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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고 약한 다윗은 골리앗을 이깁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바위를 깨뜨립니다.
성경책에서나 존재하는 이야기
혹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꿈 같은 이야기
실제로 우리 생활에서 이런 일은
힘의 지배원리,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존해서
단 1%의 가능성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1% 채 안되는 이 가능성이
정말 현실로 이루어지기도 하는게 우리의 세상이었습니다.
결코 실현 불가능 할 것 같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나는 광경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경험할 수 있었죠.
지옥 같았던 대장정 속에서 살아남아
그 거대한 중국의 땅덩어리를 뒤엎어버렸던 모택동이 그 1%의 가능성이었고,
골리앗 미국을 상대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혁명'이 무엇인지 보여준 위대한 다윗 호치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거대해진 슈퍼 골리앗을 상대로 무모하게 '맞짱'을 뜬 이란이 그 주인공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의 일본을 향한 원자폭탄 투하 후, 극적인 종전을 맞은 세계대전의 후폭풍은 엄청났습니다.
그야말로 전쟁 후의 전쟁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총, 칼 없는 냉전체제 속의 편가르기는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은밀하게, 꾸준하게 진행되어 갔습니다.
세계 제 1위의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유전국이 한데 산재해 있는 페르시아만은 이 냉전체제의 '핵심지역' 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국가의 원동력이 석유에 달려있던 만큼 이같은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죠.
페르시아만 국가들의 '경제적 쟁탈'을 위한 강대국 중 미국의 노력은 그야말로 막강했고
현대판 골리앗, 미국이 내미는 손을 잡아야 했던 나라 중, 이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이란을 경제적 우호국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란의 핵심 정권을 슬슬 구슬려 자기네들 편으로 만들기만 하면 끝이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란에는 이런 미국의 앞길을 막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1951년, 총리로 취임한 모사데그가 그 주인공이었죠.
민족주의자 모사데그는 총리로 취임 후, 석유의 '국유화'를 단행하게 됩니다.
사회주의화의 가장 기본적 수단이었던 국유화에 대해 당연히 미 정부는 강한 불만을 표시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팔레비 왕조에게 실로 수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지원을 하며
모사데그를 총리 자리에서 해임 시키라는 압력을 넣게 됩니다.
이미 미국의 손바닥 안에 있던 팔레비 왕조는 국민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
모사데그를 해임시키고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강력한 '전제권력'의 기반을 다지게 되죠.
(앞선 글들에서도 간간히 언급했지만 자신들의 국력을 위해 행한
이러한 미국의 역겨운 태도는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팔레비 왕조는 미국의 지원을 빽으로 강력한 군대를 다집니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비밀경찰, 우리나라의 안기부, 소련의 KGB와 같은 성격인
SAVAK를 결성해 정권의 사상과 통치에 반하는 이들을 강력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죠.
국민들은 분노하지만, 이미 절대권력으로 기반을 다진 팔레비 왕조를 손 쓸 도리는 없었습니다.
이 국민들의 분노가 증오와 광분으로 바뀐 결정적인 이유는 '백색혁명'이란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백색혁명이란 농지개혁 등을 골자로 한 일종의 경제 정책이었는데
이 정책을 실시하면서 발생한 갑작스러운 서구 문물의 유입과(정확히는 미국 문물) 급속한 근대화는
오히려 국민들의 문화적인 상대성에서 오는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었습니다.
백색혁명 정책이 국민의 호응을 받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란은 전통적으로 이슬람 전통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국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팔레비 국왕은 이러한 경제정책을 밀어 붙이고,
이를 강력하게 반대한 한 인물은 결국 이란에서 추방되어 망명생활까지 겪게됩니다.
팔레비 왕조는 몰랐습니다.
그때 그들이 그렇게 매몰차게 내친 그 인물이
14년 후, 이란의 모든 것을 바꿀 엄청난 존재가 될 줄은..
무작정 실시된 경제 정책으로 인한 폐단은 엄청났습니다.
토지개혁을 통해 '자작농'의 개념이 도입됐지만 되려 극심한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낳아서
이란의 농민들은 살 길을 찾아 도시로 떠났습니다.
농토에서 토지를 보유한 사람들마저 석유가격이 급등함에 따라 삶의 터전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도시에서는 토지 투기로 인해 최악의 인플레 현상을 낳았고
이슬람 문화를 파괴한 갑작스럽고 무분별한 서구화는 오히려 이란 국민들에게
서구 문물, 미국 문물은 나라를 망친 파괴의 주범으로 인식되며 극심한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허나 이러한 국민들의 고초와는 반비례로 팔레비 왕조는 엄청난 부를 축척하죠..
이미 사태는 최악으로 다다랐습니다..
세계 5위의 석유 보유국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가난을 면할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왕조의 독재정치는 더욱 심해져만 갔고, 거리에선 서양 음악과 체인점이 난무했습니다.
화풀이를 할 대상은.. 이 모든 원흉의 범인은 이젠 너무 거대해져서 '희망'이란 단어는 사라졌습니다.
이 때, 망명지로 추방당한 한 사람은..
아주 조용하게.. 차분히 혁명을 준비합니다
호메이니.
백색혁명에 반대한 주동자로 망명지 터키로 추방된 인물.
역사상 가장 격정적이었던 '이란혁명'의 시작은 작은 카세트 테이프였습니다.
망명지에서 호메이니는 조국에 카세트 테이프를 보냅니다.
그 테이프에는 정권에 대항하는 '방법'이 녹음되어 있었습니다.
호메이니의 지령에 따라 1978년 1월, 성지 콤에서
한 신학생이 호메이니의 모략기사에 반대하는 시위를 합니다.
이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이란 각지에서는
그동안 팔레비 왕조에게 희생 당한 희생자들의 추모시위가 일어났고,
이 추모시위는 자연스레 반왕조시위로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호메이니는 꾸준하게 터키에서 이들에게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지침을 내렸고,
국민들의 머리 속에는 조금씩 '호메이니'란 이름이 희망의 작은 형태로 각인되기 시작했습니다.
반왕정시위는 조심스레,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점점 더 그 규모가 커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팔레비 왕조.
이란 국민들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돈다는걸 느낀건 그들 뿐만이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알려진 CIA문서에 의하면 미국은 팔레비 왕조를 통해 이란 국민들에 대해 '무력제압'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결국 왕정은 1978년 9월,
전국 주요도시에 일제히 계엄령을 선포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테헤란 광장에 운집한 5천명의 시민을 향해 '발포'가 시작됩니다.
2천명이란 엄청난 사상자를 낳은 일명 '검은 금요일' 사건이 터진 것이었죠..
하지만 이 테헤란 참사는 오히려 잠재해 있던 국민들을 거리로 뛰쳐나오는 역할을 하게됩니다.
왕정의 무자비한 진압에 크게 분노한 국민들은 시위에 가담하고, 석유 노동자들 마저 파업에 들어갑니다.
이로 인해 이란의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이란 시민들은 오직 하나의 구호를 외치며 강하게 응집합니다.
"샤에게 죽음을, 호메이니 만세!"
1978년 12월,
테헤란에 모여있던 국민들의 수는 무려 100만명
그들은 일제히 국왕의 퇴진을 요구합니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와 함성은 군중심리와 맞물려 '광적인'기운을 발산하고
이 엄청난 기운에 팔레비 국왕은 어쩔 수 없이 1979년 1월, 망명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해 2월
드디어 호메이니가 국내로 귀국합니다.
이란이 현재 상태로 격변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호메이니는
귀국 즉시 전열을 정비해 궁전에 남아 있는 왕정파와 3일 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이 격렬한 전투에 결국 군은 압도적인 열세에 중립을 선언하고,
혁명 측이 실권을 장악합니다.
1979년 2월 11일.
혁명 역사상 가장 격정적이었던
이란 혁명은 이렇게 완성 됩니다.
일인 독재자에 대항한 시민들의 봉기는 호메이니라는 구심점을 향해 급속도로 확산됐고,
호메이니는 시민들의 '위대한 힘'을 하나로 응집시키며 비로소 '혁명'이란 실체로 완성시켰습니다.
강한 이슬람 정신을 추구하고, 이슬람 종교를 바탕으로 국가를 변화시키려한 호메이니 였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 변화의 뒷편에 이슬람이 존재했든 뭐든 상관없었습니다.
시민들은 이슬람을 바탕으로한 혁명이라서 호메이니를 지지했던게 아니라
현재를 변화시키고 파괴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강력한 '무엇'이 필요했을 뿐이었고,
그들이 원했던 애매모호한 '무엇'의 주인공은 "종교적 통일"이 아닌 "새로운 정권" 그 자체였습니다.
혹자들이 말하는 "이란 혁명이 아닌, '이슬람 혁명'이다" 라는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없은 이유도 이때문입니다.
어쨌건 이란 혁명은 이루어졌고,
길었던 독재시대는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혁명이 일어났던 1979년 봄 은 이란 역사에 있어 가장 '흥분된' 한해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혁명의 기쁨에 고취되어 있었고, 이 세상은 뭔가 엄청나게 바뀔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 앞의 골리앗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이시각.. 친미 정부의 팔레딘 왕조가 무너진 이란을 미국은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호메이니가 세운 혁명정부, 이슬람공 화국은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치 1959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호메이니 정부에게 외교적 선택의 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독히도 친미 적이었던 이전 정권과는 근본적으로 '무조건' 달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커다란 본보기는 미국과의 관계 변화 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혁명 이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삶에 대한 이란 국민들에 대한 불만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큰 처방제 였습니다.
그리고.. 이란 국민들은 뭔가 크게 바뀔 줄 알았습니다.. 혁명 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람들은 단꿈에 부풀어 호메이니 정부가 집집마다 순회하며 수표와 돈다발을 나누어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농민들은 팔레비 왕조 시절 '고위층'들의 재산이 자신들에게 배분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활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실업자들은 계속해서 증가추세 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 여성들은 이전에는 하지 않던 차도르를 착용하며 자신들의 모습을 숨겨야 했습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커다란 사건이 터집니다.
바로 1979년 11월 그 유명한 이란의 미 대사관 점거 사건이 그 주인공입니다.
호메이니의 열렬한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행해진 대사관 점거 사건은 예상치 못하게 이란 국민들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킵니다.
사건 주동자들조차 예상치 못한 국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이란은 다시 한번 '하나'로 응집될 수 있었습니다.
미국 대사관 점거라는 상징적인 사건이 이토록 큰 반응을 불러 일으킨데는 이전 정권 팔레비 왕조의 공(?)이 가장 컸습니다.
민족주의자였던 모사데크 총리를 강제 해임 후, 지독히도 '친미'일변도로 외교 관계를 행했던 덕택에
자연스레 이란 시민들의 반미감정은 상상을 초월했고 그 분노가 비로소 밖으로 표출한 계기가 됐던게 이 사건이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비상이 걸립니다.
당시 지미카터 대통령은 임기 내 최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란 혁명의 파동이 이처럼 강할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란 국민들의 '힘'을 몰랐고, '혁명'의 위대함을 몰랐습니다.
이란의 미국 대사관 점거는 단순히 보여주기만을 위한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무려 444일 간이나 이어졌으며, 대사관 안에 있던 66명은 인질로 억류됐습니다.
이 시각, 미국 내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국민들의 신뢰도는 바닥을 쳤습니다.
뉴스란 뉴스는 죄다 "인질 사건 XX일을 맞고 있습니다." 라는 멘트로 시작했습니다.
미 대통령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자존심이 상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듯 합니다..
참다 못한 대통령은 결국 인질구출작전 에 들어갑니다.
델타포스라는 특수부대를 이란에 침투시켜 인질 66명을 구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고 허술했던 이 작전은 완벽하게 실패로 끝납니다.
미국이 이란을 '침투'했다는 사실은 이란에게 분노로 다가왔고
이같은 인질구출작전실패는 카터를 거의 나락을 빠트립니다.
(이란이 아직도 '깡패국가'라는 이미지가 심어진 것이 이때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그 원인이었죠..)
결국 지미카터는 이란 내 미대사관 인질들을 구출하지 못한 채 임기를 마쳤고,
다음 대통령인 레이건이 부임해서야 이란은 인질들을 석방 해줍니다.
미국에게는 피같은 444일이라는 시간이 드디어 끝난 것이었죠.
덩치 큰 골리앗을 손바닥 안에서 갖고 논 이란은 (당연하게도)엄청난 국제적 고립상태 를 띠게 됩니다.
미국의 우방 국가였던 페르시아만의 여러 나라들은 이란을 한마디로 '왕따'로 만들어 버리고,
이란에 독이 오를대로 오른 미국 역시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이토록 똥줄 타게 만든 이란에 대한 미국의 복수방법.. 다들 예상하셨듯이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란과 인접해 있던 이라크에게 엄청난 군사적 지원 을 해줍니다.
이라크는 이게 왠 떡이냐 하며 세력을 어마어마하게 확장시켜나갔고,
미국의 암묵적 동의 하에 이란을 침공 하게 됩니다.
8년간 이어지며 100만 여명이 희생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것이죠.
(사실 이란-이라크 전쟁의 원인은 이라크와 이란의 '영토권 문제'가 표면적인 원인이었지만
이란을 짓누르려는 미국의 의도가 너무나도 강하게 반영된 전쟁이었습니다.)
이라크는 막대한 군사력으로 이란의 석유기지부터 초토화 시킵니다.
당시 이란은 혁명 이후 군장교 및 군인들을 '팔레비 왕조의 주세력'으로 간주해 몰아냈던 상태였기에
이런 이라크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커다란 위협을 느낀 호메이니 혁명 정부는 재빠르게 이란 시민 중 지원자들을 모으게 됩니다.
미국 대사관 점거라는 '제2의 혁명'을 겪은 이란 시민들의 민족주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했고
이에 수많은 지원자가 이란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듭니다.
이란 지원군의 '정신적인 무장'은 왜 이란을 공격해야 되는지
명분이 없던 이라크 군들을 월등히 제압 했고, 이라크 세력을 이란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미국은 충격에 빠집니다.
그렇게 막대한 지원을 해준 이라크가 후퇴를 했기 때문이죠..
게다가 이란은 그 여세를 몰아 역으로 이라크를 침공하기에 이릅니다.
이라크가 이란에 점령당한다면 '세계 최대의 석유유전' 페르시아만의 판도는
미국에게 너무나도 불리하게 작용될게 뻔했습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미국은 이라크를 지원 하게 되고,
미국의 우방국들 역시 압력에 못이겨 이라크를 지원하며 이란을 더더욱 국제적 고립상태에 빠트립니다.
미국은 한마디로 눈깔이 뒤집혀서 세계대전 후 그 엄청난 참상 때문에 암묵적으로 금지되고 있던
화학무기까지 이라크에 지원하며 이란 죽이기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8년이나 이어진 이 전쟁은 그 누구의 승자도 없이 1988년 8월, 휴전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란을 죽이려던 미국은 이라크에 막대한 지원을 했고,
미국의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사담 후세인'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키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 휴전 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는 미국에 의한 막대한 군사력을 이용해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침공하며.... '걸프전쟁' 이 시작됐습니다.
미국은 완벽하게 뒷통수 맞은 꼴이 된거죠..
결국 그들 손에 의해 탄생된 괴물을 그들 손으로 제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걸프전쟁의 발발은 이란에게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미국에 의한 국제적 고립상태는 이 모든 것을 지휘한 호메이니의 사망과 함께
이란에게 위기 그 자체로 다가왔고, 걸프전의 발발은 이라크라는 '새로운 미국의 적'이 탄생되며
이란을 '왕따'에서 조금은 탈출시키는 작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많이 호전되긴 했습니다만 이란은 아직도 핵무기의 핵심기술인
우라늄 농축기술을 사실상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이란의 국제적인 위치는 아직도 애매한 입장입니다.
독재정치로 시작되 혁명으로 이어지고 전쟁으로 귀결된 이란의 파란만장한 현대사..
이란 혁명은 분명 국민들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준 위대한 혁명이었지만
그 이후의 행보는 지도자의 성향과 역량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엇갈릴 수 있는지 보여주었죠..
학창시절 때 우연히 케이블 TV에서 하던 이란 혁명에 관한 다큐를 보고
관심이 생겼던 이란의 현대사는 참으로 파란만장 했었어요..
미국이란 나라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회의감도 들며.......
동시에 혁명이란게 상상만큼 그렇게 낭만적인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때는 세상을 한순간에 뒤집는 혁명에 빠져 굉장히 심취하기도 했었는데
혁명으로 완성된 나라들의 행보는 그렇게 만화처럼, 영화처럼 위대하진 않더라구요..ㅠㅠ
원래는 이란혁명에 관해서만 글을 쓸려다가 전쟁이 발발하는 과정은 뗄 수 없는 관계여서 어쩔 수 없이 글이 길어졌는데
휴.. 암튼.. 한편으로는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미국과도 맞짱을 뜨던 혁명국가 이란의 배짱이 부럽기도 한데
결국 그 속내를 파헤쳐보면 국민들의 고통과 전쟁으로 인한 폐단등.. 그 모든 부작용은 국민들이 받는 꼴이 됐습니다
게다가 미국이 이란을 제압하려는 과정에서 선택한 방법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
겉으론 세계평화 운운하면서 '자국의 이익'과 '통제의 범위'에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고 벗어나 있는
약소국들에게는 무력탄압을 자행하는 미국의 역겹고 파렴치한 행동들......
결국 이런 행동은 사담 후세인을 탄생시키며 되려 자신들이 피해를 입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직도 미국과 이란은 1979년 미 대사관 점거 사건 이후로 국교단절 상태죠.. )
우리에게는.. 아시안컵에서 매번 만나는 축구 라이벌 이란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 뒤에 존재하는 이란의 현대사는 참 격정적이고 비극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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