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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내안에 사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 (빌립보서 1장 20-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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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심하지만 바야흐로 봄이 왔습니다. 봄꽃도 만개하여서 산에는 꽃구경 가는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봄꽃 하면 개나리, 진달래, 벚꽃 정도가 가장 유명하죠. 제가 자라나며 보았던 봄꽃들은 냉이, 머위, 씀바귀 꽃, 할미꽃,. 철죽꽃... 이런 것들이었던 같습니다. 참 시골스럽죠? 시골에서는 어른들이 다 일터에 나가기 때문에,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은 거의 방치되어서 자랐습니다. 군것질, 간식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시절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놀다가 배가 고파서 봄이면 진달래 꽃 따먹으려고 산을 많이 쏘다녔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깊은 산에 들어가면 위험 할까봐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냈는데, 그 이야기가 ‘용천배기’ 이야기입니다.
‘용천배기’는 전라도, 충청도 지방에서 문둥병 환자를 말하는 방언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겁을 주면서, 산 속 깊은 곳에 들어가면 무섭게 생긴 용천배기가 사는데, 어린 아이들이 산에 올라가면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끌고가서 잡아먹는다고 했습니다.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아이들이 동네 멀리 벗어나지 않게 하는 데는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칭얼대고 우는 아이들에게도, “저기 용천배기 온다! 용천배기 온다!”고 하면 울음을 뚝 그칠 정도로 아이들에게는 용천배기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제 기억에도 그 때 당시에 제일 무서운 것이 호랑이나, 다른 짐승이 아니고 용천배기로 알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봄이 되니 기분도 좋아지고 옛날 생각도 문득 더 나는 것 같습니다. 화사한 봄꽃들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이 기지개를 펴고, 한결 여유롭고 평안해지기를 바랍니다. 느긋하게 산책이나 여행도 하시고, 시도 한편씩 읽어보시는 여유를 가져 보세요. 봄에 읽을 만한 책으로 ‘김소월 시집’을 추천 합니다. 읽다 보면, “아! 이 시도 김소월의 시였구나!” 느낄 정도로 아주 유명한 시가 수두룩합니다. 몇 편의 일부 읽어 드립니다.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
산에 산에 피는 꽃은 /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먼 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의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못 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오.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료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오
(초혼)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가고 오지 못한다 하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고락(苦樂)에 겨운 입술로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부모 어머니)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8편의 시인데, 느낌이 대단합니다. 진달래꽃만 기억 날줄 알았는데 들어보니, 동요나, 유행가 가사로도 한 번쯤은 들어본 것처럼 익숙한 시들일 겁니다. 이 좋은 봄날에 머리와 마음을 정서적으로 새롭게 하셔서, 맑은 정신과 강건한 육신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의 일생에 있어서는 따뜻한 봄날과도 같은 포근함이나 평안함이 거의 없었습니다. 결혼도 안했기 때문에 돌아가서 쉼을 얻을 가족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빌립보서를 쓸 때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악조건 이었음에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평안하고, 활력 있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20절에 담겨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습니다. “간절한 기대”(헬, 아포카라도키안)로 번역 된 말은 세 단어가 합성 되어 하나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목’(헬, 카라) 이라는 명사와, 앞으로(헬, 아포)라는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그리고, ‘바라본다’(헬, 도케인)는 동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간절히 기다릴 때, 목을 앞으로 쭈욱 빼고 여기저기 멀리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한자성어로 ‘학수 고대’(鶴首苦待, 학의 목처럼 목을 길게 늘여 빼고 기다린다는 뜻) 라는 말이 ‘아포카라도키안’(간절한 기대)과 안성맞춤으로 유사합니다.
오랫동안 목이 빠져 기다리다보면 지루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져 나오는 말이 “소망을 따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정말 지루하지만,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버틸 수 있습니다. 우리도, 소문난 맛 집에서 귀한 음식 먹기 위해서 줄서서 기다리는 일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 소망은, “영원한 미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소망”, 즉,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고, 믿음으로 인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얻는 다는 약속의 소망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은, 천국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가운데, 천국백성이 된다는 확실한 소망(보장)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은행에 적금 넣을 때 최고금리를 보장 받을 만한 여러 가지 상품들을 잘 따져 본 후에 신중하게 가입하시죠? 만기 후에 이자를 한 푼도 주지 않고, 오히려 원금에 손실을 가져 온다면 누가 그 오랫동안 적금을 넣어가면서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천국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다면, 인생 전체의 시간을 들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야 말 겁니다. 저부터 아마도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평생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몸에 베여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에게는 누구보다도 확실한 미래에 대한 큰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감옥에 있는 상황이나, 언제 처형 될지 모를 죽음의 두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현실에 대한 만족감은 떨어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은 커져만 갑니다. 자존심만 남아서 지고는 못 배기는 고집만 세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이가 들면서도 범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20절에,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신세였지만, 자신의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불명예스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당당해야 합니다. 돈이 없어 가난할 지라도, 행색이 좀 초라하여도, 배움이 부족해서 아는 것이 떨어진다 해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 몸이 불편하다 해도, 기죽을 거 하나도 없습니다. 내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만 있으면 누구보다도 자신감 있게 어깨 펴고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자존감 높이시고, 얼굴을 밝게 하고 지내십시오. 감옥에 갇힌 바울보다, 자유로운 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더 축 처져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은, 힘이 들고, 부끄러운 순간순간 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떠 올리곤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묶인 채로 짐승처럼(심하게 표현하면 개처럼) 끌려갔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욕설을 들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음해를 받았습니다. 안면이고 몸이고 수시로 구타를 당했습니다. 경멸하듯이 심문하는 자리에서 비난과 판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옷이 다 벗겨진 채로, 나무에 매달리며 신음해야 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모진 시간 중에도, 오늘 말씀과 같이 “아무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들 보고 똑 같이 해보라고 하면, 주님이 당하신 이러한 고통의 과정 중에 하나라도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모든 고난을 견뎌내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어디서 그런 인내심이 나온 것일까요? 자신의 몸은 죽어도, 다시 살려주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 그리고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예수님 안에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지셨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사도 바울에게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내 안에 사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아무 일이나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능력이요, 힘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요즘 오후 찬양시간에 자주 부르는 찬양 곡 중에, “예수 늘 함께 하시네”라는 곳이 있습니다. 가사 중에, “고단한 인생길 힘겨운 오늘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지나간 아픔도 마주할 세상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보리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어진 내 삶의 시간 속에 주의 뜻 알게 하소서” 기억나시는 곡이죠. 힘이 들 때마다 눈을 들어 십자가의 주님을 보십시오. 그러면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주셔서, 다시 일어서실 힘이 생기실 겁니다.
바울은 계속 해서 말합니다.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합니다” 전과 같이 라는 말(헬, 판토테)은 ‘항상(always)’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회심 이후에 감옥에 있는 지금까지 복음을 위해 수십 년을 지내오면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살았다는 겁니다. ‘항상’ 그랬다는 것이 너무 쉬운 일처럼 그냥 무덤덤하게 느껴집니다. 바울의 모습과 제 모습을 한 번 대비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항상’ 이라는 단어의 반대말은 ‘잠깐’ 혹은 ‘잠시’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은 잠깐 동안만, 그 때 그 때 적당하게, 기회주의적으로만 예수님을 모시려고 했고, 내 유익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항상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온 바울의 고백 앞에 제 얼굴이 화끈 거렸습니다.
정말 진정으로 회심했다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똑바로 살아가는 것이 ‘항상’의 자세입니다. 항상 예수님을 모시고 살려고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교회에만 가두어 놓고 살아갑니다. 성경책을 읽을 때에만 나타나시는 분으로 오해 합니다. 일상 생활에서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의 인생은 탈선한 기차처럼 세상의 유흥과 오락에 빠져서 한 없이 망가지기만 합니다. 너나 할 것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나약함이고 악한 죄의 습성입니다.
이러면에서 본다면, 일편단심, 좌고우면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향해서 쉬지 않고 달려간 사도 바울이야 말로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도 바울은,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는 말을 그리도 자신 있게 외쳤는가 봅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목회자들부터 ‘항상’ 예수만을 외치며 살았던 사도바울의 반의 반 모습이라도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가 되고, 복음이 복음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맛 볼 수 있을 겁니다. 제 자신부터, 우리 교회부터 다시 예수님의 이름표를 가슴에 붙이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살도록 결단해야 합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지 못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부터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신앙 고백문을 적어 봤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들의 고백, 그리고 00교회의 고백이 되어서, 내 안에, 우리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나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을 믿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겠습니다. 내 안에 사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니 나의 죽음은 두려움과 고통이 아니라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남은 일생의 전부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나의 생활을 전부 드려서 내 안에 사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토록 찬양합니다” 아멘.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1절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는 말씀과 함께, 생사를 초월한 인생관을 보여주는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두 구절은 반드시 암송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암송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이 땅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심장에서 일평생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영원토록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존엄하고 생명은 참으로 귀한 겁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당신은 왜 사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살고 싶어 사나요. 그냥죽지 못해 살지요” 라고 답한다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대답을 하는 겁니다. “나는 인생의 패배자입니다” 라고 자인하는 꼴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저와 여러분에게 “당신은 왜 사십니까” 라고 묻는 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내 안에 사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존귀하게 해 드리려고 살아갑니다. 그 분을 위해 살다가 그 분을 위해 죽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아멘.
너무나도 멋지지 않습니까? 이런 대답이 막힘없이 나와야 합니다. 누가 저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미쳤다는 소리 들을지라도 한 번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쳐 보고 싶습니다. 이 대답의 주인공이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항상 간절한 기대와 소망으로 “내 안에 사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품으시고,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의 일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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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간절한 기대와 소망으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내 안에 사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본문이 틀렸네요 빌립보서 4:20-21이 아니라 빌립보서 1:20-21절이네요 수정바랍니다
수정했습니다. 잘못 되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