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를 오랜만에 봤다.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이 올라와있는데, 이 중 '페르시아어 수업'이라는 영화에 눈길이 갔다.
세계 2차 대전 속 유대인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라는 소개를 보고, 그나마 최근에 보았던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비슷한 분위기나 느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Persian Lessons)은 2020년에 개봉한 벨라루스 출신의 감독 바딤 페를만이 연출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나치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 남성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영화의 주인공 유대인인데,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게 잡혀 수용소로 끌려간다. 수용소로 가는 트럭안에서 샌드위치와 바꾼 페르시아어 책이 그를 살리게 된다
그는 처형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살려주면 페르시아어(즉, 파르시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한다.
이로 인해 그는 수용소의 나치 장교 코흐에게 파르시어를 가르치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실제로 파르시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가짜 언어를 만들어내며 가르치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있는 것 처럼)
영화는 가짜 언어를 꾸며가며 서로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두 사람의 관계와, 생존을 위한 인간의 의지와 창의성을 그려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복잡해지는 감정과 서스펜스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생존 본능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정말 몰입해서 봤다. 영화는 유대인 '질'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유대인이 아닌 페르시아인 '레자 준'이라고 속인다.
때마침 질이 끌려간 수용소의 친위대 대위 '코흐'가 페르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페르시아인을 찾고 있던터라 질은 페르시아어를 가르쳐주는 대신 채석장에서의 혹독한 육체노동 대신 상대적으로 편한 주방, 배급일을 하면서 저녁에는 코흐에게 페르시아어를 가르친다.
문제는 질은 페르시아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코흐가 '이 단어는 페르시아어로 뭐야'라고 물을 때마다 엄청난 창작의 고통을 겪는다.
우리가 게임 캐릭터 하나 만들 때 겪는 창작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세상의 모든 단어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 고통을 겪던 질은 때마침 아이디어를 얻는다. 바로 수용소 유대인들의 이름에서 단어를 착안하는 것이다. 질은 사람들에게 배식을 해주면서 이름을 물어봤는데, 그때마다 들은 성, 이름을 활용해서 새로운 페르시아어를 계속 만들어간다.
결국 질은 독일이 패전할 때까지 2,840개 정도의 단어를 만들게 된다. (영화의 결말은 생략한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스토리와 표현에 대한 것이다. '세계 2차 대전의 비극'이라는 주제는 정말 다양한 영화에서 다뤄졌다. 아무리 중요한 주제라도, 이를 미디어에서 표현하는 과정에서 계속 반복되면 피로해질 수 밖에 없다.
가끔 한국영화 중 좋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신파적이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작품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일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봤던 세계 2차 대전과 관련된 영화는 하나의 주제를 다루지만 어느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더 리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과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표현하는 방식,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에 변형을 주면서 관객이 몰입하게 만들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든다.
물론 내가 선별해서 봤던 영화들은 이미 좋은 평을 받은 것만 받은 것들이라 그럴 수 있다. 그렇더라도 같은 주제라도 다른 경험, 새로운 몰입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또 다시 깨닫게 됐다.
아무래도 이커머스는 좋은 상품을 좋은 가격에 주고, 배송 서비스가 잘 갖춰지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지털 프로덕트를 통해 제공하는 경험은 다 유사할 것 같다는 나름대로 오만한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겸손한 마음과 모든 가능성을 열고 바라보자. 같은 커머스라도 분명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고객 경험은 달라질 수 있다는 다짐을 하면서 글을 마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