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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페 2,19-22
복 음 : 요한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믿음의 길손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수도원 아침 미사 중 주례 신부의 한 말씀이 통쾌하여 나눕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을 요약합니다.
“보고 믿는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고,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이다.”
믿는 이들은 누구나 잠시 세상에 머물고 있는 길손(나그네)들입니다.
때로 수도공동체의 형제들이 다 길손들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냥 막연한 길손들이 아니라, 하느님 향한 여정 중에 있는 '믿음의 길손들'입니다.
요즘 들어 믿음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깨닫고, 배웁니다.
믿음은 길입니다. 믿음은 문입니다. 믿음은 봄(見)입니다. 믿음은 빛입니다. 믿음은 기쁨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도권 어디가나 가득한 사람들이 흡사 '출구 없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 같습니다.
가시적 좁은 울안의 감옥만 아니라 이제 사람 가득한 나라 전체가 감옥처럼 답답하게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길이 없어, 문이 없어 답답하고 우울하고 어둡고 무겁습니다.
이리저리 뭔가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그대로 문을, 길을 찾는 모습들입니다.
하여 이런저런 순례길에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순교성지를 찾는 이들 역시 길을 찾아, 문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릴 때 보이는 길이요 문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야 비로소 방황은 멈추고 하느님 향한 여정의 시작입니다.
믿음은 봄(見)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렸을 때 예수 아기를 팔에 안고 기쁨에 넘쳐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루카2,30) 고백한 시메온입니다.
얼마 전 겸손 되이 고백성사를 청하는 전임 아빠스님의 모습에서 저는 믿음을 봤고 신선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제 저에게 밥과 옷을 사주신 분으로부터도 믿음을 봤습니다.
“자매님은 저를 통해 예수님께 밥을 사주신 것이고, 저를 통해 예수님의 옷을 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하듯 이런 순수한 믿음을 보면 저절로 기쁨이 샘솟습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이런 순수한 믿음을 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웃을 통해 예수님을 환대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제 아들이 세례도 받지 않고 죽었는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렇게 착하게 살다가 불쌍하게 죽었는데 하느님은 분명 구원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니까요.”
젊은 나이에 불행하게 죽은 자식을 슬퍼하는 자매님께 지체 없이 드린 믿음의 답변에 저 또한 만족했습니다.
사실 피에타의 성모님 같은 슬픔의 어머니들이 차고 넘치는 이 땅입니다.
이런 믿음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또 기쁨으로 빛나게 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믿음을 통해 활짝 열리는 하늘 길, 하늘 문입니다.
이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빛과 위로를 찾아 끊임없이 성지를, 성전을 방문합니다.
순교성지를 방문할 때 마다
'세상의 중심에 천주교가 있고, 천주교의 중심에 성지가 있고,
성지의 중심에 성전이 있고, 성전의 중심에 미사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지의 아늑한 성전에서의 미사는 고향에 온 듯 편안하여 꼭 영혼의 쉼터처럼 생각됩니다.
하늘 향해 막힌 길, 닫힌 문이 활짝 열리는 성전 미사시간입니다.
깊고 그윽한 순교성지들은 그대로 순교 성인들 내면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상징합니다.
성지와 미사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느님을 깊이 맛본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순교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참 고맙고 신비로운 것이 전혀 모르던 사람들도 미사를 드리고 나면 금방 한 식구들처럼 친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한 자녀들이요 하느님 안에 한 형제들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오늘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의 진리를 실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깨닫게 하는 미사의 은총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믿음을 북돋아 줍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믿음을 보게 하고, 활짝 열린 하늘 문을, 하늘 길을 보게 합니다.
여기서 기쁨으로 빛나는 자유로운 삶이 펼쳐집니다.
보지 않고도 주님을 믿는 믿음도 선사받습니다.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고백했지만
우리는 보지 않고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토마스와 달리, 보지 않고도 주님을 믿어 행복했던, 또 순교에 이르렀던 무수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끊임없는 교회의 성사(聖事) 은총이, 말씀과 기도의 은총이 주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믿음의 길손들인 우리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을 뵙게 해주시고,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깊이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ㄱㄴ)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얼마 전에 아는 분들과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었지요.
“뭐 드실래요?”
그런데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아무 거나 맛있는 거요.”
이 말처럼 애매한 대답이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 다른데, 그 기준을 제가 어떻게 다 맞출 수 있겠습니까?
하긴 이렇게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무조건 따라가는 마음 때문인지,
술집 술안주로 ‘아무 거나’라는 것이 메뉴에 있기도 하더군요.
아무튼 애매모호한 대답을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대한 우리의 대답 역시 이렇게 애매모호했던 것이 아닐까요?
단순히 믿는다는 이유만을 내세우면서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우리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성모님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의탁을 보여주는 말씀이지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과 비교를 해 봅니다.
우리 역시 이런 말씀을 종종 하지요. 즉,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당신의 말씀이 곧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식의 기도를 바칩니다.
문제는 이 기도가 참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혹시 귀찮아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갖게 됩니다.
“저는 몰라요.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 그러나 내게 정말로 유익해야지만 해요.”
이런 식의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바치게 되면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곧바로 넘어지고 맙니다.
그 유익이란 것의 기준이 세상의 것들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너무나도 다릅니다.
따라서 이런 식의 입으로만 외치는 믿음은 부족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서는 주님께 희망을 둘 수 없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신앙의 대표 주자인 것처럼 나오지만,
그가 의심했던 조건들을 보면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감격하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체적으로 내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고,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믿음의 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영접하는 체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체험하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토마스라는 사람은
주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깨우러 갈 때(요한11,16) 거기에 있었고,
고별사를 할 때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20,25)하고 말하였을 때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솔직한 답변입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
우리를 위한 사랑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한 토마스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같이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는데 특별히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20,20,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힘과 능력에 믿음을 두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믿음을 둡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드레 뒤에 다시 오신 것은 토마스에 대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되어 실망할 수 있는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섬세한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안배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토마스 혼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혼자만 왕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버려두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데 장애가 될 요소를 없애주시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결국 토마스는 감히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아챘고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신 말씀이
‘못 자국을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한
토마스의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그렇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고 만지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던 구애 받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거짓으로 믿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편이 훨씬 더 주님 마음에 듭니다.
따라서 정직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예수회 존포웰).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시니 말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요한).
사랑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꾸지람 들었지요.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누가 확실하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 그 분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더구나 살아난 후 축지법도 쓰고 예언도 한다면 더 확인해보고 싶은데요?
그러든가 TV에 생방송으로 직접 나와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좋겠고요.
저도 이런 점에서 토마스 사도처럼 호기심과 확인하기를 참 좋아합니다.
예수님 부활의 확인을 토마스 사도가 그렇게 하셨고 결국 꾸지람 들었지요.
제 대신 꾸지람 들은 거 같고, 아니면 전 인류를 대신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치유되어야 합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묵상 하나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20,25)
불신앙을 상징하는 구절로서 오랜 동안 교회 안에서 사용되던 사도 토마스의 말임을 우리는 압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사도 토마스의 태도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실 제자들은 성령강림 체험이 있기까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두려움에 쌓여 혼돈에 빠져있을 때, 가장 용기 있게 확실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자 했던 이가 토마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 야단을 맞는 장본인이 되었지만, 제일 먼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Dominus meus et Deus meus!)”(요한20,28)을 고백한 이는 토마스였습니다.
과연 우리라면 어떠했을까요?
다른 열 제자와 같은 태도를 보였을 수도 있고, 충분히 토마스와 같은 태도를 보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장에 없었고, 그저 다른 동료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보지 않고도 옳은 것만 믿을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도 토마스는 보통의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의 모습들 역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삶을 다하는 날까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진위를 따지고자 하는 마음은 죄가 아닙니다.
그럴까 그렇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지적 동물의 정상적인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도 안 되는 듯한 이야기에 속아서 사이비 종교에 주저함 없이 빠져드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의 성격이나 성향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성격을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아가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느냐 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 맞는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자신의 성격에 백 퍼센트 만족할 이는 세상에 없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청하는 마음으로 그분 안에 머물고자 할 때,
우리의 단점이나 약점은 오히려 하느님을 보다 더 잘 체험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토마스 사도가 순교의 관을 쓰기까지의 신앙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기싸움과 갈등과 번민이 있었을까를 짐작해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고린토2서12.9)
묵상 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20,28)
믿지 못하는 마음은 상처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을 저버린 사건들이 만든 상처들이 반복될수록
불신이라는 방어기제(防禦機制)는 더욱 강하게 작동합니다.
시간이 흘러도 늘 주변에는 거짓들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것이, 그리고 의심하는 것이 지혜가 되고 맙니다.
결국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선별작업과 의지를 통해서 얻어지는 마음이 되어버렸습니다.
보통의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상처는 불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신도 모르게 거짓을 타인에게 전한다는 말입니다.
거짓으로 인한 상처의 악순환입니다.
신앙. 즉 하느님을 믿는 것에도 이러한 상처의 영향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도 토마스가 보여준 태도는 사실 예수님께 나무람을 들을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자연스러운 반응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결국 만나게 되었고, 그의 상처는 치유가 됩니다.
믿음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믿음을 순교로 증거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맹목적 믿음이 현명하거나 올바르다는 표현을 쓰지 못하는 삶,
이것이 우리의 죄의 결과이고 실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관계가 하느님과 우리의 믿음이라는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올바른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상처의 치유에서 옵니다.
그 치유는 우리의 희망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치유입니다.
치유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그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묻고 찾고 만나고 확신하는 믿음
김정훈 신부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만져봐야 그분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
토마스는 ‘의심 많은 제자’라는 소리도 듣는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른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닫아걸고 숨었다.(요한 20,18–19)
하지만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는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큰소리친다.(25절)
토마스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싶고
그분을 어서 빨리 만나고 싶은 열망에서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하고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다른 제자들 중에는 그런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 없었다.
신앙인이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믿지 않는 이가 의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신앙인의 의문은 자신이 직접 하느님을 체험하고 더 깊이 믿고 싶은 열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우리에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고집만 피우는 것은 불신이지만
더 깊고 완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 주님을 찾는 물음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우리의 신앙은 맹신이 아니며 우리의 신앙고백은 남이 들려준 것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직접 하느님을 찾아 만나고 확신하며 믿음을 고백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내 삶과 구원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이신지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우리 자신이 체험한 주님께 참된 신앙을 마음으로 고백해야 한다.
<야곱의 우물>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부활의 삶
이연수 교수(가톨릭대학교 ELP 학부대학)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처를 제 눈으로 보고
손가락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실증주의자인 셈이지요.
관찰이나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못 믿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토마스의 태도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신앙이 그렇게 눈으로, 손가락으로 확인해서 얻어지는 믿음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자신들도 역사의 종말에 부활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가 죽어서 가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듯,
부활도 죽어 있다가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지는 시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을 본 토마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
실의와 절망감에 빠져 예루살렘을 도망쳤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서야 사도로 탈바꿈했듯이, 부활은 삶의 변화에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에 부활하는 것이 아닌 나날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려는 모습 속에서
진실과 사랑의 가치를 실현시킨다면, 그것이 부활의 삶이 아닐까요?
그래야, 우리네 삶이 다할 때,
하느님 앞에서 잘 놀다 왔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겠지요.
나는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의 언어로 묵상해 봅시다.
<생활성서와 함께 ‘소금항아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