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학 裵命鶴 (1907 –1973)
1907년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에서 태어났다. 합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2년에 대구로 나왔다. 1922년에 교남학교(현 대륜고교)를 거쳐 29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지형사 서양화부에서 1년 간 공부했다.
그는 20년 대 중반부터 작품활동을 하였으나 주로 미술 모임을 통해서 였다. 영과회와 향토외이다. 32년에 선전에 첫 입선을 한 후에 3회 연속으로 입선했다. 1936년에는 조선민보사가 주최하는 제 1회 남조선미술전람회에 초대작가가 되면서 이인성과 심사위원이 되었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별다른 작품활동을 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 20여 년 간은 학교 미술교사로(대구상고, 대구중, 대구여중, 김천여고) 후진을 양성했다. 57년 이후로는 개인전도 꾸준히 가졌다. 여러 미술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지도자로서 단체를 이끌었다.
그는 대구에서 서양화를 도입하던 1920년 중반 이후로부터 타계한 70년 대까지 대구화단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작품 경향은 20-30년 대에는 주로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후로 서양에서 유행하는 여러 화풍(인상파, 후기 인상파, 야수파, 표현주의 심지어는 입체파까지)을 도입하였다. 그의 화픙은 리얼리스틱 하기 보다는 몽환적인 상징적인 서정성을 가지므로 해석이 필요한 그림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