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판팅위, 제7회 응씨배 결승에 올라 한국 박정환과 대결한다. |
배태일 박사는 "최근 열린 응씨배에서 박정환은 한국랭킹 1위다운 면모를 보였고, 중국의 판팅위는 결승까지 이세돌, 탄샤오,씨에허 등 자국내 랭킹 1위를 차지해 본 세 사람을 이겨 세계 정상급 기사로 발돋움 했다."고 감상을 밝혔다.
배 박사는 "생각보다 더 빨리 판팅위의 실력이 늘고 있다. 세계대회 최연소 결승진출의 기록을 세웠다. 올해 세계랭킹 4월에 판팅위는 12위, 7월에는 10위였으니 이제 10월에 발표할 랭킹에서 더 오를 것이다. 이는 '작년 이맘때 판팅위가 1년 안에 세계랭킹 10위안에 들 수 있는 추세를 지속하고 있다'는 제 예상과도 맞는다"고 논평했다.
이미 느끼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프로바둑 세대교체가 상상이상으로 빠르다. 다음은 배태일 박사가 중국랭킹제도를 통해 살펴본 세대교체의 현황이다.
랭킹칼럼/ 중국기원의 랭킹제도로 살펴본 세대교체 - 글 : 배태일 박사
우리의 경쟁상대인 중국기사들의 실력을 가늠하는 데에는 중국기원이 발표하는 중국랭킹과 필자가 산정하는 세계랭킹이 유익한 측정자료가 될 것이다. 그런데 바이링배 4강에 올랐을 때의 씨에얼하오의 중국랭킹이 154위였고, 삼성화재배 32강에 올랐을 때의 리친청이 중국랭킹 119위였는데, 정말 그럴까? 이처럼 중국랭킹으로 중국기사들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번 9월에 발표한 중국랭킹을 보면 많은 변화가 있다. 천야오예와 퉈지아시와 스위에가 1, 2, 3위에 올랐는데 이처럼 한꺼번에 최상위 3명이 새 얼굴로 바뀐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것이 중국 랭킹 제도를 수정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우연히 이 세 명이 동시에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인가?
이런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 중국기원의 랭킹제도를 살펴보고, 다음 번 글에서는 중국기원 랭킹제도와 세계랭킹제도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
중국기원 랭킹제도의 시작
중국기원은 랭킹발표는 우리보다 앞섰다. 일찍이 1998년 3월 31일까지의 중국기사들의 전적을 가지고 발표하였고 그 다음에 1년이 더 지나서 1999년 4월 30일까지의 전적으로 랭킹을 매겼고, 8개월 후에 1999년 12월 31일까지의 전적으로 랭킹을 계산하여 발표하였다. 그 뒤로는 매 4개월마다 정기적으로 발표해 왔다. 그러므로 중국기원의 랭킹제도는 14년이나 된다.
이렇게 오래된 랭킹제도인데, 지금까지 그들의 랭킹제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었다. 작년에 저우루이양이 중국랭킹 1위인데도 국제대회에서 성적이 좋지 않자 중국랭킹에 문제가 있다고 중국 바둑 팬들이 아우성쳤다. 그래서 랭킹제도를 고친 것 같은데, 무엇을 어떻게 고쳤는지에 대해 역시 아무 설명이 없다. 이래서 조선일보 이홍렬 기자는 중국 랭킹 제도를 “베일에 싸인” 제도라고 불렀다.
이처럼 폐쇄적인 중국기원이 통계적 랭킹제도를 어떻게 일찍부터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 해답은 중국바둑의 조직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의 모든 스포츠는 중국체육총회라는 국가기관에서 지원, 육성하는데 체육총회 산하의 중국기원에서 바둑, 장기(象棋), 체스(国际象棋), 오목(五子棋), 브리지(桥牌), 체커(国际跳棋)를 관장한다. 중국위기협회는 중국기원 산하의 바둑을 위한 조직이다. 이렇게 바둑과 체스가 같은 조직에 속하므로 중국의 바둑계 인사들이 체스의 랭킹제도에 관해서 일찍부터 알게 되었고 그래서 바둑에도 도입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단급제도를 통해서 실력을 표시하는 바둑과 달리 체스는 오래 전부터 실력을 숫자로 표시하는 랭킹점수 제도를 실시해 왔다. 처음에는 랭킹제도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이론적 배경도 빈약하였다. 그러다가 미국 위스칸신 주의 체스 챔피언이었고 물리학자였던 일로(Arpad Elo) 박사가 측정이론과 통계학에 근거한 랭킹제도를 1959년에 개발하였고, 그 다음해에 미국체스 연맹에서 일로 레이팅 제도를 도입했다. 그 뒤 10년이 지난 1970년에 세계체스연맹에서 일로 제도를 채택하였고, 자연스레 여러 나라의 체스 조직에서 이 제도를 채택하게 되었다.
중국기원이 사용하는 랭킹제도에서 최고점이 2700점대인데 체스의 최고 점수와 비슷하다. (현재 세계체스연맹의 최고점수는 노르웨이의 칼슨이 가진 2843점이고, 중국 체스선수 중 최고점수는 왕하오의 2742점이다. 중국기원이 랭킹제도를 시작할 때에 최고점수를 2750점으로 했다.) 중국기원이 이론뿐 아니라 점수 스케일도 체스의 랭킹제도를 본딴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체스 랭킹제도에서 사용하는 승률기대치 함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 공식이다.
E(d)=1/(1+10-d/400)
여기서 d는 승률기대치를 계산하려는 선수의 점수에서 상대선수의 점수를 뺀 점수 차이이다.
한국기원의 승률기대치 함수는 이 공식에 있는 숫자 400 대신에 800을 사용한다. 이 숫자가 두 배가 크므로 한국기원의 점수 분포가 두 배가 성글다. 즉 한국기원의 랭킹에서 점수 차이가 200점이면 고점자의 승률기대치가 64.0%인데, 체스 랭킹에서 100점 차이이면 고점자의 승률기대치가 64.0%가 된다.
중국기원 랭킹제도에서 사용하는 승률기대치 함수를 위에서 추정해 보았는데, 그 이외에 임시 점수를 어떻게 매기는지, 어떤 가중치를 사용하는지, 점수 디플레이션을 어떻게 방지하는지, 중국 이외의 국가의 기사들의 점수는 어떻게 계산하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작년에 중국 랭킹제도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을 때 중국기원에서 한국기원의 랭킹제도에 관해 물었다는데 그 후로 랭킹제도를 수정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보지만 무엇을 어떻게 고쳤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중국랭킹을 통해서 본 세대교체
이처럼 중국 랭킹제도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긴 하지만 실제로 기사들의 점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바둑 랭킹제도가 도입되던 1998년에는 중국의 과거의 강자들이 퇴조하였고 “소룡세대”에 속하는 70년대생인 창하오, 뤄시허, 저우허양 등이 전성기였다. 먼저 과거의 강자들의 점수 변화를 살펴보자.
[그림1]에서 녜웨이핑(1952년 출생), 류샤오광(1960), 마샤오춘(1964), 위빈(1967), 샤오웨이강(1973)의 점수 변화를 살펴보자.
중일 수퍼대항전을 통해 1980년대에 명성을 날렸던 녜웨이핑은 1998년에는 이미 전성기를 한참 지나서 점수가 낮게 나왔고 그 후로 계속 점수가 내려갔다.
마샤오춘은 2000년초에 1위에 올랐으나 그 후로 계속 내려가고 있고, 최근 3년 가까이 대국이 없어서 점수가 그대로 있다가 이번 순위 발표에서 빠졌다.
류샤오광의 점수도 계속 내려갔는데, 오래 동안 대국이 없어서 순위 발표에서 이미 빠졌다. 위빈은 2005년까지는 점수를 유지했는데, 그 후로 계속 내려가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젊은 샤오웨이강은 “소룡세대”의 맏형에 해당하는데, 그 역시 계속 내려왔다.
▲ [그림1] 과거 중국강자들의 점수 변화
[그림2]에 “소룡세대” 기사들의 대표격인 창하오(1976), 왕레이(1977), 저우허양(1976)과 “소호세대”의 대표격인 구리(1983), 콩지에(1982), 씨에허(1984)의 점수 변화를 그렸다.
평균적으로 2002년까지는 소룡세대가 앞섰으나 그 후로는 소호세대의 구리와 콩지에가 앞서게 되었다. 소호세대 기사 중에서 구리와 콩지에의 점수가 최근에 내려가자 지금은 씨에허가 이들 중에서 가장 점수가 높고 공동 1위에 오른 적이 있는데, 그렇지만 씨에허는 한번도 2700점을 넘어본 적이 없다.
▲ [그림2] 소룡세대와 소호세대 기사들의 점수 변화
소호세대 다음으로 박문요(1988), 천야오예(1989), 저우루이양(1990), 퉈지아시(1991) 등이 “소표세대” 기사들이라고 불리는데, [그림3]에서 소표세대 기사들 중 3명의 점수 변화를 살펴보자.
천야오예가 박문요보다 한살 적은데, 그의 점수가 먼저 올라갔고 박의 점수가 뒤따라 올라가서 2007~2008년과 2009년 전반기에는 박문요가 앞섰었다. 이들이 10대 후반까지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했으나 2600점이 넘은 다음에는 정체되어 있다가 최근에 천야오예와 퉈지아시의 점수가 갑자기 늘었다.
▲ [그림3] 소표세대 기사들의 점수 변화 90후 세대의 등장 소룡, 소호, 소표 기사들은 그래도 손꼽을 수 있는 숫자였다. 그런데 1990년부터 출생한 기사들 중 부쩍 강자가 많아졌다. 멋있는 맹수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거의 써먹었고, 해서 강자가 많이 출현한 90년 이후 출생 기사들은 맹수의 이름을 따지 않고 “90후 세대”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90후 세대 중에서 탄샤오(1993), 저우루이양(1990), 스위에(1992), 장웨이지에(1992), 퉈지아시(1991)가 이미 10위권 이내에 있다. [그림3]에 포함된 퉈지아시는 빼고, 90후 세대 최강자들의 점수 변화를 [그림4]에 그렸다.
저우루이양이 일찍이 2006년에 2600점을 넘어섰고, 스위에, 탄샤오, 장웨이지에가 그 뒤를 따랐다. 저우와 탄샤오가 80년대생들을 제치고 중국 1위에 먼저 올랐는데, 1위에 오른 다음에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고 이번에 중국 1위가 천야오예에게 넘어갔다. 이들 외에도 당이페이(1994), 저우허씨(1994), 렌샤오(1994), 타오신렌(1994) 등이 성적을 내는 90후 세대 강자들이다.
▲ [그림4] 90후 세대 강자들의 점수 변화 금년 들어서 90년대 후반에 출생한 중국기사들이 국제무대에서 크게 활약하여 한국의 강자들을 넘어뜨렸다. 이래서 “95후 세대”라고 이들을 명명했는데, 95후 세대에는 판팅위(1996), 미위팅(1996), 양딩신(1998)이 잘 알려져 있고, 씨에얼하오(1998)와 리친청(1998)이 의외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이들 외에도 판원뤄, 통멍청, 황인송, 등 기회가 주어지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기사들이 줄을 서 있다.
이처럼 중국 기사들은 90후 세대로 세대가 교체되어 가는 중인데, 2010년 초부터 지금까지의 랭킹 발표에서 90후 세대 기사들이 10위 이내, 20위 이내, 30위 이내에 각각 몇 명씩 들어가 있는지의 변화를 <표1>에서 살펴보자.
2010년 초에는 10위 이내에 90후 세대 기사가 한명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5명이 되고, 30위 이내에 이미 50%를 차지하고 있다. 머지 않아서 90후 세대 기사들이 상위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 <표1> 90후 세대 기사들이 상위를 차지한 숫자
2008년 입단자들
대표적 95후 세대 강자들인 판팅위와 양딩신이 2008년에 입단했으므로 새내기들의 점수가 어떻게 증가해 가는가 보기 위해서 2008년에 입단한 기사들의 점수 변화를 다음 두 그림에서 살펴보았다.
[그림5]에 중국랭킹 점수 2300 이상인 기사들의 점수 변화가 보인다. 판팅위는 거의 일직선으로 점수가 상승해왔는데, 이번 발표에서는 예전보다 작은 폭으로 점수가 늘었다. 그 다음으로 양딩신과 리쉬엔하오가 꾸준히 늘어왔고, 통멍청이 그 뒤를 따른다. 커지에는 입단 후 3년 동안 늘지 않고 있다가 작년 봄부터 늘기 시작했다.
▲ [그림5] 2008년 입단한 고점자들의 점수 변화
▲ [그림6] 2008년에 입단한 저점자들의 점수 변화.
[그림6]에는 2008년 입단자들 중에서 랭킹 점수가 2300점 이하인 기사들의 점수 변화가 보인다. 이들은 입단 후에 점수가 거의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천샤오티엔은 13세에 입단했고 친치유안은 11세에 입단했는데, 이들도 점수가 별로 늘지 않고 있다. 일찍 입단했다고 반드시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여자 기사인 리샤오시도 점수가 별로 늘지 않았다. 그 해의 다른 여자 입단자는 헤이자자인데, 지금은 대만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두 그림을 통해서 새내기들이 2200에서 2300 사이의 점수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다른 해에 입단한 새내기들도 마찬가지다.
결론
중국기원 랭킹제도에 관해서 조사해 보았다. 중국기원에서 일찍이 통계적 바둑 랭킹제도를 도입한 것은 중국기원 산하에 중국위기협회와 중국체스협회가 속해 있으면서 체스의 랭킹제도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중국 랭킹제도를 통해서 중국바둑 상층권의 세대교체를 살펴보았다. 또한 중국의 새내기들에게 2200에서 2300 사이의 점수를 최초로 부여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필자가 개발한 세계랭킹과 중국랭킹을 비교함으로써 중국 랭킹제도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행복한 한가위 연휴 보내시길 바라며.
[글 | 배태일 박사]
○● 필자 소개 랭킹칼럼을 쓰고 있는 배태일 박사는?
필자는 1972년에 매릴랜드 대학교에 도미, 유학해 1977년에 동 대학에서 물리학박사를 취득하였다. 그 후에 NASA(미우주항공국) 산하의 Goddard Space Flight Center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78년에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에서 연구 조교수로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1982년에 Stanford University로 옮겨서 Senior Scientist로 연구 활동을 하다가 작년에 은퇴하였다.
연구 활동 분야는 태양의 활동과 중성자성과 블랙홀 주위에서 발생하는 엑스광선 분야이다.
한국기원의 랭킹 전문위원으로 2009년 1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통계적 랭킹 제도를 창안했고, 2010년 1월부터 3개월에 한번씩 세계랭킹을 계산해서 발표하고 있다. 한국기원 공인 아마5단이고, 미국바둑협회 6단 기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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