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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의 사회학
주위에서 들리는 경상도 사투리
엊그제 아파트 뒤 산책길을 걷는데
뒤에서 걸어오는 사람들 대화소리가 시끄러웠다
주위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가까이 지나칠 때 들어보니 진한 경상도 사투리였다
무슨 주제로 서로 논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자기 주장을 하며 목청을 높인다
여기가 서울 한복판인지 경상도 어느 지방인지 헷갈린다
우리가 흔히 보고 들을 수 있는 광경이다
누가 듣더라도 곧바로 경상도 사투리임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손위 동서형님이 대구 토박이 출신이신데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서울로 올라오셨다고 한다
경상도 출신 회장의 재벌기업에서 평생을 일하고 퇴직하셨다
젊어서는 계열 종합상사의 해외지사장으로도 나갔다 왔다
계열사의 대표이사를 맡아 대구에서도 몇 년간 근무하셨다
회장 비서실장도 하고 여러 고위직을 역임하셨다
서울에 와서 50년을 사셨지만 아직도 진한 대구 사투리를 쓴다
내가 보기엔 사투리를 고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
아직까지도 약간은 거들먹거리는 경상도 말투가 묻어난다
대개의 경상도 사람들이 비슷하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학창시절 들었던 경상도 사투리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짝꿍이었던 고교동기
대구 계성중을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왔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잘 못 알아 들었다
발음과 억양이 서울말씨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대학엘 가니 전국적으로 다양한 동기들이 모여 있었다
선후배들 중에도 전국적으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있었다
유난히 경상도쪽 동문들의 억양이 심하고 억셌다
기숙사 한 방의 2학년 후배는 경북사대부고 출신이었다
다른 한 명의 1학년 후배는 부산고 출신이었다
둘 다 뭐라고 빠르게 말을 하면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 들었다
우리 방으로 같은 학교 동문들이 자주 찾아왔었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목소리가 엄청 컸다
타고난 음성이 크다기 보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군복무 시절에 들었던 경상도 사투리
군대엘 가보니 거긴 더 심했었다
지휘관들 중에 경상도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경상도 사투리가 일상적으로 쓰였다
다른 지역 출신들은 그 사투리를 배워야 했다
아니면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 들었으니까
내가 근무했던 수송부와 정비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상도와 전라도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어느 도 출신들이 많으냐? 고참이냐?에 따라서
내무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처럼 서울 출신이거나 다른 지역 출신들은 눈치를 봐야했다
경상도 출신과 전라도 출신들은 서로 자기지역 출신들을
감싸고 모여서 나름대로 세력을 형성하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나이많은 대머리 수송관이 전라도 출신이었다
전라도 출신 병사들이 조금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나중에 그 양반이 여단 수송부 수송관으로 옮겨가고
다른 지역 출신의 젊은 수송관이 부임했다
다행이 그 양반이 오고나서부터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 차별이 다소 완화됐다
그 양반은 두 지역 중 어느 쪽 출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들이 대부분 경상도인
당시에는 박정희 정권이 꽉 잡고있던 시절이었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 중에 경상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중요한 산업시설들도 경상도에 주로 지어졌다
울산, 포항, 마산, 창원, 구미, 부산, 등
TV에 나와 인터뷰하는 정치인들을 봐도 그랬다
김윤환이라고 민정당 고위직을 맡았던 사람
거만하고 거들먹거리는 낮은 음성으로 인터뷰를 했다
김윤환을 방불케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이런 상황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그런 식으로 끈질기게 경상도 정권이 이어졌다
이후 민주당이 잡았을 때인 노무현 문재인도 경상도였다
지금 이재명도 민주당이지만 안동이 고향이라고 한다
결국 경상도가 9명으로 절대 다수다. 정말 대단하다
전라도는 김대중으로 달랑 1명이다
이승만이 황해도, 윤보선이 충청도, 최규하가 강원도다
윤석열도 충청도라는데 3년 남짓 하다가 쫓겨났다
이승만이 13년을 해먹다가 하와이로 쫓겨가서 죽었다
최규하는 전두환의 꼭두각시였고 잠시 동안만 했다
윤보선도 4.19후에 1년 남짓하고 박정희에게 짤렸다
박정희는 혼자서만 18년을 해 먹었다. 전두환도 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77년 동안 둘이서만 26년이다
나머지 6명을 5년씩 하면 30년 도합 56년이다
경상도인들에 의한 한반도 지배 역사
이 글을 통해 지역감정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주위에서 큰 소리로 얘기하는 경상도 사람들
그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어 보려는 것이다
경상도인들이 우리 한반도를 지배한지가 1500년이다
신라가 당나라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내쫓고 나서
평양~원산 이남 땅을 겨우 확보하고 200여년을 떵떵거렸다
극심하게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차별했다고 한다
결국 후백제와 고려와의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가 재통일했다
경순왕이 왕건에게 신라를 헌납하고 고려의 신하가 됐다
이후 고려조를 지나면서도 경상도인들의 지배는 계속됐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도 역시 경상도인들이었다
조선왕조 500년도 경상도인들의 지배는 온전하게 유지됐다
4색당파의 주역들도 모두 경상도 출신들이었다
이후 조선이 망하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변한 건 없었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실시됐고, 결국 대한민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지배계층의 내용면에서 변한 건 거의 없었다
여전히 경상도 출신 정치인들이 세력을 놓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양반계급이 그 지위를 계승했다
더구나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은 더욱 견고하게
경상도인들의 남한 지배를 확고하게 고착시켰다
삼성을 비롯한 LG등의 재벌기업들은 경상도 출신의
군사정권 통치자들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부를 쌓았다
공고한 결탁과 후원등으로 이룩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걸 정경유착이라고 불렀다
삼성 로비에 가서 들어보면 경상도 사투리가 압도적이다
LG도 마찬가지다. 금호그룹에 가면 전라도 사투리가 다수다
어느 지역출신 회장이냐에 따라 고위직의 출신지역이 갈린다
위에 적은 내용이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어느 스위스 출신의 한국학자가 통찰한 우리나라의 역사다
정확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통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오롯이 신라를 계승한 경상도인들의 역사라고 했다
경상도인들의 목소리가 큰 이유?
그렇게 군, 정치, 재벌, 교육계 등을 장악한 경상도 출신 인사들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2000년의 전통을 이어받아
경상도 사투리를 고치지 않고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다
은퇴 후에 운동을 한다든가 산행을 한다든가 모임을 하더라도
절대로 목소리를 낮추는 법이 없다. 목소리가 매우 크다
식당엘 가도, 청계산엘 올라가도, 동네 산책길을 걸어도
유독 큰 소리로 들리는게 경상도 사투리다
고교동기 모임엘 가도, 대학동기 모임엘 가도, 어딜 가더라도
경상도 출신 아이들이 목소리는 한 옥타브가 높다
논쟁이라도 벌어지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우선 피하고 보자는게 내 생각이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글을 쓸 때도 그런 걸 느낀다
사투리를 소리나는 그대로 글자대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같은 경상도인들끼리 자기들 사투리로 ㅋㅋ거린다
표준어가 있는데도 무시하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 있다
글에서 깽깽이를 찾는 전라도인들은 아직 보질 못했다
경상도 출신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목소리가 클까?
내게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어떨 때는 안하무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다
[사족] :
어렵게 어렵게 자료실 한 구석에 보관해 놓았던 아래의 글을 찾았습니다
위의 "사투리의 인간학"과 깊은 연관이 있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즐독하시기 바랍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Martina Deuchler
193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라이덴대 동아시아학과를 졸업했고,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명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대 규장각에서 연구하였고,
1972년 옥스퍼드대 인류학과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1975년부터 1988년까지 취리히대 교수를,
1988년부터 2000년까지 런던대의 아시아·아프리카 대학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런던대 명예교수이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으로 1993년 위암 장지연상을,
2001년에는 용재학술상을 수상하였다. 영국학술원 회원이며
2008년 1회 한국국제교류재단상과 2009년 미국동양학회 아시아연구공로상을 수상하였다.
『Confucian Gentlemen and Barbarian Envoys: The Opening of Korea, 1875~1885』,
『Culture and the State in Late Chos? Korea』(공 편저) 등의 저서와 다수의 한국사 관련 논문이 있다.
“한국사회 뿌리깊은 친족 이데올로기 아직까지 이어져”
2018.11.21
신라 골품제 이후 지배계급 추적
‘조상의 눈 아래에서’ 출간한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
'조상의 눈 아래에서'를 들고 온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동양·아프리카 연구대학(SOAS) 명예교수.
강건한 친족이데올로기를 한국사의 특징으로 꼽았다.
“발전이요?” 눈이 안경 너머 허공을 잠시 더듬었다.
대꾸할 만한 적당한 표현을 고르는 듯했다.
뜸 들였다 말을 이었다. “한국 사회의 발전, 그건 참 까다로운 표현이지요.
발전이라기보다 ‘변했다’, ‘변화했다’가 좋겠습니다.”
저서 ‘조상의 눈 아래에서’(너머북스) 번역 출간 기념으로
지난 20일 한국을 찾은 해외 한국학 1세대
마르티나 도이힐러(83) 런던대 동양·아프리카 연구대학(SOAS) 명예교수가 내놓은 답변이다.
‘발전’이란 단어를 미묘하게 비껴가는 대답이다.
한국사 연구자들이 그간 내세운 건 우리 나름의 ‘역사발전 단계론’이다.
서구가 ‘고대 노예, 중세 봉건, 근대 자본’이라는 시대 구분을 통해
‘1인의 자유가 만인의 자유로 심화ㆍ확대되어 가는 과정이 곧 역사’라는 관념을 만들어냈다면,
한국 역사학은 그에 대응해 ‘골품제, 귀족제, 관료제’라는 도식을 만들어냈다.
서구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게끔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뭔가 심화ㆍ확대되어가는 게 있었다는 얘길 하고 싶은 게다.
1992년 ‘한국의 유교화 과정’으로 각종 학술상을 휩쓸었던 도이힐러가
그 뒤 20여년을 준비해 2015년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출간한 ‘조상의 눈 아래에서’는
이 통념에 도전하는 책이다.
4, 5세기 신라 골품제에서부터 19세기 조선 말까지
지배계급의 역사를 추적한 끝에 내린 도이힐러의 결론은
“고유의 친족 이데올로기는 신분의 위계와 신분의 배타성을 찬미하면서
운명의 붉은 실처럼 신라 초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한국 역사를 관통했다”는 것이다.
골품, 세족, 사족 등 시대에 따라 지배계급의 이름은 변했다지만
그것은 핏줄, 곧 ‘운명의 붉은 실’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도이힐러 교수는
“서양인이 왜 한국사를 공부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바로 이 지점”이라고 강조했다.
덧붙여 “강력한 부계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는 더러 있지만,
어머니 쪽 핏줄까지 따지는 ‘쌍계’에다 동생이나 사촌들까지
‘문중’이라는 이름으로 묶은 친족 이데올로기가
이 정도로까지 강력하게 뿌리 내린 곳은 한국밖에 없다”면서
“그래서 외부인의 눈으로 보자면 아주 재미있는 현상들이 많이 벌어진다”고 덧붙였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가 자신의 책 '조상의 눈 아래에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재미있는 현상이란 이런 것들이다.
노비, 양민은 물론 서얼, 향리 등 구분을 통해 한국 지배층은
“고집스러운 사회적 차별”을 고수한다. 이런 전략을 통해 정권 교체는 물론
왕조 교체 같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살아남는 “엄청난 내구력”을 발휘한다.
주자학과 과거제 같은 능력주의 원칙을 들여와 놓고도
그것이 “엘리트의 월권에 제약을 가하기는커녕 괄목할만한 방식으로
엘리트의 지배를 강화”하는데 쓰인다.
점잖은 학문적ㆍ문학적 수사를 걷어내고 날 것 그대로 말하자면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쪽 편이든 저쪽 편이든,
해먹는 사람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는 얘기다.
시각에 따라 도이힐러 교수의 책은
한국 지배층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기록으로 읽힐 수도 있다.
‘발전’보다는 ‘응전’ 혹은 ‘변신’의 기록이다.
21세기에도 한국 사회의 친족이데올로기는 강력하다.
그런거 이제 누가 신경쓰나 하지만, 여전히 족보 사기 사건이 터진다.
사진은 경찰에 압수된 가짜족보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런 시각이기에 책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이 넘친다.
가령 고려의 권문세족(權門世族)을
도이힐러 교수는 권문(權門)과 세족(世族)으로 나눈다.
세족이 전통의 명문가라면,
권문은 원나라, 무인정권 등으로 잠깐 힘을 얻은 가문들이다.
그래서 고려 말 신유학의 도입을 통한 개혁 움직임이란,
실은 세족이 신유학을 무기로 권문을 찍어내는 과정이다.
고로, 조선 건국은 신흥사대부의 등장이 아니라 세족의 귀환에 가깝다.
16세기 문중의 탄생도 그렇다.
조선이 들여온 중국의 신유학이란 맏아들에게 모든 걸 주는 부계 중심제다.
하지만 진짜 이렇게 했다간 동생과 사촌들의 숱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큰 한 가족이라는 관념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도이힐러 교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조차도 문중의 승리로 해석한다.
국가의 참패는 문중이 지역기반을 더 단단히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연구의 함의는 무엇일까.
근대화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기된 뒤에도 여전히 그 잔향은 남아 있다.
도이힐러 교수는 “1960~70년대까지도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일부에선 여전히 그렇다”며 웃었다.
갑질, 맷값 등 ‘헬조선’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신라 이후 1500년, 왕조는 바뀌어도 지배층은 같았다
"한국 지배 엘리트층은 세계 유례없는 친족 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쳐...
유교가 사회적 차별 강화" 반평생 한국 연구한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
경향신문 김유진 기자
2018.11.22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가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신간 <조상의 눈 아래에서>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라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왕조의 성씨가 바뀜에 따라
사회를 주도한 세력들도 달라졌다’는 것은 한국사에서 오래 전해내려 온 상식이다.
스위스 출신 세계적인 한국학자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84)는
이러한 상식과는 사뭇 다른 견해를 밝힌다.
5세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1500년간
한국 사회를 이끌어 온 지배 집단은 사실상 동질적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이토록 대담한 주장을 펴는 까닭은 씨족이나 족, 겨레 등으로 불리는
‘출계집단(出系集團·descent group)’의 존재 때문이다.
출계집단은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혈통을 추적하는 친척의 집합체”를 뜻하는데,
이들은 줄곧 한국 엘리트 사회의 기본 단위를 구성했다.
양반, 사족 등 명칭이 어떠하든
엘리트층은 스스로를 자신의 출생 배경, 조상을 통해 정의했다.
이렇게 구축된 강한 ‘친족 이데올로기’는
신라 시대 골품제가 등장한 4~5세기 무렵부터 조선 후기인 19세기말까지
한국 정치·사회를 규정했다는 것이 도이힐러의 시각이다.
도이힐러가 최근 신작 <조상의 눈 아래에서>(너머북스)의 번역 출간을 계기로 한국을 찾았다.
원제가 <Under the Ancestors’ Eyes>인 이 책은
그가 50년간 매달려 온 한국사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2015년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출간됐다.
각주를 포함해 1000쪽에 달하는데, 한국 전통 사회 엘리트 집단의 원형을 포함해
사회사 측면에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줬다는 평이다.
지난 20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한국 역사를 보면 사회적 배경이 정치적 성취보다 중요했다”며
“왕조가 교체되도 엘리트 집단의 기본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도입한 과거제나 ‘신유학’도 위계 질서를 허무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양반에 속하지 않으면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엘리트와 비엘리트의 구별이 매우 심했던 것이죠.
엘리트가 유교를 받아들인 것도
출계집단을 부계로 제한시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엘리트가 이렇게 뿌리내린 사회는 세계에도 별로 없습니다.”
그의 관점은 신진사대부가 조선을 건국했다고 보는
한국사학계의 ‘정설’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도이힐러는 이날 “이기백 교수 등이 조선 초기 시골 출신 향리 후손들이
시험을 거쳐 등용되면서 새로운 계층이 나타났다고 봤지만,
실제로 여말과 선초의 엘리트는 똑같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고려의 세족이 조선의 사족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도이힐러는 엘리트 집단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조사를 벌였다. 안동과 남원 지역을 직접 방문해
문중이나 양반 후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모두 공식 자료에는 담기지 않은
“살아있는 전통”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전작 <한국의 유교화 과정>(너머북스)에서
“고려-조선 교체기의 엘리트 사회가 고유의 양계제(부계·모계)에서
유교적 부계제로 이행하는 역사적 과정”을 다뤘던 그는
이번 책에서 유교 사상의 영향력을 좀더 세밀하게 살폈다.
서문에서 그는 “엘리트층은 유교의 특정한 교의,
특히 남계친 중심의 의례적 의식과 승계의 원리를 취사선택하여,
출생과 출계에 기초한 자신들의 귀족적 특권을 강조하고
엘리트 출계집단의 성원권을 제한했다”며
“한국식으로 해석된 유교는
사회적 차별을 완화시키기보다는 강화시켰다”고 밝혔다.
그는 부계 집단화 과정에서 모든 성인 남계친족을 포함하는
‘문중’이라는 독특한 ‘비공식 집단’이 생겨났다는 해석도 제시했다.
그는 “부계 사회에서는 장자가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경제적으로도 많이 상속하게 된다”며
“과거의 양계적 관념에 따라 형제간 평등을 지향하는 문중을 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이힐러는 해외 한국학 1세대 연구자였던 고 에드워드 와그너 하버드대 교수의 제자로,
존 덩컨(UCLA), 고 김자현(컬럼비아대) 등과 더불어 대표적 2세대 한국학자로 꼽힌다.
1960년대 서울대 규장각에 유학했던 최초의 외국인 중 한 명인 그는
“과거에 비해 한국학자가 많아졌지만 마을(현장)로 내려가기 보다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들여다보는 ‘암체어 스칼라’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 아쉽다”고도 말했다.
실제로 신라계 김부식이 고려 권력을 독차지하고
삼국사기를 편찬하며 한국의 민족주의는 땅에 떨어졌다.
신라계는 삼국통일을 이룩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주장했던 통일 이후 후삼국시대가 열린 것은 무려 2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신라가 백제계와 고구려계 유민들을 완벽하게 차별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지역, 계층, 심지어 성별까지 동원해 갈라치기를 조장하며
지배와 피지배, 적과 나로 사회를 분열시키고 사익을 추구하는 그 버릇은
지역을 떠나 한국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한국의 부패유형을 엘리트까르텔로 분류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1천500년간 한국사회는 친족 이데올로기가 지배"
2018-11-20
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 '조상의 눈 아래에서' 출간
"신진사대부 조선 건국설은 허구…세족이 사족으로 변화"
'조상의 눈 아래에서' 출간한 도이힐러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가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신간 '조상의 눈 아래에서'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8.11.20 scape@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한국에서 사회적 배경은 정치적 성취보다 중요했습니다.
엘리트와 비엘리트에 대한 구별이 매우 엄격했어요.
엘리트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했는가를 추적하고자 했습니다."
유럽 한국학 선구자인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가
2015년 미국 하버드대 아시아센터를 통해 펴낸 '조상의 눈 아래에서'가 번역·출간됐다.
도서출판 너머북스가 20일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개최한 간담회에서 도이힐러 교수는
"신라 골품제가 만들어진 4∼5세기부터 조선 후기인 19세기까지 한국을 지배한 것은
정치체제가 아닌 친족 이데올로기"라고 강조했다.
전작 '한국의 유교화 과정'에서 15∼16세기 조선 사회에 영향을 미친
신유학(성리학)을 분석한 도이힐러 교수는 경북 안동과 전북 남원 지역을 조사하고
각종 문헌을 연구해 한국사회의 주요한 동인으로 작용한 친족 이데올로기를 파헤쳤다.
도이힐러 교수는 "한국에서 엘리트 사회의 기본 단위는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본인들의 혈통을 찾는 친척 집합체인 출계집단(族, Descent Group)"이라며
"출계집단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다투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귀족 가문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라 수도 경주에 거주하며 엘리트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체제가 무너지면서 지방으로 이주했다"며 "인구의 10∼12%를 차지한 엘리트 집단과
나머지 구성원들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조선 초 40%에 달했던 노비 집단의 노동력에 의존했다"고 본다.
도이힐러 교수는 친족 이데올로기가 한국에서만 나타난 현상이라고 역설했다.
그 근거 중 하나로 실력에 근거해 과거 급제자를 뽑은 중국과 달리
한국은 과거를 도입해도 사실상 양반에게만 응시 자격을 부여했다는 점을 꼽았다.
아울러 성리학을 받아들여 부계 사회가 됐지만,
사회적 신분은 부계와 모계에 의해 결정됐다고 설명했다.
신분이 낮은 여성은 본처가 되지 못했고, 그가 낳은 아이도 엘리트 집단에 끼지 못했다.
도이힐러 교수는 엘리트 집단이 오랜 세월을 버틴 이유로 조상숭배와 제사를 제시하면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정확히 알았고,
신분에 따라 조상을 모시는 사당 앞에 도열하는 순서도 달랐다"고 말했다.
'조상의 눈 아래에서' 출간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가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신간 '조상의 눈 아래에서'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8.11.20
친족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를 움직인 요인이었다면, 한국사를 통념과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생긴다.
그는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가 조선을 건국한 세력이라는 고 이기백 교수 견해는 잘못됐다"며
"고려의 세족(世族)이 조선시대에 사족(士族)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라는 파격적 주장도 펼쳤다.
아울러 조선시대 당쟁은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싸움이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트가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사회적 현상이었다고 지적했다.
도이힐러 교수는 장자가 상속에서 우위를 점하는 상황에서
형제간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고안된 개념이 가족보다 폭넓은 '문중'이라면서
"문중은 비공식적인 조직이지만 분명히 존재했다"고 말했다.
도이힐러 교수의 주장을 종합하면 중국에서 한국으로 여러 사상과 관습이 건너왔지만,
고유한 친족 이데올로기가 워낙 공고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결혼할 때 가문을 따진다거나 이야기 도중 조상을 거론하는 점을 예로 들면서
친족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한국사회에 남았다고 진단했다.
"외국인의 눈으로 한국을 보면 재미있는 점을 많이 발견합니다.
서양과 달리 한국에서는 왕조가 바뀌었는데도 지배 세력이 거의 바뀌지 않았어요.
이런 나라는 세계적으로 유일합니다."
그는 이런 친족 이데올로기가 21세기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지금도 '엘리트 집단'이 '노비 집단'과 혼인하려 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2013년 '한국의 유교화 과정' 출간 때 '한국의 부계(父系) 중심 사회는
부계·모계를 모두 중시하는 양계(兩系) 사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듯,
이 이데올로기 역시 변화 과정에 있는 셈이다.
psh59@yna.co.kr
어느 한 서평 중에서...
한국 사회에서 뿌리깊은 지역 구도의 배경에 있는
신라 이후부터 지속되어온 한반도의 권력의 원천 친족 집단에 대한 연구서
"한국 친족제도의 중심에 있는 출계집단에 초점을 맞춘 이 작업은 시공을 통해
사회적인 것이 한국인의 삶 구석구석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조명해준다.
출계의 원리는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는 신분집단의 위계를 조성했고,
엘리트는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통제하는 정당성을 사회적 특권으로부터 도출했다.
정치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것을 우위에 둠으로써 엘리트층은 자신들의 우월한 신분을
정치적 기능이 아니라 입증된 선계로부터 이끌어냈다.
이런 까닭에, 출계에 바탕을 둔 한국의 엘리트층은
출계보다는 기능에 근거한 중국의 엘리트층과는 달리
신분에 대한 법적 정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정치참여를 생득권으로 주장하던 엘리트의 사회적 구성은
정치적 영역의 형성과 구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의 보완체로 개념화됨에 따라,
국가는 사회의 외연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더 과감히 공식화하자면 국가는 사회안에 자리매김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런 관념은 훗날 국가와 사회가 상호의존성이라는 도덕적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의 실체를 구성한다는 유교적 전제로 뒷받침되었다.
이 관념은 왕권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왕의 권위와 권력을 약화시켰고,
여러 왕조를 거치는 동안 왕과 귀족층 사이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들었다." p705-706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2018.
50년간 한국 연구한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
'조상의 눈 아래에서' 번역 출간
"친족 이데올로기"가 사회 규정

첫댓글 대통령이 버젓하게 사투리를 쓴다는 것이
늘 답답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죠
경상도사투리 ~ 에고 이젠 좀 그만 듣로싶네요 너무나 시끄러워요!!!!!
경상도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요
보통이야기라는데
큰싸움 난줄 알았잖아요
남편은 서울에서 자랐기에
서울말씨였어서 몰랐죠
이상한 건 저랑은 서울말 쓰다가
본가에 가면 경상도 말을 쓰더군요
남의 남편 같았어요
다행히도 남편은 조용조용하게 말했는데
낯설긴 마찬가지였어요
물론 우리가 다 알고 겪었고 겪고 있는
일이지만
잘 연구해 놓았군요
무대뽀같이 큰소리면 이긴다식의 사고는
어이가 없게도 하지요
좀 곱게 이야기 해주기를
남의 생각도 좀 하며 살아주기를
바라요
청솔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
다른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전두환을
제가 제법 좋아합니다
이유는 딱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서울말 배우려고 과외선생 불러서
경상도 사투리 안 쓰려고 노력했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일 잘하는 사람들을 발탁해서
경제를 잘 운용했다는 것이지요.
김재익 경제수석과 신병현 부총리
지금도 경상도인들의 지배가 계속되고 있지요
목소리가 크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그 과도한 자신감의 발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엊그제 산책하는데 너무 시끄러웠습니다
완전히 안하무인이더군요 ㅜㅜ
긴 댓글 감사합니다 블루님 ^^*
@청솔 그러니까요
일국의 대통령이면
표준어를 쓰려는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잖아요 아..전통이 그랬었군요 그점은
훌륭합니다
안하무인 ~ 그 단어가 딱!이죠
세상에 후우 ~ ㅎ
고생하셨습니다 에고
@그대안의 블루 네 전두환대통령이 그랬다고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그 기사를 보면서
참 훌륭한 생각이라고 느꼈습니다
주위에 다른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하는지
자기들끼리 모이면 정말 시끄럽습니다
마치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을 방불케 하지요
고생은요
시간은 좀 걸렸지만 도이힐러 교수님의
훌륭한 책을 소개할 수 있어서 보람있네요
감사합니다. ^^*
@청솔 네, 도이힐러 교수님 훌륭하시네요
읽어보겠어요~
저분 모습과 의상의 색감도 아름다워요
감사합니다 ^^
@그대안의 블루 자유게시판에도 추가로
도이힐러 교수님의 책에 대한 글
올려 놓았습니다 ^^*
@청솔 아..네
감사합니다 ! ^^*
지방 탯말 억양은 쉽게 고쳐지지를 않아요
태어나서 부터 그들은 몇 십년을 그렇게 숨 쉬어 왔기에
여유있는 사람은 학원 도 댕기고 하더라만요
세상은 기준을 어디에다 두느냐 에 있다고 봅니다
어느 개인이나 특정인 으로 인해
모든 그 들의 문화 전체를 디스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살짝 드네요
그 찬란했던 신라 시대에는 분명 이 지방 경주 말 억양이 표준 말이었고 서울 경기 말이 사투리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해 보네요
저는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어느 지역이든 각 그 자방 억양이 너무 재미 있다는 생각 입니다
경상도 사람이 서울말 억양 쓰면
게그의 소제 되는거 아시지요
오해를 하셨네요
어느 지방 사투리를 디스하는 거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사투리 그냥 쓰십시오
다만 사투리 쓰는 걸 너무 당당하게
있는 목청껏 아무데서나 큰소리로
말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상냥하게 조곤조곤 사투리 쓰는
아가씨들 말투 듣기 좋드라구요
다만 너무 시끄럽게 주위 사람들
무시하듯 마치 자기들만 있는 듯
시끄러운 사람들 있습니다
연예인들 중 사투리 고친 사람들
여럿 보았습니다
박경희 가수, 허참 개그맨, 등
전두환대통령도 그랬구요
김영삼은 아니었지요
역사적 배경도 중요하지요
2천년을 한반도를 지배했으니까
우리가 제일이다 그런 거 아닐까요?
우리가 남이가?
주제는 다소 무겁지만
가볍게 읽어 주시기 바라구요
외국의 저명한 학자가 분석한
내용을 새겨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댓글 감사드리구요
마음이 많이 불편하시다면
글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말씀드립니다
@청솔 평소에 청솔님 께서는 삶방 에 꾸준히 좋은글 많이 올려주셔서 늘 존경하던 바였지요
그 연예인들은 억양 고치기 위해 노력도 많이 하지만 투자도 엄청 많이 하는걸로 알고 있지요
일반인들 이 그렇게 까지 하기 쉽질 않아요
마치 우리 삶방 의 글 처럼 살아가는 모습 이지요
청솔 님의 시각과 제 시각이 이런 부분에서는 다를 뿐이지요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경상도 사람으로써 한때
돈은 안 드리고 고쳐 보려 노력해 봤지만 안되더군요
이제 늙어 지니 오히려 지금은 부담없이 당당하게 지낸 답니다
@복매 복매님께 사투리를 고치시라고
지적질 하는 거 아닙니다
다만 엊그제 걷기운동을 하다가
너무 큰소리로 당당하게
마치 싸움하듯 큰소리로
주위사람들 배려없이 지나치는
모습을 보고 글을 올렸습니다
식당엘 가서도
청계산엘 가서도
우면산엘 가서도
북한산엘 가서도
동창회엘 가서도
같은 모습을 봅니다
특히 어쩌다 보았던 토론프로에서
자기주장만 큰소리로 당당하게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듯
그런 사람들 여럿 보았습니다
제 시각이 아니라
그거 불편해 하는 사람들
여럿 보았습니다
다른 지방 분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배경과 편견이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났다
우리가 주인이다
거기다 프리미엄까지 있구요
불이익이 있다면 바로 고치겠지요
오히려 경상도 사투리를 배워서
짝퉁 경상도인 행세 하는 이도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솔 물론 저 보고 그러는거 아닌줄 너무 잘알지만
제체기를 참을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식당에서나
산책 로 에서나 어디서든 우월해서 ?
그러는게 아니라는 뜻 입니다 네버
그게 경상도 사람의 애로사항 이기도 하지요
절대로 타지역 억 양인들은 모르는 ~~
@복매 물론 복매님께서 그럴 분이 절대로 아니라는 건
저뿐만 아니라 동행카페 분들이 더 잘 아시겠지요
다만 재채기 소리가 너무 크다는 것
그 것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큰 소리로 재채기를 하지만
서양사람들은 최대한 그걸 참습니다
저도 참는 방법을 배워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합니다
배우면 할 수 있게 되드라구요
혓바닥을 입천장에 붙이고
기도를 막으면 재채기가 막히드라구요
도이힐러 교수님의 이론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위 사람들을 생각해서
재채기를 참아내는 서양사람들
우리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솔 서로의 견해 가 다를 뿐이란 생각이네요
배워서 되는게 있고 안 되는건 분명 있다는 생각이고요
마치 즐겁고 기쁠때 터져 나오는 감탄사 와 같다 는 생각 이네요
태생을 자신의 뜻 데로 할 수 없듯
언어 의 억양도 선택 사항 이 아니다 보니
듣는 이 에게는 더러 호불호 가 있나 봅니다
@복매 자연스럽게 쓰는 사투리야 어쩌겠습니까마는
일부러 큰 소리로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마치 남성스러움을 뽐내듯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걸 지적하는 것이구요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호기심 반, 당황스러움 반
심지어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합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공중도덕이랄까? 매너라고 할까?
맞습니다
매너없는 사람들 꽤 많습니다
중국사람들이 그렇다고 합니다
공중도덕심 빵점인 중국인들!!
해박한 논조에 감명 깊게 있었습니다
하루빨리 좁은 국토에 지방 구분이 없어야 하는데 .....
지방색이 없을 수 없습니다
향토색이란게 있습니다
타고나고 살아가는 거니까요
자연스레 체득하는거지요
다만 고위공직자들 중에 일부러
자랑스럽게 아주 고압적으로
심지어 거만하고 오만불손하게
사투리로 말하는 걸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전두환도 노력해서 고쳤는데요
앞으로 사투리가 너무 심한 사람들
전국방송 출연을 자제시키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특히 격렬한 토론 프로그램들
자기네 지방 방송에만 나오도록...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의 학계와 교육계에도
조선시대 노론의 후손들이 많다고 합니다
각계에 골고루 두루 퍼져있다고 합니다
원조는 물론 신라의 경상도인들입니다
노론은 조선후기를 좌지우지한 사람들이지요
결국 나라를 말아 먹었구요
일제시대에는 친일파로 화려한 변신을 하지요
미국이 들어온 이후로는 숭미파가 됩니다
미국 유학을 통해 사회 지도층이 됩니다
그 들이 앞장서서 자기 조상들의 업적을
과대포장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그런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 사학계의 거두인 이병도
그의 자손들인 이춘녕, 이장무 등이
모두 노론의 후예들이라고 합니다
이장무는 서울대 총장을 지냈구요
그의 동생은 문화재청장을 했으며
이춘녕은 서울농대 학장을 지냈습니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자손들이 사회 곳곳에 중추세력으로
포진해 있다고 합니다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기반으로 한 것이지요
조선초기 이들이 전 인구의 10% 정도구요
노비 인구가 40%쯤 됐다고 합니다
조선말기가 되면 70%로 늘어납니다
퇴계 이황도 400명 가까운 노비들을 부렸습니다
대다수 경상도인들은 양반집 노비출신입니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주인집 성을 따르게 되지요
새로운 호적법에 따른 결과라고 합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통치한 건
근대의 일일뿐만이 아니라 지난 1500년 동안
쭉 그래 왔다고 합니다. 권력지향적이지요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경상도 사람들 중에서도 겨우 10% 정도만
엘리트 지배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노비, 중인, 천민, 기타 등입니다
퇴계 이황이 부린 노비만 367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체 경상도 사람들이 모두
10%안에 드는 줄 착각하고 양반행세를 하지요
종갓집에 가서 문중을 대표해
도포입고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면
진짜배기 양반집 자손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일제가 들어와 일본식 호적법이 생기면서
주인양반집 성씨를 따라 성을 갖게 됐지요
사실은 개똥이, 쇠똥이, 삼월이, 사월이 등이
대다수 경상도 후손들의 조상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목소리를 아주 크게 내지요
너무 목소리 높이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봅니다
중국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네요
상냥하고 듣기좋은 경상도 아가씨들 사투리
어데예~~ 몰라예~~ 아이라예~~
듣기에도 부담없고 매력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