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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절기(1)
신 16:1-17
1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2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3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4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 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며
5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유월절 제물을 드리고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 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8 너는 엿새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일하지 말지니라
9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10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1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13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신 16:1-17 / [유월절] 곡식을 추수하기 시작하는 ㄱ) 초봄이 되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잔치를 베푸십시오. 이 기간의 어느 날 밤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ㄱ. 히. 아빕월.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를 말한다) 2) 그때에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양이나 소를 잡아 여호와께 유월절 제물을 바치고 잔치를 베푸십시오. 3) 또 그때에는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떡만을 먹으십시오. 여러분이 애굽 땅에서 황급히 탈출할 때에 누룩을 넣어서 부풀릴 사이도 없이 반죽하여 금방 구워서 먹었던 것처럼 다시 그런 떡을 7일 동안 구워서 먹으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고난의 떡을 먹음으로써 여러분이 애굽 땅에서 탈출하던 날을 평생토록 기억하십시오. 4) 묵은 누룩은 모조리 폐기하고 새 누룩이 나오기까지 7일 동안 전국에서 어느 누구도 집안에 누룩을 보관해 두어서는 안됩니다. 또 여러분이 유월절 첫날 저녁에 잡은 제물의 고기도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5)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이라고 해도 아무 데서나 자기 마을에서 유월절 짐승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6) 꼭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여러분이 애굽에서 출발하던 때인 해지는 시각에 잡으십시오. 7) 여러분은 그 고기를 여호와의 성소에서 요리해 먹고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8) 그래도 계속 6일 동안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만을 먹고 7일에는 다시 성소에 모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잔치를 베푸십시오. 그리고 이 잔칫날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9) [칠칠절] 여러분은 곡식 추수를 시작한때로부터 7주를 계산하여 10)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ㄱ) 오순절 잔치를 베푸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논밭에 복을 내려 주셔서 여러분이 일년 동안 수고하여 거둔 것인 만큼 자진해서 추수 감사 예물을 가져다 바치십시오. (ㄱ. 히. 칠칠절) 11) 여러분은 자녀들과 남녀 종들과 여러분의 마을에서 함께 사는 레위 사람들과 외국인들과 고아와 과부들까지 모두 데리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즐거운 잔치를 베푸십시오. 12) 여러분 자신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 규정들을 지켜 실천하십시오. 13) [초막절] 여러분은 봄철 곡식을 수확한 때뿐만 아니라 초가을에 올리브와 포도를 수확한 다음에도 일주일 동안 초막절 잔치를 베푸십시오. 14) 여러분은 자녀들과 남녀 종들과 여러분의 마을에서 함께 사는 레위 사람들과 외국인들과 고아나 과부들과 함께 이 잔치를 즐겁게 베푸십시오. 15)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잔치를 베푸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많은 수확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잔치에서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16)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씩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뵈어야 합니다. 곧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는 여러분이 여호와의 얼굴을 뵈어야 하는데 언제나 빈손으로는 가지 마십시오. 17) 많든지 적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가지고 가되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에 따라서 예물을 가지고 가십시오.
유월절과 무교절, 맥추절, 초막절에 관한 규정입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그 땅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갖고 살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유월절(1-8) 유월절과 무교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함께 연결되어 8일 동안 지켰습니다. 아빕월은 우리의 달력으로 따지면 대략 3~4월에 해당합니다. 출애굽기 12장 18절에 의하면 아빕월 14일에 유월절을 지내고, 그 이후 15일에서 21일까지 7일 동안 무교절을 지냈습니다. 이때 누룩 없는 떡과 구운 고기를 먹으며 출애굽 때의 고난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념하며 감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절기는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 우리의 유월절 양 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합니다.
칠칠절(9-12) 일곱 번의 일곱 날이라는 의미의 칠칠절은 후에 오순절로 불렸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을 시작하는 안식일로부터 50일 후에 거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보리와 밀 추수를 마쳤습니다. 그래서 맥추절로도 불립니다. 이 역시 애굽에서의 해방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12). 하지만 이 절기는 땅의 소산을 강조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할 때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돌보시고 먹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백성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감사의 예물을 드렸습니다(10).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에는 추수의 육적 기쁨이 풍성할 때 성령강림의 영적 기쁨이 임하였습니다.
초막절(13-17) 매년 가을에 거행되는 세 번째 절기인 초막절은 포도, 올리브, 종려, 무화과 등을 수확한 뒤 지내는 절기입니다. 자신들이 누리는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하고 기뻐하는 시간입니다. 현대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합니다. 칠칠절과 초막절의 중요한 특징 하나가 있습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규정입니다. 이 절기에는 반드시 가정의 노비, 지역 제사장인 레위인, 소외되기 쉬운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추수의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했습니다(11, 14). 하나님의 선물이 풍성하게 주어진 추수의 계절에 그것을 사람들과 후하게 나누도록 한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은 백성이 약속의 땅에 흩어져 살다가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에 함께 모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당신의 예배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예배입니까?
인간의 기억은 한계가 있고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들도 시간이 흐르고 현실의 상황에 매몰되어 살다보면 쉽게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끝까지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했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설 교 >
감사와 복
신 16:15 / 강성찬 목사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깎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과 사업장이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데다가,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 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이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모임을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나에게 불만을 토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래도 내게 친구로 가까이 있음이 아니던가요?
모든 일에 원망 불평 하지 아니하고 감사의 조건을 찾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소출을 저장한 후에 칠일 동안 초막절을 지키되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복 주실 것이란 말씀은 지금 까지 복을 주셨고 앞으로도 복을 주실 것이란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앞으로도 복을 베풀어 주실 것과 지금까지 줄 곧 복을 베풀어 풍성한 소출을 얻게 하신 사실을 인해 감사함으로 초막절을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도들이 복 받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추수 감사절을 지키게 하심도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을 주시고자 합입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주일을 지킴으로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감사할 때에 물산의 복이 임합니다.
가난과 질병의 저주에서 축복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정진숙 집사 (46세, 여,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의 간증이 있습니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6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는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나가기도 했으나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면서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댁은 대대로 우상을 섬기는 가정이었습니다. 남편의 외할머니는 무당이셨는데 딸에게까지 대물림 하려고 하셨다 합니다. 시어머니는 신내림을 받지 않으려고 많은 돈을 가져다주고 굿도 하면서 그 일은 피하였지만 가산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결혼 후 날마다 술을 먹었고 점점 심해지면서 정신 분열 증세까지 보였습니다. 남편의 행패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가혹했고, 괴로움에 지쳐 언니의 전도를 받고 남편 모르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남편이 변화되기를 기도하던 어느 날, 남편에게 교회 다니는 것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마구 때리면서 "너 왜 하나님을 믿는 거야! 나 죽으라고 교회 다니는 거야!" 하며 시누이에게 끌고 갔습니다. 남편은 시누이와 여러 시집 식구들이 있는 앞에서 예수 믿지 않겠다고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순교하는 정신으로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더욱 화가 나서 그때부터는 닥치는 대로 때렸습니다. 매를 너무 많이 맞아서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고 너무 서러워서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십니까? 하나님 안 계신 것 아니에요. 정말 살아 계신다면 살아 계신 표적 좀 보여주세요."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자다가 일어나서 누군가에게 고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너 이놈!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데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어서 나가! 나가!" 하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하나님 아버지, 나 미련해서 그렇습니다. 용서해 주시고 술, 담배 끊게 해 주세요." 하며 교회를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러한 산 표적을 체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남편은 술과 정신 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도 했었으나 완치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 남편이 예수를 영접하자 그날로 교회 철야 예배에 가서 눈물로 회개를 하였고, 성령 충만을 받아 밤새도록 기도하고 새벽 기도까지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예수 믿기 전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시커먼 사람과 매일 같이 다니며 너 한잔 나 한잔 하며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 술 귀신이 이제 쫓겨나고 주님 안에서 새사람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남편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술, 담배도 끊었고, 정신 분열증도 치료받았습니다. 이전에 정신 분열로 수없이 때리고 핍박했던 남편이었지만, 그것을 잘 참아 내고 인내하자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신 것이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불행했던 가정에 평화의 꽃이 피기 시작했으나 가난은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너무 가난한 것은 덕이 되지 않으니 우리에게도 집을 달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정아버지가 사놓은 집이 있는데 싸게 줄 테니 사라고 하셨습니다. 적은 돈을 가지고 그 집을 샀습니다. 약간은 허름한 집이었지만 어느 맨션아파트도 부럽지 않은 집이었습니다. 남편은 작게나마 전기 공사 주식회사를 차리게 되었고 한전공사를 맡게 되면서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주일마다 감사 헌금을 드렸고 돈이 들어오는 대로 건축 헌금도 많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매주 감사할 일이 생겨났고 나중에는 집이 네 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 한 채는 집 없는 사람들에게 일 년씩 살고 좀 나아지면 이사 가게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욕심이 들어와서 감사 헌금을 한 달 동안 드리지 않았더니 한 달 내내 감사할 일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는 주일마다 감사 헌금을 빼놓지 않고 드리고 있고 십일조와 헌물을 아낌없이 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가난했을 때도 좋은 쌀 대신 나쁜 쌀 사고, 연탄도 100장 들여놓을 것을 50장만 들여 놓아가며 남편 모르게 알뜰살뜰 절약해서 십일조를 드렸었습니다. 그리고 차비가 없어서 2번씩 차를 갈아타고 다녀야 될 먼 교회를 두 아이를 업고 끌고 걸어 다니면서도 하나도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간절히 기도한 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받지 못한 것이 있다면 게을러서 기도하지 않았던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남편은 믿음 안에서 안수 집사가 되었고, 올 6월에는 장로로 장립(將立)을 받기 위해 공부하고 있으며 사업도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딸은 신학대학을 나와 전도사와 결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고, 작은아이는 대학을 다니며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고 핍박했던 시집 식구들은 모두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바로 위의 형님은 그 동안 혼자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며 이제까지 자기를 위해 기도했으니 이제는 위해 기도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사 문제도 다툼이 많았지만 이제는 추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모두가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남편 사업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대로 앞으로도 더욱 하나님 사업과 구제에 힘쓰며 살려고 합니다.
모든 일들에 복을 주십니다.
복 주실 것을 하신 말씀은 그가 너를 축복 하실 것이다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하는 모든 일들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CBS의 뉴스 앵커 돈 래더(Don Rather)는 워터 크롬카이트 이후 미국의 방송인 가운데 최고로 꼽힙니다. 그는 <나는 기억한다(I remember)>라는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 가난해서 대학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교 시절에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일단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풋볼 선수로 스포츠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샘 휴스턴 사범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계획대로 풋볼 팀에 들어가 1 개 월 간의 시험 연습 과정을 거쳐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코치는 퓨니(Punny, 꼬마)라는 별명을 가진 윌슨 씨였습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인격적으로도 존경받는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날 윌슨 코치는 돈을 개인적으로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너는 너무 작아. 155파운드로는 대학 풋볼 팀에 들어갈 수 없어. 하지만 실망하지는 마라. 나는 너보다 훨씬 작지만 풋볼 코치가 되지 않았니? 내 어머니께서는 늘 자기가 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은 그를 더 귀한 그릇으로 쓰신다고 말씀하셨다. 너는 풋볼 선수는 되지 못해도 머리가 좋고 말을 잘 하니까 스포츠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 어떻겠니?" 이렇게 해서 그는 윌슨 코치가 소개한 시골 라디오 방송국에 발을 디뎌 놓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의 명 앵커 돈 래더가 된 것입니다. 그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르쳐 준 윌슨 코치에게 지금도 나는 감사한다."(디럭스바이블-명 앵커가 된 돈 래더)
억지로 베풀어도 복되게 하십니다.
“집에는 아이들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아내는 작년에 죽었지요.” 피리 하나만 팔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면서 노인은 가정 사정을 늘어놓았습니다. 어딜 가나 듣는 얘기였습니다. 워낙 인도의 피리 음악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잠깐 기웃거렸을 뿐이지 사실 형편없는 대나무 피리들을 살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는 관심을 보이자 필사적으로 달라붙었습니다. “훌륭한 물건입니다. 인도의 어딜 가도 진짜배기 피리들을 구하긴 어렵지요. 싸게 해드릴 테니 제 사정 좀 봐주세요. 막내아이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답니다.” 그가 하는 거짓말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집세도 못 내서 쫓겨났겠군요.” 그러자 노인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우리 식구는 완전히 거리에 나앉았답니다. 그러니 적선하는 셈치고 하나만 팔아 주세요.” 다시 말했습니다. “물론 1주일 동안 한 개도 못 팔았겠죠?” 노인은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이 피리들이 좋은 것이긴 해도 누가 사줘야 말이죠. 솔직히 말해 당신처럼 히피 같은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인도 피리 따위를 사려고 하겠습니까?” 노인은 말을 마치고 나서 환심을 사려고 피리 하나를 꺼내더니 휘엉청 불어제끼기 시작했습니다. 피리 장사를 오래 한 때문인지 피리 솜씨는 더없이 훌륭했습니다. 더구나 갠지스 강의 낙조를 배경으로 허공에 솟구치는 피리 곡조를 들으니 감동이 더했습니다. 피리 한 개를 팔려고 상투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긴 했으나, 피리를 부는 모습은 더없이 진지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동안 인도 여행 때마다 피리 한두 자루를 꼭 사들고 돌아오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사 갖고 온 피리들은 번번이 너무 형편없어서 제대로 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파는 사람만 멋들어진 곡조를 낼 수 있을 뿐 아마추어는 흉내 내기도 어려웠습니다. 또다시 쓸모없는 피리를 사고 싶지 않아서 노인에게 10루피(300원)정도 적선하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10 루피 짜리를 꺼낸다는 것이 그만 덜렁 1백 루피 짜리 종이돈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아차 하는 사이에 1백 루피는 노인의 재빠른 손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노인은 종이돈을 꽉 움켜쥔 손을 합장을 하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습니다. “아, 이런 고마우실 데가! 신께서 틀림없이 당신을 기억하실 겁니다. 나 또한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연신 합장한 손을 이마 위로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때는 늦어서 돌려 달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맥없이 1백 루피를 빼앗긴 터라 속이 쓰렸지만 내색할 수도 없고 해서 억지로 자비스런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습니다. 더 손해를 보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습니다. 노인은 몇 걸음 더 쫓아오며 감사 표시를 하다가 내가 그만 됐다고 손짓을 하자 마지막으로 합장을 하고는 작별의 손을 흔들었습니다. 노인으로선 뜻밖의 횡재를 한 셈입니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온 나는 할 일도 없고 해서 일찌감치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벽녘이 됐는데, 난데없이 피리소리 하나가 잠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아직 잠이 덜 깬 의식으로, 이 피리소리가 꿈속에서 들리는 건지 창밖에서 들리는 건지 몰라 한참을 그냥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밖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눈을 부비며 창문을 열자 베란다 밑에서 어제의 그 노인이 피리를 불며 서 있었습니다. 쳐다보더니 손을 흔들어 보이고 얼른 또다시 피리를 불기 시작했습니다. 가락이 긴, 아침에 듣는 인도 전통의 라가 곡이었습니다. 순간 기가 막혀서 창문을 도로 닫았습니다. 어제 1백 루피를 빼앗아가더니 이제는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서 흥정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는 금방 쪼개져버릴 피리를 떠넘기고 또다시 거금을 우려낼 계획이었습니다. 고약한 노인네 때문에 잠이 확 달아나버렸습니다. 창문을 닫은 뒤에도 피리소리는 멎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작은 미워도 피리 부는 솜씨는 역시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타일러서 보낼 생각으로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노인은 합장을 하며 아침 인사를 했습니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어제 그만큼 돈을 줬으면 됐지 왜 또 와서 이러는 거요? 분명히 말하지만 피리를 살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어서 가시오.” 그러자 노인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더 엄숙하게 소리쳤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녜요? 어서 가세요. 더 이상 뭘 뜯어낼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난 당신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당신의 방 앞에 와서 피리를 불어주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도움을 주었으니까요. 난 그것 말고는 당신한테 해줄 것이 없거든요.” 노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서 순간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노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더 우려내려고 찾아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준 돈에 고마움을 느껴 뭔가 보답을 하려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노인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밝혀졌습니다. 그는 그 갠지스 강가에 머무는 닷새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내 방 앞에 와서 필릴리 필릴리 피리를 불었습니다. 피리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면 미명을 헤치고 갠지스 강 위로 오렌지색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노인이 불어주는 피리 곡 때문에 날마다 새롭고 뭔가 다른 하루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내키지도 않은 상태에서 1백 루피, 약 3천 원 정도를 적선한 덕분에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노인은 작은 베풂에도 보답하는 자세를 가르쳤고, 가난하지만 아직은 부유함을 잃지 않은 마음을 전해주었다. 그 노인 덕분에 지금도 잘난 체하며 말합니다. 인도 여행을 멋지게 한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어떤 국가 원수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과연 아침마다 누군가가 와서 환상적인 피리소리로 잠을 깨워 주었느냐고. 인도 역사상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람에게 마지못하여 베푼 일로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할 때 약속하신 은혜와 복이 아름답게 임할 줄 믿습니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복되게 하십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어둠속에서 한 성공한 사업가가 먹 문을 닫으려던 정육점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정육점 주인은 "크리스마스 파티용 칠면조를 사려고 그러나?" 하고 묻자, 사업가는 "아니, 핫도그 몇 개만 사려고" 하면서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핫도그를 사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해 주었지요. 오래 전 그는 사업이 완전히 망해서 갑자기 빈 털털이가 된 적이 있었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을 때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는 선물을 살 돈은 커녕 당장 저녁에 먹을 찬거리를 살 1달러가 전 재산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그와 아내 그리고 어린 딸은 서로에게 축복을 한 다음 감사한 마음으로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잡고기를 섞어 만든 작은 소시지를 각자의 식탁위에 놓아 주었지요. 놀랍게도 이 작은 소시지에 딸은 완전히 매료되었고, 딸의 기쁨은 전염이 되어 가난을 잊은 채 모두를 즐겁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가족들은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사랑이 넘치는 축제가 되도록 허락해준 하나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렸습니다. 소중했던 그 가난한 날의 크리스마스 만찬을 회상하는 듯 사업가 친구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젠 그날 일이 우리 집 크리스마스 전통이 되어서 지금도 크리스마스에는 핫도그를 먹는다네. 돈은 없었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서로 의지할 가족이 남아 있다는 것 또한 작은 일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와 서로를 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던 그 행복했던 날을 기억하게 만들어 주거든." 이라고 말했습니다.(크리스마스 만찬-둘로스자료)
1975년 12월 22일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른 파바로티는 어느 때보다 지쳐 있었습니다. 오페라 가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뚱뚱한 몸도 성공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도 부담스럽고 힘들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는 그저 빨리 집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잊고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밀라노의 말펜시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가 짙은 안개 속에서 착륙을 시도하다 활주로를 벗어나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사고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가 깨어난 곳은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사망한 끔찍한 사고 현장의 한가운데였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장면을 보며 그는 어떤 울림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아, 이런 생사의 갈림길에서 내 삶은 아무래도 좋은가? 여기 많은 죽음 앞에서도 내 삶이 헛된 것이란 말인가?' 그 와중에서 와이셔츠 차림으로 오들오들 떨던 그는 누군가 건네 준 손수건을 받아들자 자신도 모르게 그 손수건으로 목과 입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결코 노래와 떨어져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구나.' 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뻔했던 그 사고 이후 열아홉 살 때 처음 노래를 시작하던 열정으로 연습을 했고 다이어트를 해서 몸무게도 줄였습니다. 그에게 비행기 사고는 모든 일을 아름답게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다시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내가 노래를 그만두기 전에는 공부하고 또 공부할 것입니다. 타고난 재능이 50퍼센트라면 나머지 50퍼센트는 철저한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고로 다시 태어난 파바로티)
추수감사주일을 앞두며 이스라엘이 감사할 때에 더욱 복이 임함 같이 감사하며 물산의 복과 모든 복을 누립시다.
함께 즐거움으로 잔치하라
신 16:13-17 / 윤영택 목사
8월이 끝이 나고 내일부터 새로운 달 9월이 시작됩니다. 금년 영국에서는 여름이 싱겁게 지나가버린 듯 합니다. 작년처럼 물난리를 겪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어제처럼 맑고 따가운 햇볕을 충분히 맛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싱거운 여름이었습니다. 한국은 지난 주 토요일 처서를 지나면서 그 무덥던 삼복 더위가 물러가고 입추와 처서가 지난 지금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하여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맘때가 되면 삼복 더위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대지와 푸른 여름 들녘이 누런 빛으로 옷 색깔을 바꾸기 시작하고 꼿꼿하게 올라오던 벼 이삭도 고개를 살며시 숙이기 시작합니다.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처서가 지나면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고 하지요. 들녘에 여름내 무성하게 자라던 모든 식물들도 생장을 멈추니 마을 뒷산 묘소 벌초도 시작되어 산촌 동네엔 도시에서 고향으로 미리미리 선산을 찾는 이가 많아지는 시기입니다. 다음 주일이 모든 농작물에 하얀 이슬이 맺히게 된다는 백로이고 그 다음 주일이 추석입니다.
맑은 가을 하늘 따가운 햇빛을 받으며 알차게 익어가는 열매를 바라보는 농부들의 마음은 벌써 추수 밭에 가 있습니다. 풍성한 추수를 기대하는 농부들은 이제 하늘만 바라보며 땅의 열매들이 알차게 여물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예기치 않는 태풍이나 이상기온이 닥치면 여름내 힘들여 지어놓은 농사가 순식간에 쓸모 없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이 시기에 우리도 농부와 한 마음으로 고국의 평안을 위해 그리고 들녘의 곡식들이 큰 어려움 없이 건강하게 잘 여물어가도록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구하여야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작년부터 추석과 함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고 교우들과 이웃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잔치를 열고 있습니다. 9월 둘째 주일에 있을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준비하는 의미에서 오늘 읽은 말씀을 중심으로 감사절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할까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꼭 지켜야 할 세 가지 중요한 명절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곡식에 처음으로 낫을 대는 첫날부터 계산하여 칠 주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칠칠절 또는 맥추절 그리고 오늘 읽은 말씀처럼 포도 농사를 비롯하여 한 해의 모든 농사를 마치고 열매를 창고에 들이며 감사하는 수장절 또는 초막절입니다. 이 명절에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준비한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모여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잔치를 벌였습니다.
우리가 추석명절을 기해 드리는 추수감사절은 세 번째 절기인 수장절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켰던 것처럼 이 세가지 절기를 우리가 문자적으로 그대로 지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르러 각각 부활절, 오순절, 추수감사절 등으로 그 정신을 따라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이나 우리 조상들처럼 농사를 주업으로 삼지 않는 우리 시대에 추수감사절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여 무심코 지나쳐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농산물을 비롯하여 모든 생산품과 우리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농부들이나 목축업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명령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추수감사절을 가장 큰 교회의 명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자세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추수감사절을 지킬까 생각하는 아침이 되기 바랍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초막절을 지킬 때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와 함께 즐거운 잔치를 열었습니다. 농사를 마친 사람들은 풍성한 열매를 거둔 기쁨으로 마음도 풍성하여 가족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즐거움의 향연을 벌였습니다. 거기에는 풍성한 음식과 노래가 있고 서로를 향한 축복과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있었습니다. 땀 흘려 수고한 사람들이 수고한 대가를 얻음으로 인하여 누리는 행복한 시간이며 얻은 것을 이웃과 나눔으로 그 기쁨을 더 크게 하는 즐거움의 잔치였습니다. 우리에게 추석 명절이 있듯 어느 민족 어느 나라나 각각 고유한 추수감사 축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이 지켰던 이 감사의 축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직접 그 방법과 정신을 가르쳐주신 것이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왜 우리가 추석을 놔두고 이스라엘의 추수감사제를 따라야 하는가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이 수장절을 지켰던 것처럼 문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고 그 정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고 미국 선교사들의 소개로 미국의 추수감사절 시기에 맞추어 한국 교회들이 11월 넷째 주일에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지만 우리 나라의 계절과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어 요즘 많은 교회들이 우리의 고유 명절인 추석을 기해 감사주일로 지키기 시작합니다. 우리 교회도 그간 우리 형편을 따라 혹은 영국의 Harvest 기간과 비슷한 때 추수감사절을 가져보기도 하다가 몇 년 전부터는 추석 기간이 있는 주일로 정하여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감사 예배와 추석잔치를 분리하여 잔치는 토요일 밤에 옥스포드에 있는 이웃 사람들을 청하여 하던 것을 작년부터는 주일예배와 함께 낮에 공동식사를 하는 것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추수감사절을 지킬 때 그 시기와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 정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이 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에서 미리 드러낸 것처럼 우리가 이 감사의 축제를 즐거움으로 드릴 것이며 더 나아가 이웃과 함께 나누는 잔치가 되게 하자는데 말씀의 초점이 있습니다. 여름 곡식을 거둔 후 감사를 드리는 칠칠절에서도 언급이 된 것처럼 감사의 축제들은 열매를 거둔 후 그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움의 잔치를 열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14절을 보면,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 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하였습니다. 연락하라는 말은 즐거운 잔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자기 식구들끼리만 즐거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즐기는 잔치였습니다. 그 함께라는 테두리 속에 누가 들어 있습니까? 첫째 내 가족이고 다음에는 내 집에서 일하는 일군들입니다. 다시 말해 내 집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 집 울타리를 넘어 성중 마을에 살고 있는 레위 인들과 나그네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이었습니다. 이 안에 모든 사람들이 다 포함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감사의 절기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즐기며 감사하는데 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내 집에 속한 자들은 추수의 기쁨을 함께 누릴 권리를 가진 이들입니다.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기까지 함께 땀 흘리고 수고하여 일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집’에 속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권리를 누리지는 못합니다. ‘종’은 분명 한 집에 속한 자들이지만 주인의 소유물일 뿐 주인의 땅에서 나는 것을 자기 맘대로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엄밀히 말해 가족의 의미에 속하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레위인, 객, 고아, 과부 등은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약자로 언급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고 사회적 안전과 보호로부터 소외되고 빗겨난 자들입니다. 레위인은 12지파에 속하였지만 다른 지파들처럼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고 성전의 일을 거들면서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조로 생활하던 자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은 언제 밥줄이 끊어지고 생명의 위협을 받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서 ‘객’은 그냥 유랑하는 나그네를 뜻하기 보다는 이스라엘 본국 백성들이 살고 있는 그 곳에 터전 곧 땅을 가지지 못하고 얹혀서 살고 있는 타국인, 이방인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고아와 과부는 아버지와 남편 없는 사람들로서 가부장적 가족체제와 독특한 배타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전혀 보호와 안전의 보장을 받을 수 없는 소외층을 대표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농사 지을 땅이 없는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추수의 기쁨을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상대적으로 더 많이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시고 그 땅에서 나는 것을 얻을 때 함께 즐거워하며 잔치하라고 명하신 것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들 사이에서 발생되는 소외감과 박탈감을 해소하시려는 뜻이며 공동체 안에서 소외된 자들과 약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에서 주신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가진 자들이 누리는 그 즐거움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그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이 본 주인이셨습니다. 비록 내 이름으로 등기된 땅이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그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었으니 하나님의 소유였고 사람들은 다만 그 땅을 관리하는 청지기였습니다. 그 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산물은 땀 흘려 수고한 대가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당연히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 내가 노력하여 획득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 또한 복으로 받은 것임을 강조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15절). 이것은 결국 내가 소유한 것들이 절대적으로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을 풍성하게 주신 이유는 공동체가 함께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풍성한 수확과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나의 소유, 나의 울타리를 절대화시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의 초막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누려야 하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그 정신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적 가치는 많이 가진 자가 더 많이 누릴 권리가 있고 그 권리는 각각의 능력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달리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신 것은 그 많은 소유 그 자체로 인해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받은 그것으로 갖지 못한 자들, 소외된 자들과 함께 나눔에서 얻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정신을 따라 우리가 이번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준비하며 또 지켜야 할까 마음에 정한 바가 있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겸손한 고백이 담긴 예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물론 거기에는 감사의 마음이 담긴 예물이 따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추수감사주일에는 가을걷이를 한 후 드리는 예배라는 뜻에서 시각적으로 그 감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과일과 채소들을 강단에 올려놓고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이 추수감사헌금을 드려 부족한 교회의 재정을 채우는 일에 주 목표를 두지 않습니다. 헌금을 드리되 그 물질에 하나님을 향한 진심 어린 감사가 담겨있어야 하며 그 물질 또한 선한 일에 함께 나누어지는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한국에 있는 소년소녀 가장 10명에게 아주 작은 양이지만 매월 얼마씩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구제헌금이라는 이름으로 헌금하고 있지만 잘 기억하지 못하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과 같은 절기를 통해 나와 우리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일에 이번 추수감사헌금이 유익하게 쓰여지리라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함께 즐기는 조촐한 잔치가 열립니다. 우리교회 자매님들이 수고하여 매주일 예배 후 점심식사로 나누는 비빔밥이 우리를 얼마나 즐겁게 하는지 감사할 뿐입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옥스포드 비빔밥이 그립다고 말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지금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있느냐고 물으며 그때 그 사랑을 먹으며 외로울 때 힘이 되었고 활력소가 되었다고 감사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자매님들이 때로는 부담이 되고 힘이 들지만 여러분의 수고로 나그네 되어 이곳에 와 있는 분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면 수고가 즐거움으로 변할 줄 믿습니다. 이 수고를 한 데 모아 이번 추수감사절 추석에는 작은 잔치가 열립니다. 역시 우리교회 여전도회 자매님들의 수고가 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요.
알고 보면 우리가 다 나그네들입니다. 옥스포드에 잠시 여행 온 분들, 몇 주간 혹은 몇 달 머물며 공부하고 일하시는 분들,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 연구하시는 분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모두 이 땅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들입니다. 더 나아가 여기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얻어 정착하고 계신 분들이라 할지라도 마음은 늘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고국에 마음을 두고 사는 나그네들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이 땅에 잠시 머물다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갈 나그네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그네 사정은 나그네들이 잘 아는 법입니다. 의지할 곳이 없고 외로운 시간에 누군가 곁에서 친구가 되어주고 가족이 되어주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위로가 되는지요.
우리 옥스포드 한인교회가 나그네들을 위한 가정이 되고 울타리가 되며 친구와 위로자의 역할을 잘 해나갈 수 있기를 함께 힘써야 합니다. 더 나아가 잠시 옥스포드에 머무는 나그네들뿐 아니라 이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우리 모든 나그네들에게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울타리와 가정의 기능을 힘써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추석잔치는 우리 이웃에 있는 한인들을 초청하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평소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이라도 아무런 부담이 없이 초청되어 우리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고향을 떠나 홀로 추석을 보내야 하는 이웃들이 참 많습니다. 학교와 이웃의 한인들에게 우리 교회의 추석 잔치를 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외국인 친구들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초청하여 한국의 추석의 의미를 소개하고 그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전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아주 작지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이런 부분들이 이번 추수감사절을 의미 있게 지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추수감사의 중요한 정신입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방식이 이웃과 함께 그 즐거움을 나누는 것입니다. 내 집에 있는 가족은 물론 내 사업장에서 함께 일하는 고용인들에게 그리고 집 밖의 이웃들 특히 궁핍한 생활을 하는 어려운 이웃들과 외롭게 홀로 지내는 이웃들이 우리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무엇으로 보일 수 있습니까? 내 곁에 있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지 않고 그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한 나의 사랑이 표현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것처럼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이 된다, 다르다는 뜻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감사축제에서도 다른 민족들과 무엇인가는 다른 모습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다름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제사입니다. 복을 기대하는 나 중심이 아니라 나를 복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구체적인 방법은 나와 내 식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아니라 그 범위가 더 넓게 열려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의 잔치입니다. 이 즐거움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와 사는 거룩한 백성의 삶이 얼마나 복된 것임을 재확인하면서 주 안에서 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성과 유대감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가집니다. 여기에 다른 민족들의 축제와 근본적인 다름이 있습니다. 열매를 기다리는 계절을 시작하면서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기억하며 이번 추수감사절을 감사함으로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
신 16:13-17 / 문기태 목사
성경에서 추석과 가장 비슷한 절기를 찾는다면 초막절이라고 할 수 잇습니다. 초막절은 광야에서의 장막 생활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일주일 동안 집앞에 초막을 지어놓고 그곳에 거하면서 지켰는데 일년간의 결실을 감사하는 절기이므로 수장절로도 불리웠습니다. 오늘 우리의 추석과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이 절기는 신분, 지위,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 축제를 벌이는 것이고 복받은 것 뿐 아니라 복 주실 것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석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까요? 한 마디로 즐겁게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시면서 강조한 것이 즐겁게하라는 말씀입니다. 초막절에 관한 규레를 주시면서도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반복하여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더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여러 절기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 일깨워 주십니다. 절기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즐겁게 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기대하시며 우리가 즐거워할 때 아주 사랑스럽게 여기십니다.
1. 하나님앞에서 즐겁게 보내야 합니다.(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할지니라(11)"
이 말씀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즐거움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즐거움은 위험요소를 안고 있습니다. 절기를 지키며 자칫하면 하나님을 잊기 쉽습니다. 춤추고 노래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다보면 하나님을 잊기 쉽습니다. 타락한 죄의 열락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우리는 축제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앞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모든 즐거움이 같아 보이나 즐거움의 대상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즐거움은 달라집니다. 인간으로서 즐겁게 살아 본 사람으로 다윗과 솔로몬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즐거움으로 살아간 사람이요, 솔로몬은 세상적인 부귀영화로 낙을 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낙을 누렸던 다윗은 즐거움이 온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낙을 누렸던 솔로몬은 결국 후회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모든 낙을 누리려고 했지만 모든 것이 다 헛되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진짜 즐거움은 하나님 안에서 얻는 즐거움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처럼 살아가려고 합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인생의 어떤 낙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즐거움은 없습니다. 기왕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얻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빨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광야에서 배회한 만큼 자기 생을 불쌍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즐거움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대부분의 시들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한 내용입니다. 고난을 통과할 때도, 질병으로 신음할 때도, 외로움, 두려움, 슬픔을 만날 때도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위기를 견뎌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승리를 맛볼 때도 왕의 자리에 올라 감사한 마음이 밀려올 때도 다윗은 그 기쁨을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않고 바라보며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윗의 예배에는 언제나 거룩한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그 인생은 즐겁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데서 즐거움이 없다면 참 즐거움은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을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시1::2)
예수 믿는 사람은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세상 사람들같이 헛된 세상의 쾌락이 가득하여서는 안됩니다. 중심에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받은 은헤에 감사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를 깨닫는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발전을 통하여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감격어린 예배의 성공을 통하여 맛보는 하늘의 기쁨을 갈망해야 합니다.
여러분 추석을 맞아 우울하게 보내지 말고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다른 줄거움으로 채우지 말고 하나님을 모시고 그 은혜로 말미암은 즐거움이 가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가족, 이웃과 함께 즐겁게 보내야 합니다.(14)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나누어야 할 사람으로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증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라(14)하셨습니다.
먼저 즐거움을 나누어야 할 사람들은 가족들입니다. 가족들과 웃고 살아야 합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 하라(잠언5:18)" 그리고 노비는 오늘로 치면 종업원 또는 직장 동료를 의미합니다. 또 레위인은 목회자를 의미합니다. 당시에 레위인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만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았습니다. 따라서 추수할 밭도 과수원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자기 가족과만 잔치를 하고 즐기면 레위인은 다른 백성들과는 달리 아주 우울한 절기를 보내야 합니다. 교인들은 주의 종과 즐거움을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이들입니다. 또는 가족을 잃고 가난하게 사는 이들입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 돌보아 주지 않으면 절기가 고통스런 시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서로 이웃과 나눔으로 확신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독점해서는 안됩니다. 하늘은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누어야 합니다. 나의 감사가 다른 사람에게 원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즐거움이 다른 사람의 슬픔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즐거움이 모두의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 즐거움만이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적인 즐거움은 사유화 하고 독점하는데서 옵니다. 이것은 나눌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이 즐거움은 반드시 원망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의 은혜가 됩니다. 천국은 공동체의 즐거움을 나누는 세계입니다. 너와 내가 함께 즐거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즐거움을 공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절기는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공동체의 즐거움이요, 축제인 것입니다.
추석과 같은 명절이 오면 더 우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몸이 아프고 더 괴로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움에 취하여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 가족만을 챙기기 쉽습니다. 우리가 서로 돌아보며 적극적으로 주는 삶, 베푸는 삶을 실천할 때 받는 것을 통해 누리는 기쁨보다 열 배나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혼자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교인을 돌아보아 한 사람이라도 한 가정이라도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추석 명절을 복되게 보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믿음을 드러내며 즐거워 해야 합니다.(15)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 할지니라(15)"
이미 받은 복을 즐거워하고 앞으로 받을 복을 기대하며 즐거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오면서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더 크고 좋은 복을 더 많이 받게 될 것을 기대하십니까? 그러면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기뻐하십시오. 믿음이 좋은 사람이 믿음이 없는 사람보다 더 즐겁게 살아갑니다. 믿음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과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깨닫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속 복을 부어 주실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뻐합니다. 기도가 곧 응답될 것을 믿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미래를 열어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의 성취 즉 하나님이 행하실 크고 비밀한 일들을 내다보며 신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늘 즐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와 감격이 넘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17절에는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힘대로 드릴지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받은 것을 즐거워하고 즐거움으로 바치면 즐거움은 계속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께 현금할때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도록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고후9:7)
예수님은 이 즐거움을 친히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나누어 제물이 될 것을 즐거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구원의 즐거움, 나눔의 즐거움, 바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바치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심령으로 만들어 참 즐거움을 알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내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에 빠지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 정성껏 바치는 즐거움으로 우리의 생애가 온통 즐거움으로, 축제로, 잔치하는 삶으로 이어지기 소원합니다.
감사하며 사십니까
신 16:13-17 / 조상호 목사
저는 지난주에 어린이 동화집에 나오는 ‘호두나무’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먼저 그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마을 입구에 큰 호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어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두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 끝에, 몇 년 후 많은 호두알을 주렁주렁 맺게 되었습니다. 호두나무는 속으로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드디어 열매가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오더니 돌멩이를 집어 호두나무를 향하여 마구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호두열매가 와르르 떨어져 내렸습니다. 어느 날은 꼬마들이 긴 장대를 가지고 왔고, 또 어떤 때는 어른들이 몰려와 나무가 상하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고 돌멩이를 던져댔습니다. 몇 날 며칠을 이렇게 지낸 호두나무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가지도 여기저기 부러져 나갔습니다. 돌에 맞은 자리가 몹시도 아팠습니다. 나무는 자기의 찢긴 상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아! 나는 사람들에게 열매를 주려고 오랜 세월을 애쓰며 기다렸는데, 사람들은 정말 은혜를 모르는구나.”
이 ‘호두나무’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현대를 잘 묘사한 이야기입니다. 요즘 우리는 감사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니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의 머리까락을 잡아 끄집어내 살려주었더니, 죽었다가 살아난 이 사람이 머리가 아파 죽는 줄 알았다고 두고두고 원망하더랍니다. 여러분, "감사가 메말라지는 때부터 신앙의 타락은 시작된다."라는 말을 아십니까? 감사가 말랐다는 말은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산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감사하며 사십니까? 어떤 글에 보니까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보통 네 가지 대답이 나온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럭저럭 삽니다.” 둘째는 “마지못해 삽니다.” 셋째는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셋째는 “죽지 못해서 삽니다.” 그러면 넷째는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그냥 살아요.” 여러분은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한번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인사하며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 옆에 계신 분들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다시 한 번 인사하겠습니다. “감사하며 삽시다.” 저는 2006년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오늘 “감사하며 사십니까?”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신명기 16장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등, 3대 절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 절기는 따로따로가 아니라, 서로 관련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한마디로 말하면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칠칠절’은 추수를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출애굽한 후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하는 40년 동안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등, 3대 절기는 공통적으로 감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께 감사를 드리도록 이와 같은 절기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유월절이나 칠칠절이나 초막절과 같은 절기를 지키지는 않지만, 우리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요?
1)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라
첫째로, 우리는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자유를 잃은 채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애굽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민족의 지도자를 사용하여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은혜를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이 절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6장 2절과 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야훼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야훼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애굽 땅에서 나온 날, 다시 말하면 430년 동안 노예 생활하던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날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94년 9월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지존파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예 ‘살인공장’까지 차려놓고 다섯 명을 연쇄 살해한 것은 물론, 시체를 소각로에 태어버리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압구정동 야타족들, 돈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놈들은 다 죽이고 싶었다.” “시작도 못하고 여기서 끝난 게 안타깝다.”고 자신들의 범죄를 합리화하며 큰소리쳤던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김현앙’이라는 청년은 사형언도를 받고 형 집행 일자를 기다리고 있다가, 교도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교회의 이재명 집사님의 끈질긴 전도를 받고 회심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재명 집사님에게 보낸 여러 번의 편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살인자 김현양이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 세상 서로를 존중하며 아껴주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면, 저 같은 죄인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잊지 말고 전해주세요. 이재명님이 나눠주신 사랑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조금 남은 생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야겠지요. 이재명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김현양 올림” 또 이런 편지가 있습니다. “…생각하면 제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와 생각하니 제 눈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죄에 대한 대가로 죽지만, 세상에서는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기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눈물만 흐릅니다. 저는 요즘 늘 이 찬송을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우리 교회에 두 번씩이나 오셔서 은혜를 끼쳐주신 박효진 장로님의 말씀대로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들킨 죄인입니다만, 감옥밖에 있는 우리들은 들키지 않은 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죄와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위해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 모든 물과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뜨거운 구원의 감격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2) 돌보아주신 사랑에 감사하라
둘째로, 우리는 지금까지 돌보아주신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하기는 커녕, 입만 열면 계속해서 불평을 했습니다. 홍해가 가로막혔다고, 목이 마르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40년 동안 끊임없이 투정을 부렸습니다. 새로운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시편 107편 4절부터 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야훼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방황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피곤한 가운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 주셨습니다. 때를 따라 먹여주시고, 마시게 해주시고, 원수들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신명기 16장 10절을 보면, 이것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신명기 16장 10절을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야훼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또 17절을 보겠습니다.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야훼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10절의 ‘복을 주신대로‘라는 말씀과 17절의 ’주신 복을 따라‘ 라는 말씀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신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사랑에 힘닿는데 까지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요,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 광야 같은 세월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 광야 같은 위기와 역경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도와 주셨습니다. 한 번 지난 1년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직장이 없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직장을 주시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영주권을 허락해주시고, 학업 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학업 할 수 있게 해주시고, 불경기 가운데서도 그나마 이렇게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게 해주시고, 특별히 아픈 곳 없이 건강을 주셔서 오늘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이 자리에 어떤 분들은 “감사하고 싶어도 감사할 것이 있어야 감사할 것 아닙니까? 어디를 보아도 나에게는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어 ‘think'와 ’thank' 두 단어가 같은 어원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서양 사람의 유명한 경구에 ‘think and thank'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하라 그리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감사할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일곱 개의 황금단지를 얻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섯 개의 단지는 황금으로 가득 찼는데, 일곱 번째 단지는 반만 차 있었습니다. 그는 일곱 번째 단지를 가득 채우기 위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황금으로 바꾸어서 반만 차 있는 단지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담아도 그 단지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단지를 채우고 싶은 욕망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졌습니다. 결국 만족하지 못한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평생 동안 불평하는 마음으로 궁색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섯 개의 황금단지를 소유하고도 감사하지 못한 채,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단지만을 붙잡고 불평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감사할 조건이 있음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만 일삼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열 사람의 문둥병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약 문둥병자인 것이 확인되면 마을에서 살지 못하고 즉시 진 밖으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날라다주는 음식으로 삶을 연명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문둥병은 곧 가족과 헤어져져서 평생 비참한 삶을 살아야하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홉 명은 가버리고 오직 한사람만이 주님 앞에 와서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10명의 공통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문둥병자였다가 주님의 사랑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고침 받은 아홉 명은 감사할 줄 몰랐지만, 단 한 명은 감사할 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홉 명과 같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한 명처럼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과 같은 사람이 아닌, 감사했던 한 명과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없는 것 때문에 원망하기보다, 있는 것 때문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것, 사라진 것, 약한 것 때문에 고민하기보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늘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복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라
셋째로, 우리는 복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15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야훼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여기 ‘모든 소출’은 소득, 열매, 이익, 등을 의미하며, ‘모든 일’은 활동, 직업, 노동, 등을 의미합니다. 즉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논에서 농사를 짓든지, 사업장에 사업을 하든지, 우리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손을 대었다고 모든 것이 잘 되고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힘써서 수고했다고 무조건 풍성하게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수고하는 대로 거두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년 내내 수고했지만 가뭄과 홍수와 병충해와 태풍 등의 외부적인 어려움 때문에 수고한대로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은 ‘확실한 믿음 속에서 기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복 주실 것이니’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NIV 영어 성경에서는 “the Lord your God will bless you"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 ‘will'이라는 단어는 미래조동사입니다. 이것은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복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뿌려놓은 일들이 앞으로 잘 될 것을 믿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잘 되었지만, 앞으로도 더 크게 베풀어주실 복을 기대하며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더 크게 역사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환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환경은 어렵지만, 역사하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소년이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축사'라는 말은 한문으로 보면 빌 ‘축(祝)자‘에 사례할 ‘사(謝)’입니다. 영어성경에는 'He gave thanks to God‘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감사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남자만 5천명이나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가로막은 돌문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하신 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 사실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은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나사로의 시체가 앞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믿고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감사한 기도를 통하여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줄로 믿습니다. 우리 또한 감사를 드릴 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감사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감사할 때 자녀가 변하고 가정이 변합니다. 감사할 때 남편이 변하고 아내가 변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됩니다. 믿으십니까?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 해군 장교가 자기의 고향 땅에 돌아와 보니,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고, 온 동네는 다 폐허가 되었으며, 자기가 살던 집도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애써 참으려 하였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입에서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가슴속에서는 분노가 끓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때문에 화병이 생겼고, 전신마비가 와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그 사람의 병이 마음속의 분노에서 생긴 것임을 알고는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내가 주는 약을 먹을 때마다, 꼭 한번씩,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하고 먹어야 합니다. 내 처방대로 하면 당신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 장교는 의사의 말대로 감사하기를 몇 개월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학교 갔다 와서 그에게 "아빠, 먹어."라고 말하며 풀빵을 하나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딸이 건네주는 풀빵을 받으면서 힘들게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 전신의 마비가 확 풀렸습니다. 병이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일어나 뛰면서 연신 소리를 내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를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감사가 기적을 만드는 줄로 믿습니다. 응답하실 것을 믿는 믿음도 귀하지만, 응답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믿음은 더 귀합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응답이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응답하신 것으로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궁핍한 환경이든지 부유한 환경이든지, 건강하든지 병약하든지, 잘 풀리든지 잘 풀리지 않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 환경은 좋아지지 않았지만, 역사하실 주님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는 믿음의 온도계’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진정한 감사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감사도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감사할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반면에 감사를 잘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의 이유를 찾는데 매우 익숙합니다. 또 ‘감사는 축복의 원료’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미국 미네소타 주는 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에 걸친 심한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엄청난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농작물을 다 갉아먹어 경제대공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필스베리 주지사’는 모든 주민들에게 1877년 4월27일을 ‘감사기도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했지만 우리가 아직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날 미네소타 주민들의 감사기도는 하늘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더니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설사 환경이 나빠지고 절망스럽다 할지라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문제의 산이 가로막혀 있을지라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랜 전에 주보 3면 ‘은혜 나눔터’에 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느 한 병실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을 반성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여겨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 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겨웁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2006년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우리 입술에서 감사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하고, 지금까지 돌보아주신 사랑에 감사하고, 앞으로 복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감사할 뿐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이것도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 유래와 신앙
신 16:13-17 / 지태일 목사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하고 밤에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천사가 내려와서 교인들의 기도를 바구니에 담고 있었습니다. 이쪽 바구니는 교인들의 간구의 제목을 담는 바구니였고 이쪽 바구니는 교인들의 감사를 담는 바구니였습니다. 간구의 바구니 - 이것 주십시요. 저것 주십시요. 하는 기도는 차고도 흘러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바구니는 저 밑바닥에 조금 깔려서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천사가 기도의 바구니를 들고 하늘에 올라가는데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애를 쓰고 또 애를 써도 땅을 향하여 곤두박질하고 말더랍니다.
안타깝게 생각하고 쳐다보고 있는데 몸이 붕 뜨더니 하늘나라로 인도를 받습니다. 하늘나라 문을 열고 들어가서 봤더니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응답 주시려고 큼직한 보화 창고에 보화를 준비해 두었는데 한 창고는 텅텅 비어 있었고 한 창고는 가득 채워져 있더랍니다. 이 빈 창고는 도대체 무슨 입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이것 주십시요. 저것 주십시요. 간구할 때마다 주는 보화 창고입니다. 하도 사람들이 긁어가서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창고는 감사의 창고인데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더 부어 주기 위해서 쌓아 놓은 보물들인데 감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쌓여 있더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11월은 추수감사주일이 있는 감사의 달입니다. 어느 때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리요 만은 다시 한번 내 인생의 감사의 제목들을 더듬어 보고 특별히 지난 1년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내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을 더듬어 감사하며 내게 주신 분복들을 감사하며 풍성한 영적인 복들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 지나온 모든 세월들 뒤돌아보아도 모든 것이 감사뿐인 것을 오늘 내 주변에 있는 모든 환경들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내가 잘 나서 얻은 것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감사뿐입니다. 내일을 내다보면 하나님께서 또 어떻게 나를 인도해 주실까? 더 아름다운 자리로 인도해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소망가운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고, 씨를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는 것이며, 출발이 있으면 종착이 있게 마련입니다. 역사는 나선형도, 돌고 돈다는 윤회도 아닙니다. 오직 직선이 있을 뿐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종착역이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도 언젠가 끝이 있음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들의 인생관입니다. 인생은 요행이나 우연이 없습니다. 갈6:7절 이하의 말씀대로 뿌린대로 거두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인생이요 신앙입니다.
가을이 되어 들에 나갔는데 거둘 것이 제대로 없는 농부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봄에 씨 뿌린 것이 없으면 여름에 그렇게 수고하지 않으면 가을이 되어도 거둘 것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인생의 마지막 추수의 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이든, 아니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든, 내 하는 일들의 작은 결산하는 때든지 거둘 것이 없는 사람들, 불쌍하고 가련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마지막 그 때에는 아무리 애원을 하고 떼를 써도 소용이 없고 그렇게 후회하며 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경솔히 여겨 팔아 먹은 후 그렇게 후회하였지만 울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2006년 추수감사절을 앞에 두고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며 거둬들일 것이 많은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감사할 것들이 많은 축복의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계절이 감사를 회복하는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추수감사절을 통하여 바로 알고 바로 지킬 수 가 있습니까?
1.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유래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은 사람이나 교회가 형편대로, 무슨 헌금을 거두기 위한 방편으로 세워진 절기가 아님니다. 창세기4:1-4절을 보면 인류 초기에 가인과 아벨은 그들이 농사지은 것과 목축한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일에도 감사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한 해의 추수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사는 오래 전, 즉 모세 시대 때부터 율법으로 제정되었습니다.
1) 추수에 대한 감사 절기로서 초실절이 있습니다.(레23:9-14, 신16:9-12)
초실절은 그해 하나님께서 주신 곡식 중 처음 익은 곡식 첫 단을 하나님께 드려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 다시 돌려 영광을 드림을 표한 것입니다. 초실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확한 보리의 첫 단을 제사장에게 드려 요제로 바치고 아울러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드렸습니다. 이 제사를 드리기 전에는 그 누구도 보리 수확의 열매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초실절의 대표의 원리에 적용시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된다고 규정했습니다.
2) 맥추절이 있습니다(레23:15-22)
맥추절은 칠칠절로 본격적으로 밀을 추수하면서 하나님께 한 해 동안 축복해 주신 것을 기리며 감사하는 절기이며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오순절은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과 동시에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켜졌습니다. 그리고 성령 강림 이후에는 추수 감사절에서 성령 강림절로 그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3) 초막절이 있습니다.(레23:34-38)
하나님께서는 1년 추수를 마친 시기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막절은 그해 모든 추수를 마치면서 역시 한 해 동안 돌봐주신 것에 대해 기리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에는 칠 일 동안 초막을 짓고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초막에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광야 40년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것을 기념함과 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 배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지킨 절기입니다.
2.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는 청교도에 의해 유래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이 들끓던 16세기 중반 영국에서도 헨리 8세라는 강력한 군주가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이끌고 갈 목적으로 수장령을 발표하고 영국 국교회를 창시하게 됩니다. 이에 반대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성경 말씀대로 경건하게 생활하려는 입장을 취하였으니 이들이 청교도들입니다. 영국 성공회의 분리파에 속하는 사람들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네덜란드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11년간의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은 무척 고된 것이었으며, 아르미니우스파의 반대에 부딛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올바른 신앙인으로 자녀를 교육하기란 더 더욱 힘이 들었습니다. 이에 청교도들은 신대륙으로 가기 위해 7년 동안 힘들여 일해서 번 돈으로 배를 샀습니다. 그러나 스피드웰(speed well)이란 이름을 가진 그 배는 장기간 항해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다른 배를 구입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메이플라워호입니다.
신앙의 자유에 대한 열정에 불타는 청교도(the Puritan)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9월 16일, 지금으로부터 386년전 180톤의 메이풀라워 작은 목선에 102명이 몸을 싣고 망망 대해를 건너 신대륙 아메리카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이 그때 항해한 거리를 한번 재어 보니까 대략 3,400킬로미터 우리식으로 약 10.000리 길이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너무나 멀고 긴 이 지루한 여행길을 끝가지 견디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죽기도 하였습니다. 먹을 물과 양식이 부족한 가운데 행해진 65일간의 항해가 험난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꿈에 부풀게 했던 신대륙 미국에서의 생활도 생각처럼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1620년 11월 9일 미국 동부 매사츄세쓰 주 케이프 카드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개척지의 악조건 때문에 케이프 카드 서쪽 약 50km 지점에 위치한 플리머드로 옮겨 정착하였습니다. 거기서 1년을 개척하며 보냈던 그 시간은 또한 악몽과도 같이 힘들고 어려웠던 세월이었습니다. 낮에는 원주민인 인디언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고, 밤에는 사나운 맹수 때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질병과 굶주림 그리고 추위와도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년 후에 인원을 다시 점검해 보니까, 처음 출발했던 102명에서 그 절반도 넘는 53명의 사람이 죽어 버렸고, 겨우 49명만이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그 일년의 세월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던 지를 우리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습니까? 비록 짧은 세월이었지만, 저들에게는 마치 그것이 10/ 100년을 지나는 것 같은 천신만고의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단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개간하고 나무를 베어 교회부터 짖고 1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었으며 그간 약 반수가 사망하였는데도 장례식도 제대로 못 치른 때가 많았으니 인디언에게 사람 수가 적어지는 것이 알려지면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디언과 화친을 맺게 되자 심한 고통 속에 있던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마음 좋은 인디언들이었습니다. 이 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청교도들에게 옥수수 등의 곡물을 가져다 주었고, 옥수수를 심는 법 등 농사짓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청교도들은 풍성한 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옥수수와 호박 등을 처음 수확하였을 때에 그 고마움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해 가을 즉 1621년 10월에 익숙지 못한 기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인디안으로부터 배워서 가꾸어 거두어들인 곡식을 바치며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역경 가운데서도 저들은 그 땅에서 얻은 약간의 소출을 가지고 기뻐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살았다. 이제부터는 정말 굶어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안도감과 자신감이 또한 저들을 몹시 들뜨게 하며 감사와 흥분으로 넘치게 했습니다. 아무튼 저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회로서 눈물과 기쁨이 범벅이 된 체 서로 얼싸 안고 감사의 축제를, 감사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친절한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식과 칠면조 고기 등을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의 기쁜 첫 추수 감사절을 가졌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칠면조를 잡아 고기를 먹게된 것도 인디언도 초청된 이날 총을 들고 새를 잡으려던 사냥꾼이 부근에서 칠면조를 잡게 되어 그 고기를 먹은 것이 지금까지도 추수감사절이 되면 그 때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칠면조 고기를 먹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미국과 그리고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일 년에 한번씩 추수 감사절로 지키게 된 이 추수 감사절의 역사요 기원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추수감사절은 1863년 링컨 대통령이 추수 감사절을 미국의 연례적인 축일로 선포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당시 남북 전쟁이던 남군과 북군도 이날 하루만은 전쟁을 중지하였다고 합니다. 1941년에 미국 의회는 대통령과의 합의 아래 11월 네번째 토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습니다. 그 후 루스벨트에 의해 11월 셋째 목요일이 추수감사절로 공포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어 온가족이 모여서 풍성한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지나간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시고 복 주심에 감사하는 날로 지킵니다. 요즘은 일주일 혹은 3-4일 추수감사절을 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3. 한국에서의 추수감사주일은 선교사들에게서 유래했습니다.
구한 말 우리 한국교회는 나라가 어려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결과 1904년 한국장로교회는 단독으로 그 해 11월 10일 목요일을 우리나라 최초의 추수감사절로 지키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 후 1914년 교파 선교부의 회의 결과에 따라 미국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11월 셋째주 수요일로 변경되어 지켜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추수 감사절은 그 요일이 수요일에서 주일날로 바뀌어 11월 셋째주일을 추수 감사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거의 1차 산업 사회였던 당시의 추수감사절은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과 함께 교회력에서 가장 큰 행사 중에서 하나였고, 성도들도 한해 동안의 수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그러나, 2차, 3차 산업 중심의 사회로 문화와 구조가 바뀌었고, 이른바 ‘월급쟁이’들로 가득 찬 현실에서 추수감사절은 의미를 조금씩 잃어 가는 실정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추수감사절을 과일로 강대상 주위를 장식하는 것과 추수감사헌금을 드리고 점심이나 나누면서 교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준비 없이 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추수감절에 대한 이해와 신앙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교계에서는 추수 감사절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추석(중추절)으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일부 교회와 교파에서는 이미 이를 시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직까지는 대부분 우리나라 개신교에서는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미국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인 추수감사절 시기는 나라와 교단마다 다를 수 있으며 그 기간이 실제적인 추수 기간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추수감사주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감사할 줄 알되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범사에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살전 5:18).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경에 시작되어 교회의 역사안에서 잘 지키어져 온 것으로 추수감사절은 부활절과 성탄절과 더불어 기독교의 3대 절기중 하나로 지켜왔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추수감사절의 신앙을 바로 알고 지킬 수 잇는 절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추수감사절의 참 신앙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 플리모스항구에 도착한지 3년만인 1623년 11월 29일에 당시 메사추세스 초대 주지사이며 청교도 지도자인 윌리엄 브레포드의 추수감사절에 발표한 선언문에 나타납니다.
“위대한 하늘 아버지께서 옥수수와 밀, 완두콩, 땅콩, 호박 등 많은 재소를 풍부하게 거두게 하셨고 숲속에는 사냥감이 많게 하셨으며 바다에는 생선들로 가득하게 하셨고 인디언과 맹수의 위험에서 우리를 때를 따라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순례자들이 이곳에 도착한지 3년만인 1623년 11월 29일 목요일 아침, 여러분 모두는 부인과 자녀들에 이르기까지 예배당이나 동산에 모여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의 축복에 대하여 예물을 드리며 감사절을 지킬 것을 나 지사는 선언합니다”
신대륙에 도착하자 못먹어서 풍토병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가져온 씨나 영농법이 맞지 않아 농사도 실패하고 지식인들이 많다보니 농사법을 잘 몰랐고, 집도 제대로 못지어 추운 겨울 나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봄이 되자 우호적인 인근의 인디언들로부터 농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제공한 밀, 보리, 옥수수 씨앗을 심었고 가을이 되자 상상 밖의 큰 수확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교회와 가정에서 감사예배를 드렸으며,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축제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청교도들의 첫 추수감사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눈물과 감사가 뒤범벅된 벅찬 감동의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 벅찬 감동과 기쁨은 단순히 한 나라의 건국 일화나 한 해의 추수의 감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자유의 존엄성을, 그리고 개척자 정신의 고귀함을 보여 주는 산 실례로서 모든 인류의 가슴속에 진한 감동을 전해 줍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추수감사절을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현실을 실현 가능한 현실로 바꾸어 주신, 은혜로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축제로 삼았습니다.
당시 청교도들이 추수감사절을 지키기까지 그 과정속에는 이런 일화도 전해집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남아있는 사람들마저 해마다 겹치는 흉년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도무지 밝은 전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금식기도를 선포하고 경건한 이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이 상황을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땐가 또 한번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다시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식기도를 놓고 의논하는 자리에서 어떤 농부 한사람이 이렇게 제의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농사가 흉년이 들고 형제 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지만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량이 풍족치 않고 여건이 유럽보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금식 대신에 감사 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농부의 그 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금식기도 주간을 선포하는 대신 감사주간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추수 감사주일의 기본 동기가 되었다 하기도 합니다. 청교도들의 신앙 역사로 볼 때 추수감사절에는 세 가지 감사 신앙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들은 실로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의 자유를 택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본토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한 것과 유사합니다.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자녀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싶어서 그렇게 행한 것, 감사하는 것입니다. 2006년 추수감사절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감사함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를 세우셔서 부르시고 여러 믿음의 은사들을 허락하시고 귀한 성도들을 만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생존에 대한 감사입니다. 낯선 대륙에서의 첫 겨울에 절반 가까운 사람이 죽어나갔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도 높았다. 이런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큰 수확을 하게 된 그들은 진심 어린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심으로 지금까지 지내 온 생명에 대한 감사입니다. 환란과 질고가 많은 세상, 영육간에 강건케 하심을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 됩시다.
세 번째는 이웃과 함께 나누는 감사입니다. 처음에는 원주민 인디언들이 공격적이고 경계적인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의 신실함을 알고 오히려 도와주는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의 은혜 또한 잊지 아니하고 초대하여 함께 더불어 나누는 추수감사절의 신앙입니다.
청교도들의 일용할 양식의 수확은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베풀었던 인디언의 사랑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의 사랑에 감사해서 그들을 그들의 축제에 초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언어와 종교, 문화를 떠나서, 이해와 타산을 떠나, 멀어졌던 사람들, 함께 하지 못한 성도들, 모두가 함께 어울러져 드려지는 추수감사절이야말로 이 시대에 우리가 들려야 추수감사절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2006년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그 유래와 신앙을 말씀을 통하여 나누었습니다.
어느 때 평생 모든 순간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리요 만은 다시 한번 내 인생의 감사의 제목들을 더듬어 보고 특별히 지난 1년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회복하는 절기를 잘 사용하며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앞에 드리며 감사할 열매들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귀한 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지나온 모든 세월들 뒤돌아보면서 겸손히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감사뿐입니다. 청교도들의 추수감사절처럼 먼저는 신앙의 은혜를 먼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은혜의 잔을 높이들고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감사합시다. 더 나아가 생존의 은혜, 물질 건강 양식 자녀 주심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인디언들을 초청해다가 감사한 것처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대행자들, 가정의 부모형제들과 교회의 모든 주의 종들과 동역자 지체들과 이웃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는 복된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차가운 계절을 따뜻한 신앙의 계절, 영육이 살맛나는 그런 성도의 귀한 삶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추석과 감사
신 16:13-17 / 이정익 목사
오늘은 추석날 입니다. 금년에는 공교롭게도 추석날과 주일날이 겹치게 되었습니다. 이 명절날은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소중하게 지키는 3대 명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3대 명절이 있습니다. 하나는 애급으로부터 430년 만에 해방을 맞는 유월절이고 또 하나는 여름 곡식을 추수하고 드리는 칠칠절 즉 맥추절이고 또 가을에 곡식을 거두면서 드렸던 추수감사절 즉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일 년에 세 번 이 명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명절에는 모든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모여 축제로서의 명절을 지켰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일 년에 세 차례 명절을 반드시 지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명절은 나름대로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명절이 지니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감 사
본문을 보면 “너희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 모여 하나님께 감사하라”(16)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일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고 복을 받은 대로 하나님께 드리라”(17)고 했습니다. 그 말은 받은 은혜를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명절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추석명절은 하늘에 감사하는 뜻을 지닌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들은 농부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은 하늘에 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농사는 절대적으로 하늘의 도움과 은혜를 입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농부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농사철이 되었는데도 비가 오질 않으면 먼저 하늘에 기우제를 드렸습니다. 농사는 하늘이 돕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늘에 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농부들의 순박한 마음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면 농사도 삶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옛날 시골에서는 불효자가 동네에 있으면 동네 어른들이 다스렸습니다. 그 불효자 때문에 하늘로부터 노여움을 받지 않을까 해서 두려웠던 것입니다. 동네에 살인사건이라도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는 회개의 제사였고 용서를 비는 제사였습니다. 농부의 마음은 이렇게 순박했고 순전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하늘을 향한 앙천사상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시 65: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속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 시는 농사의 절대적인 힘은 하늘이 주는 은혜라는 것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절대로 경거망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지어서 첫 곡식을 거두게 되면 반드시 먼저 하늘에 제물로 드리며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여름내 수고해서 얻은 열매로 음식을 만들어 나누며 기뻐했습니다. 그것이 추석명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민족의 추석명절은 뜻이 있고 의미가 있는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원형의 모습입니다. 하늘에 감사하고 이웃과 함께 더불어 나누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 그것이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이 권장하시는 삶이고 바라시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감사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지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지각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지각이 없으면 감사도 없고 은혜도 모르고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각이 없는 시대입니다. 오늘은 지식은 있는데 지혜가 부족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꾀는 있고 요령은 많은데 덕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그 결과 많이 누리고 소유하고 살아가면서도 감사도 없고 은혜도 모르고 도리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엡 5:19)고 했습니다. 이 추석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동안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결 속
본문 14절을 보면 “절기를 지킬 때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객과 고아들까지 함께 해서 즐겁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가정의 결속을 다지라는 말씀이고 이웃과 민족의 결속도 다지라는 말씀입니다. 이 결속이 이루어지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소망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하신 최대 관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가정의 건강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가장 먼저 이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정건강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배려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가정의 건강한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결속을 유지하는 법을 제정하셨습니다. 율법으로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파괴하는 범법자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중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해치는 불경건한 요소를 제거하라고 성경에서 누차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이 건강하고 신성하고 경건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가정이 흔들리면 사회가 흔들리고 세상이 흔들리게 됩니다. 가정이 복잡하고 갈등하고 불화해 보십시오. 그러면 정신이 혼란해지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의욕이 저하되고 기쁨이나 감사함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무엇 보다 신앙의 초점이 흐려집니다. 영적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은 사람의 몸으로 말하자면 심장과 같은 곳입니다. 사람이 심장이 건강하면 온 몸이 건강하듯이 가정이 건강하면 살아가다가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삶의 중심은 가정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안정되고 건강하고 중심역할을 잘 하게 되면 우선 삶이 건강해 집니다. 그리고 신앙이 건강해 집니다. 기쁨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거기가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가정들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깊으신 배려를 하고 계신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삶의 내용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거기서 한 가지 깊은 지혜를 깨달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이 다 잘 살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문제없이 살고 결혼하면 모두 아이를 낳고 모두 성격이 좋고 조화를 이루어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 보면 결혼을 했는데도 아이가 없는 가정이 있습니다. 자녀를 낳아도 아들을 낳고 딸을 낳으면 참 좋을 것인데 그렇게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보면 아이가 없는 가정이 있고 있어도 딸만 낳는 가정이 있고 아들만 낳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마음에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집은 딸이 일곱에 마지막으로 아들을 낳은 가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이름이 팔남이 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한 가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팔남이의 아버지가 참 성자 같은 남자라는 점입니다. 그 아버지가 성자 같으니까 그 가정이 안정되게 유지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자연, 우주, 생물 인간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똑같은 모습으로 지으시고 창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나 결혼하면 아이를 낳고 아들딸 고루 낳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녀가 없는 가정이 있고 어느 가정은 넘치는 가정이 있고 어느 가정은 부족한 가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가정은 문제가 없지만 부족한 집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딸 부잣집의 남자가 성자였으니 인내하는 마음으로 딸을 일곱을 낳았지 괴팍한 남자였으면 셋쯤 낳다가 밖에서 아들을 낳아가지고 들어왔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두 해 아이를 기다려 보다가 낳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들이 주변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딸 부잣집, 아이가 없는 집 남편들은 대부분 마음씨가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니고 성격이 괴팍한 남자에게 딸만 일곱을 낳게 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아이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 가정들이 깨지고 불화하고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조화를 위해서 배려하시는 섭리일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목회하다 보니까 보고 깨닫고 발견하게 된 통계입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이 명절을 지키라고 강조하신 것도 같은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느 민족에게나 다 명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3대 명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명절을 반드시 지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좋은 날로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족 간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키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명절날은 전국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날입니다. 아마 명절날이 없으면 온 가족이 함께 모인다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이 명절날은 각지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곳으로 모여 결속이 느슨하던 가정을 결속시키고 다지는 날입니다. 그래서 가족애를 결속시키는 날이 명절날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명절을 잘 유용해야 합니다. 가정건강을 위해서 이 날을 유념해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떡을 만들어 나누고 흩어져 살며 소원했던 관계를 다져야 하고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만일 오늘 같이 개인주의화 된 시대에 이 명절날이라도 없어 보십시오. 얼마나 이 세상이 삭막해져 가겠습니까. 오늘은 그러잖아도 삭막해져가는 시대입니다. 강원도의 어느 콘도에 서울의 한 부자가 전화를 했습니다. “금년 명절에는 콘도에서 제사를 드릴 테니까 상을 준비해 주십시오.” 그런데 전화 받은 분의 실수로 준비를 못했습니다. 명절날 콘도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왔던 그 부자는 그만 호텔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삶의 고유한 의미가 이렇게 자꾸만 퇴색해 가는 시대입니다. 공동체가 자꾸만 약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건강성도 그 의미도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 년에 세 차례 명절날에 모이라고 강조하신 것은 그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이되 너와 자녀와 객과 고아와 과부들도 다 모여 이 날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모여 명절을 보내는 동안 히브리인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확인하고 결속하는 계기가 되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섭리입니다. 추석 절은 그런 의미로 지켜야 합니다. 명절은 먹고 노는 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날입니다.
결 산
추석은 결산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명절입니다. 추석은 가을의 중심이고 상징입니다. 매년 추석 때가 되면 모든 식물들이 보기 좋게 익어갑니다. 그것은 추석이 결산의 때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석 절은 결산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년 추석 때만 되면 가는 곳 마다 풍성하게 익어가는 들판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이 풍성하고 만족스럽습니다.
시 65:13절을 보면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며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하고 찬양했습니다. 그것이 마치 천국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가장 잘 표현된 평화의 모습입니다. 전쟁 시나 국가에 재난이 일어나면 처량하고 마음이 불편한 날이 명절날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고난 받으며 살아갈 때 명절날이 되면 서로 모여 한탄하고 눈물 흘리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나라 없는 백성이나 전쟁이나 재난을 당한 민족에게는 명절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책망하실 때는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서 안식일을 빼앗고 명절을 빼앗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명절은 평화 시에 누리는 날입니다. 그런 면에서 시 65편의 말씀은 천국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장에는 양 떼로 옷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으로 덮였으며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며 또 노래하나이다.”
그래서 추석 때는 한 가지 꼭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결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실한 모습은 보기에도 아름답습니까. 엊그제 시골을 갔다 오는데 길옆에 있는 과수원의 사과나무에 탐스러운 사과가 열렸는데 그 모습이 아주 환상적이었습니다. 탐스러운 사과들이 열렸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좋은지 보기만 해도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결실한 모습은 그렇게 보기에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니 그런 모습을 보고 누리는 과수원 주인은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면서 또 한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말 못하는 식물들도 저렇게 익어가고 때가 되니까 열매로서 자기를 나타내는데 우리 신앙인들도 저렇게 영적으로 익어가고 성숙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익어가고 성숙해 가는 모습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좋고 행복한데 우리 신앙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숙하고 익어가는 식물들은 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습니다. 자식들이 커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기쁨이고 행복이고 보람입니다. 성숙한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고 기쁘고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니 반대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은 보기에 얼마나 흉하겠습니까. 그 모습은 보기에도 흉하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 초라하고 빈약해서 보는 사람들이나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결실한 모습은 자신도 만족스러운 일이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도 행복한 일입니다. 추석 절은 그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추석명절은 결실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명절입니다. 흉년이 들고 농사가 피폐한 해의 추석 절은 모두에게 시름만 안겨주는 명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추석 절은 풍성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두가 함께 모여 흩어졌던 구심점을 회복하고 성숙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되새겨 보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명절을 아주 의미 있게 보내면서 이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일조해야 합니다. 그것이 명절이 지니는 뜻이고 의미입니다.
감사절을 지키는 자세
신 16:13-17 / 임덕순 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시대에 매년 삼대 절기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으로 애굽에서 해방된 일을 기념하는 "유월절" 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팔레스틴 땅에 들어가서 첫 곡식을 거두고는 감사하는 절기를 지켰는데 그것이 바로 "오순절"이며, "칠칠절 초실절, 맥추절" 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다음은 10월초 가을에 추수를 한 후에 그 곡식을 저장하게 된 것에 감사하며 드리는 절기가 "수장절" 이며, "초막절"이라고도 불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하던 때를 생각하고 그때 그 막막하던 때에도 먹여주시고 인도해주시고 오늘 농사한 곡식을 쌓아놓고 먹게 해 주신 은혜를 기념하면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이 초막절이 바로 오늘 우리 성도들이 지키는 추수감사 절기입니다.
이런 절기들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만아니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푸실 구속의 은혜까지 내다보면서 감사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지켰던 감사절의 특징은 무엇이며,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감사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추수 감사절의 특징 (신16:13,14).
1)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함께 지켜는 절기였습니다.
추수감사 절기인 초막절뿐만 아니라, 유월절과 오순절을 포함한 삼대 절기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함께 지켜야만 했습니다.
20세 이상성인 남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성전과 그의 지정해 주신 장소에 가서 감사 절기를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사사로운 일로 핑계를 대고 불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고 해도 불참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일을 한다고 핑계를 대서는 안 되었고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야 했습니다. 한자리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거룩한 제사를 드리며, 며칠을 감사와 기쁨의 축제로 보냈던 것입니다(신12:5-7).『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이 절기들은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것으로(신12:8) 경고되어 있습니다. 사사로운 이유로 절기에 참여치 않으면 유대인 족보에서 제외되었고 그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앞에 모이는 절기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고 광야에서 구원과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살아났고 광야에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중에 단 한명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이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러 모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는 당사자 아닌 것처럼 불참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거기 안가도 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제외되었고,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시간,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것입니다. 그분이 주인이신 땅에 와서 그분이 주신 몸을 가지고, 그분이 관리하시는 공기와 물을 마시며, 그분이 주신 건강과 지혜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자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빠져도 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모두 그분 앞에 경배하기 위해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다른 날은 몰라도 그분 앞에 감사하는 날이다 할 때는 결코 빠질 수가 없습니다. 절기에서 제외된 사람은 유대인 취급을 받지 못했듯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서 빠지는 사람은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감사를 강조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감사하는 데에 적극 동참하고 계십니까? 기꺼이 나오셨습니까? 마음속에 감사를 준비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모여서 일주일 내내 절기를 지켰습니다. 주일 낮 예배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성가대가 성도들을 대신하여 준비하여 드리는 찬양예배에도 꼭 참석하여 함께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감사절기에는 반드시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공수로 나오지 말라고 하셨고, 출 23:15에서도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에나 밭에서 거둔 곡식 중 가장 처음 거둔 것, 또 가축의 첫 새끼 등을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출34:19,20). 그들은 절기를 지킬 때 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힘껏 바치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물을 준비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바치면 됩니다. 내가 받지 않은 것을 바칠 수 없습니다. 내가 받은 것이 없다면 바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있을까요? 돈을 벌게 해주셨다면 돈으로 바치면 되고,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하게 해주셨다면 농사지은 곡식을 바치면 되고, 많이 받았으면 많이 바쳐야 되고, 적게 받았으면 적게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액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것을 정직하게 바치는가를 보십니다. 받은 것을 인정하는 사람인가를 보십니다. 빈손으로 나와서는 안되었습니다.
제가 우리 청년들이 결혼할 때, 결혼주례를 해 줍니다. 결혼주례가 아주 힘든 것은 아니지만 일생에 단 한번뿐인 일이기에 신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은 결혼주례를 해 주면, 간혹 양복 한 벌을 맞추어 주는 가정도 있는가 하면, 대개는 와이셔츠 한 장을 답례로 주기도 하고, 상품권 한 두장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은 갑자기 결혼 주례해 잘라고 해서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주례를 해 주었는데도 결혼식 한 후에 찾아와 감사하다는 인사 한마디 없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럴 땐 기분이 좀 안 좋더라구요, 결혼주례를 해주고 하나님께 그들에게 복을 주시라고 축복해 주었는데도 감사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보이는 목사에게도 감사를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줄 알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생명과 시간과 기회와 물질과 모든 환경을 하나님께서 다 주셨는데도 감사하는 절기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감사의 헌금도 드릴 줄 모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언짢아하실까? 그 사람이 다음에 은혜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가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응답해주실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감사의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감사절의 두 번째 유념할 일은 감사의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이웃과 함께 지켜야 했습니다.
구약의 감사 절기의 가장 아름다운 특징은 모든 이웃과 더불어 감사 절기의 풍요와 기쁨을 함께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특히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과 함께 절기를 함께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다. 신명기16:11,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즐거워할지라." 고 하셨습니다. 자기 소유가 없는 객과 나그네, 농사지은 것 없는 과부와 고아, 분깃이 없는 제사장인 레위인 들에게는 물질을 나누어주고, 그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감사 절기는 어떤 특정 부류나 있는 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이 기쁨을 맛보는 축제였던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만 관계하는 기회가 아니라 이웃들과도 함께 기뻐하는 절기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감사절 축제는 단순한 종교적 절기로 끝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절기를 통해서 그 동안 외면했던 이웃이 있다면 만남과 화해의 축제로 삼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일년 동안 하나님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린 성도는, 그 축복을 자랑하고 감사하는 한편,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내가 받은 축복을 나눠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남들은 다 복을 받았는데 나는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작은 축복도 하나 놓치지 않고 헤아리면서 감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옛날에 농부들은 쌀 한 톨을 흘려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앉아서 그 쌀 한 톨을 주워 담아 갔습니다. 하나님의 작은 축복도 헤아리고 감사해야 하며, 많은 축복을 받은 성도가 나에게 무언가를 나누어 준다면 기분상해 하지 말고, 함께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그 호의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도 교회 안에서 행사로 그칠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서 감사를 나누고, 이웃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2. 오늘에 감사절을 지키는 참 뜻 (신16:15)
1) 인생의 삶의 주인과 배경이신 하나님을 범사에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쁜 삶에 쫓기다 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돈은 늘 생각하는데 건강은 늘 생각하는데, 성공은 늘 추구하는데 그것을 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추수 감사 절기의 큰 뜻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바로 우리의 모든 것의 배경이시고 감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입니다. 날짜를 잡아서 감사의 예물을 준비하고, 정한 장소에 모여서 공개적으로 내 생명과 내 삶의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이 감사절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점점 없어지고, 희석되어 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추수 감사절이란 오직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 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은, 물질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었다고 돈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직장에서 한해 잘 근무했다고 직장에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물질과 소득의 원주인이신 하나님, 우리 삶의 조건과 자원과 배경을 제공해 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주인은 물질이나 추수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오늘 감사는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감사하고 달에 감사하고 자연에 감사하고 돈에 감사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 시대에 그가 보니 그물과 낚시로 고기를 잡은 어부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그물에 감사하고 제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합1:16)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삶의 배경과 조건과 자연에 대해 고마워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것들의 창조주요,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일년 동안 얻은 것이 있다, 그래서 기쁘다, 그러니 축제를 즐기자 라고 한 축제라면 하나님이 빠진 것입니다. 조상에게 감사한다면 역시 우상숭배가 될 것입니다. 조상이 농사를 잘 짓게 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조상도 하나님께서 주셨고, 우리 몸도, 농사할 땅도 근무할 직장도 하나님께서 주셨고 농사할 비와 바람과 기후도 하나님이 주장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사지은 것이나 일년 동안 직장에서 열심히 일 잘한 것 자체만을 감사하는 감사절이 된다면, 그것은 이방인의 축제이고 감사의 의미는 사라지고 "우상을 위한 제사"가 될 것입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영광 돌리는 감사의 절기가 되도록 하십시다.
2) 지금도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자는 것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추수감사절인 초막적의 궁극적인 교훈과 뜻은, 바로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확신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양의 피"를 통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권능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것이요,
오순절은 가나안 땅을 얻게 해주시리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성취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기념하는 축제요,
초막절은 광야의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영원한 안식처를 얻게 해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의 사랑을 기억하자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감사 절기를 통해서 늘 기념하고 확신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을 얻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데 까지 이어졌고,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 영광을 누리게 하시는데 까지 이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절기는 단지 지난날의 한 부분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랑에 대한 확인과 감사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주신 복에 대하여 감사할 뿐 아니라, 앞으로 주실 복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더 복을 주십니다.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역경 중에도 감사하는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매년에…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레23:41)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규례"라 하는 것은, 계속해야 할 규례라는 것이고, 어떤 환경 어떤 조건과 처지를 불문하고 지켜야 된다는 뜻입니다. 풍성한 결실 때에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악조건 속에서도 감사로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평온한 때가 별로 없었습니다. 강대국과 다른 민족의 끊임없는 침공과 내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는 늘 역경이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절기는 늘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도 지난 일년 동안을 돌아볼 때, 평안과 번영은 고사하고 물질과 정신적인 손해를 당한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역경 중에도 감사를 잊지 않고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훌륭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감사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우리의 감사도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감사한 일이 많아서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가 크기에 주기적으로 감사해야 하는 것이고, 앞으로 받을 축복은 말로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잃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천국의 영생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에 기쁜 마음으로 감사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메튜 헨리라는 목사님은 어느 날 외출했다가 집에 오던 도중 강도를 만나서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빼앗기고 심하게 얻어맞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집에 와서 감사의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강도를 당하고 보니 그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신 은혜가 얼마나 감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강도를 당하고 나니 강도들이 얼마나 무섭고 불행스러운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고 자신이 강도가 되지 않고 오히려 당하는 사람이 된 것에 감사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자세로 역경 중에도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추수를 많이 해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요, 이방인도 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요, 불신자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지금 현재, 어떤 환경에 처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나를 사랑하시며 지켜주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대로, 외양간에 소가 없으며 밭에 소출이 없고 창고에 쌓은 소득이 없을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속하시는 그 사랑에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감사 주일에는 내가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신하고, 어떤 조건이나 환경을 만났을지라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추수 감사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번 추수 감사절에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형편에 처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서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의 예배 정신
신 16:13-17 / 오창우 목사
오늘도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크신 은혜와 복으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이라고 하면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신 분들은 설교 내용이 무엇일거라고 대충 짐작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이 때로는 도움이 되지만,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언제 나 성경말씀대로 그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추수감사절 때 평소의 생각을 접어 버리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일부터 신16:13-17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추수감사절에 이루어지는 행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사가 세가지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첫 번째는 추수감사절에 행하는 ‘저희가 추수하여 소출을 창고에 저장한 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힘이 생기면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없을 때는 있기를 원하는데, 생기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생기면 놀자고 향락을 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을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람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향락이나 권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람있게 살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람있게 사는 삶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없는 것이 생겼을 때 이웃을 생각하라. (나눔의 정신)
절기를 지킬 때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없던 것이 생겼을 때, 처음 생각할 사
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없는 것이 생겼을 때 누구를
도와 줄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지나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창고의
소출을 저장한 후에 제일 먼저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고 즐거워 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추수감사절을 위해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정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오늘 그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셋째, 헌신입니다.
나눔은 이웃에 대한 태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헌신은 자기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은 예배정신과 헌신에 대해 말씀을 하고 마치려 합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신16:13-15)
15절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둘째,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셋째,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우리가 많은 소출을 얻었습니다. 적든 많든 힘이 생겼습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광야생활을 그치고 땅에 정착하여 농사생활을 할 때에 제일 걱정한 것이 ‘너희가 하나님을 모른다 할 까 하노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생기면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두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외견상 본다면 장소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장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장소는 시대를 따라 변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미스바 광장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고, 어떤 때는 벧엘에서 드렸고, 어떤 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망해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을 때는 예루살렘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정한 장소인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할 때 여인이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당신들은 저 산에서 예배하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산도 말고 저 산도 말고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하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에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은 곳에 가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다 받으시겠지’하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과연 순종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며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거기에서도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네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아브라함과 같이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자기의 보기 좋은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곳이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결국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한 것에 자기의 신앙의 생명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로마의 한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다 죽게 되었으니 고쳐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은 “나는 주님이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내 위에도 상관이 있어 그가 나더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며, 또 내 밑에도 사람이 있어 그도 내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데, 주님이 이 시간 내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마음으로 듣겠사오니 말씀만 하옵소서 내가 그대로 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이 만한 믿음을 이스라엘 가운데 본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을 성경 지식이 얼마나 있느냐, 신앙경력이 얼마나 되느냐 하고 얘기하지만,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믿음은 딱 한가지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순종하는 자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 약 7000개의 교회가 있는데 지난 일년 동안 교인수가 2500명정도 증가했습니다. 교단 안에서도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많이 자랑하고 있지만 한교회에 한명도 전도가 안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순종하는 자세를 잃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좋은 교회로 가는 것입니다. 시설 좋고 편하고 나 쉬운대로 하는 것입니다.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순종하는 자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을 칭찬하신 믿음, 하나님이나 원하시는 믿음은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교인들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자세인 것입니다. 헌법책에 기록된 교인의 의무는 첫째는 주일성수 하는 것, 둘째는 헌금하는 것, 셋째는 치리에 복종하는 것, 즉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제일 좋은 신앙의 자세도 순종의 자세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너는 이레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라고 했습니다. 절기를 지키라는 것은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민수기 29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내일같이 하나님앞에 제물을 드리는데 이 제물의 숫자가 자그마치 215마리입니다. 매일같이 드리는 것이 수양 두 마리이고, 일년된 어린양 14마리, 또 소는 첫날엔 14마리, 둘째날 13마리, 이런식으로 한 마리씩 줄어들어서 마지막 날엔 7마리를 드립니다. 이것은 매일 드리는 상번제 외에 드리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데 그 피 비린내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불로 태워서 화제로 드리라고 했으니 그 연기와 냄새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제물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서 하나님께만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부자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고 43세에 미국의 최고 부자가 되고 53세에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신앙을 잘 물려받아서 신앙적으로 아주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억만장자가 되는 그 해에 아로페시아라고 하는 머리가 빠지고 눈썹이 빠지는 병에 걸렸습니다. 거기다 의사가 일년 안에 죽는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이분은 억만 장자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잘 믿었는데 자기 직원들한테는 너무나 인색하게 했었습니다. 그가 하루에 버는 돈이 백만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일년 안에 죽을텐데 하루에 백만불을 버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가 하나님께 엎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앞에서 잘 못 살았다는 것은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그는 록펠러 제단을 만들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기 시작했습니다. 또 아름다운 리버사이드 처치라는 교회를 세워서 봉헌을 하고 그로부터 자기를 죽이는 작업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일년이면 죽는 다고 한 그를 점점 더 건강해져서 99세까지 장수하게 하셨습니다. 예배는 순간순간 자기를 죽이는 작업입니다.
현대적 의미의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을 떠나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가는 청교도들의 마음에는 마음 놓고 예수님을 믿어보자는 소원 하나가 있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해서 정착하고 살게 되었는데 얼마 후 병이 돌기 시작하고 죽기도 하고 흉년이 들기도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어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로 떠나올 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마음 놓고 믿어보자고 했는데 이곳에 와서 핍박하는 사람 없이 마음 놓고 예배드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원망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우리가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을 찾아봅시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그렇습니다. 믿음 생활 잘 하게 하시고 건강 주시니 감사합니다. 인디언들이 우리를 도와주게 하시니 감사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소출이 없지만 감사할 조건들을 찾아서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철저하게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우리가 살수 있음을 고백할 때 이 감사절예배의 진정한 축복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셋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복을 주실 것이니’라고 하는 말은 미래입니다. 앞으로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농사지어서 추수해서 창고에 쌓을 수 있는 것은 복입니다. 성경은 네 모든 소출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복 받아야한다고 말씀합니다.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이 복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순종의 자세를 가지고 자기를 죽이는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것에 감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얻어 놓은 것에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건강은 복입니다. 하지만 건강한 몸으로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병들었어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소출에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진 것 많지만 그것이 복을 받지 못해서 엉뚱한 곳에 다 써버리기도 합니다.
여러분, 스티븐 워킹이라는 아인슈타인을 능가하는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있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신체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근 위축성 측식 경화증 환자가 되어서 휠체어에서도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었습니다. 부인인 제인 호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나는 남편의 병이 악화된는 상황속에서 살아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남편이 병들었지만 남아 있는 것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많은 것이 복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적어도, 그 적은 소출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큰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목동 소년이었지만 그가 복을 받으니까 위대한 임금이 되었습니다. 초대임금 사울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늠늠한 사람이었지만 왕이 된 후에 복을 받지 못하니까 당대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어거스틴은 탕자였지만, 어머니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아들 돌아오게 하실 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작고 쓸모없는 소망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쓰셔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내 몸과 내 삶의 현장이 비록 작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몸에, 이 가정에, 이 자손들에게 복을 주시면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순종을 했으니 이제는 나를 비워야 합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어도 하나님만을 기뻐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이 신앙인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고 쓸모없었지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의인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절대 낙심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서 꼭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행한 일에 주님께서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내 쫒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지만 주님은 모르신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고 일주일에 한번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바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었지만 주님이 그들을 모르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행한 일이 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믿음 안에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이 복을 받으려면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고,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 주실 줄 믿는 믿음 안에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다고 간곡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예수님께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내가 금식하였고 무엇 무엇 하였습니다”라고 기도하였고 세리는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하고서도 자랑하는 것은 행한 일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행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이드존스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 목사님에게 사람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유명한 목사님이신데 늘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목사님은 “내가 목사로 일하다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텐데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실지 그것이 제일 걱정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목사라고 다 대접 받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심판하실지, 늘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그런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의 소출과 여러분이 행한 모든 일이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 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도 그 예물이 진정한 예물이 됩니다. 옛날에 사람들은 왕 앞에 나아갈 때 꼭 예물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삽니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의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화장품회사 가운데 가네보라고 하는 화장품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의 역대 회장 가운데 말단 사원으로 들어가서 회장이 된 신화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미따니 야스또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결혼을 한 후 아내로부터 전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세요, 출세 안 해도 됩니다. 그저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만 사세요.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다가 회사에서 정리되더라도 과감히 그만 두세요. 그러면 우리 둘이서 전도하러 다니면 되요”라고 했습니다. 다른 아내들은 다들 출세해야된다고 말들을 하기에 아내의 말중 ‘출세 안 해도 되요’라는 말이 남편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마음이 편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뒤출세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까 고민을 하다보니 세상을 보는 안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가 늘 간직한 말씀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 말씀 ‘이제 내가 사람들을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불이익도 왕따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할 위기를 맞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 때 하나님은 말단 직원에서 회장이라는 높은 위치까지 높이셨습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출에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행한 일에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좋은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에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서 나눔의 정신, 예배의 정신 헌신의 정신을 가질때 하나님께서 큰 복과 은혜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라
신 16:13-17 / 윤창용 목사
영국의 여왕 메리가 300여명의 개신교도들을 학살했습니다. 이 때 독일이나 스위스로 학살을 피해 피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개신교도들을 학살한 영국 여왕 메리는 개신교도들에게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리의 출생배경을 살펴보면 이 메리 여왕이 왜 개신교도들에게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메리의 아버지는 헨리 8세로 스페인의 국왕 페르난데스의 딸 캐서린과 결혼을 했습니다. 원래 이 캐서린이라는 여자는 지금 결혼한 헨리 8세의 형 아더의 부인이었습니다. 즉 헨리 8세는 형수와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5년의 결혼 생활을 했는데 이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질 않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사산이 되고 사산이 되길 몇 번을 한 후 겨우 딸아이 한 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딸아이가 바로 메리 여왕입니다.
결혼 후 15년이 지났지만 겨우 병약한 딸아이 한 명만 둔 헨리 8세는 나이 든 캐서린도 싫증이 났고 남자아이를 두어 대를 잇게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궁녀인 앤 볼레인이라는 처녀가 마음에 들어 캐서린과는 이혼을 해 버리고 앤 볼레인이라는 궁녀와 덜컹 결혼을 해 버립니다. 그러자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를 반대하고 다시 캐서린의 위치를 회복시킬 것을 명령했지만 헨리 8세는 듣지 않았습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만일 명령을 듣지 않고 헨리 8세를 파문할 것이라는 통고를 했습니다. 여기에 헨리 8세는 맞불작전을 써서 1534년 국회의 의결을 거쳐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독립하여 영국 교회는 황제가 수장이 된다는 이름하여 '교회 수장령'이라는 칙령을 내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로마 교황청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가 시작됩니다. 이 영국의 종교개혁은 종교적인 문제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바로 헨리 8세라는 국왕의 결혼과 이혼문제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캐서린은 졸지에 남자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메리와 시골로 유배를 가고 엔 볼레인이 왕비가 됩니다. 그러나 사태가 1553년 역전이 됩니다. 헨리 8세가 죽고 또 다른 여자 제인 시모어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6살에 올랐지만 7년간 왕위에 있다가 일찍 13세에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헨리 8세의 혈육인 어머니 캐서린의 한을 품은 메리가 왕위에 올라 영국의 국왕이 됩니다. 20 년간 아버지가 교회 수장령을 내리면서 만들어진 개신교인 영국 성공회가 자기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삶을 한없이 추락시켰다고 믿는 메리는 개신교도들을 인정 사정없이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300여명, 정확히 교회사학자들은 288명이라고 하는데 이 때 개신교도들은 스미스 필드라는 형장에서 목숨을 잃게 되자 개신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찾아들게 됩니다.
그래서 1620년 102명의 청교도들이 5월의 꽃이라는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화란을 거쳐 미국의 동쪽 해변가 프리모쓰(Plymouth)에 도착했습니다. 그 다음해 감독이었던 윌리엄 브레드 포드가 같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찾아 든 102 명 중 추운 겨울과 험한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55명과 함께 옥수수를 거둬들여 이것을 제물로 해서 자기들을 해치지 않은 인디안을 초청해서 베푼 3일간의 축제가 바로 추수 감사제가 되었습니다.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12월 26일 겨울 찬 미국 동북부 해안 플리모쓰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일곱가지를 감사했다고 합니다.
첫째,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이지만 그 배라도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둘째, 평균 시속 2마일(걷는 속도 보다 느리다)의 항해였으나 117일간 계속 전진할 수 있었음을 감사했습니다.
셋째,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넷째, 폭풍으로 중심 되는 큰 돛이 불어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다섯째, 여자들 몇이 파도 속에 밀려들어갔으나 모두 구출됨을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여섯째, 인디안들의 방해로 상륙지를 찾지 못해 한 달을 바다에서 방황했으나 호의적인 원주민이 사는 상륙지점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일곱째, 고통스러운 삼 개월 반의 항해 중 단 한 명도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1787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죠지 와싱통은 11월 26일을 감사절로 선포했으며, 링컨은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루즈벨트는 셋째주 목요일을 선포했던 것이 오늘의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근세 추수 감사절이 시작된 유래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에는 3대 절기라고 해서 꼭 지켜야 할 절기가 있었습니다.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무교절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이라는 세월동안 억압받다가 애굽에서 나온 날인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누룩없는 떡을 급히 먹는 날이기에 누룩이 없는 병을 먹는 절기, 무교절입니다.
두 번째 절기는 맥추절로 밀과 보리 농사를 한 후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상징으로 지키는 절기가 맥추절입니다.
세 번째, 절기가 수장절로 밭에서 거둔 것을 저장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이 추수 감사절은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까?
첫 번째로 추수 감사절은 소유의 감사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의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16장 9절에서 17절의 말씀의 추수절 규례를 보면 정당하게 땀흘려 거둔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고 바친 그 곡식과 열매를 남종과 여종, 나그네와 과부, 고아등에게 나누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 감사도 감사이지만 나누는 축제의 절기입니다. 즉 소유의 감사 절기가 아니라 나눔의 절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저런 것을 주시어 감사합니다"도 있지만 더 깊은 의미는 "하나님 주신 것을 기뻐하며 저 어려운 사람에게도, 병든 사람에게도, 고통당하는 사람에게도 나누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나누는 절기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추석이라는 절기가 있습니다. 이 추석이라는 절기도 내가 많은 누렸기에 감사하는 절기가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과 하늘과 조상에 감사하고 그 감사한 소유들을 함께 나누는 잔치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토착화를 부르짖는 신학자들은 1970년대 전통문화에 기독교 문화를 접목해 보자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추석절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교회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문화는 나누는 문화였습니다. 아기가 백일이 되면 무속적인 신앙에서 비롯되기는 했으나 백 가정에 떡을 돌려야 했고, 돌이 되어도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서 떡을 돌려야 한다는 습속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누는 것에 대한 좋은 미풍양속입니다. 물론 그 속에는 이상한 무속 신앙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우리나라 문화는 나누는 문화였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어도 나누어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백성이었습니다.
통닭을 부모님 몰래 먹다가 그것을 숨기려는 신혼부부의 이야기가 제가 어릴 때에는 코메디 프로에 자주 소재로 쓰이곤 했습니다. 그만큼 나누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었는데 나누지 않으니 숨겨야 하는 고통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코믹하게 묘사한 프로그램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추수 감사절은 정복과 소유의 절기가 아니라 섬김과 나눔의 절기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나눔과 섬김으로 추수감사절을 지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추수 감사절의 의미는 보답의 차원에서의 감사가 아니라 믿음의 감사입니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문둥 병자들이 예수님에게 자비를 구합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 에수님께 와서 감사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감사 때문에 그 사마리안인은 주님으로부터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의 믿음을 확인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광 성도 여러분 !
예수님께로 돌아 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감사란 단순히 심리적인 느낌이 아닙니다. 보답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 믿음의 차원입니다. 즉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고, 그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예배는 늘 감사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불평의 예배, 불만의 예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교회의 성도들은 목사님이 설교에 불만을 갖고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는 이미 예배가 아닙니다. 어떤 예배가 되었건 예배는 감사로 드려야 합니다. 감사, 감사, 감사가 넘치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감사라는 말은 감사 드림이라는 말로 자주 쓰입니다. 영어로 하면 "thanks giving"이라는 말입니다. 감사는 항상 하나님께 드려지고 감사는 언제나 드려야 하는 것이기에 "thanks giving"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감사의 단어가 '유카리스테오'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혹은 감사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 전체에도 감사가 언급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기도 자주 했지만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은 절대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사악한 자를 거꾸러뜨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를 높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죄지은 백성들을 용서하는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어떤 사람인가? "모든 경우에 있어서 배우는 사람"이다. 참으로 강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면 정말 부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정말 부자이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는 심리적인 느낌이 아닙니다. 감사는 주심에 단순히 사례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는 우리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잖아요!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 깊은 신뢰와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감사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등불을 소유하며, 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달빛을 소유하며,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별빛을 소유하며,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햇빛을 소유하며,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햇빛보다 더 밝은 곳, 그 곳을 소유한다는 말이 있듯이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의 행복에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모든 부와 지위와 행복의 척도인 것인 양 착각하는 오늘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의 절기를 정하여 감사주일로 지키게 하신 것은 감사야말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토록 해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 감사 생활 속에 더 깊이 이어짐을 가르치고 있다 하겠습니다.
감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신 16:13-17 / 이원근 목사
2023년 추수감사절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절기를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지킬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와 같은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히10:1) 신약의 성도들이 이 절기를 꼭 지켜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와 같은 형식적인 절기에 얽매이는 일을 피하라고 주의합니다(갈4:10,11). 그러나 그 절기의 신앙적인 의미와 교훈을 우리는 경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구약의 추수 절기는 영원한 복음 진리와 하나님의 구속 섭리의 전형이요 요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기에 깃들어 있는 신앙 교훈과 정신은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영원한 규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신앙 교훈은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죄와 사망에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로마서 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구속 섭리를 보여주는 추수감사절입니다.
구약의 추수감사절은 신약에 성취도리 하나님의 구속 섭리의 예표요 전형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행하라"(신16:12)고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오순절과 장막절 모두 애굽에서 구원받아 약속의 땅에서 얻은 열매를 통해 감사드리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고전15:23)를 받으심과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들을 교회를 통해 얻으신 것을 상징합니다. 또 장막절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을 종말에 심판하사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마감하실 것에 대한 예표인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속하시는 거룩하신 섭리의 모형이므로 성도들은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추수감사 절기를 보냈다면 오늘의 성도들은 이미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으며 또 재림하셔서 모든 것을 완성하실 섭리를 믿고 그 안에서 더욱 감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은혜에 대한 응답의 방법입니다.
성도들은 먼저 감사의 고백과 간증으로 하나님의 구속 은총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고 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열매를 수확하여 그것으로 제사를 드려 감사함을 표시했다면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진실한 마음의 고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 다음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성경은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골1:10)라고 권합니다. 선과 의와 사랑을 추구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구원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본분이자 하나님께 대한 최선의 감사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2002년 추수 감사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일한대로 열매를 거두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로마서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1) 물질적 수확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의 제일차적인 의의는 '수확물'에 대한 감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에 대해서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더하게 하시리니"(고후9:1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필요한 물질을 풍성하게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삶의 자원을 베풀어주신 은혜에 마땅히 감사드려야 합니다.
2) 의의 열매 맺게 해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성도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은 바로 성도 자신이 맺은 의의 열매에 대한 감사입니다. 물질적 수확은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의의 열매는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얻기가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도와주셔야만 맺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뜻에 순종하는 삶의 대가로 의의 열매, 빛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이며(엡5:9갈5:22). 이 서도의 성품 안에 맺는 의의 열매는 장차 얻을 영생 열매의 증거가 됩니다. 성도들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닮게 하사 거룩한 의의 열매를 맺게 해주신 은혜에 더욱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한대로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3. 천국 곡간에 알곡으로 분류된 감사입니다.
요한복음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1) 알곡은 성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추수의 목적은 '참된 곡식' 즉 '알곡'을 얻는 데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 농사는 의미가 없으며 추수의 즐거움도 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비유한다면 천지 만물은 하나님의논과 밭이요 하나님은 농부이십니다. 그리고 오직 '알곡'을 얻기 위해 창조와 구속 섭리를 진행시켜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알곡은 누구입니까?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섭리의 '영광의 찬송'(엡1:12)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는 농부되신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최종 목적이 우리 성도들을 얻고자 하시는데 있음을 교훈해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불신자와 악인을 '가라지와 쭉정이'로 성도를 '알곡'으로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섭리에 순응하는 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알곡이 될 것입니다.
2) 영생, 즉 천국에 들어갈 성도들입니다.
알곡은 반드시 '타작'과 관련시켜 생각해야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타작 방법은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날카롭고 강한 타작기구를 사람이나 가축의 힘을 이용하여 곡식단을 털고, 껍질을 벗겨내고 또 풍향의 힘을 이용하여 쭉정이와 가라지로 분리해 냅니다. 그 후 알곡만을 창고에 저장합니다. 그와 같은 알곡을 얻기 위한 타작 과정은 하나님의 종말 심판을 상징해 줍니다(마3:12).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시기 위한 맹렬하고 엄중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마13:39-43). 그때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을 간직한 성도들은 참 알곡으로 인정받고 분류가 되어 영원한 천국 창고로 들여지게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와 같은 진리를 감사 절기를 맞아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창고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천국이 나의 것임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결 론
2023년 추수감사절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물질적인 은총과 영적인 은총 그리고 미래에 주실 영원한 삶에 대한 은총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신 16:13-17 / 최응희 목사
오늘 추수감사절입니다. 지난 주일 숙제를 내드렸습니다. 잘 하셨습니까? 만약 잘 지키신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고 그 고백과 예배를 통해 가정과 자녀들에게 풍성하신 복으로 채워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심히 보냈거나 알면서도 무시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렇게 작은 것들을 지키고 행하는 데서 커가는 것입니다. 대충대충 하는 버릇 때문에 신앙생활도 항상 대충대충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것들도 실천하는 사람이 무엇이든지 열심있는 믿음이 되는 것이고, 절기도 스스로 의미를 찾아 은혜롭게 보내게 됩니다.
어떤 생각을 품고 오늘 이 추수감사절에 예배를 드리든지 정말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냥 헌금 드리는 부담스러운 절기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저 대충대충 체면치례로 드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사와 고백을 담아 드리는 헌금이 되시고, 그런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추수감사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도시에서 무슨 추수감사예배인가!
두 가지 점에서 우리가 추수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도시에서 추수하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 80%는 아무도 추수하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모두 컴퓨터를 만지고 있거나 기계를 만지거나 서류를 만집니다. 그러나 기계를 먹거나 서류로 식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기계를 만지거나 서류를 만지고 있어도 결국은 곡식을 먹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추수를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곡식의 수확만이 수확이 아닙니다. 생활의 열매들, 자녀들의 성장, 믿음의 성장, 이 모두가 우리의 열매요, 수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단순히 곡식을 거둠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라 살아온 지난 한 해의 거둠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농사와 같은 것이요, 모두가 무언가를 심고 거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들 속에 우리는 무언가 부지런히 뿌리고 심어 왔습니다. 성공을 통해서도 기쁨을 거두었고, 실패를 통해서도 많은 경험을 얻었습니다. 빈 시간들 속에서도 우리는 생명을 유지해 왔고, 알차게 보낸 시간들 속에서 보람을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묶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곡식과 열매의 수확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일년 동안의 삶과 소득에 대한 감사,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왔음에 대한 감사, 앞으로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함께 담는 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초막절을 이렇게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막절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수장절이라고 나오고 신명기에서는 초막절이라고 나옵니다. 수장절은 곡식을 거두어 저장한다는 의미에서 수장절이고, 초막절은 곡식을 거두기 위해서 들판에서 초막을 짓고 기거하던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습니다. 사실은 단순히 그냥 곡식거두는 초막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지내던 그 때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배경이든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절기를 지키는 방법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온가족이 함께(14)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14
온 가족이 함께 지키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교회에 잘 오지 않던 사람들도, 바쁘다는 핑계로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던 자녀들도, 심지어 직원들도, 손님까지도 함께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 예수를 믿는 집안들이 아니기에 쉽지 않을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적어도 세 번,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에는 온 가족이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16:16
우리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이 그 절기입니다. 가능한 한 이런 절기에는 온 가족이 함께 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안 믿는 가족들도 권면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때 안 갔는데 어떻게 그런 때 가느냐고 보통은 말합니다. 다른 때 안 왔으니 이런 때에라도 와야 하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그것이 절기를 지키는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2. 택하신 곳에서 이레 동안(15)
‘택하신 곳’이란 바로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을 일주일씩 연휴로 만들어 쉽니다. 그것은 기독교국가의 형태를 띤 미국의 좋은 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이제는 점차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들의 초기 역사에서 첫 번 추수감사절을 칠면조 고기를 먹으며 지켰다고 해서 칠면조 고기를 먹으며 일주일씩이나 휴가를 보내지만, 그 조상들이 왜 추수감사를 지켰으며 누구에게 어디서 지켰는지는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냥 노는 날로 전락해 버린 것이지요. 모두 들로 산으로 휴가여행을 떠나고 맙니다. 추수감사절을 일주일씩 지키기는 하는데 ‘택하신 곳’에서 지키지를 않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래서 미국이 초창기의 그 튼튼한 국가에서 점점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기에 공휴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택하신 곳--교회에서 이 날을 감사의 예배를 드리면서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레 동안 지키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부터 감사글 쓰기도 하고, 감사한 것 20개도 쓰고, 그것으로 가정 예배도 드리라 한 것입니다. 어느 날 하루 ‘오늘이 그런 날이야’ 하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절기’로서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절기는 날이 아니라 기간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디에 갔다가도 서둘러 본 교회로 돌아와서 지키는 것이 절기입니다. 바삐 살았다 해도 이 절기만은 말씀대로 지키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택하신 곳에서 이레 동안 지키라. 그것이 성경의 명령입니다.
3. 힘대로 예물을 드리며(16-17)
구약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절기는 세 개였습니다.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입니다. 이 세 절기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을 애굽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요, 맥추절과 수장절은 말 그대로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결국 이 세 절기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절기의 공통점은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예물을 드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16-17
빈손으로 하나님께 뵈옵지 말고, 주신 복을 따라 힘대로 드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진정한 감사는 마음 중심으로 하는 것이지 물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감사가 진실할수록 최선을 다하여 드리는 믿음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중요하다 하여 물질을 드리는 것에 인색한 것은 한낱 핑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실제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6:21
참으로 주님이 우리 인생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기뻐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복된 인물들은 한결같이 드리기를 기뻐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도 풍성히 받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만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시간과 지식과 능력을 기꺼이 주를 위해 드리는 믿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절을 지키는 방법을 오늘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택하신 곳에서 이레동안, 힘대로 예물을 드리며, 그것이 감사절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방법을 따라 지키다 보면 진실로 감사의 마음과 믿음이 회복되고 기쁨이 충만해지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전 세계132개국 1억 4천만 시청자를 웃고 울리는 오프라 윈프리 쇼, 그 쇼를 이끄는 오프라의 명성은 세계에 알려져 있고, 그 재산은 1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톡크 쇼에 참석한 사람 전부에게 자동차를 한 대씩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때 아주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났고, 자신도 14살에 미혼모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삶을 바꾼 것은 자신의 친 아버지와 만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믿음을 심어주었고, 매주 책을 읽게 했고, 성경을 암송하는 훈련도 시켰습니다. 현재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하루도 빼먹지 않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날마다 ‘감사일기’를 적는 습관입니다. 하루 동안에 일어났던 일 가운데 다섯 가지 감사 목록을 찾아 기록하는 것인데 감사 내용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아주 작은 일상의 것들입니다.
1.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2.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 점심 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4. 얄미운 짓을 한 동료에게 화내지 않도록 저에게 참을성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5. 좋은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써 준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아주 작고 일상적인 것들입니다. 무슨 대단한 어떤 것을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한 어떤 것을 감사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일상적인 감사를 잃어버리고, 불만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헬렌 켈러가 쓴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을 보면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헬렌 켈러의 소망은 지극히 소박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매일 누릴 수 있는 평범한 것들입니다. 지난 일년을 회고해보십시오. 내가 받은 복이 얼마나 많았던가. 감사의 잔이 차고 넘칩니다. 우리가 욕심과 경쟁 속에서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일상 속에 있는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보물들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의 믿음도, 기쁨의 마음도 잃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들도 지난 주간 감사20가지를 실제로 썼던 분들은 사소한 것들에 대한 감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런 감사들이 모여서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 추수만이 아니라 우리 삶을 돌아보며 감사의 믿음과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는 절기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감사의 우물을 가진 사람만 기쁨의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의 예배와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기쁨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