제년이 가까울 때 빌려주면 분명히 받지 못할 것이 뻔하다.이런 생각이 악념이라고 말씀하신다.이런 생각은 죄다.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르시다.
④즐거운 마음으로 구제하라(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10상)
이왕 못 본체하지 않고,인색한 마음을 버리고,악념도 버리고 구제한다면 이제는 정말로 즐거운 마음으로 구제하라 는 것이다.의무감으로 하지 말고 이왕할 것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하나님은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우리의 동기에 대해서도 세심히 관찰하신다.왜 그런가?나중에 크게 보상을 해주시려는 것이다.바울은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야고보는 구제를 믿음과 연결하여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3)그럴때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6,10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6)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10하)
하나님은 명하신다.'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10상) 구제는 하나님의 요구임으로 내가 감당하면 하나님은 나의 손해난 것을 복으로 갚아 주신다.하나님의 경제에 외상이란 없다.아니 몆 배로 갚아 주신다.우리가 손해볼 일은 절대로 없다.
도우라(삶을 위한 수칙)
신명기 15:1~11 / 고신일 목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다.어떤 사유로 가난하게 되었든지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아 주시며 믿는 우리들에게도 그런 자를 도와주라고 명령하시고 계신다.그래서 믿는 우리는 가난한 자를 구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이 명령은 내가 여유가 있으면 돕고 없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명령이 아니라,꼭 해야하는 명령이시다.
하나님은 바로 앞에서 우리에게 소산의 십일조를 하라 하시면서 그 십일조를 어려운 이웃과 나누라고 명하신다.'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14:28~29) 또한 절기를 지키면서도 그 경축 행사를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명하신다.'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신16:14) 두 명령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면제년 제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제를 명하고 계신다(1~3)'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인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1~3)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안식일 즉 7일에 하루는 쉬라고 명하시고,안식년 즉 6년을 열심히 일했다면 7년째는 일년 쉬라는 것이다.이때 하나님은 쉬는 동안에도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주시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군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찌니라'(레25:6~7)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시다.그래서 이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의미로 너도 혹시 어려운 이웃에게 꾸어준 것이 있다면 7년째는 부채를 상대에게 면제하여 주라고 명하신다.
모든 가정은 예외없이 예상치않는 큰 경비가 들어갈 때가 발생할 수 있다.그럴때 빚을 지게된다.한번 진 큰 빚은 감당하기가 어렵고 그결과 가정이 파탄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이를 방지하기 위해 공동체는 그런 자에게 꾸어주라는 것이다.이런경우 물론 이자는 받을 수 없다.빚을 주는 것은 이식행위가 아니라,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도와주는 구제행위다.'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출22:25) 또한 꾼 자가 갚지 못한다면 채주는 '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1)'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2)이와같이 이자는 물론이요,원금까지도 포기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올해 들어오면서 계속 복받는 것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지만 모든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지만 그중에는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다.대부분이 불 순종한 무리들이다.이 무리들이 하나님의 염려 대상이다.그냥 방치하셔도 되는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지시고 염려하시면서 복을 받은 너희가 그런 자들을 돌보아주라 고 명하시는 것이다.('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8)
본문에서도 다시 한 번 순종하면 복 받는다 는 사실을 강하게 말씀하시면서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라 명하신다.
본문 말씀에 의거해 복 받은 자가 구제할 때 가져야할 마음 자세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자.
1. 하나님의 경제원칙(4~6)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치리할지라도 너는 치리함을 받지 아니하리라'(4~6)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그래서 넉넉한 삶을 영위하게 하여 주신다 고 말씀하신다.(이 말씀은 앞에서도 몆번 강조했지만 반듯이 물질적인 것에 한정하는 것도 아니며,물질이 넉넉하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은 증거라는 사실도 아님을 말했다.)그러나 예외의 경우도 발생할 수 가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마음에 든 자라고 해도 물질적으로 풍성한 삶을 보장해주신다 고 말씀하지는 않으신다.우리가 생각해도 엄청난 복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경의 인물 중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산 사람들을 우리는 잘 알고있다.그래서'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11상) 하시면서 그런 자들을 구제하라 명하신다.
2. 구제 시의 마음 가짐(7~11)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시므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구제를 하여야한다.본문은 이 사실을 몆 번에 걸쳐 강조한다.
명령을 받은 자들은 먼저 자기들이 풍요를 누리는 원천인 토지가 자기들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인식하는 것이 구제에 앞서 가져야할 마음이다.그럴때 구제를 관대한 마음으로할 수 있다.또한 이웃을 자기 몸을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할 수 있다.
1) 내가 구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선물이 없었다면 현재의 나는 없다.오히려 비참한 삶을 살고있을 나만이 있다.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현재의 재산을 가지고있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4).또한 구제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도 주셨다.현재의 나의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이런 마음이 있어야 구제가 진정한 구제가 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
요한은 구제를 한 단계 상승된 사랑으로 말하면서 그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목숨을 주는 희생이라고 말한다.'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16~17)
2)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1)
이 명령에 순종하려면은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
① 못 본체('네 마음을 강퍅히')하지 말라(7)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려면 나의 잣대로 그 어려운 이웃을 평가해서 도와주려는 마음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나의 평가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이시니 그저 따지지 말고 도와야 한다 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② 인색한 마음('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을 버리라(7하~8)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7하~8)
자기의 것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한푼이라도 나의 정성이 들지않고 번돈이 있는가?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먹지 못하고,입지 못하고,자지 못하고, 쓰지 못한 것이 얼만가?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버리라 명하신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7~18)
③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9)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9)면제년이 가까울 때 빌려주면 분명히 받지 못할 것이 뻔하다.이런 생각이 악념이라고 말씀하신다.이런 생각은 죄다.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르시다.
④ 즐거운 마음으로 구제하라(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10상)
이왕 못 본체하지 않고,인색한 마음을 버리고,악념도 버리고 구제한다면 이제는 정말로 즐거운 마음으로 구제하라 는 것이다.의무감으로 하지 말고 이왕할 것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하나님은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우리의 동기에 대해서도 세심히 관찰하신다.왜 그런가?나중에 크게 보상을 해주시려는 것이다.바울은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야고보는 구제를 믿음과 연결하여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4~17)
3) 그럴때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6,10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6)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10하)
하나님은 명하신다.'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10상) 구제는 하나님의 요구임으로 내가 감당하면 하나님은 나의 손해난 것을 복으로 갚아 주신다.하나님의 경제에 외상이란 없다.아니 몆 배로 갚아 주신다.우리가 손해볼 일은 절대로 없다.
네 손을 펼지니라
신명기 15:1-11 / 강릉교회
신명기 말씀은 애굽이라는 세상을 떠나서 처음 믿음의 공동체가 자리를 잡아가는지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세월을 애굽에 적응해서 생존하며 잘 살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가장 기름진 고센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바로 왕이 비돔과 라암셋 국고성을 건축하는데 히브리인들이 동원돼서 고된 강제노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점점 힘이 들자 원로들이 잊어버렸던 야훼 하나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이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세라는 걸출한 믿음의 지도자를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 40년 동안 애굽의 학문과 재주를 통달시키셨고, 그냥 가라면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기에 살인자의 너울을 씌워 애굽을 도망치게 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광야를 훈련시켰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바로 왕을 굴복시키는 것을 목격하고서야 출애굽을 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모세처럼 믿음도 광야도 훈련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불순종으로 진노하심으로 이래저래 고난과 죽음을 맞이하였고, 야훼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않고 불순종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에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드디어 요단강가에서 모세가 자신은 건너지 못하고 들어갈 수 없는 약속의 땅으로 백성들을 건너보내면서 派送式, 結團式의 復興會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요단강을 건너보내면서 이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야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으면서 살기 위해서는 애굽 땅에서 살던 방식을 다 버리고 새로운 이런 마음가짐과 태도로 살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7년 주기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Rebuild-up을 명령하셨습니다.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신명기 15:1-3)
免除<면제>라는 단어는 책임이나 의무를 지우지 아니함 법적인 용어로 채권자가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그 채무를 면제해 주는 일 매 7년마다 채무자를 그 빚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에 관한 계율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친히 경험한 믿음의 채권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나타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7년 마다 상기시켜 주는 복음의 삶입니다.
매 칠년 마다 채무를 면제 해 주면서 살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신명기 15:4-6)
2022년 하나님께서 정하신 매 칠년이라고 생각하고, 한번만 면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어떤 역사를 일으키실지 확인해 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간은 마음에 믿음이 생길 때, 행동으로 옮기려고 생각을 합니다.
생각이 확실한 믿음이 생기면 그때,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한 행동이 마음과 생각대로 성취되거나, 응답을 받으면 그때에는 확신하고, 다른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않고, 변함없이 그 길을 죽을 때까지 굳세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확신의 경험이 없으면 언제든지 변심할 기회를 찾으면서 안절부절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분명한 것이 없습니다. 늘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립니다. 항상 불안합니다. 편안함이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10)
마음으로 믿어야 의에 이릅니다.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받습니다.
의로움은 어디를 가더라도 당당함입니다. 믿음으로 <의로다> 칭함을 받기 때문에 먼저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고백하며 시인해야 구원이 완성됩니다. 이런 마음가짐과 태도여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5:7-10)
강릉가족 여러분~! 사실 人生萬事 마음먹기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기에 더 더욱 믿음으로 생각하고, 마음먹고,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하게 이루어 주실줄 저는 믿습니다. 62년 동안 강릉교회와 우리는 믿음으로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랑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으로 복을 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세의 설교에 면제라는 단어와 손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명기 15:11)
심은 대로~ 믿음 대로~ 하나님께서도 손으로 응답하십니다.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5: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시편 81:10)
피조물 가운데 욕망덩어리는 양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에서 최고점에 있는 호랑이, 사자, 늑대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욕망덩어리는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이 욕망으로 인해 사탄의 시험에 빠져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의 중심에는 더 많이, 더 높이,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꽈리를 틀고있기 때문입니다. 선천적으로 인간은 움켜쥐는 것은 저절로 잘합니다.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은 잘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나누는 것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오직 믿음으로만 섬김과 나눔과 주는 자의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입을 크게 열면 입을 벌린 만큼 채워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설교도 섬김과 나눔과 사랑을 내 손이 한 만큼, 내 손이 닿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복으로 갚아주시고, 채워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여러분 자신과 가정이 먼저 복음의 은혜와 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받아 누리는 복음의 은혜와 복으로 손을 넉넉하게 펴서, 강릉교회와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이롭게 하는 주는 자의 복을 누리는 축복의 통로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면제의 삶
신 15:1-11
말라기 3:8,9절을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교인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안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공포의 구절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를 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고, 그것은 저주를 받는 길이다'라는 말로서 교인들에게 엄포를 놀 때 본성적으로 저주를 두려워하는 인간들로서는 십일조를 안한다는 것은 실로 모험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울며겨자먹기로 십일조를 하면서 그 돈이 헛된 돈이 되기를 싫어하는 마음에 십일조로 인해서 자신에게 복이 주어지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는 말씀에 기대를 걸고 십일조를 하게 됩니다. 즉 저주를 피함과 동시에 복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함으로서 10절의 말씀이 자신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바쳤다고 해서 복을 주고 돈을 바치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를 내리는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꾼들이 상상해 낸 사이비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돈을 기준으로 해서 복과 저주를 나누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뿐만이 아닙니다. 종교 행위(예배, 전도, 구제, 선교, 봉사, 기도, 성경 읽기 등등)를 기준으로 해서도 복과 저주를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복안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복,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자기 자식보다 귀한 것이 있습니까? 내 자식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귀한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잘하는 사람에게 아들을 주셨습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성경 보는 사람에게 아들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즉 인간의 행위는 전혀 보지 않으시고 택한 백성들에게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복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안하면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까? 오늘날의 십일조는 단지 소득의 십분의 일을 교회를 위해서 내어놓는 것이지 구약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십일조는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말씀의 의미도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내어놓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십분의 일을 내어놓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면 결국 나의 소득에서 하나님의 것은 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십분의 구는 내것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적질은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챙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도적질하는 것으로, 그리고 저주를 받는다는 심한 말씀으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까?
말라기 당시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 같이 스스로 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점차 희미해져 갔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 할 때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고 함께 먹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매 3년마다 소산의 십분의 일을 내어서 저축을 해야 했는데, 그 용도는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그리고 나그네 고아 과부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나 혼자 즐겁게 먹고 마시고 배부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득이 없는 자들과 함께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 나누는 십일조 였던것입니다. 이것이 말라기에서 말씀하는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배려에 대해서 소홀해져 갔으며 내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으로 없는 자의 배고픔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등 약자들을 위해서 3년마다 따로 십분의 일을 저축하라는 규례는 이웃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일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하나님 성전의 창고가 비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규례를 세우신 것은, 단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 속에 가난한 자들을 있게 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수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만약 가난한 자들이 불쌍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다면 굳이 인간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가난한 자들에게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구제 역시 단순히 없는 자들을 돕는 차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회 속에 가난한 자들을 있게 하신 것이나, 그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발전하고 번영한 힘있는 국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국민이 단결해서 나라를 위해서 힘써 일하는 국민성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사를 열심히 시행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만 애굽에서 나올 때의 이스라엘을 원하실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는 모두가 종이고 나그네고 객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즉 너나 할 것 없이 약자였습니다. 모두가 고아이고 과부 같은 신세였습니다. 부자 가난한 자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구출하셔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은 애당초부터 자기 것이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약속의 땅에서 씨를 뿌리고 경작을 해서 추수를 한다고 해도 그 수확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단지 십분의 일을 낸다고 해서 십일조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득에서 처음 난 것, 맏물이 곧 십일조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난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치고, 다시 그것으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우린 여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 있는 자임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다' 이것이 약자의 정신이고, 여전히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위치에서 살아갈 때 가질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약자는 하나님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우린 하나님 때문에 살아가는 민족이다'는 이 정신에 대해서 결코 희미해지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약자의 정신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정신이 온 국가에 퍼지는 것이 이웃 사랑의 내용이고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결국 가난한 자는 이것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서 이스라엘 사회에 있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풍족해지기 시작했을 때 과거의 자신의 위치와 처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망각해 버리고 자기 노력과 힘으로 얻은 것처럼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아버립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도 나를 복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로 인해서 소외된 계층은 자연히 약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약자가 소외되고 무시되고 그들이 굶주린다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이러한 정신 아래서 바라볼 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즉 오늘 본문은 앞서 나오는 십일조의 정신이 이스라엘 내부에 확산되었을 때 나타나야 할 이웃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행하기도 무척 곤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이러한 본문을 대하면서 상당한 곤란과 번민에 처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희색이 만면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이용하여 득을 보려는 욕심도 생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7년을 '면제년'이라고 정하고 7년이 되면 이웃에게 돈을 꾸어준 사람은 그 돈을 면제하라고 합니다. 또 8,9절을 보면 가난한 형제가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하고, 혹 면제년이 가까웠다고 해서 주지 않으면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없는 자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지만 있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무거운 짐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7년이 되면 면제를 해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꾸어주기를 요구하면 꾸어주라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돈이 있어야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있는 사람들에게 빌려준 것을 7년째에는 면제해 줘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물론 적은 액수라면 충분히 면제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큰돈이 아닐 때는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기 위해서도 충분히 면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돈일 때는 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면제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우선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규례는 단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면제하라는 말씀도 7년이 지나도록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가난한 자의 사정이 딱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 세우신 규례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본문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도웁시다'라는 교훈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의 말씀을 인간의 도덕과 윤리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매 칠 년 끝에 면제하라"고 합니다. 매 칠 년이란 안식년을 말합니다. 즉 면제는 아무 때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년 끝에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식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로 인해서 깨어진 안식이 하나님의 희생 덕분으로 회복되는 날입니다. 즉 하나님의 희생으로 인간의 죄가 면제됨으로 이스라엘이 안식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노동을 쉼으로서 맛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동의 대가로 안식을 누리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면제받음으로 안식을 누리게 된 자로서 그 인식을 배우고 가르치라는 의미로서 빚을 면제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돈을 빌려준 사람은 면제해 줌으로서 '나도 하나님의 희생 덕분에 죄가 면제됨으로서 안식을 누리는 자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가난해서 돈을 갚지 못한 자는 면제받음을 통해서 역시 '나는 하나님의 면제해 주심 덕분에 안식을 누리는 자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면제를 모를 때, 그 사람에게는 '면제하라'는 규례가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 18:21-35절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의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고 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은 결국 주인으로부터 받은 면제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면제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의 면제를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에게는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희생에 의해서 빚이 탕감되어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쏟아 부음으로 우리의 죄의 빚을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십일조는 맏물이며, 신약에서 맏물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맏물을 받으시고 그 맏물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우리는 맏물을 먹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맏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예수님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오늘도 우리는 그 몸과 피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십일조의 정신이 확산되어 있는 이스라엘이라면 안식년 끝에 빚진 자를 면제한다는 것은 능히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의 빚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자였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의 실체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죄의 빚을 탕감 받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복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자기에게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지 못해서 쩔쩔매는 가난한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자신의 거울인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발견하고 그렇게 저주 아래 놓인 죄의 빚을 갚아주셨기 때문에 안식을 누릴 수 있었음을 안다면 그 감사함과 은혜 안에서 빚을 면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면제하라'는 규례를 통해서 원하시는 것은 서로 빚을 탕감해주는 아름다운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면제를 마음에 담고 그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되는 것이었습니다.
'면제하라'는 말씀 안에는 우리 죄를 면제하신 하나님의 희생 안에서 구원을 확인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면제해준다는 것은 빚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지 빚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 죄를 면제하신다는 것은 죄의 값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지 죄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죄의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값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확인하라는 것이 면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십일조의 규례나 면제의 규례 등을 통해서 확인하며 살아가도록 하셨지만 오늘 우리들은 그런 규례가 필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법의 완성자로서 규례의 정신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규례를 통해서 은혜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확인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이스라엘은 복을 받게 되는데, 그 복은 가난한 자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린 한가지 이상한 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명령대로 지켜 행하면 복을 준다는 것은 흔히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복을 받는다고 할 때 우리의 상식은 말씀대로 행하는 나자신에게 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복받았다는 것은 내가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남이 잘 된 것을 가지고 내가 복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복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이것이 말씀을 듣고 명령을 다 지켜 행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결국 개인적인 복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지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것은 가난했던 자들에게 돈을 줘서 가난을 없애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물질의 부유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것은 이스라엘 모두가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의 부유함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 자체가 복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자로 오셔서 율법을 이루심으로 그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자가 아니라 은혜의 부유함을 누리고 사는 복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자가 참으로 가난한 자이며 불쌍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의 부유함으로 사는 자는 가난한 자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7-10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는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 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인간 사회에서 가난한 자란 귀찮은 존재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국가에 도움이 안됩니다. 오히려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자기 주위에 가난한 자가 오는 것을 꺼려합니다. 부유한 친척은 반갑게 맞이하고 가까이 하면서도 가난한 친척은 멀리 하려고 하고 만나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만나면 도와줘야 할 대상이지 나에게 도움을 줄 힘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사회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사회는 그러한 모습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고 손을 움켜쥐지 말고 요구하는 대로 꾸어주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면제년에 빚진 것을 면제해주는 정신이 살아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7년째만 은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죄의 빚을 면제받은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내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부유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통해서 나눠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바로 그 도구로 쓰시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은혜의 부유함이 나눠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살므로서 모두가 하나님의 복안에 거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신자는 나누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돈만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는 자는 돈을 나누면 되고, 건강이 있는 자는 건강을 나누면 됩니다. 병이 든 사람은 병든 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면 됩니다. 이것이 모두가 부요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나누어야 할 형제이고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 이웃은 내가 찾아서 선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웃을 찾아서 그 다음에 그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은 내가 사랑할 대상을 찾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찾게 되면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7절에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라고 말씀합니다. 즉 내가 어디에서 살든지 이웃은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사랑할 대상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상황이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지독한 가난뱅이가 왔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상황입니다. 문제는 사랑할 준비가 된 마음으로 살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눅 10:30-37절에 보면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강도 만나서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주신 상황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상황을 피합니다. 사랑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랑할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와 사마리아 사람은 한쪽은 도움이 있어야 살아날 수 있는 처지이고, 한쪽은 도와줄 수 있는 건강과 여유가 있는 사람으로 만난 것입니다. 즉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가 자신을 도와줄 힘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자비와 불쌍히 여김 받는 관계가 이웃 관계입니다. 따라서 내 이웃은 누구냐? 라는 질문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을 무능한 자라는 위치에 놓고 볼 때 누가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을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 평소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자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던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자를 만나게 해도 그 사람을 자기와 같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자로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평소 많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라는 교만으로 살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만들어 주신 축복을 누리는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강도 만난 자를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 수 없었고 그런 마음에서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나타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강퍅히 대하지 말고 손을 움켜쥐지 말고 요구하는 대로 꾸어주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혹, 본문의 말씀을 대하면서 '그렇다면 앞으로 누가 나에게 돈 좀 꾸어달라고 하면 거절해야 하나 빌려줘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결국 끝까지 나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겠다는 고집밖에 되지 않습니다. '돈을 꾸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꾸어주고 싶으면 꾸어주십시오. 본문의 말씀은 너희들이 주님의 사랑을 아는 자로 살아가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는가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신 가난한 자를 통해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런 부유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신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강제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자와 나누도록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기적의 일을 깨닫고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살도록 하십니다. 기적의 일이란 도저히 탕감 받을 수 없는 빚을 진 우리들을, 강도 만나서 남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었던 우리들을 죄를 면제해 주시고 찾아오셔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큰 일 덕분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무능하고 가치 없는 우리들이 대속의 은혜 때문에 새생명을 누리고 복안에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자기의 무능함을 알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대하도록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은혜를 깨달은 자는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자신에게 있는 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눌 수가 없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크게 보인다면 상대적으로 세상의 것들은 작아지고 의미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럴 때 아무런 부담 없이 나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크신 분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크신 분으로 자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것은 작아지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의 자리에서 여러분이 만나게 되어지는 모든 사람을 자신과 같은 위치에 만나고 여러분을 통해서 은혜의 부유함이 나눠지기를 바랍니다.
면제의 규례
신 15:1-11
하나님께서는 성민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행해야 할 바를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난 시간에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제 3의 십일조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제 3의 십일조는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십일조입니다. 15장에서 모세는 구제와 관련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5장에서는 세 가지 규례가 나타나는데 그 첫째가 면제규례(1-11)입니다. 두 번째는 종을 해방시켜 주는 규례(12-18)요, 세 번째는 초태생 규례입니다(19-23). 이 세 가지 규례 가운데서 오늘은 안식년에 꼭 실천해야 하는 채무에 대한 면제 규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개개인에 대해서 무시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오늘 본문은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특히 궁핍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면제 규례나 해방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본받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방인들의 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는 사람들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면제 규례(1-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매주 안식일을 지켜야 했고, 매달 초하루 월삭을 지켜야 했습니다. 구제를 위해서 삼년마다 십일조를 드려야 했고, 칠년 마다 면제년을 지켜야 했습니다.
레 25:4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레 25:5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민들에게 6년은 경작하고 7년이 되는 해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안식년이라고 부릅니다. 이 안식년이 돌아오면 돈을 꾸어준 사람은 그 빚을 면제해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요즘 세간의 화두가 되고 있는 ‘양극화 해소 방안’입니다. 이런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양극화는 심화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다고 말씀합니다.
신 15: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
여기에서 “꾸어주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내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쓰고 남도록 축복해 주셨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자기가 쓰고 남은 것을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또 하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통해 내가 그 사람보다 더 큰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빚을 져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7년이 되도록 빚진 것을 갚지 못하였다면 7년이 지난 안식년에는 빚을 면제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빚진 자는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기회를 갖게 되고 탕감을 해 준 사람은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물론 이 은혜의 해는 가장 큰 해방을 누리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일곱 번째 안식년이 지난 다음해인 50 년째는 모든 종들과 눌린 자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는 희년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면제년과 희년에 빚을 탕감 받고 종에서 해방되는 것처럼 우리를 모든 죄의 빚에서 놓아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면제년의 실체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었던 모든 빚을 다 탕감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면제년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빚을 진 사람들이 6년 동안 얼마나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칠년이 될 때 많이 졌거나 적게 졌거나 불문하고 완전히 면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그 성민들에게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으로, 은혜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이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은혜를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은혜를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가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면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습니다. 그 많은 빚을 주인은 탕감하여 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 모두가 잘 살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여 빚을 지고 살 수 있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과부 이야기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엘리사의 기적이 없었다면 그 과부는 아들을 종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면제년 규례를 정하여 주시고 그것을 반드시 실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규례는 하나님께서 백성들 간에 균등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 마련하신 놀라운 은혜의 규례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규례(3절)
이방인들에게 면제년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똑같은 특권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느 곳에서라도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나 이방인들은 그와 같은 혜택에서 제외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엡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약속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습니다.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하나님은 분명 “이웃”과 “이방인”을 구분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채무 면제 규례의 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계명과 규례는 그분의 두 가지 중요한 성품인 사랑과 공의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1)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기인된 규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난한 자와 고아, 과부 등과 같은 약자에 대해서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23:24; 출 23:11; 레 19:10; 사 10:2; 렘 7:6). 마찬가지로 안식년마다 채무자에 대한 빚 독촉을 면제해 주라는 규례 역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출된 일례인 것입니다.
2) 안식년 제도를 효율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상호 연결 규례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년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토지를 경작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레 25:2-7). 따라서 채권자는 그간 빌려 준 빚이라도 받으려 할 것이나 채무자 역시 1년 동안 아무런 수입이 없기 때문에 빚을 갚을 처지가 못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빚을 독촉하면 채무자는 빚을 갚기 위해 안식년임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경작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될 경우 안식년의 규례는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년 채무 규례는 그러한 사태를 방지할 수 있는 좋은 상호 연계 규례인 것입니다.
3) 재물의 주인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 주는 규례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가진 재물이 자기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안식년이 되어도 결코 자기의 채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제정해 놓으신 안식년 채무 면제 규례를 정하심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우주 만물의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4) 자신이 빚진 자인만큼 동일한 처지에 있는 자를 긍휼이 여김이 당연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규례입니다(마18:21-35).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은 자일 뿐 아니라 그분께서 제공해 주시는 빛과 공기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자신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적이 없다고 소리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은혜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갚으려 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도리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선 나그네와 헐벗은 자, 주린 자, 병든 자, 고아 등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보는 것이 곧 당신께 은혜를 갚는 길이 된다고 교훈하고 계신 것입니다(마25:31-40).
면제년의 규례를 지키면?
신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5 4절과 같음
신 15: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치리할지라도 너는 치리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면제년의 규례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정녕’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녕 주실 복은 어떤 것입니까?
1)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4절).
2) 여러 나라에 꾸어주는 자가 되리라(6절).
3) 여러 나라를 치리하는 자가 되리라(6절).
4) 범사와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을 받습니다(10절).
여러분 가만히 세계 지도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나라마다 복을 받아 남에게 꾸어주고 남을 치리하는 나라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된 것은 그 나라의 국민들이 베풀기를 좋아하는 국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자여서 나누어 주기를 좋아합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근검절약하면서 남을 돕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언제나 땅에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7-11절에 ‘반드시’라는 말씀이 세 번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구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구제는 반드시 하되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라-쓸 것을 넉넉히 주라.
2)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악념이란 ‘벨리알’인데 무익하고 쓸데없는 생각, 경건치 않는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호소하리니 죄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3)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하나님은 마음까지 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채권자들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는 채무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없었다면 역시 비천함에 처했을 것입니다. 다만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물질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관대하게 다루셨다면 그들 역시 다른 사람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채권자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오늘날 에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해야’ 합니다(4-5).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하기로 하신 것(‘네게 허락하신 대로’, 6절)을 주심으로써 언약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그들의 순종이 공동체의 빈곤을 몰아낼 방도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서로를 돌보는 때가 올 것을 기대하십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채권자들이 명령에 대해 순종하려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해 동안 채무를 거두어들이려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약속은 분명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6절)
4)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해야 합니다.
관계라는 문제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채권자는 동료 이스라엘 사람을 성가신 채무자, 자신의 사업에 손해를 끼치는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가 비록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원수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빚을 준 사람은 평안해도 빚을 진 사람은 언제나 꺼림칙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맡은 것을 잘 관리하는 충성된 청지기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의 짐을 함께 져 주는 사람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그런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준행해야 할 세 규례
신명기15:1-23 / 차용철 목사
앞 장에서 십일조에 대한 조항을 말하면서 후반부에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십일조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 같은 극빈자를 긍휼히 여겨야 할 것에 대해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안식년에 이웃의 채무에 대해 면제해 줄 것과 종을 해방시켜 주어야 할 규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안식년 채무 면제 규례(1-11절), 히브리 종 해방 규례 (12-18절), 초태생 규례(19-23절)로 되어 있습니다.
1. 안식년 채무 면제 규례 (1-11절)
구약의 모든 절기는 3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산술역법(算術曆法)에 따른 절기로서 안식일과 월삭과 신년절과 속죄일과 안식년과 희년이 있고, 둘째는 사건에 따른 절기로서 유월절과 무교절과 수전절과 부림절이 있고, 셋째는 농경역법(農耕曆法)에 따른 절기로서 초실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이 있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은 산술역법에 따른 절기에 속합니다. 안식년에 대한 규례는 출애굽기23:10-11과 레위기25:1-7과 신명기15:1-15에 언급된 내용입니다. 안식년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키지 않습니다 (골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년이 가지는 목적과 영적인 교훈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합니다.
‘안식년’(安息年)은 ‘편안히 쉬는 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면제년(免除年)이라고도 합니다 (신31:10). 안식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해로부터 7년째 되는 해입니다. 안식년은 하나님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어 영적 안식을 주실 것이며 종말에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주실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주신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은 느끼게 하기 위해서 2가지 실천적인 규례를 주었습니다. 하나는 농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해 동안 땅도 쉬게 하고 땅 주인도 쉬고 종들도 쉬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안식년에는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면제해주고 독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안식년에는 그 해까지 진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주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안식년 한 해 동안에는 빚 독촉을 하지 말라는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안식년에는 빚진 사람을 빚에 대한 고통에서 자유하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해로부터 매 7년 끝(6년 가을 이후)에는 면제하라고 했습니다. 채주는 꾸어준 빚을 면제하고 독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언약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는 면제하지 않고 독촉할 수 있지만 형제와 이웃에게는 면제하고 독촉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 가난한 자가 없게 해 주고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나라가 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1-6절). 안식년에 채무를 면제해 주라는 말씀은 안식년에는 그 때까지 진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주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안식년에는 빚 갚을 의무를 면제하여 빚 독촉을 하지 말라는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이든 분명한 것은 공동체 일원 가운데 빚을 진 사람이 있으면 안식년에는 고통에서 자유하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돈이든 물건이든 식량을 꾼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거나 생각지 않는 어려운 상황을 당한 사람일 것입니다. 더욱이 안식년에는 농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빚을 갚을 능력이 더욱 없습니다. 그런데 안식년에 빚을 독촉하게 되면 하나님이 안식년을 주신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더욱 고통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년에는 빚에 대한 압박에서 해방시켜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동체에서 가난한 자들의 고통이 줄어들어 하나님이 주실 안식에 대해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공동체를 부요하게 해 주고 번영하게 해 주어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손을 움켜쥐지 말고 손을 펴서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했습니다.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고 주라고 했습니다. 땅에는 항상 가난한 자들이 있으므로 형제 중에 곤란과 궁핍 가운데 있는 자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손을 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마음에 악한 생각을 가지고 면제년이 가까웠다 생각하여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 그가 하나님께 호소할 것이고 그러면 죄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7-11절). 가난하여 생계가 어려운 불쌍한 이웃에 대해 도와줄 마음을 굳게 닫지 말고 그들이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욕망을 따라 원하는(want) 것을 다 주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나 회복을 위해 필요에 따라 원하는(need) 것을 다 충분하게 주라는 것입니다. 만일 면제년이 되면 꾸어준 것을 아주 돌려받지 못하거나 1년 동안 지체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빌려 주지 않거나 혹은 빌리려는 이웃이 그런 의도를 가진채 빌려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으로 여겨서 빌려주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공동체 구조에 대한 불신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생계 문제로 극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노블레스 오빌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귀족은 책임이 있다’는 뜻의 프랑스어로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거 유럽에서 영주들이 농부들이나 귀족들이 노동자들을 부려먹기만 했더니 자기들도 망하게 된데 대한 인식에서 나온 이론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땡볕’이라는 영화가 있었는 모양입니다. 일제시대에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상황을 영화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징용에 끌려가고 여자들만 남아 소작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주는 땅을 논밭을 빌려주고는 소작료를 내게 했지만 흉년이 들어 소작료를 내기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지주는 아자들에게 소작료를 강요했고 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몹쓸 짓을 했습니다. 독립된 후 점점 민주화가 되어 제도가 바뀌기는 했지만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는 성장 중심의 정책을 쓰든 분배 중심의 정책을 쓰든 결국은 부요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강제로 부요한 사람들의 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결국 부요한 사람들이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부작용이 상쇄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생각하면서 생계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전답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갖다 놓았고 사도들은 그것들을 극빈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행2:44-45).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고아와 과부같은 극빈자들을 명부에 올려놓고 주기적으로 도왔습니다 (행6:1, 딤전5:3). 오늘날 교회적으로도 구제 사역을 해야 하며 성도 개인적으로도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야고보서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했고, 요한일서3:17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어려운 당한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한 자유와 평안과 안식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심리적 빚도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자기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용서’(容恕)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에 대해 변상을 요구하거나 정죄하거나 처벌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심리적으로 보면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 지불해야 할 의무를 사면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 가진 심리적 부담감과 책임감을 면해주므로 자유를 얻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용서를 해야 자신이 상처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계속 발전되는 부정적인 요인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용서를 해야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도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이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잘 수 있어도 때린 사람은 발 뻗고 잘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계속 용서해 주지 않으면 평생 마음에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용서를 해 주어야 마음의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많습니다. 그 상처를 준 사람이 가족이든 교회 목회자나 성도이든 우리도 고통 가운데 있지만 그들도 고통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뉘우쳐도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용서를 빌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서 그 부담을 덜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생각하면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가 살면서 잘못해도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마태복음18:23-35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이 결산하기 위해 빚진 관리들을 불러 빚을 갚도록 했습니다. 10,000달란트(7조원) 빚진 자가 용서를 빌기에 탕감해 주었습니다. 탕감 받은 관리가 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1천만원)을 빚진 동료를 만나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가 용서를 빌었지만 용서하지 않고 고발하여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관리들이 딱하게 생각하여 임금에게 알렸습니다. 임금이 그를 불러 악하다고 책망하고 10,000달란트를 갚으라고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18:35에 보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릴 용서해 주신 것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할 비율은 70만분의1입니다. 죄로 죽어 지옥갈 죄를 용서하여 천국가게 해 준 것에 비하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 큰 은혜를 받은 자는 다른 사람을 마땅히 용서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안식년에 빚진 자를 면제 해 주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10절에 보면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빚진 자를 면제해 주면 하나님이 더 많은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잘못한 자를 용서해 줄 때 하나님도 우릴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6:14-15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라고 했습니다 (18:35, 막11:25, 눅6:37).
2. 히브리 종 해방 규례 (12-18절)
종을 해방시켜 주는 제도는 출애굽기21;1-6에도 나와 있습니다. 동족 종을 데리고 있는 경우 7년째 해에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하라고 했습니다 (12절). ‘일곱째 해’는 안식년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종이 된 때로부터 6년이 지난 7년째를 말합니다 (18절, 출21:2). 히브리인들이 종이 되는 경우는 가난과 빚으로 스스로 종이 되는 경우도 있고 (레25:47), 가난과 빚으로 부모에 의해 팔린 경우도 있고 (느5:5), 범죄로 인해 종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습니다 (출21:1-3). 동족 히브리인 가운데 어떤 연유이든 종으로 팔려온 사람이 있으면 6년 후 7년째에는 자유롭게 놓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을 놓아줄 때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하나님이 복 주신대로 그에게 후히 주라고 했습니다 (13-14절). 종을 놓아 보낼 때 가축과 곡식과 과실 등 가진 소유를 여유있게 충분히 주라는 것입니다. 종은 가난이나 빚으로 팔린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이 주인에게 놓임을 받는다 하더라도 자립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생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종으로 전락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으로 일한 대가는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품꾼 한 사람의 1년 임금이 약 10세겔이었기 때문에 종 한 사람이 6년 동안 일한 품삯은 60세겔에 해당하는 일을 해준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종 한 사람의 값이 30세겔이었으므로 그 값을 제외 한다 하도라도 30세겔 이상의 노동력을 제공한 것입니다. 18절에 “그가 여섯 해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실은 종은 낮에만 일한 것이 아니라 밤낮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품꾼들보다 품삯을 배나 더 받을 만큼 품꾼들 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종이 만일 7년째에도 가지 않고 계속 남아서 동거하길 원하면 송곳을 다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영구히 종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여종에게도 해당되었습니다 (16-17절). 종이 자유함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아 있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잘 해 주어서 계속 주인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 종살이를 하는 동안 주인의 배려로 결혼을 했다면 자신을 떠나도 처자는 주인의 소유로서 계속 주인의 종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처자와 함께 살기를 원하여 계속 주인의 종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종이 스스로 종으로 남아 있기를 원할 경우 그 종을 재판장에게 데려가 법적으로 확인한 다음 그의 귀를 집 대문이나 대문기둥에 대고 송곳으로 뚫으라고 했습니다 (출21:5-6). 당시에는 귀를 예속과 복종의 기관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귀에 구멍을 뚫는 것은 주인과 주인의 집에 죽을 때까지 예속된다는 상징을 가진 의식이었습니다. 그 규례는 여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습니다. 7년째에 자유를 준 것도 종의 인권을 존중한 것이지만 7년째에도 남기를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허락해주는 것도 종에 대한 인권을 존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남기를 원하는 종에게 강제로 떠나게 하는 것은 그 종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년째에 떠나든지 남든지 종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하나님이 거기에서 속량해 주신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15절). 종들에게 7년째에 자유를 주고 그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재물을 충분히 주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또한 7년째에도 자유를 포기하고 주인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를 받아주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종이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배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의 근거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으로 있었으나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셨고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많은 보화와 의복과 가축과 함께 나오게 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득이하게 종이 된 자에 대해서 그같은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18절). 우리도 악령들과 죄와 죽음과 내세형벌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 받은 것을 생각하여 우리도 우리에게 예속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고 존중해 주어야 하고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3. 초태생 규례 (19-23절)
소와 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부리거나 털을 깎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매년 온 가족이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19-20절). 사람이든 가축이든 곡식이든 처음 것을 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는데 (출13:2,12, 22:29-30), 여기에서는 소나 양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소는 일을 부리고 양은 털을 깎아 소득을 얻습니다. 그런데 소나 양의 처음 난 수컷은 세속적 목적에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온 가족과 함께 소나 양의 처음 난 수컷을 하나님이 지정한 중앙 성소(예루살렘 성전)에서 화목제로 드리고 제사장 몫을 제외한 나머지로 성소 뜰에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레7:15-17, 30-34). 그러나 소나 양이 흠이 있어 절거나 눈이 멀거나 한 것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가축은 정한 자나 부정한 자나 다같이 노루와 사슴 같은 일반 짐승을 잡아먹는 것처럼 잡아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21-22절). 소나 양 가운데 초태생은 제물용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리되 흠이 있는 것은 제물용으로 삼을 수 없으니 식용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려 하실 때 바로왕이 굴복하지 않자 10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그 중에 10번째 재앙이 장자 재앙이었습니다. 사람이든 가축이든 사람의 장자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가 죽음에서 살아남는 방편으로 재앙이 내려올 밤이 되기 전에 어린 양 1년 된 수컷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해 장자를 죽이는 천사가 그 집을 그냥 넘어가므로 이스라엘의 장자가 죽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축의 처음 난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이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에 대해 물으면 출애굽 때의 죽을 가운데서 살린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출13:14-16). 처음난 초태생은 대표성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인다는 의미로 그 대표인 장자만 죽이는 재앙을 내린 것이고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은 살린다는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죽을 가운데서 살린 것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택한 백성을 대표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시므로 모든 택한 백성이 살게 될 것을 예표합니다. 택한 백성이 아담의 범죄로 죽어 형벌을 받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대속적 죽음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롬5:12,15). 소난 양의 처음 난 것을 제물로 드리되 흠있는 것은 드리지 말라고 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제물로서 온전한 대속적 죽음을 죽으실 것을 예표합니다 (고후5:21).
소나 양의 처음 난 것은 제물용으로 드리되 흠 있는 것은 식용으로 사용하게 했는데 식용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그 피를 먹지 말고 물 샅이 땅에 쏟으라고 했습니다 (23절). 피를 먹지 말고 쏟으라는 명령은 12:16,23-24에도 언급된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피에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피와 생명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피를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창9:4, 레17:11, 신12:23). 피를 먹지 못하게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자들의 행위를 따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이방 우상숭배자들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피를 마시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런 사악한 행위를 본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 생명을 존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는 피에 생명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신 생명을 경시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 제사 원리에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 값은 사망(죽음)이었습니다 (롬6:23). 하나님은 죄를 사해주기 위해 자기를 대신할 제물(짐승)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제물의 피를 흘려 제단에 뿌리라고 했습니다. 생명이 피에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피를 흘리는 것은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죽게 된 것은 죄 값을 지불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죄 값을 지불한다는 것은 죄가 속함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짐승을 대신 피 흘려 죽게 함으로 범죄한 자가 죽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히9:22).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희생 제물이 피 흘려 죽게 되므로 범죄한 백성들을 죄가 속해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택한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죽으므로 그를 믿는 자들이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골2:17, 벧전2:24, 1:18-19, 엡1:7).
피 문제에 대해 사도행전15:28-29에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이방교회의 놀라운 선교효과를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割禮)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교리적 문제와 선교적 문제를 야기하는 주장이었습니다. 바울,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변론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교회로 보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공회로 모였는데 거기에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부가적으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해야 할 것을 결정합니다. 그렇게 결정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유대인 출신들은 할례를 받았고 또 할례를 받아야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이방인들은 할례가 외과적 수술인데다 당시 사회에서 불경하게 보이는 모습 때문에 할례 받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의 주장을 들은 예루살렘교회 사도들과 장로들은 할례를 요구하므로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힘들게 하는 멍에를 벗겨 주기 위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공회에서 예루살렘교회 사도인 야고보가 사도행전15:19-20에 보면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결정하고 말 경우 유대교회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할례 멍에를 벗겼으니 이방교회에 좋은 결정이 내려졌지만 유대교회는 전통적으로 할례를 받아왔기 때문에 불평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이 좋게 생각할만한 규례를 정했습니다. 그것이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대체로 유대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철저히 지키는 편이었고 이방교회에서는 그렇치 못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가적인 결정은 할례 문제를 이방교회에 양보하므로 섭섭할 수 있는 유대교회의 마음을 안정시킨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피를 먹는 일에 대해서 초대교회 때는 다소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산 동물의 피를 마시는 것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약용(藥用)으로 사용하거나 음식 안에 공재(共在)된 경우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피 자체로 만든 음식의 경우가 있습니다 (선지국, 순대). 그런 경우는 위의 예루살렘 공회에서 피 문제를 부가적으로 결정하게 된 배경을 생각하면서 각자 양심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結言>
우리는 초태생 규례와 피에 대한 규례를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하여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표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그와 그의 대속을 믿으므로 죄 사함과 칭의와 중생과 양자와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피 흘려 생명을 내어 주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벧전2:24).
그리스도인의 구제 원리
신명기 15:7-11(누가복음 14:12-14)
본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제를 함에 있어서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느냐에 대해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이 말씀에서 남을 돕는 구제의 원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실로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며(레 25:35-3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에(히 13:16) 이 지상에서 성도가 마땅히 실천해야 할 빛된 행동입니다. 그러면 구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구제는 은밀히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을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그 일로 칭찬 듣기를 좋아합니다. 더구나 남을 도와줄 때는 자기를 과시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마 6:3, 4절에서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고 구제의 원리에 대해 규정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구제란 사람 앞에서 칭찬 받고 상금을 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영혼 한 영혼을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고, 그것은 하늘 창고에 쌓여 하나님이 주실 상급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 사람보다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은밀한 가운데 구제하시기 바랍니다.
2. 구제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제를 하면서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갚을 것이 하나도 없는 자에게 구제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눅 14:12-14절에서 갚을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베풀었을 때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베풀고 그들에게 보답을 받는다면 진정한 구제가 아니며, 우리에게 진정 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진정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베풀어야 장래에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을 것이 있다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도적도 없고 좀도 먹지 아니하는 하늘 창고에 귀한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눅 12:23). 이 땅에서 미리 그에 대한 상을 받는다면 주님 앞에 서는 날에는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반드시 기억합시다. 그래서 그 누구도 돌보지 않는 정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줍시다. 형편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야 친교지 그게 어찌 구제라 할 수 있겠습니까?
3. 구제는 당연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구제는 우리가 우리 것으로 남에게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와 선행의 재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가 나눠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눅 12:42, 43절에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재물을 가지고 단지 대신 전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구제할 때 가져야 할 당연한 청지기적 정신입니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내 것을 가지고 준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대개 구제하는 것이 아깝고 힘든 것입니다. 이렇게 아까운 마음을 가지고 억지로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또한 축복의 근거가 되지도 못합니다.
이 구제가 내가 해야 할 당연한 일임을 자각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베풀고 나눠 줄 때, 그 마음은 복된 마음이 되고 그런 자세를 하나님은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행 20:35절에 보면 "베푸는 것이 복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께 한없고 끝없는 사랑과 은혜를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그 빚을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면 그 빚은 누구에게 갚아야 합니까? 바로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웃에게 갚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변의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나눠줄 때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은혜 갚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베풀고, 갚을 능력이 없는 자에게 베풀고, 그리고 당연한 마음으로 베풀어서 복된 성도로서 하나님께 창찬받는 자들이 됩시다. -아 멘-
복 주시는 하나님
신명기 15:1-6 / 김제중앙교회
[암송구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엽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명기 15:4-5)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돌보고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들의 책임이다.
1. 가난 채무 종살이를 면제하라. [2,3]
7년 안식년에는 면제년으로서 그 해 동안은 토지를 휴경하였으며 종들을 풀어주었다.
이것은 여러 은혜의 행위 가운데 하나로서 돈을 빌리고서도 그해 전까지 갚을 능력이 없었던 사람들은 이 면제년에 그 부채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율법상으로 채권자는 빌려준 돈을 결코 되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법은 법률상 빚의 영원한 면제를 말한다.
그 법적 근거는 (1) 안식년은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2). (2) 어떤 이스라엘인이라도 극한의 빈곤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마침내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4,5).
2.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채무자를 위한 법이 있다.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펴라, 쓸 것을 넉넉히 주라[7,8] (1)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끊이지 않게 되리라는 점을 상기 시킨다(7,11절).
우리가 혹 자비를 베풀어 빌려주어야 할 경우를 당했을 때 빌려 가는 사람을 신용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빌려주어야 하며 이 세상에서 다시 되찾으리라는 희망은 품지 말고 의로운 자들의 부활 때에 보상받을 것을 기대하도록 하여야 한다. (눅 6:35, 14:14).
하나님 여호와께서 줄 때는 넉넉히 주라고 명령 하시면서 고의로 거절하거나 생색만 내는 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신다.
3. 가난한 자가 호소할 때 주지 아니하면 죄를 얻을 것이요.
주지 않는 자들도 있다.[7. 9]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움켜쥐고[7]
악한 생각을 품고 주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호소하면 네게 죄가 된다.[9]
구제할 때 가난한 형제에게 네 손을 움켜쥐고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7,8절).
여기에서 긍휼로 우리가 베푸는 것은 무엇이나 기쁘게 즐거이 넉넉하게 내어주라는 명령이 나타나 있다.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10절).
4. 도우면 범사에 복을 주신다. [10]
신 28: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반드시 주되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8] 반드시 줄 것이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10]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은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라 [10]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신앙생활은 궁극적으로 구제 기도 금식이 세 가지이다. [마 6:1-4]
신앙생활은 나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마 6:1]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의 기본원리는 신자는 항상 하나님 앞에 산다는 것이다. [시편 139:7-12]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찬양을 들어도 박수치거나 감사하지 않는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말씀이다.
현실에 사람의 보상이 아닌 영원하신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고 충성하시기를 바란다.
나팔을 불지 말라 [2] 은밀하게 하라 [3-4] 주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셨다.
교만해서는 아니 된다. 마태 25장의 의인들은 알지 못했다. 손해 보는 것에 인색하지 말라.
어려울 때일수록 성실하라. 경제가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부터 찾게 된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여 보십시다.
1. 가난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책임을 말하여 보십시다.
2. 매 번 오는 안식년에 해야 할 일들을 말하여 보십시다.
3. 안식년에 종들에게 자유를 주는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4.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도우라고 하셨습니까?
5.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는 자들의 태도를 말하여 보십시다.
6.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도우라고 하셨습니까?
7.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를 말하여 보십시다.
8. 가난한 자를 돕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은 무엇입니까?
9.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자에게 오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10. 감동적인 찬양이 있어도 박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