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초대장
다섯 개의 초대장
INVITATIONS
죽음이 가르쳐 주는 온전한 삶의 의미
프랭크 오스타세스키 지음
주민아 옮김
Keeping
다섯 개의 초대장은 이 진실을 함께 나누면서,
죽어감의 본질과 진정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통찰을 전해 준다.
프랭크 오스타세스키는
담대하고 선구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죽음 하나하나를
고유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바라보고,
죽어가는 사람에게나 계속 살아갈 사람에게나
한결같이 지혜와 치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삼는 특별한 능력을 선보였다.
그가 이 책에서 전하는 그 경험의 깊이는,
두려움 없이 조용하고
끈질기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타인과 심장과 영혼을 연결하며,
지나왔던 길에 대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축복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만이 쌓아 갈 수 있다.
다섯 개의 초대장에 가득 담긴 심오한 이야기들은
목적지를 향한 미지의 길에서 나침반 역할을 한다.
그중에 여러 실화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들려주는 우화처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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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부는
스승이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진실로 관심을 돌리게 만드는
일종의 손가락질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프랭크 오스타세스키는 바로 그런 스승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가
그 죽음의 무도회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충만한 삶으로 빠져들게 하는 그 초대.
그 초대에 마음 깊이 감사를 느낀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궁긍적으로 죽음은 미지의 세상과
함께하는 지극히 은밀하고 사적인 만남이다.
모든 삶의 목적은
지혜로움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죠,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by 레이첼 나오미 레멘
삶과 죽음은 일종의 패키지 상품이다.
그 둘을 분리할 수는 없다.
일본의 선에서
쇼지라는 용어는 탄생-죽음으로 번역된다.
삶과 죽음 사이를 가르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둘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선,
작은 아이폰뿐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유지하지 않은채로,
진정으로 살아 있을 수는 없다.
죽음은 머나먼 길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찰나와 같이 지나는 매 순간마다
우리의 동반자로 항상 곁에 머무르고 있다.
죽음이란
말간 얼굴을 드러내 놓은 비밀 스승이다.
그 스승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찾아내도록 도와준다.
여기에서 하나 좋은 소식이 있다면,
죽음이 전하는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
굳이 삶이 끝나는 지점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죽음이라는 알림이 없으면
우리는 주어진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끝없이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생활에 빠져 버리고 만다.
죽음이 우리 가까이 다가오면
아둥바둥 삶을 붙들고 있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그때가 되면 어쩌면 우리 자신과 우리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조금은 더 쉽게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죽음이
누구에게나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 모두 같은 배에 탄 공동 운명체임을 알게 된다.
이런 생각과 더불어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으로 변한다.
··
바로 그때,
엘리자베스가 따라오더니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커피와 담배를 내주었다.
"자신을 다 열어젖히고
아픔이 관통해서 움직이게 만들어야 해요.
당신의 고통이나 아픔을 붙잡고 있으면 안 돼요."
내가
이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그 후로도
수십 년간 지켜보게 될 고통과 더불어
건강한 방식으로 머무를 수 없었을 것이다.
젠 호스피스 프로젝트는
영적 통찰과 실용적 사회활동을 결합한
미국 최초의 불교계 호스피스였다.
명상 수행자들과 죽음을 겪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러운 어울림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돌봄활동 자체는 매우 평범한 일이었다.
수프를 만들고, 등 마사지를 해 주고,
더러워진 시트를 갈아 주고, 약 먹는 일을 도와주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나
이제 곧 끝나려 하는 평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차분하고 다정하게 함께 있어 주는 일은 그리 특별할 게 없다.
그저 인간적인 배려와 친절함, 정말로 그뿐이다.
하지만
이런 일상의 활동을 근본적 진리를
알아차리기 위한 수행활동으로 받아들일 때,
고정관념과 회피하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지금 생생하게 살아서 침대 정리를 하든,
죽음 앞에서 침대에 갇혀 있든
우리 모두는 삶의 불확실한 본질에 직면해야 한다.
모든 생각, 모든 사랑, 모든 생명, 모든 삶,
이 세상 모든 것은
한 번 왔다가 간다는 근본적 진리를 인식하게 된다.
죽어감은
세상 만물의 삶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진리에 저항한다면, 그 결과는 고통일 뿐이다.
언어는
죽음과 죽어감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관용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죽어감은
사람들이 거쳐 가는 경험이지
그들의 정체성은 아니다.
다른 일반화의 오류처럼
특정한 경험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때,
그 경험이 전해 줄 수 있는 고유성,
그리고 각 개인이 그 경험을 겪으면서
전할 수 있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게 된다.
죽어감은 불가피하고 내밀한 일이다.
나는
삶의 끝에서 심오한 통찰을 계발하고
강렬한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보아왔다.
죽음은 의학적 사건 너머 그 이상의 일이다.
오히려
죽음은 성장의 시간이자 커다란 변화의 과정이다.
죽음은 인간성의 가장 깊은 차원으로 우리를 열어 준다.
죽음은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존재감,
그러니까 우리 자신과
모든 살아 있는 것과의 내밀한 친밀함을 일깨워 준다.
죽음의 순간까지 기다리지 말자.
세상 그 무엇이든 널리 환영하고 아무것도 밀어내지 말자
오롯이 온전한 자아로 경험에 부딪히자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온한 휴식의 자리를 찾자
'알지 못함', 초심자의 그 열린 마음을 기르자
다섯 개의 초대장은
하나씩 따로 떼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보완해 주고 지원해 주는 원리이며,
무엇보다 사랑이 가득 스며 있는 원칙이다.
그 원칙은 내가 죽음을 대하는 일에 신뢰할 만한 역할을 해냈다.
등을 쓸어 가며 씻어 주자,
잭이 날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자기 어깨너머로 휙 쳐다보곤 체념하듯 말했다.
"그게 이런 모습이라곤 결코 생각하지 못했어요"
"뭐가요?"
---내가 물었다.
"죽는다는 거요"
"어떨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 잭은 한숨을 쉬었다.
"가만 보니 죽음에 대해
진짜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죽음에 대해 단 한 번도
성찰해 본 적 없었다는 잭의 느지막한 후회.
이것은 폐암 말기라는 사실보다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더 큰 이유였다.
한국의 위대한 선승 숭산 스님은
"내가 곧 죽으리라"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쓰디쓴 호출이었다.
죽음은 방 한가운데 놓은 코끼리와 같다.
모두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진리이지만
그것을 논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과 거리를 두려고 애쓴다.
우리가 지닌 가장 나쁜 두려움을 죽음에 투사시키고,
그것을 놓고 농담하고,
숨기듯 완곡하게 표현하려고 하며,
가능한 한 그런 이야기를 피하거나
대화라는 것 자체를 완전히 회피한다.
나는 원래 금발머리였다.
중력은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근육은 더 약해지고 피부 탄력은
더 줄어들고 몸의 기능은 둔화되었다.
이것은 어떤 실수나 착오가 아니라
노화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수년 전 한 친구와 함께
소규모 취학 전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따금 우리는
세 살부터 다섯 살배기 정도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숲으로 가서 죽은 것을 찾아내는 활동을 했다.
아이들은
그 놀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낙엽이며 부서진 가지며
녹슨 중고자동차 부품을 들고오거나
가끔씩 닭이나 작은 동물 뼈를 주워 오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전나무 숲으로 들어가
파란색 큰 방수포 위에 그것을 다 펼쳐 놓고
각자 하나씩 가져와서 발표하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우리는 대개
일시성을 슬픔과 종말로 연관시키지만
그것은 결코 상실에 관한 개념이 아니다.
불교에서
일시성은 곧 무상 anitya을 말하며
이는 일체의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변화하여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 유위전변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끊임없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관법칙은 균형과 조화를 규정한다.
끊임없는 해체와 사멸이 있는 곳에
당연히 끊임없는 변화와 존재가 있다.
모래 만다라 수행 승녀들의 지도자
로상 삼텐 스님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밝혔다.
"저희들은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가 왜 그랬는지 의도를 판별하는 방법도 알지 못하고요.
그저 사랑과 연민으로 그 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만다라의 창조와 파괴는 이미
그 시작부터 생명과 삶의 본질에 관한
교훈을 전하는 목적을 품고 있었다.
박물관 직원은
만다라를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예술작품이자 귀한 대상으로 생각했다.
반면 승려들에게
그 만다라는 무상과 무집착 교리 안에 존재하는
가치와 아름다움을 구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우리는 날마다 만들어 먹는 끼니와 더불어
일시성이라는 작은 축제를 열고 기꺼이 참여하는 중이다.
변화에 저항하는
영원한 행복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아비가일은
자기 앞에 놓인 진실을 기꺼이 마주하며서,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망설이거나 외면하지 않게 되면서 태도가 바뀌었다.
자신이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자기 삶의 모든 조건과 상황은
계속 변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바뀌며 달라지는
존재의 법칙과 일치하는 지점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캐럴 하이먼은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삶과 죽음'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불확실성 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알게 되고,
인간의 본질과 세상의 본질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면,
세상 만물이
공고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움을 주는 기회가 된다."
모든 것은
부서지고 흩어지고 끝이 나기 마련이다.
육체도, 인간관계도, 생명과 삶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는 삶이라는
무대의 커튼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함께 모이고 결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헤어진다는 뜻이다.
걱정하고 불안해하지 말라.
이는 삶의 타고난 본질이다.
우리 삶은
절대로 깨지지 않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진실로
알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
즉 세상 모든 형태의 상실에
대응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며,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식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어떤 존재로 변하고 달라지는 중이다.
우리는
원한을 풀어놓을 수 있으며 용서할 수도 있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기 전에
원한과 후회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일시성은 가능성으로 가는 길이다.
일시성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
수간호사는
아기가 태어나면 산부인과에서
브람스의 자장가를 트는 관례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 음악은
모든 병실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중략)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저런 대화도 멈추었고 대신
여기 저기에 소리 없는 웃음이 활짝 피었다.
긴장과 스트레스가 있던
이곳에 잠시 즐거움과 편안함이 흘렀다.
행복을 특정 결과에 얽어매면
온갖 종류의 고통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통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결혼식 당일의 날씨,
다른 사람들의 기분, 복권 당첨,
하물며 암을 진단받는 것까지
그 무엇도 우리가 통제할 수는 없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아무리 잘 세운 계획이라도
일시성의 법칙을 이길 수는 없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한다면 희망은 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증상을
애써 관리해보려는 행위를 멈춘다.
그 대신
현재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서
온전히 살아가면서
가치를 발견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런 전환된 모습을 두고
나는 종종 성숙한 희망이라고 부른다.
성숙한 희망이란
우리를 내면으로 데려가
경험의 선함과 미덕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준다.
우리 문화에서는
좋은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밝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보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일이 깔끔하게 마무리되길 바라는
낭만적인 희망을 품는다.
죽을 때가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아주 평안한 상태가 되겠지하고 말이다.
용서는
어쩌다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되는 태도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